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5화

Author: 봄은어디
유하늘은 문 앞에 서서 말했다.

“돌아가면 알게 될 거야. 난 집에 안 갈 거니까 혼자 가.”

송여준은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그녀의 앞에 신발을 내려놓으면서 그녀를 설득했다.

“우주 지금 집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까 같이 돌아가자.”

“우주가 원하는 건 숙제를 같이 해줄 사람이지 내가 아니야. 내가 그동안 우주 숙제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주가 오늘 밤 찾은 사람은 내가 아니었을 거야.”

유하늘은 고개를 돌렸다.

“여준 씨는 빨리 가. 난 안 갈 거야.”

송여준은 다짜고짜 유하늘의 발목을 움켜쥐고 한쪽 무릎을 꿇었고 그 탓에 그의 정장 바지에 구김살이 생겼다.

“우리한테는 네가 필요해.”

유하늘은 자조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나보다는 아람 씨가 더 필요하겠지. 오늘 아람 씨가 학교에 도착하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됐잖아. 우주도 아람 씨 말에 잘 따랐고.”

송여준의 눈빛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피식 웃었다.

“그것 때문에 질투한 거야? 아람이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우주 엄마가 될 수는 없어.”

“왜 안 돼? 여준 씨가 원하면 되는 일이잖아.”

유하늘이 송여준을 밀어냈다.

그녀의 말에 송여준의 눈동자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유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유하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 이혼하는 거 어때? 그리고 여준 씨는 아람 씨랑 결혼하는 거야. 우주는 아람 씨가 키우면 되고.”

송여준은 신발을 옆에 내팽개치고 음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앞, 송여준의 큰 몸이 유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송여준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나랑 이혼하겠다고?”

“응. 나보다 아람 씨가 여준 씨 아내, 우주 엄마로 사는 게 더 좋지 않겠어? 그러니까 아람 씨랑 결혼하라고!”

유하늘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는 송여준을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으면서 이혼하기 싫은 척 연기를 하니 말이다.

그들은 뭔가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이 그저 말 한마디만 하면 7년간 이어온 인연을 끊을 수 있었다.

유하늘이 몸을 돌리자 송여준이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내 허락 없이는 이혼할 수 없어. 네가 화가 났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혼하겠다는 말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유하늘은 무표정한 얼굴로 받아쳤다.

“왜? 난 이혼하겠다는 말도 못 해?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아니면 여자 하나로만 만족 못 해서 그래? 두 여자 다 가져야겠어?”

송여준이 원한다면 7년 동안 아내로 산 유하늘은 언제든 아내가 아닌 연인이 될 수 있었고 반대로 권아람은 언제든 그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

송여준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나랑 권아람은 아무 사이 아니야. 기분 좀 나쁘다고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그래. 그게 싫으면 나랑 이혼하든가!”

유하늘은 송여준의 손을 뿌리쳤다.

“여준 씨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서 나가!”

인내심이 바닥난 송여준은 곧장 유하늘을 잡아당긴 뒤 매정한 말만 내뱉는 유하늘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키스를 통해 조금 전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잊으려고 했다.

마침 밖에서 지나가던 여자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유하늘은 몸을 움찔 떨면서 송여준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송여준은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문을 닫았다.

유하늘은 송여준에게 밀려 문에 등이 닿았다. 뜨거운 열기를 지닌 큰 손이 옷자락 안을 파고들며 유하늘의 서늘한 피부를 만졌다.

유하늘은 점점 더 심하게 몸을 떨었다.

감정이 격해진 탓에 몸이 안 좋아진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송여준의 폭력적인 행위에 역겨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송여준은 그녀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동안 그녀를 사랑하는 척하며 그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

수많은 생각들이 밀려오자 유하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송여준을 힘껏 밀친 뒤 화장실로 달려갔다.

먹은 게 없다 보니 헛구역질만 계속됐고 위경련도 동반되었다.

안으로 들어온 송여준은 유하늘을 부축했다.

“또 토하는 거야? 단순히 몸이 약해져서 그런 건 아닐 거야. 나랑 같이 병원 가자.”

“안 갈...”

유하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송여준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유하늘은 머리가 아프고 속도 울렁거려서 저항할 힘이 없었다.

게다가 멀미까지 해서 죽을 만큼 힘들어진 유하늘은 눈을 감고 꼼짝하지 않았다.

송여준은 운전하며 이따금 유하늘의 안색을 살피면서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접수하고, 진료받고, 검사받고...

유하늘은 계속 토하고 싶어서 침을 끊임없이 삼키며 마치 꼭두각시처럼 간호사를 따라가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유하늘이 밖으로 나왔을 때 송여준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꿀물을 그녀에게 건넸다.

“마셔. 마시면 속이 좀 편할 거야.”

유하늘은 꿀물을 건네받지 않고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송여준은 시선을 내려뜨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너랑 싸우지 말아야 했는데.”

송여준은 유하늘의 새끼손가락에 손가락을 걸면서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송여준은 달콤한 말을 할 줄 몰랐기에 늘 이런 작은 행동으로 유하늘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유하늘은 그 순간 심장이 아려왔다. 그의 익숙한 행동에 지난 추억이 떠오른 것이다.

“검사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자. 응?”

송여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유하늘이 대답하려는데 옆에 갑자기 그림자가 생겼다.

“여준 씨, 여긴 웬일이야?”

시선을 들자 호기심 가득한 얼굴의 권아람이 보였다.

송여준은 손을 거두어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검사받으러 왔어. 너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병원에 왜 온 거야?”

권아람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검사결과지를 등 뒤로 감추면서 어색하게 말했다.

“별, 별거 아니야.”

송여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가져와 봐.”

권아람은 입술을 깨물다가 송여준에게 검사결과지를 내밀었다.

내용을 확인한 송여준은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너 심장 우회로 수술받았었잖아. 다 나은 거 아니었어? 왜 또 갑자기 심장이 아픈 건데?”

“몰라. 계속 이래.”

권아람은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말을 아꼈다.

송여준이 부드럽게 말했다.

“약 잘 챙겨 먹어. 넌 심장이 원래 약하니까 몸조리 잘하고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조윤민 씨한테 연락해.”

그들의 대화를 들은 유하늘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조윤민은 송여준의 어시스턴트였고 그동안 송여준과 유하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처리한 적이 없었다.

역시 송여준이 사랑하는 여자라서 그런지 모든 일에서 예외였다.

유하늘의 호흡이 가빠지자 송여준은 곧바로 몸을 돌려 유하늘의 등을 쓸어주었다.

“좀 괜찮아? 너 요즘 계속 토하던데 단순히 몸이 약해져서일 리가 없어. 잠시 뒤에 의사 선생님 말씀 들어보자.”

‘계속 토한다고?’

권아람의 동공이 떨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유하늘의 배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해 보였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권아람은 빠르게 그곳을 떠나 검사실로 향했다.

그러다 의사가 간호사에게 당부하는 걸 들었다.

“아까 그 검사결과지는 버리고 대신 이걸 가져가세요. 괜한 말은 하지 마세요.”

권아람은 곧바로 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녀는 간호사가 검사결과지를 쓰레기통 안에 버리는 걸 본 뒤 그곳으로 걸어가 검사결과지를 주웠다.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펴보니 악성 뇌종양이라고 적혀 있었다.

권아람은 당황했다.

이때 간호사는 송여준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심하고 위염도 있어요. 약 드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유하늘은 간호사와 눈빛을 주고받은 뒤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떠나기 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리도 다행히 의사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송여준은 조금 마음을 놓고 유하늘에게 옷을 걸쳐주며 말했다.

“이제 집에 가자.”

“여준 씨...”

권아람이 마침 나타나서 말했다.

“시간이 많이 늦어서 지금 나가면 택시가 안 잡힐 것 같은데 나 먼저 데려다줄 수 있어?”

권아람은 가슴께를 누르며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유하늘은 본능적으로 송여준의 손을 뿌리치며 기회를 틈타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송여준이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늘이 몸이 안 좋아서 하늘이부터 집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아. 차는 내가 불러줄게.”

권아람은 순간 표정이 굳으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유하늘은 잠깐 놀랐지만 이내 깨달았다. 송여준은 그녀의 앞에서 권아람을 살뜰히 챙길 수 없었을 뿐이다.

유하늘의 눈빛에 조롱이 가득했다. 그녀는 송여준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간 뒤 빠르게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곧바로 뒤에서 송여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 강요할 생각 없으니까. 호텔까지 데려다줄게.”

유하늘은 잠깐 망설이다가 차에 탔다.

송여준은 직접 운전하여 그녀를 호텔로 데려다준 뒤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유하늘은 빠르게 문을 열고 닫아서 송여준을 막으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방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가정부가 소파에 송우주가 쓰는 푸른색의 곰 캐릭터 침대 시트를 깔고 있었다.

송우주는 가정부 옆에서 짜증 가득한 얼굴로 숙제를 하다가 고개를 들어 유하늘을 보더니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엄마 때문에 아빠랑 저는 이 시간까지 쉬지 못했어요. 아빠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도 해야 한다고요!”

유하늘은 순간 심장이 아렸다.

그녀는 송우주를 무시하고 곧장 안쪽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곧 밖에서 아이를 혼내는 송여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하늘은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자신이 병원에 간 사이 송여준이 가정부를 시켜 내일 입을 옷과 노트북을 가져오게 한 걸 발견했다.

유하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송여준이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하늘은 켜진 노트북을 닫으려다가 우연히 검색 기록을 발견했다.

그 위에 적힌 글에서 유하늘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가족관계등록부.

유하늘은 순간 손끝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귀신에 홀린 듯 인터넷 방문 기록을 클릭해 결과 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그 순간 유하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결과를 재차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송여준은 기혼이었고 배우자란에는 권아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순간 유하늘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송여준은 그녀와 가짜 결혼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 몰래 권아람과 법적 부부가 되었다.

가족관계등록부에는 송여준, 권아람, 송우주만 적혀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가족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유하늘은 그들 대신 아이를 7년간 공짜로 키워준 가정부 같았다.

그렇다면 송우주는 권아람과 송여준이 진짜 부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유하늘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아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는 노트북을 끈 뒤 뒷걸음질 치다가 별안간 물기가 남아있는 따뜻하고 품에 안기게 되었다.

황급히 몸을 돌린 유하늘은 송여준이 허리에 타월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고 복근이 있는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송여준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매력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몸은 좀 나아졌어?”

유하늘은 입술을 힘껏 깨물었으나 마음을 가다듬기 힘들었다.

송여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유하늘의 침묵을 소리 없는 초대로 여기고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은 뒤 유하늘을 안아서 침대에 내려놓고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happyhomejoa
이게 뭐하는 짓이야. 에구 참. 집 놔두고 호텔에 세식구가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거짓말쟁이의 참회   제319화

    저녁 8시, 유하늘은 정각에 리헬 그룹 사옥 아래에 나타났다.지난번 이 시간에 찾아왔을 때는 송여준이 채도현이 처한 상황을 빌미로 그녀를 협박했었다.당시만 해도 송여준 때문에 이렇게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유하늘은 마음을 가다듬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고, 여느 때처럼 프런트 데스크를 지나갔다.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카드를 찍어주며 미소를 지었다.“어서 올라가 보세요. 대표님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유하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탔다.프런트 직원은 뒤늦게 알아차렸다.그제야 하율이 들어올 때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하지만 미처 주의 깊게 보지 못한 탓에 유하늘의 진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렸다.그녀는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구르며 자신의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유하늘은 대표실 문 앞에 멈춰 섰다.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송여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요.”낮게 깔린 목소리에 은근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이를 듣자 유하늘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그리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송여준이 고개를 들었다. 기대에 차 있던 눈빛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경악으로 바뀌었다.그는 당최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니, 어쩌다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하늘이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내가 가면을 벗고 나타나니까 신기해? 드디어 얼굴을 보게 돼서 속이 후련해? 하율이 아니라 유하늘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 같아서?”송여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흔들리는 눈동자는 마치 잃어버렸던 보물을 다시 찾은 듯 경이로움이 서려 있었고, 시선은 유하늘에게서 한시도 떨어질 줄 몰랐다.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유하늘의 앞으로 다가왔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드디어 널 다

  • 거짓말쟁이의 참회   제318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하늘을 발견했다.유시훈이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물었다.“하늘아, 왜 그래?”그제야 유하늘이 송여준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을 쓰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유하늘은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짐 좀 챙기러 왔어. 곧 여기 떠날 거야.”그 말을 듣자 유시훈의 표정이 착잡하게 변했다.“이렇게 갑자기?”유하늘이 피식 웃었다.“더 이상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 오빠도 못 느꼈어? 누구든 나랑 엮이면 송여준이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는 거.”유시훈은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알았어. 지금 바로 떠날 수 있게 준비할게. 그나저나 분명 한 달 뒤에 출발하기로 했었잖아. 대회도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싶댔는데 이렇게 가버리는 건 좀 아쉽지 않아?”“나도 아쉬워. 하지만 더는 못 참겠어. 다음에 또 무슨 식으로 상처 줄지, 내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괴롭힐지 누가 알겠어? 다들 나 때문에 휘말리는 거 싫어. 그리고...”유하늘은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무의식적으로 얼굴의 가면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맑고 깨끗한 얼굴이 드러났다.그녀는 유시훈을 똑바로 응시했다.“나랑 무려 7년을 같이 살았어. 내가 아무리 작정하고 얼굴을 가렸다고 해도 정말 완벽하게 숨겨질 리가 없잖아. 그 남자는 오빠가 생각만큼 바보가 아니야.”그녀의 말에 유시훈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이내 주먹을 움켜쥐었다.“네가 영원히 내 곁에 남아있길 바랐는데... 우리 남매가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줄 알았어. 하긴, 이 지경이 된 이상 널 보내줄 수밖에 없겠네. 언제 떠날 생각이야?”“대회 주최 측에 상황을 잘 설명해서 기권 의사를 밝힐 거야. 그리고 떠나기 전에 송여준에게도 다시 한번 나를 잃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저 눈을 뜬 채 내가 떠나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함이 어떤 건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줄 거야.”유하늘의 눈동자 속에는 증오의 빛이 서려 있었다.

  • 거짓말쟁이의 참회   제317화

    딱히 거절할 명분이 떠오르지 않은 송여준은 못내 아쉬워했다.그녀와 단둘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꽤 실망스러웠다.하지만 티는 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요. 지금 갈게요. 내가 한 일들 때문에 너무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질투가 나서, 하율 씨를 너무 좋아해서 그랬던 거니까. 아니면 나도 하율 씨 주변 사람들까지 건드리진 않았을 텐데.”지금의 유하늘에게 이런 말은 그저 역겹게만 들릴 뿐이었다.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현관문을 가리켰다.“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요. 다신 보고 싶지 않으니까.”송여준은 흠칫 놀라더니 결국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뒤돌아섰다.그가 떠나고 나서야 유하늘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이내 소파에 앉아 한동안 침묵한 뒤, 휴대폰을 꺼내 유시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지금 집에 갈게. 이제 마지막 방법을 써야 할 때가 된 것 같아.”그 말을 듣자 유시훈은 숨이 턱 막혔다. 2초가 지나서야 체념한 듯 대답했다.“그래, 기다릴게.”통화를 마치고 유하늘은 즉시 집으로 향했다.하지만 도착해서 문을 열기도 전에 밖에 나와 있던 서영준에게 끌려갔다.유하늘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왜 밖에 계세요? 설마...”“쉿!”서영준은 다급하게 목소리를 낮추라는 신호를 보냈다.“방금 누가 왔는지 알아요?”유하늘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그제야 안에 자신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와 있어서 서영준이 일부러 밖에서 기다렸다는 걸 깨달았다.“누군데요?”“송우주요.”서영준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이름을 듣는 순간, 유하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이내 입술을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콧방귀를 뀌었다.“하필이면 송우주라니, 그럼 전 뒷문으로 들어갈게요.”유하늘은 집사와 함께 뒷문을 통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등을 돌린 채 유시훈과 대화 중인 송우주가 보였다.유시훈은 싸늘한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갓 태어났을 때 그토록 예뻐하며 거액

  • 거짓말쟁이의 참회   제316화

    유하늘은 힘없이 일어나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하지만 돌아간 줄 알았던 남자가 다시 나타난 것을 보고 멈칫했다.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뭐라 하기도 전에 송여준이 먼저 선수 쳤다.“내가 장기혁 곤란하게 하는 거, 이미 알고 있죠?”유하늘의 몸이 움찔했다.“그럼 그 자식이랑 더는 엮이지 마요.”강압적인 말투는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유하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하게 말했다.“만약 내 주변 사람들 모두 해치면서까지 당신 곁으로 돌아가게 할 작정이라면, 그건 아주 큰 오산이에요. 난 절대 타협 안 해요. 오히려 당신만 점점 더 혐오하게 될 뿐.”인정사정없는 독설에도 송여준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절 미워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하율 씨 곁에 누군가 머무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어요. 사실 저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요.”비록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 지울 수 없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마치 절망의 늪에 빠져버린 사람처럼.그리고 또박또박 덧붙였다.“나도 하율 씨랑 천천히 시작해보고 싶었어요. 언젠가는 마음을 열고 내 곁으로 돌아와 주길, 아니면 그 가면을 벗고 나를 제대로 마주해 주길 기다려 보려고 했죠. 하지만... 욕심이 너무 과했나 봐요.”“저의 자제력을 너무 믿었나 봐요. 하율 씨를 향한 내 소유욕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요. 누구든 하율 씨 곁에 나타나서 친하게 구는 꼴을 보면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송여준의 눈에 광기가 일렁거렸다.그는 앞으로 다가와 유하늘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약속해 줘요. 다른 남자한테 따로 연주해 주지 않겠다고. 그냥 내 곁에만 있어요. 나를 미워해도, 당신의 진짜 얼굴을 안 보여줘도 좋으니까.”유하늘은 그 자리에 선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단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눈빛으로 송여준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오랜 침묵이 이어지자 송여준은 점점 초조해졌다.“왜 그래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만 있으면 어떡해요?”유하늘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 거짓말쟁이의 참회   제315화

    물론 무슨 꿍꿍이인지 굳이 짐작할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첼로를 들고 와서 맞은편에 앉아 차분히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두 사람 모두 음악에 몰입한 채 어딘가 허망하면서도 미련이 남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거실 안은 고요했고, 오직 첼로 선율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그때, 별안간 울리는 노크 소리가 이 평화를 깨뜨렸다.유하늘은 눈살을 찌푸렸다.도중에 연주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장기혁에게 들려주기로 약속한 이상 절대 멈출 생각이 없었다.결국 못 들은 척 연주를 이어가기로 했다.한편, 밖에서 문을 두드리던 송여준은 반응이 없자 직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다.거실의 풍경을 마주한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고, 싸늘한 눈동자는 살기가 일렁거렸다.그는 주먹을 꽉 쥐고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아내려고 이마에는 핏줄이 불끈 튀어나왔다.그런데도 유하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송여준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야 비로소 연주를 마쳤다.그리고 못마땅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누가 감히 주인 허락도 없이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오래요?”이 한마디는 송여준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그는 이를 악물고 그녀와 마주 앉은 남자를 가리켰다.“고작 저 사람 위해서 연주하느라 내 노크 소리도 무시했던 거예요?”유하늘은 첼로를 내려놓고 쌀쌀맞게 대꾸했다.“맞아요. 그런데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당연히 상관있죠. 나한테는 한 번도 안 해줬으면서 왜 저 남자는 되는 건데요?”송여준의 가슴이 들썩거렸고, 누가 봐도 질투하는 모습이었다.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 이 순간, 질투에 눈이 멀어 미쳐버릴 것 같다는 사실을.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과 슬픔이 밀려왔다.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유하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당신이 대체 뭔데 끼어들지? 장 대표님은 내 창작 세계를 이해해 주고, 내 음악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팬이에요. 근데 당신은? 그저 사사건건 따라

  • 거짓말쟁이의 참회   제314화

    또한, 리헬 그룹이 수년간 안정적으로 경영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송여준의 해킹 능력 덕분이었다.다만 홍이수는 이런 방식이 장기혁에게 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어쨌거나 이곳은 그가 오랫동안 뿌리내린 터전이니까.홍이수가 생각에 잠긴 찰나, 갑자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송여준이 전화를 받았다.“장평 쪽 분위기는? 슬슬 나 찾을 때 안 됐어?”“장기혁이 사내 시스템을 복구하려고 해커들을 대거 불러 모으고 있어요. 하지만 본인은...”감시를 맡은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송여준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더니 싸늘하게 물었다.“본인은 뭐?”“지금 하율 씨 만나러 갔어요. 둘이 현재 집에 같이 있어요.”휴대폰 너머로 남자는 거의 죽을상을 쓰며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송여준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그는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고, 눈동자에는 서늘한 살기가 스쳤다.“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이내 헛웃음을 치며 낮게 읊조렸다.“계속 감시해.”전화를 끊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뒤에 남겨진 홍이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야! 너 어디 가?”송여준은 대답도 없이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한편, 유하늘은 차를 한 잔 따라 장기혁 앞에 내려놓았다.“천천히 얘기해봐요. 송여준이 대표님 회사에 무슨 짓을 했다고요?”“해커를 동원해서 우리 회사 시스템을 해킹했어요. 최대한 빨리 복구하라고 지시하긴 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손실이 나고 있죠.”장기혁의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예상보다 결과가 더 심각한 듯 보였다.순간, 유하늘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이내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죄송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 역시 대표님 도움은 받지 않는 게 좋겠어요.”유하늘은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누군가를 더 이상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채도현에게 부탁했던 일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타격을 준 터였다.장기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무덤덤하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