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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봄은어디
유하늘은 문 앞에 서서 말했다.

“돌아가면 알게 될 거야. 난 집에 안 갈 거니까 혼자 가.”

송여준은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그녀의 앞에 신발을 내려놓으면서 그녀를 설득했다.

“우주 지금 집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까 같이 돌아가자.”

“우주가 원하는 건 숙제를 같이 해줄 사람이지 내가 아니야. 내가 그동안 우주 숙제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주가 오늘 밤 찾은 사람은 내가 아니었을 거야.”

유하늘은 고개를 돌렸다.

“여준 씨는 빨리 가. 난 안 갈 거야.”

송여준은 다짜고짜 유하늘의 발목을 움켜쥐고 한쪽 무릎을 꿇었고 그 탓에 그의 정장 바지에 구김살이 생겼다.

“우리한테는 네가 필요해.”

유하늘은 자조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나보다는 아람 씨가 더 필요하겠지. 오늘 아람 씨가 학교에 도착하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됐잖아. 우주도 아람 씨 말에 잘 따랐고.”

송여준의 눈빛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피식 웃었다.

“그것 때문에 질투한 거야? 아람이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우주 엄마가 될 수는 없어.”

“왜 안 돼? 여준 씨가 원하면 되는 일이잖아.”

유하늘이 송여준을 밀어냈다.

그녀의 말에 송여준의 눈동자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유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유하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 이혼하는 거 어때? 그리고 여준 씨는 아람 씨랑 결혼하는 거야. 우주는 아람 씨가 키우면 되고.”

송여준은 신발을 옆에 내팽개치고 음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앞, 송여준의 큰 몸이 유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송여준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나랑 이혼하겠다고?”

“응. 나보다 아람 씨가 여준 씨 아내, 우주 엄마로 사는 게 더 좋지 않겠어? 그러니까 아람 씨랑 결혼하라고!”

유하늘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는 송여준을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으면서 이혼하기 싫은 척 연기를 하니 말이다.

그들은 뭔가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이 그저 말 한마디만 하면 7년간 이어온 인연을 끊을 수 있었다.

유하늘이 몸을 돌리자 송여준이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내 허락 없이는 이혼할 수 없어. 네가 화가 났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혼하겠다는 말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유하늘은 무표정한 얼굴로 받아쳤다.

“왜? 난 이혼하겠다는 말도 못 해?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아니면 여자 하나로만 만족 못 해서 그래? 두 여자 다 가져야겠어?”

송여준이 원한다면 7년 동안 아내로 산 유하늘은 언제든 아내가 아닌 연인이 될 수 있었고 반대로 권아람은 언제든 그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

송여준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나랑 권아람은 아무 사이 아니야. 기분 좀 나쁘다고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그래. 그게 싫으면 나랑 이혼하든가!”

유하늘은 송여준의 손을 뿌리쳤다.

“여준 씨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서 나가!”

인내심이 바닥난 송여준은 곧장 유하늘을 잡아당긴 뒤 매정한 말만 내뱉는 유하늘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키스를 통해 조금 전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잊으려고 했다.

마침 밖에서 지나가던 여자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유하늘은 몸을 움찔 떨면서 송여준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송여준은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문을 닫았다.

유하늘은 송여준에게 밀려 문에 등이 닿았다. 뜨거운 열기를 지닌 큰 손이 옷자락 안을 파고들며 유하늘의 서늘한 피부를 만졌다.

유하늘은 점점 더 심하게 몸을 떨었다.

감정이 격해진 탓에 몸이 안 좋아진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송여준의 폭력적인 행위에 역겨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송여준은 그녀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동안 그녀를 사랑하는 척하며 그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

수많은 생각들이 밀려오자 유하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송여준을 힘껏 밀친 뒤 화장실로 달려갔다.

먹은 게 없다 보니 헛구역질만 계속됐고 위경련도 동반되었다.

안으로 들어온 송여준은 유하늘을 부축했다.

“또 토하는 거야? 단순히 몸이 약해져서 그런 건 아닐 거야. 나랑 같이 병원 가자.”

“안 갈...”

유하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송여준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유하늘은 머리가 아프고 속도 울렁거려서 저항할 힘이 없었다.

게다가 멀미까지 해서 죽을 만큼 힘들어진 유하늘은 눈을 감고 꼼짝하지 않았다.

송여준은 운전하며 이따금 유하늘의 안색을 살피면서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접수하고, 진료받고, 검사받고...

유하늘은 계속 토하고 싶어서 침을 끊임없이 삼키며 마치 꼭두각시처럼 간호사를 따라가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유하늘이 밖으로 나왔을 때 송여준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꿀물을 그녀에게 건넸다.

“마셔. 마시면 속이 좀 편할 거야.”

유하늘은 꿀물을 건네받지 않고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송여준은 시선을 내려뜨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너랑 싸우지 말아야 했는데.”

송여준은 유하늘의 새끼손가락에 손가락을 걸면서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송여준은 달콤한 말을 할 줄 몰랐기에 늘 이런 작은 행동으로 유하늘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유하늘은 그 순간 심장이 아려왔다. 그의 익숙한 행동에 지난 추억이 떠오른 것이다.

“검사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자. 응?”

송여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유하늘이 대답하려는데 옆에 갑자기 그림자가 생겼다.

“여준 씨, 여긴 웬일이야?”

시선을 들자 호기심 가득한 얼굴의 권아람이 보였다.

송여준은 손을 거두어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검사받으러 왔어. 너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병원에 왜 온 거야?”

권아람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검사결과지를 등 뒤로 감추면서 어색하게 말했다.

“별, 별거 아니야.”

송여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가져와 봐.”

권아람은 입술을 깨물다가 송여준에게 검사결과지를 내밀었다.

내용을 확인한 송여준은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너 심장 우회로 수술받았었잖아. 다 나은 거 아니었어? 왜 또 갑자기 심장이 아픈 건데?”

“몰라. 계속 이래.”

권아람은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말을 아꼈다.

송여준이 부드럽게 말했다.

“약 잘 챙겨 먹어. 넌 심장이 원래 약하니까 몸조리 잘하고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조윤민 씨한테 연락해.”

그들의 대화를 들은 유하늘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조윤민은 송여준의 어시스턴트였고 그동안 송여준과 유하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처리한 적이 없었다.

역시 송여준이 사랑하는 여자라서 그런지 모든 일에서 예외였다.

유하늘의 호흡이 가빠지자 송여준은 곧바로 몸을 돌려 유하늘의 등을 쓸어주었다.

“좀 괜찮아? 너 요즘 계속 토하던데 단순히 몸이 약해져서일 리가 없어. 잠시 뒤에 의사 선생님 말씀 들어보자.”

‘계속 토한다고?’

권아람의 동공이 떨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유하늘의 배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해 보였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권아람은 빠르게 그곳을 떠나 검사실로 향했다.

그러다 의사가 간호사에게 당부하는 걸 들었다.

“아까 그 검사결과지는 버리고 대신 이걸 가져가세요. 괜한 말은 하지 마세요.”

권아람은 곧바로 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녀는 간호사가 검사결과지를 쓰레기통 안에 버리는 걸 본 뒤 그곳으로 걸어가 검사결과지를 주웠다.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펴보니 악성 뇌종양이라고 적혀 있었다.

권아람은 당황했다.

이때 간호사는 송여준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심하고 위염도 있어요. 약 드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유하늘은 간호사와 눈빛을 주고받은 뒤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떠나기 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리도 다행히 의사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송여준은 조금 마음을 놓고 유하늘에게 옷을 걸쳐주며 말했다.

“이제 집에 가자.”

“여준 씨...”

권아람이 마침 나타나서 말했다.

“시간이 많이 늦어서 지금 나가면 택시가 안 잡힐 것 같은데 나 먼저 데려다줄 수 있어?”

권아람은 가슴께를 누르며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유하늘은 본능적으로 송여준의 손을 뿌리치며 기회를 틈타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송여준이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늘이 몸이 안 좋아서 하늘이부터 집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아. 차는 내가 불러줄게.”

권아람은 순간 표정이 굳으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유하늘은 잠깐 놀랐지만 이내 깨달았다. 송여준은 그녀의 앞에서 권아람을 살뜰히 챙길 수 없었을 뿐이다.

유하늘의 눈빛에 조롱이 가득했다. 그녀는 송여준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간 뒤 빠르게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곧바로 뒤에서 송여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 강요할 생각 없으니까. 호텔까지 데려다줄게.”

유하늘은 잠깐 망설이다가 차에 탔다.

송여준은 직접 운전하여 그녀를 호텔로 데려다준 뒤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유하늘은 빠르게 문을 열고 닫아서 송여준을 막으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방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가정부가 소파에 송우주가 쓰는 푸른색의 곰 캐릭터 침대 시트를 깔고 있었다.

송우주는 가정부 옆에서 짜증 가득한 얼굴로 숙제를 하다가 고개를 들어 유하늘을 보더니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엄마 때문에 아빠랑 저는 이 시간까지 쉬지 못했어요. 아빠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도 해야 한다고요!”

유하늘은 순간 심장이 아렸다.

그녀는 송우주를 무시하고 곧장 안쪽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곧 밖에서 아이를 혼내는 송여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하늘은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자신이 병원에 간 사이 송여준이 가정부를 시켜 내일 입을 옷과 노트북을 가져오게 한 걸 발견했다.

유하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송여준이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하늘은 켜진 노트북을 닫으려다가 우연히 검색 기록을 발견했다.

그 위에 적힌 글에서 유하늘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가족관계등록부.

유하늘은 순간 손끝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귀신에 홀린 듯 인터넷 방문 기록을 클릭해 결과 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그 순간 유하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결과를 재차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송여준은 기혼이었고 배우자란에는 권아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순간 유하늘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송여준은 그녀와 가짜 결혼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 몰래 권아람과 법적 부부가 되었다.

가족관계등록부에는 송여준, 권아람, 송우주만 적혀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가족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유하늘은 그들 대신 아이를 7년간 공짜로 키워준 가정부 같았다.

그렇다면 송우주는 권아람과 송여준이 진짜 부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유하늘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아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는 노트북을 끈 뒤 뒷걸음질 치다가 별안간 물기가 남아있는 따뜻하고 품에 안기게 되었다.

황급히 몸을 돌린 유하늘은 송여준이 허리에 타월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고 복근이 있는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송여준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매력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몸은 좀 나아졌어?”

유하늘은 입술을 힘껏 깨물었으나 마음을 가다듬기 힘들었다.

송여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유하늘의 침묵을 소리 없는 초대로 여기고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은 뒤 유하늘을 안아서 침대에 내려놓고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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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homejoa
이게 뭐하는 짓이야. 에구 참. 집 놔두고 호텔에 세식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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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짓말쟁이의 참회   제2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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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실 안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송여준이 눈을 뜨기도 전에 귓가에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그는 천천히 의식을 되찾으며 몸을 일으켰다.몸은 온통 쑤시고,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욱신거렸다.송여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통증을 참았다.침대 옆에서 울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송정희임을 알아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여긴 웬일이죠? 우주는 어디 있어요?”송정희는 눈물을 닦으며 목이 멘 듯 말했다.“병세가 심각해서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하는 중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해외 갔다 오더니 한 명은 쓰러지고, 한 명은 다치고.”송여준은 혐오스럽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얘기했죠? 이제부터 당신이랑 관계 끊는다고. 당신은 더 이상 내 고모가 아니에요.”“아직도 나 용서 못 하겠어? 하늘에 계신 네 할머니가 이런 거 보고 어찌 가만히 있겠니? 내가 잘못하긴 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송정희는 눈물을 펑펑 흘렸고, 예전의 거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송여준이 혐오가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할머니를 이용하려 드는 거예요? 예전에도 계속 권아람이 우리 할머니를 구해준 사람이자 은인이라고 세뇌하듯 말해서 그동안 감쪽같이 속아온 거잖아요.”유하늘이 안락사 센터로 향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송여준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이내 냉소를 지었다.“당신이랑 권아람이 유하늘한테 진 빚은 평생 갚아도 못 갚을 거예요. 두고 봐요. 하늘이 상태만 확인하면 당신들 괴롭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요!”송정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놀라움과 의심이 뒤섞였다.“유하늘 상태를 확인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송여준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몰라서 물어요? 암에 걸려서 병세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데 당연히 심각하지 않겠어요?”주먹을 불끈 쥐고 매정한 눈빛으로 송정희를 바라보는

  • 거짓말쟁이의 참회   제206화

    두 경호원은 멈칫하더니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안 가고 여기 있어봤자 할 일 없을 텐데.”“유하늘 기다려야죠. 안락사를 선택한다 해도 끝까지 있을 거예요. 장례식도 참석해야 하고.”송여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우린 부부예요. 설령 죽었다 해도 하늘은 송씨 가문 사람이에요. 유골은 내가 가져가서 모실 거예요.”두 경호원은 너나 할 것 없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싸늘한 시선에는 조롱이 묻어났다.“아직도 미련 못 버렸어요? 아가씨를 그렇게 괴롭혀서 결국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놓고도 놓아줄 생각이 없다니. 맞아 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요!”말을 마치고는 송여준의 등을 떠밀어 송우주의 퇴원 절차를 밟으러 갔다.송여준은 반항하려 했지만 경호원에게 주먹을 맞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두 경호원은 서둘러 부자를 차에 태워 공항으로 향했다.송여준과 송우주를 완전히 보내기 위해 유시훈은 전용기까지 동원했다.홍이수가 집을 계약하고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송여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이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경호원의 차갑고 무심한 시선이 그를 마주했다.“헛수고하지 마세요. 송여준은 여기 없어요. 저희가 헬기로 돌려보냈으니까 당신도 얼른 돌아가요.”“지금 뭐 하는 겁니까? 하늘 씨랑 떨어지거나 곁에서 치료받는 걸 지켜보지 못하면 송여준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억지로 데려간다고 뭐가 달라져요? 어차피 다시 돌아올 텐데!”홍이수가 초조한 얼굴로 한발 다가섰다.“그리고 아이가 그렇게 위중한데 어찌 그냥 돌려보낼 수 있죠?”그 말을 들은 경호원들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얘기를 들은 듯 비웃음을 지었다.“이제 평생 우리 아가씨 얼굴 못 볼 거예요. 병세가 더 악화해서 뇌종양이 너무 빨리 커져 신경을 압박하고 있대요. 의사 말로는 사흘 안에 식물인간이 되어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했어요.”홍이수는 흠칫 놀랐다.“아가씨는 마지막을 그렇게 비참하게 맞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결국

  • 거짓말쟁이의 참회   제205화

    유하늘은 휴대폰을 꺼버리고 앞만 바라보았다.송여준이 계속해서 문자를 보냈지만 무시했다.몇 개만 봤을 뿐인데 벌써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차가 한 요양기관 앞에 멈추자 유하늘이 내렸다.이때, 간호사 두 명이 다가와 짐을 들어주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차에서 내리는 유시훈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유시훈은 우두커니 서서 꿈쩍도 안 했다.이내 주먹을 쥐고 말을 꺼내려다 멈칫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몸 잘 챙겨.”유하늘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 뒤 곧장 센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유시훈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시선을 거두었다.잠시 후, 길게 한숨을 내쉬고 차에 올랐다.집에 막 돌아오자 두 명의 경호원이 다가와 보고하기 시작했다.“저희가 알아보니까 송여준 친구, 홍이수라는 사람이 별장 단지 안에 집을 하나 임대했더라고요. 아마도 송여준이 애 데리고 오래 살 곳을 찾는 것 같아요.”유시훈의 표정은 차갑게 굳었고, 짜증이 그대로 드러났다.“하늘도 없는데 집을 빌려서 뭐 하겠다는 건데? 오늘 밤 송여준 부자 다 쫓아내. 제 발로 안 나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내보내.”경호원들이 서로 눈을 맞췄다.“하지만... 아이는 위독한 상황이라 병원을 떠나기 어려워요.”“내 알 바 아니야. 하늘이가 다시는 보기 싫다는데 여기 머물게 놔둘 수는 없잖아. 애가 버티지 못하고 죽으면 시체라도 끌어내!”유시훈은 주먹을 쥐고 싸늘한 목소리로 지시했다.그의 말에 겁을 먹은 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곧장 송여준을 찾아가 인정사정없이 내쫓기 시작했다.“저희 아가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요. 여기 남아 있어도 다시는 못 볼 테고, 당신은 장례식에 참여할 권리도 없죠!”송여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오늘 자정까지 이 도시를 떠나요. 안 그러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쫓아낼 거니까 알아서 해요.”두 경호원의 말이 끝나자 송여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시종일관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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