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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풍령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어제도 나경이를 보았고, 그녀를 위해 저택까지 마련해 주지 않았던가!’

기연우가 주위를 둘러보자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담아 물었다.

"어찌하여 나에게 아무도 고하지 않은 것이냐?"

목지의는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대꾸했다.

"겨우 서녀의 혼사일 뿐인데, 서방님께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니 굳이 고하지 않은 것이지요."

기연우는 할 말을 잃었다. 맞다, 목나경은 그저 서녀일 뿐이었다. 서녀가 누구에게 시집가든 태자에게 고할 의무 따위는 없었다.

‘허나 남들은 모른다 해도 왜 나경이조차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최근 목나경의 묘한 태도를 떠올린 기연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변방으로 시집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끝까지 그에게 숨겼던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요동치며 숨통을 조여왔다. 어제 자신이 목지의와 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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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은 날, 다른 가마   제24화

    "나경아…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거라, 나경아. 넌 아직 날 사랑하지, 그렇지?"기연우는 헛것을 보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목나경이 대답할 리 없었다.환상 속의 목나경조차 그가 절대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안 된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거라, 나경아…"그는 서럽게 통곡하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만약 그날, 네 요구를 들어주었더라면, 첩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혼인하겠다는 약속을 했더라면, 우리 사이는 달라졌을까?’기연우는 이를 악물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마침내 눈을 감았다.심태수는 그 광경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기연우는 죽었고 그의 병사들은 모두 항복했다. 기연우의 측근 시위들은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심태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심태수가 이겼으니 이제 목나경을 빼앗으려 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심태수는 시신을 한 번 훑어본 뒤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반란이 진압되었다!"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갇혀 있던 다른 황자들과 공주들을 구출했고, 황제가 마음 편히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수습을 마쳤다.황궁 안에서 황제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심 장군, 역시 너밖에 없구나. 무엇을 포상으로 원하느냐?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내주마."심태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높은 지위와 막대한 재산, 군권까지 쥐고 있는 그에게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정말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였다."소인에게 교지 한 장을 내려주십시오."심태수의 요청에 황제는 공을 세운 장군에게는 죽음을 면하는 특권을 보장하는 금패조차 아깝지 않다며 즉시 사람을 시켜 붓과 먹을 가져오게 한 뒤 친히 교지를 써 내려가려 했다.하지만 심태수가 원하는 내용을 듣자 황제는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심 장군, 진정 이것으로 충분하느냐? 교지는 곧 짐의 권위이니, 훨씬 더 큰 것을 요구해도 된다."심태수는 고개를 저었다."이것이면 충분합니다.""알겠다, 네 뜻대로 하마.

  • 같은 날, 다른 가마   제23화

    같은 날, 기연우는 자신의 계획을 적고 있었다."황제께서는 분명 심태수를 불러들여 궁을 지키게 하시겠지. 심태수만 죽이면 나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그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는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집착이 남아 있었다.그를 따르는 시위가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심 장군님은 변방을 지키고 있어 보름이면 경성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때 그가 이끌고 올 10만 병사를… 저희 힘으로는 막아내기 어렵습니다.""이길 수 없어도 이겨내야 한다!"기연우가 책상을 쾅 내리치자 시위는 겁에 질려 무릎을 꿇었다."예! 허나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황제께서는 이미 전하께 황제의 자리를 물려줄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몇 년만 기다려 황제께서 수명을 다하신 뒤면 정당하게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으실 텐데, 어찌하여 이런 위험을 무릅쓰시는 것입니까…."시위의 말대로 누가 봐도 기연우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이미 태자로서 황제의 자리는 언젠가 그의 것이 될 터였고, 애초에 다른 누구와 다툴 필요도, 억지로 빼앗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인 황제에게 독을 쓰고 형제자매들을 가두었으며, 광기에 가까운 방식으로 황제의 자리를 뺏으려 하는 반역자가 되었다.기연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왜 위험을 무릅쓰느냐고? 당연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지!’그도 원래는 황제가 수명을 다하실 날을 기다려 목나경을 되찾으려 했다. 하지만 단 하루도 참을 수 없었다. 목나경의 남편이 심태수라는 사실과 두 사람이 매일 밤낮으로 사랑을 나눈다는 생각을 하면 미칠 것만 같았다. ‘목나경은 원래 오직 나만을 바라보던 여인이었는데!’설령 반역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그는 당장 목나경을 되찾아야 했다. 기연우는 다시 종이 위에 글을 써 내려갔다."보름 뒤 심태수가 경성에 오면 내가 직접 군을 이끌고 나가겠다. 성공한다면 새 황제가 즉위할 것이고, 너희는 모두 내 측근이 될 것이다. 만약 실패한다면…"그의 눈빛이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실패한다

  • 같은 날, 다른 가마   제22화

    심태수가 여러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장군님! 심 장군님!"심태수는 번쩍 정신을 차렸고, 여전히 연무장에 있었다."미안하다, 잠시 생각할 게 있었다. 계속하자꾸나."그는 창을 고쳐 잡았다.병사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떠들었다."심 장군님이 멍하니 계시다니 희한한 일이네요. 형수님 생각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듣자 하니 오늘 전하께서 형수님을 찾아오셨다던데, 설마 남의 여자를 뺏으려는 건 아니겠죠?""에이, 전하께서 설마 그러시겠느냐!""하지만 형수님이 워낙 고우시니 태자라도 혹할 만하지. 공적인 일이면 장군님께 직접 말씀하셨을 거 아니냐."그들이 추측을 이어가자 심태수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태자를 두고 이런 농담을 하는 것은 무례한 짓이며,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심태수가 입을 열어 꾸짖으려던 찰나, 병사들의 따뜻한 말이 들려왔다."그래도 만약 전하가 형수님을 뺏으려 든다면, 저희는 무조건 장군님 편에 설 겁니다!"심태수는 그들을 나무라려던 마음을 거두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그래."그는 대답한 뒤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하지만 훈련은 계속해야 한다. 슬쩍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라!"병사들의 곡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그렇게 평온한 나날이 몇 달 더 흐른 뒤, 변방의 심태수에게 경성에서 온 긴급 비밀 서신이 도착했다.그때 그는 막 장군부로 돌아와 군복도 채 벗지 못한 상태였다."심 장군님! 황제의 비밀 서신입니다!"시위가 건네자 심태수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황제가 그에게 긴급 비밀 서신을 보낸 것은 거의 10년 만의 일이었다.목나경은 왠지 모를 긴장감에 사로잡혔다."서방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요?"그녀는 오로지 심태수의 안위가 걱정될 뿐이었다.심태수는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 말거라."그가 봉투를 뜯고 내용을 읽어 내려가자, 담담하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봉투를 덮었을 때 그의 안색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어두워져 있었다."기연

  • 같은 날, 다른 가마   제21화

    얼마나 달콤한 맹세인가. 태자비, 심지어 황후의 자리라니. 수많은 이가 갈망하는 그 자리를 기연우는 목나경에게 약속했다.예전 같았으면 목나경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그를 뼛속까지 사랑했으니, 그가 혼인하자는 말에 어찌 가슴 벅차지 않았겠는가?하지만 지금 목나경의 마음에는 끝없는 서글픔과 차가움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늘 품에 지니고 다니던 수건을 꺼내 꽉 쥐었다."전하, 기억하십니까? 예전에 제 심장의 피를 뽑아가실 때, 제가 소원 하나를 들어달라 했고 전하께서는 인장을 찍어주셨지요."분명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기연우도 기억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목나경이 손수건을 펼치자, 그 위에는 피로 쓴 글자들이 선명했다."이것이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전하, 부디 약속을 지키십시오."기연우는 멍해졌다. 당시 목지의의 일로 급한 나머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인장을 찍어주었는데, 설마 이런 내용이 적혀 있을 줄이야![기연우는 목나경의 혼인 자유를 허락하며, 향후 어떠한 방식으로든 목나경의 남편을 괴롭히거나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그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호흡이 가빠졌고, 충동적으로 그 손수건을 쳐내 버렸다."이건 무효다! 그때 난 내용을 보지 않았다. 네가 이런 걸 썼을 줄 알았다면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얀 손수건이 허공에서 천천히 떨어졌고, 목나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전하, 여기엔 전하의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황제 앞에 가져가더라도 효력이 있는 물건이지요."손수건은 바닥에 떨어졌으나 아무도 줍지 않았다.기연우는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당장이라도 목나경을 끌고 가고 싶었지만, 심태수와 자신이 직접 찍은 인장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후회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때 왜 단 한 글자도 읽어보지 않았단 말인가!’그는 눈앞의 두 사람을 증오스럽게 노려보았다. 그 붉게 충혈된 눈동자 속에 얼마나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목나경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 같은 날, 다른 가마   제20화

    "심태수는 어디 있느냐!"그가 크게 외쳤다.심태수는 굳은 표정으로 홀로 밖으로 나갔다."전하, 무슨 일이십니까?"그가 공손히 물었다."목나경이 네게 시집온 것이 맞느냐? 지금 당장 화리서를 써서 갈라서거라!"기연우는 말에서 내려 심태수와 대치했다. 하지만 심태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소인은 그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저와 나경이는 부부의 정이 깊거늘, 전하의 말 한마디에 갈라서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으십니까?"심태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비굴하게 굴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은 채 기연우를 똑바로 응시했다."나는 태자이며 장차 황제가 될 몸이다. 나는 그저 목나경과 갈라서라 명했을 뿐이다. 심 장군, 너는 장군이면서 어찌 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냐? 설마 감히 내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황제를 제외하고는 태자를 보면 누구나 고개를 숙여야 했다. 감히 누가 태자를 거스르겠는가? 하지만 변방을 지키며 군권을 쥐고 있는 심태수는 태자도, 심지어 황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심태수는 차갑게 비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고, 기연우는 화가 치밀어 헛웃음을 터뜨렸다."좋구나! 심태수, 대단한 변방 장군이로군. 내가 황제께 한마디만 하면 네 놈의 모든 것을 뺏을 수 있다는 걸 모르느냐? 나라를 지킨 공을 생각해서 내 나름대로 좋게 말로 해결하려 했거늘, 감히 분수를 모르고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는구나!"기연우는 자신이 아직 황제가 아님이 한스러웠다. 황제였다면 일개 장군이 감히 그를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일촉즉발의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기연우의 안색은 싸늘해졌고, 옆에 있던 시위의 검을 낚아챘다."정 그렇다면 나와 한판 겨루어 보자꾸나. 만약 내가 이긴다면, 너는 내 요구를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심태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나경이는 물건이 아닙니다. 제가 대신 결정할 수도 없지요. 게다가 나경이는 더 이상 전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전하, 그만

  • 같은 날, 다른 가마   제19화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현재의 태자비는 목나경의 언니인 목지의였다. 목지의와 기연우가 혼인하기 전, 목나경은 매일 태자와 몰래 만났다. 소문 속의 고결한 군자였던 기연우는 목나경을 만날 때마다 거칠게 몰아붙이며 지칠 줄 모르고 탐했다. 마치 그녀를 뼛속까지 사랑하는 것처럼.하지만 관계가 끝나면 그는 지독하리만치 차갑게 돌변해 상처를 주었다. 남들이 목나경을 오해하고 비난하게 내버려 두었고, 기연우는 그녀가 평생 빛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의 장난감으로 남기를 바랐다.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목나경은 이 변방까지 시집을 온 것이었다. 그런데 기연우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비록 기연우를 더 이상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일을 털어놓는 것은 여전히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과거였다."압니다. 태자는 저를 찾으러 오는 겁니다. 태자가 혼인한 사람은 제 언니지만, 그들이 혼인하기 전 저는…"심태수의 걱정 어린 시선 속에서, 목나경은 자신의 과거를 한마디씩 내뱉었다.추잡한 과거들과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 그리고 몸서리치게 만드는 이야기들을 말이다.이야기를 들을수록 심태수의 눈에는 연민이 깊어졌다. 목나경이 마지막 말을 끝내자, 그는 그녀를 와락 품에 안았다."무서워하지 말거라, 다 지나간 일이다. 그가 태자라 할지라도 너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할 것이다."목나경은 그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따뜻한 배려에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서방님은… 제가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태자와 그렇게 여러 번 몰래 만났는데…"심태수는 고개를 저었다."알고 있다. 허나 그건 전부 너의 과거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혼인했으니, 앞으로 함께할 날들이 우리의 진짜 미래다."오랫동안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던 어둠이 심태수의 단호한 말 한마디에 균열을 일으켰다. 이 순간, 목나경은 자신이 진정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느꼈다.그녀는 심태수의 품에 얼굴을 묻고 참았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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