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예는 그대로 몸이 굳어졌다.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어둠 속에서 묵직한 인기척이 한꺼번에 밀려들더니, 주예의 몸이 뜨거운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등은 차가운 문에 닿았다.곧바로 거칠고도 집요한 키스가 이어졌다.힘이 너무 강해서 주예는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주예는 타이밍을 봐서 상대의 입술을 콱 물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익숙한 서늘한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주예는 잠깐 멍해지면서, 몸에 들어가 있던 힘도 풀렸다.그 변화를 눈치챈 남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목구멍 안쪽에서 흘러 나왔다. 남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키스는 더욱 거칠어졌다.커다란 손바닥이 주예의 뒷머리를 단단히 감쌌다. 다른 손은 주예의 뺨을 따라 내려와 목덜미를 스쳤고, 드레스 선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지다가 마침내 허리를 정확히 움켜쥐었다. 그 손으로 주예의 몸을 자기 쪽으로 더 세게 끌어당겼다.“읏...”숨이 달리자 주예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몸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주예는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상대의 수트를 꽉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남자가 겨우 입술을 떼었다.남자는 어둠 속에서 붓고 젖은 주예의 입술을 손끝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목소리는 깊이 잠겨 있었다.“그 사람이랑 이혼해.”그제야 숨을 돌릴 틈이 생긴 주예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방금 전까지 너무 심하게 휘말린 탓에 눈가에도 붉은 기운이 번져 있었다.주예는 조금 전, 어둠 속에서 거리낌 없이 밀고 들어오던 정재를 떠올렸다. 바깥 홀에서 하늘과 나란히 서 있던 모습도 같이 겹쳐졌다. 주예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정재의 가슴을 밀어냈다.“누군진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런 말 하는 거 진짜 어이없네.”주예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그래도 방금 키스는 제법 괜찮았으니까, 지금 나가면 그 일은 그냥 개한테 한 번 물린 셈 치고 넘어가 줄게.”정재는 그
그때 정재는 고홍근 옆에 서 있는 하늘을 바라봤다. 단정하고 우아한 하늘을 향한 정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선에는 가늠해 보려는 뜻이 서려 있었다.그런데 그 눈길은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혔다.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쪽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이들 사이에서 작은 수군거림이 번졌다.“고홍근 회장이 손녀까지 직접 데리고 나온 걸 보니 의도가 뻔하지. 심씨 가문 안주인 자리를 노리는 거 아니겠어?”“고하늘 씨는 그럴 만하지. 그 또래 가운데선 고씨 가문에서 제일 잘나가는 편이잖아. 고홍근 회장도 기대를 많이 거는 것 같고.”“고하늘 씨가 심정재 회장님 옆에 서 있으니까 참 잘 어울리긴 하네. 딱 금수저 커플 같잖아.” “심정재 회장님이 보는 눈빛 못 봤어? 누가 봐도 서로 마음 있는 분위기던데.”“아, 진작 알았으면 나도 우리 조카 데려와 볼 걸 그랬네. 혹시 알아? 심정재 회장 눈에 들지.”“그만해. 네 조카가 하늘이만 하겠냐?”“못하면 어때. 우리 조카도 나름 장점은 있지. 남자야 원래 선택지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말은 점점 거칠어졌다. 주예는 듣고 있을수록 속이 답답해졌다.‘시끄럽네.’주예는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 진후가 다가와 주예의 어깨를 감쌌다.“왜 그래? 몸이 안 좋아?”정재는 내내 시선을 주예 쪽에 걸쳐 두고 있었다. 그때 진후의 손이 주예의 어깨를 감싸는 게 보이자, 정재의 눈이 확연히 달라졌다.옆에 서 있던 진석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터질 듯한 정재의 기색을 읽은 진석은 바로 움직였다. 표정부터 다시 정리했다. 흠잡을 데 없는 미소를 걸친 진석이 재빨리 진후 쪽으로 다가갔다.“한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심정재 회장님 비서 진석이라고 합니다.”“아, 과분하십니다. 무슨 일로 말씀 주셨습니까?”진후는 뜻밖이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다름이 아니라, 지난번에 대표님께서 로즈 화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계시다고
진후의 눈에 오늘 가장 중요한 상대는 정재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일들은 그저 곁가지에 불과했다. 아직 본격적인 자리가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방금 강규나 씨 봤어. 가서 몇 마디도 했고.”주예가 의미를 담아 말했다.‘그러니까 네 첫사랑한테 가.’‘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그런데 진후는 그 속뜻을 전혀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굴었다.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주예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흘러내린 잔머리까지 손수 정리해 주며, 자상한 남편인 척 행동했다.바로 그때 정재가 모습을 드러냈다.정재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쓸어 담는 사람이었다. 홀 안의 공기가 단숨에 정리되는 듯했다. 정재는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원단 위에는 가시 돋친 장미 덩굴 문양이 어둡게 수놓아져 있었다.“오늘 이 자리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내놓아 주신 소장품은 마지막에 전부 자선 목적으로 쓰이게 됩니다.”“그래서 먼저 기증받는 분들을 대신해 감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사업 이야기는 내려놓고, 작품 이야기만 했으면 합니다. 모두 좋은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정재가 말을 마치자,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아까까지 오가던 형식적인 치켜세우기는 흐릿해졌고, 대화는 오늘 나온 작품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오늘 초대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 합쳐도 스무 명이 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정재에게 들러붙듯 다가가는 장면은 벌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심정재 회장에게 초청받아 이 자리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인정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정재는 가장 먼저 고홍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정재야, 오늘 내놓은 것들 참 대단하더라. 하나만 따로 꺼내 놔도 경매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것들이야.”고홍근이 감탄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칭찬에는 진심이 실려 있었다.“과찬이십니다, 회장님.”“하늘이는 내가 굳이 소개 안 해도 되겠지? 너희도 알게
“규나가 어릴 때 생각이 아직도 나요. 하얗고 말랑말랑한 작은 떡 같았고, 성격도 워낙 발랄해서 가만히 있질 못했잖아요.” “그때 제가 옆집에 살아서, 맨날 규나랑 놀겠다고 찾아가곤 했습니다.”진후는 지난 일을 떠올리는 듯 말하면서도, 시선 한쪽으로는 강빈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강빈은 아주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났다. 그래서 동생이 태어났을 때도, 그 뒤 5년 동안도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부모가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한 뒤에야 강빈은 학업을 멈추고 급히 귀국해야 했다. 장례식장과 병원을 오가던 그때, 강빈이 처음으로 여동생을 본 때였다.“내가 돌아왔을 때 규나는 병원에 있었어. 그 나이에 그런 일을 겪었으니, 당연히 넋이 나가 있었겠지.”강빈의 말 사이사이에는 동생을 향한 안쓰러움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진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사고가 났을 때, 규나도 차 안에 같이 있었던 거죠?”“그래. 부모님은 끝내 못 돌아오셨지만, 다행히 규나는 크게 다치지 않았어. 좀 많이 놀랐을 뿐이지. 그건 아마 돌아가신 부모님이 지켜 준 거겠지.”거기까지 말한 강빈은 진후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네가 규나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지 나도 다 알아. 반쯤 오빠 노릇까지 해 준 셈이잖아. 네가 옆에 있으니까, 나도 마음이 좀 놓였어.”그 말을 들은 진후의 속을 싸늘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역시... 강빈 형님은 규나가 친여동생이 아니라는 걸 모르고 계셔.’진후는 아무 뜻 없는 말처럼, 가볍게 아쉬움을 섞어 말을 이었다.“그래도 저는 늘 좀 아쉬웠습니다. 규나가 다섯 살 이전 일은 거의 전혀 기억을 못 하시더라고요. 물론 그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죠.”“어릴 때 제가 같이 놀다가 규나 발을 다치게 한 적이 있었거든요. 발바닥에 흉터도 남았고요.”“규나는 그게 어떻게 생긴 상처였는지도 기억을 못 하는 것 같던데, 만약 기억했으면 워낙 꾸미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평생 저를 원망할지도 모릅니다.”강빈의 눈이 가늘어졌다.뭔가 이상했
주예는 홀 안을 가득 메운 서화와 고서, 골동품 진열장을 천천히 둘러봤다. 직업 때문인지, 주예는 그런 물건을 보면 저절로 걸음을 늦추게 됐다. 시선도 하나씩 오래 머물렀다.그러다 겉보기에는 수수하고 오래된 잔 앞에서 주예의 표정이 다시 묘하게 바뀌었다.그 물건은... 어릴 적 정재의 거실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주예는 철이 없었고, 장난도 심했다. 주예는 그 잔으로 붓을 헹군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정재는 끝까지 그 물건이 얼마나 귀한 건지 한마디도 꺼낸 적이 없었다.진후는 그런 주예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주예의 표정이 어딘가 어색하고 굳어 있는 걸 본 진후는, 주예가 아직도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받아들였다. 진후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앞으로는 이런 자리에 더 자주 데리고 다녀야겠네.’그때 규나와 강빈도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규나는 들어오자마자 진후를 발견했다. 지난번 병원 소동 이후, 진후는 규나를 얼음처럼 차갑게 대했다.규나는 몇 번이나 진후를 찾아갔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규나는 속으로 생각했다.‘내가 그날 조금 심하게 밀어붙였나?’그래서 오늘은 강빈을 따라 이 자리에 왔다. 규나는 진후한테 조금 살갑게 굴고,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여 주면 분위기가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진후 옆에 선 사람이 주예라는 걸 본 뒤, 규나는 그대로 표정이 굳어졌다.진후가 주예를 데리고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처음이었다.질투가 규나의 이성을 조금씩 갉아먹었다.규나는 숨을 크게 한 번 고른 뒤, 진후를 스쳐 지나서 주예 쪽으로 다가갔다. 규나는 친한 사람에게 말을 거는 척 자연스럽게 웃었다.“주예 언니,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세요?”규나는 주예의 시선이 머문 쪽으로 함께 고개를 돌렸다.“아, 보고 계신 게 이 청화백자 용무늬 잔이군요. 몇백 년 전에 만들어진 거예요. 원래는 한 쌍이었다고 하는데, 전란을 거치면서 하나가 유실됐다고 하더라고요”“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이 한 점이 더 귀
모임이 열리는 곳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의 비밀스러운 개인 저택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자, 저택 입구에는 경호 인력이 배치되어 있었고 각종 최고급 차량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주예는 도요타 미니밴에서 내렸다. 멀리서도 진후의 상징처럼 익숙한 검은색 마이바흐가 눈에 들어왔다. 주예는 그쪽으로 곧장 걸어갔다.진후는 주예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준비해 둔 드레스 안 입었네?”“무슨 드레스?”주예가 잠깐 멈칫했다.“오늘 아침 일찍 사람 시켜서 당신 작업실로 보내 놨잖아.”주예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그제야 작업실 쪽에서 온 부재중 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걸 놓친 모양이었다. 주예는 담담하게 말했다.“오늘은 작업실에 안 갔어.”주예가 핸드폰을 보는 모습을 본 진후는 더 강하게 인상을 썼다.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작업실 가서 드레스 찾아와. 최대한 빨리.”전화를 끊은 진후 마음속에는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처음으로 주예를 이런 급의 모임에 데리고 왔는데, 주예는 이 자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부분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주예는 진후 표정을 보고도 조금도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한 대표.”주예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날이 서 있었다.“내가 지금 입은 옷이 당신 체면을 깎는다고 생각되면, 난 그냥 돌아갈게. 앞으로 이런 자리엔 굳이 부르지 마.”주예가 오늘 입은 건 짙은 녹색 벨벳 드레스였다. 장식은 많지 않았다. 대신 가슴 위에 보석 브로치 하나만 달려 있었다. 이런 디자인이 단순한 옷일수록 입는 사람에 따라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다. 그런데 주예는 빛이 날 정도로 흰 피부 덕분에 오히려 그 절제된 디자인을 훨씬 더 고급스럽게 살려 냈다.진후는 주예의 한마디에 바로 말문이 막혔다.“내 뜻은 그게 아니야. 됐어, 일단 들어가자. 드레스가 도착하면 그때 갈아입으면 되니까.”경호 인력이 초대장을 확인한 뒤, 도어맨이 공손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