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새길공인중개사 출입문에는 `임대` 스티커만 남아 있었다.
유리문 안쪽은 비어 있었다. 상담용 책상과 의자, 벽에 붙어 있던 매물표까지 사라졌다.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있어 천장에 달린 형광등만 거리에서 반사됐다.
서아가 손잡이를 당겨 봤다. 잠긴 문이 덜컥거렸다.
“이사를 갔으면 종이라도 붙여 놓던가.”
“임대 스티커는 오래된 겁니다.”
도현이 스티커 모서리에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서아는 저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도 그걸 확인하는 게 신기했다. 좋은 뜻은 아니었다.
통화하며 오가던 중개사 조희철의 목소리가 아직 생생했다. `대리님처럼 꼼꼼한 분은 처음 봅니다.` 그 말을 듣고 웃었던 자신이 짜증났다.
서아는 유리문과 비어 있는 실내를 찍었다. 간판과 건물 번호가 같이 나오도록 반대편에서도 사진을 남겼다.
옆 세탁소 주인이 문을 반쯤 열고 내다봤다.
“부동산 사람 찾아요?”
서아가 조희철의 사진을 보여 주자 주인은 바로 알아봤다. 그는 어제 저녁에 탑차 한 대가 왔고, 남자 두 명이 사무실 짐을 실어 갔다고 했다.
“폐업한다는 얘기는 못 들으셨어요?”
“없었어요. 이사냐고 물으니까 사무실 가구 바꾸는 거라고만 하던데.”
세탁소 외부 카메라는 부동산 출입구 일부가 보이는 각도였다. 주인은 수사기관에서 요청하면 보존해 둔 영상을 제출하겠다고 했다. 도현이 업체 이름과 연락처를 메모했다. 서아는 세탁소 간판과 카메라 위치가 한 화면에 들어오도록 찍었다.
“등기 다시 보시죠.”
두 사람은 가까운 무인민원발급기가 있는 구청으로 갔다. 도현이 당일 등기사항증명서를 다시 발급받았다. 소유자 이름은 여전히 김상식이었다.
그러나 계약 당시 서류에는 없던 근저당권이 추가돼 있었다. 등기 접수 시각은 이날 오전 8시 50분, 채권최고액은 9천5백만 원이었다.
서아가 해당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거 언제 들어온 거예요?”
“접수는 우리가 잔금 보내기 전이네요.”
서아가 자기 말을 정정했다.
“아니, 그래도 이게 어떤 영향인지는 우리가 판단하면 안 되겠죠.”
“네. 시간까지 찍어 두세요.”
도현이 등기를 더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서아도 그대로 따라 했다.
도현은 오전 9시 30분, 서아는 11시 10분에 각자 잔금을 보내고 같은 비밀번호를 받았다. 이삿짐이 겹친 건 오후 1시가 넘어서였다.
서아는 전세피해 상담창구에 전화했다. 상담원은 확정일자만으로 대항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며, 인도와 전입신고를 모두 마친 다음 날부터의 효력이 문제된다고 설명했다. 오전 8시 50분에 접수된 근저당은 그보다 앞서 있었다.
다만 두 임차인 사이의 권리 순서는 계약일만으로 정할 수 없었다. 계약서의 선후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등기 접수 시각과 잔금, 인도, 전입신고 접수 자료를 모두 갖추라는 말도 했다. 임의로 짐을 빼거나 주소를 옮기지도 말라고 했다.
“제가 오늘 안에 임대차 전문 변호사를 알아볼게요.”
도현이 말했다.
“저도 회사 동료한테 물어보겠습니다. 각자 확인하고 내용을 맞추죠.”
“그건 좋네요. 서로 하는 말은 못 믿어도, 전문가 말은 비교할 수 있으니까.”
두 사람은 각자 찍은 사진과 접수증을 바로 공유했다. 도현은 파일명 앞에 날짜와 시간을 붙였고, 서아는 계약서 항목별로 폴더를 나눴다. 사진과 접수증 어디에도 김상식과 조희철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오민지는 전화로 상황을 듣더니 욕부터 했다.
“야, 그 집주인 미친 새끼 아냐? 그럼 네 돈은? 전부 보낸 거야?”
“응. 오늘 잔금까지.”
“대출도?”
서아는 옆에 서 있는 도현을 봤다. 그는 못 들은 척 폰으로 서류를 스캔하고 있었다.
“응.”
“일단 와. 재현이한테는 내가 말할게.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
“알았어.”
전화를 끊은 후 서아는 아까부터 휴대폰에 떴던 숫자를 계산기에 넣었다.
58,000,000.
72,000,000.
그리고 도현의 계약서에 적힌 140,000,000.
합계를 누르자 270,000,000이 떴다.
도현이 계산기 화면을 보고 말했다.
“제 계약서는 원본 맞습니다. 계좌도 소유자 명의였고요.”
“제 것도요. 도장도 중개사 앞에서 찍었어요.”
“아까는 서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과하는 거예요?”
“아니요. 아직은 확인할 게 남았습니다.”
“참 반듯하게 재수 없으시네요.”
도현은 그 말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등기를 접어 자신의 파일에 넣은 후 서아에게 유리문 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다.
서아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두 계약서에는 같은 임대인 도장과 계좌가 찍혀 있었다. 김상식은 한 집으로 두 사람의 돈을 받았다.
서아가 계약서 파일을 양손으로 눌러 쥐었다.
“우리 둘 다 당한 거면요?”
도현이 짧게 답했다.
“그 부분부터 증명해야죠.”
“등기부 다시 확인하셨죠?”서아가 묻자 중개사가 웃었다.“오늘 아침에 떼서 보여드렸잖아요.”“계약 직전에 한 번 더 볼게요.”“그러세요. 당연히 확인하셔야죠.”도현은 말없이 휴대전화로 등기사항을 다시 열었다. 소유자 이름, 근저당 설정 여부, 주소와 동·호수. 서아는 임대인의 신분증과 계좌 예금주를 한 번 더 맞췄다.긴장한 사람은 오히려 임대인이었다.“제가 뭐, 문제 있는 집을 내놓은 건 아닙니다.”“문제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서아가 말했다.“저희가 전에 크게 당해서요.”예전에는 전세 사기라는 말을 입 밖에 내면 얼굴부터 뜨거워졌다. 이번에는 먼저 말하고 중개사와 임대인의 반응을 기다렸다.지난 집 배당금은 예상보다 조금 많았지만 보증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입금액은 각자 대출 원금에 넣었고, 임대인과 중개사를 상대로 한 절차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도현이 특약을 읽었다.“잔금과 전입신고를 마친 다음 날까지 현재 권리관계를 유지하고, 소유권 이전이나 새 담보권 설정을 하지 않는 조건 맞죠?”“예, 적어놨습니다.”“보증 가입이 거절되면 계약을 해제하고 이미 지급한 돈을 전액 반환하는 조건도요.”“여기 있습니다.”서아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임차인 칸에는 이름이 두 개 들어가 있었다.특약에는 두 사람이 부담한 보증금 액수와 반환계좌, 한 사람이 먼저 나갈 때의 정산 방식도 적혀 있었다.윤서아. 강도현.계약서는 한 장이었다.두 사람은 각자 도장을 찍었다. 도현이 도장에 묻은 인주를 닦는 사이 서아는 제 이름 옆을 손가락으로 눌렀다.손은 떨리지 않았다.계약서를 첨부해 주택 임대차 신고를 마쳤고 확정일자 번호도 확인했다.일주일 뒤 잔금을 보내기 직전, 둘은 새 등기부와 진행 중인 등기신청 유무를 다시 확인했다. 서아는 임대인의 납세증명서와 전입세대확인서, 건축물대장을 차례로 확인했다.이삿짐차 두 대가 다시 한 골목에 섰다.이번 기사들도 주소를 확인했다.“두 분 짐이 같은 집으로 가는 거 맞죠?”서아와
다시 연애를 시작한 뒤에도 두 사람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금요일 밤은 주로 서아의 집에서 보냈다. 도현의 원룸은 회사와 가까웠지만 창문을 열면 옆 건물 벽만 보였다. 서아의 집은 꼭대기라 계단을 다섯 층이나 올라야 했지만, 창문 한쪽으로 북한산 자락이 조금 보였다.“칫솔 놓고 가도 돼?”도현이 물었다.“한 개만.”“면도기는?”“안 돼.”“왜.”“세면대 좁아.”“네 화장품 반만 치우면 되잖아.”“그럼 오지 마.”“칫솔만 둘게.”일요일 저녁이면 도현은 제 칫솔을 남겨 두고 돌아갔다. 서아는 문이 닫히고 나서도 굳이 컵에서 빼지 않았다.여섯 달 동안 둘은 세 번 크게 싸웠다.첫 번째는 도현이 며칠 입을 옷을 가져와 옷장 한 칸을 차지했을 때였다. 두 번째는 서아가 데이트 비용을 매번 십 원 단위까지 정산해 보냈을 때였다. 세 번째는 도현이 부동산 매물 링크를 보냈을 때였다.`신축 투룸, 역 도보 7분, 보증금 5천/월 95.`그전에도 둘은 매물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데이트를 하다 부동산 유리창 앞에서 멈춰 가격만 읽고 지나갔다. “이건 반지하인데 왜 구십이야”, “관리비 십오만 원에 뭐가 들어가는데” 같은 말만 했다. 함께 살자는 말은 누구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서아는 링크만 읽고 답하지 않았다.그날 저녁 도현이 집에 왔다.“링크 봤어?”“봤어.”“주말에 볼래?”“왜?”“계약 끝나면 같이 살 집.”서아가 썰던 대파를 내려놨다.“누가 같이 산대?”“싫어?”“그 얘기를 왜 링크부터 보내.”도현이 현관 앞에 서서 신발도 벗지 못했다.“먼저 물어보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그러니까 또 네가 다 정하고 보여준 거네.”“정한 게 아니라 찾아본 거야.”“보증금 오천은 누가 내는데.”“내가 삼천, 네가 이천.”“봐. 정했잖아.”도현이 입을 다물었다.서아는 칼을 씻어 건조대에 놓았다. 예전 같으면 화부터 냈을 것이다. 이번에는 식탁을 가리켰다.“앉아.”“밥부터 먹고 얘기하면 안 돼?”“대파 다시 썰
서아는 인터폰 화면을 세 번 확인했다.도현이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봤다.“안 열어?”스피커에서 조금 찌그러진 목소리가 나왔다.서아가 현관문을 열었다.“여긴 어떻게 알았어?”“이사한 날 네가 보내 줬잖아.”“그걸 아직 기억해?”“응.”“무섭네.”“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잖아.”도현의 머리는 전보다 짧아졌고 얼굴과 목은 현장 햇빛에 타 있었다.서아는 화분을 내려다봤다.“그건 왜 네가 갖고 있어?”“네 트럭에 실으려다가 내 상자에 들어갔어.”“반년 동안?”“키웠어.”“물을 너무 줬네. 잎이 물렀잖아.”“죽지는 않았어.”서아가 화분을 받아 들었다. 문 앞에서 계속 이야기할 수는 없어 몸을 비켰다.“들어와.”도현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방을 둘러봤다. 침대 하나와 작은 식탁, 옷장으로 꽉 찬 원룸이었다.“생각보다 괜찮네.”“생각보다가 뭐야.”“고시원 갈 줄 알았으니까.”“돈 없지 눈 없냐.”서아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마실 만한 컵이 하나뿐이라 제 머그에 물을 따라 건넸다.도현이 두 손으로 컵을 받았다.“연락 왜 안 했어?”“내가 묻고 싶은데.”“네가 정리되면 한다며.”“그걸 진짜 기다렸어?”“응.”“시키는 건 더럽게 안 들으면서.”“그건 들으라고 한 말 같았으니까.”서아는 식탁 반대편에 앉았다. 둘 사이에 스투키 화분을 놓았다. 잎 하나가 옆으로 축 처져 있었다.“정리됐어?”도현이 물었다.“아니. 돈도 다 못 받고, 소송도 남았고. 아마 몇 년 걸릴 수도 있대.”“왜 연락 안 했어?”“하려고 했어.”“언제.”“네가 벨 누르기 직전.”서아가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관리비 삼천칠백 원 때문에.”“그건 라면값이라고 했고.”“라면을 얼마나 처먹었으면 삼천칠백 원이나 돼.”도현이 웃었다. 웃음이 끝난 뒤에도 둘 다 바로 말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옆집 문 닫는 소리가 났다.“나 서울에 집 구했어.”도현이 먼저 말했다.“어디?”“회사 근처. 보증금
혼자 사는 집에서는 아무것도 제자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냉장고에 넣어 둔 즉석밥은 그대로 있었고, 검은 양말이 빨래에 섞이는 일도 없었다. 샤워를 삼십 분 해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었다.서아는 처음 한 달 동안 그 자유를 악착같이 누렸다.보일러를 스물여섯 도로 올렸다. 침대 위에서 과자를 먹었다. 설거지는 아침까지 미뤘다. 새벽 두 시에 드라이어도 돌렸다.그러다 옆집에서 벽을 세 번 두드렸다.“죄송합니다.”서아는 드라이어를 끄고 혼자 웃었다.웃고 나니 조용했다. 예전 집에서는 이 시간이면 도현이 벽을 두 번 두드렸다. 시끄럽다는 뜻 한 번, 이제 자겠다는 뜻 한 번. 둘이 정한 적도 없는데 어느 날부터 그렇게 됐다.서아는 벽에 손등을 댔다가 내렸다. 옆집 사람까지 놀라게 할 필요는 없었다.이사 일주일 뒤 마지막 전기료가 빠져나갔다. 도현은 생활비 모임통장 잔액을 십 원 단위까지 나눠 보낸 뒤 `정산 끝`이라고 썼고, 서아는 `응`이라고 답했다. 둘이 함께 보던 계좌는 그날 닫혔다.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경매 절차는 사람들이 처음 말한 것보다 오래 걸렸다.서아는 임차권등기 완료 서류와 배당요구 접수증, 대출 연장 서류를 챙겨 다녔다. 배당요구는 종기 전에 끝냈지만 보정과 확인 연락은 계속 왔다. 피해자 결정 통지서를 받은 날에도 회사에서는 순두부찌개 신제품 관능평가가 있었다.결정서를 받았다고 돈이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바뀐 것은 지원대출 상담 창구와 안내 절차 정도였다. 서아는 결정서를 새 투명 파일에 넣고 겉면에 제 이름과 사건번호를 적었다.“대리님, 이거 끝맛이 너무 텁텁하지 않아요?”신입사원이 물었다.서아는 세 번째 컵의 국물을 삼켰다.“전분 줄이고 고춧가루 입자 바꿔봐요. 매운맛만 세게 하면 싸구려 같아.”“네.”그래도 서아는 매일 출근했고 기획안 마감도 맞췄다. 월급날이면 대출 이자와 월세가 같이 빠져나갔다. 통장 잔액은 여전히 보기 싫었지만 화장실에 숨어 확인하지는 않았다.엄마에게도 한 달에 한 번 진행 상
이삿짐차 두 대가 같은 골목에 들어왔다.기사들이 차에서 내려 주소를 확인하다가 서로를 봤다.“302호가 두 집이에요?”서아와 도현이 동시에 대답했다.“네.”처음 이사 오던 날과 똑같았다. 그날은 트럭 두 대가 집 안으로 짐을 밀어 넣었고, 오늘은 반대였다.서아의 짐부터 빠졌다. 책상, 작은 서랍장, 날짜가 붙은 반찬통. 냉장고 문에서 마지막 자석을 떼자 오래 가려져 있던 자리가 네모나게 희었다.도현이 현관 앞에서 상자를 받아 기사에게 넘겼다.“이건 깨지는 거야.”“써 있는데.”“아저씨가 방금 밑에 깔려고 했어.”“내가 말할게. 너도 네 짐 봐.”둘은 계속 서로에게 할 일을 시켰다. 멈추면 다른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마지막으로 작은 화분 하나가 남았다. 서아가 입주 첫날 사 온 스투키였다. 햇빛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죽지 않고 버텼다.처음에는 서아 방 창틀에 있었고 비가 새던 날부터 도현 방으로 옮겨졌다. 누가 물을 줬는지는 늘 서로 모른 척했다. 화분 받침 밑에는 관리비를 나누려고 끄적인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그건 네 거지?”도현이 물었다.“같이 물 줬잖아.”“네가 사 왔어.”“네 방에 더 오래 있었고.”“화분도 재산분할 해야 돼?”“우리가 결혼했냐?”서아가 화분을 안았다.“내가 가져갈게.”서아는 화분을 현관 옆에 잠깐 내려놓았다.짐이 빠진 작은방은 생각보다 좁았다. 침대가 있던 자리만 먼지 테두리가 잡혔고, 벽지 아래쪽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서아는 물티슈를 들고 쪼그려 앉았다.도현이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청소비 냈어.”“그래도 이건 닦고…….”“가.”“왜 쫓아내.”“네 차 기다리잖아.”밖에서 기사가 경적을 짧게 울렸다.서아는 빈방을 한 번 더 봤다. 울고 싶지는 않았다. 이 집 때문에 이미 너무 많이 울었다. 그런데 자꾸 코가 매웠다.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도현이 무릎을 굽혔다. 풀린 운동화 끈을 묶어 주려는 줄 알고 서아가 발을 뺐다.“뭐 해.”“이거.”그가 신발장 아래에서 검은
이삿짐 상자가 거실 벽을 따라 쌓였다.서아 것에는 `주방`, `옷`, `회사 샘플`이 적혔고, 도현 것에는 숫자만 쓰여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 붙어 있던 `서재`, `주방`, `도면` 메모 대신 번호가 남았다.“십이 번은 뭐야?”“책.”“십일 번은?”“책.”“왜 굳이 번호를 써.”“목록 따로 있어.”“피곤하게 산다.”“냉장고 달걀에도 날짜 쓰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둘은 나흘 만에 제대로 대화했다. 대전 이야기가 나온 뒤 필요한 말만 주고받았다. 종량제 봉투 더 사지 마. 가스 해지했어. 이삿짐차는 열 시에 와.내일이면 그 말도 끝이었다.서아가 싱크대 아래에서 처음 쓴 생활계약서를 찾았다. 물이 튀어 종이 가장자리가 울어 있었다.`1. 각자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가지 않는다.``4. 냉장고 왼쪽은 서아, 오른쪽은 도현이 쓴다.``7. 계약 종료 즉시 각자 퇴거한다.`둘은 이사 관련 확인서와 배당요구 접수증을 각자 서류 상자 맨 위에 넣었다.도현이 어깨 너머로 종이를 읽었다.“칠 번은 잘 지키겠네.”“그러게.”서아는 종이를 버리려다 접어서 가방 옆주머니에 넣었다.“대전 언제 가?”“모레.”“숙소는?”“현장 근처 오피스텔.”“좋겠다. 사기당한 집보다는 낫겠네.”도현이 테이프를 끊다 말고 서아를 봤다.“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뭘.”“네 두고 도망가는 사람처럼.”“내가 언제 그랬어.”“계속 그러고 있잖아.”서아는 빈 서랍을 닫았다. 잘 맞지 않는 레일이 덜컹거렸다.“그럼 아니야?”“나도 집 구해야 돼. 돈 벌어야 하고.”“알아.”“모르는 얼굴인데.”그가 며칠 전 서아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서아가 바닥에 앉았다. 상자에 가려진 창으로 해 질 무렵 빛이 들어왔다.“네가 또 없어질까 봐 그래.”도현의 손에서 테이프가 길게 풀렸다.“아빠도 돈 문제 생기고 지방 간다고 했어. 일 잡히면 부른다고. 그게 마지막이었어.”“나 네 아버지 아니라고 했잖아.”“알아. 머리로는.”도현이 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