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냐고? 기쁘지 않다.’이승우는 27년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적이 없었고 밤새 불면증에 시달렸다.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하나의 법칙을 알려주었다.“결혼 직전 기대가 전혀 없다면 그 결혼은 하지 않는 게 낫다. 너의 엄마랑 결혼하기 한 달 전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기분이 좋았어.”“이승우, 우리 집은 결혼율은 낮지만 한 번 하면 끝까지 가. 그러니 잘 생각해 봐.”그의 갈등과는 달리 지은설은 오히려 더 깨달음을 얻었고 헤어지자는 말도 그녀가 먼저 꺼냈다.“승우 씨, 사실 당신은 나랑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가끔은 내가 당신의 결혼에 대한 고민을 시험하는 실험대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혼하고 싶으면서도 두려운 거죠. 하지만.... 결혼은 그렇게까지 무서운 일이 아니에요. 승우 씨가 두려워하는 건 결혼 자체가 아니라 나랑 하는 결혼이겠죠. 만약 두 달 후 결혼식장에서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부승희 씨라면 그때도 여전히 두려울까요?”‘만약 부승희라면....’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 이미 지은설의 말을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결국 부승희를 잃었다는 슬픈 현실이 그를 짓눌렀다.결국 그는 지은설과 결혼하지 못했다.지은설은 그보다 어리지만 훨씬 더 성숙했고 그가 남긴 보상을 받아들인 채 깔끔하게 화서시로 유학을 떠났다.이승우는 한동안 혼란스러웠고 결국 참지 못하고 부승희가 있는 도시로 향했다.그는 부승희의 아파트 아래에서 희미하게 그녀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 역시 그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승우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났다.아마도 그녀는 이제 평생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부승희의 아파트 아래에서 밤을 지새웠고 몇 개의 담배를 피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원래는 해외에 더 머물 생각이었지만 국내에서 일이 생겼다. 그와 함께하던 사업에 작은 문제가 발생했고 그녀가 전
카이도에서 돌아온 후 그는 부승희가 그리워서 견딜 수 없어 충동적으로 항공권을 끊고 그녀가 있는 도시로 가서 학교를 찾아갔지만 결국 그녀와는 만날 수 없었다.학교 근처의 식당에서 이승우는 부승희가 한 남자의 팔을 잡고 길을 건너는 모습을 목격했다.그와 단 한 번 스쳐본 것만으로 이승우는 다시 물러섰다.그 후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귀국했으며 이 일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 인사조차 건넬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고 초라한 떠돌이 개처럼 보였을 것이다.이승우는 혼자 있을 때마다 자신에게 묻곤 했다.‘만약 부승희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여전히 좋아할까? 아마 아닐 거야. 나조차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데.’그는 그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결국 나중에 알게 되었다.그 이후 그는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게임을 만들고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며 돈을 벌고 끊임없이 사업을 확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우는‘이승우 도련님’에서‘이승우 대표’로 변했다.이승우의 고모는 그를 볼 때마다 장난스럽게 말했다.“우리 이승우는 정말 천재야. 갑자기 확 깨달은 것처럼 변했네. 예전엔 왜 그렇게 사업에만 집중하지 않았을까?”그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사업에 몰두한 이유는 모연준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였고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마주했을 때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부승희와 다시 무언가를 기대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좋은 연애를 하고 있었고 이승우는 그녀가 헤어지길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더군다나 부승원은 부승희가 선택한 사람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부승희가 해외로 떠난 이후 그는 부승원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고 자주 만나긴 했지만 예전처럼 친밀하진 않았다.그는 부승원에게 먼저 연락해 유도장에서 함께 훈련하자고 했지만 둘은 별로 말을 섞지 않았다.유도는 부승원이 강한 종목이었고 이승우의 전문 분야는 아니었다.그는 스스로 부승원에게 얻어맞으러 간 셈이었
“몇 시야?”부승희가 잠결에 묻자 이승우가 침대에서 내려와 부승희를 안마 의자에서 안아 올렸다.‘뭐지?’부승희는 두 눈을 번쩍 뜨고 이승우의 어깨에 손을 감았다.“7시. 옆방으로 바래다줄게.”“그냥 나 깨우면 되잖아.”부승희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러나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지고 이승우의 품은 꽤 단단하고 편했기에 옆방으로 가는 길에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정신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으나 체온을 재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또 이승우의 이마를 만지려 손을 뻗었다.이승우는 길을 걸다가 고개를 숙여 부승희의 손이 제 이마에 닿게 했다.“이젠... 안 뜨겁네...”부승희는 그 한마디만 건네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이승우는 말없이 부승희를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레 옆방 문을 열고 침대 위로 눕혔다.폭신한 침대에 눕고 부승희는 알아서 코알라처럼 이불을 찾아갔다.이승우는 이불을 좀 더 당겨 등을 가려줬다.요즘 들어 부승희는 자주 앉아서 근무했기에 허리며 목까지 아프다고 자주 호소했었다.이른 시간은 아니었으니 위층엔 벌써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이승우는 한참 부승희를 내려다보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열을 재고 약을 챙겨 먹었다. 그리고 비서에게 업무를 조달한 뒤에 편하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부승희가 자신의 옆방에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이승우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게 느껴져 바로 잠이 들 수 있었다.꿈속엔 또 얼기설기 얽힌 기억들이 떠올랐다.부승희는 많이 피곤한 것인지 오후 두 시까지 푹 잠이 들었다.다시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한 부승희는 제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그리고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옆 방의 이승우를 찾아갔는데 이승우는 아직도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었다.부승희는 문에 대고 쾅쾅 노크하며 이승우를 깨웠다.부스스 잠에서 깬 이승우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더니 다시 침대에 풀썩 누웠다.“승희야, 겨우 두 시잖아.”“오후 두 시라고!”부승희는 어이가 없었다.“근데 오빠는 지금 좀 어때? 머리 아직도 아파?”
“나 지금 회사 다녀오려고 하는데 저녁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사올게.”부승희는 예쁜 가방을 골라 들며 현관 앞에 서서 말했다.이승우는 따듯하게 데워진 우유를 꿀꺽꿀꺽 마시다 답했다.“아무거나. 난 다 괜찮아.”“어젯밤 갔던 레스토랑 나쁘지 않던데 포장해올까?”부승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메뉴를 읽었다.“그러면 칠리 새우랑 갈비찜 어때?”“새우는 좋은데 갈비는 별로야.”하지만 요리가 겨우 하나인 건 조금 아쉬웠다.“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없어?”“아무거나.”“한 번만 더 아무거나 라고 답하면 오늘 밤 굶을 줄 알아.”이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다 마신 우유 컵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사골 곰탕?”“...”“나 사골 곰탕이 먹고 싶어.”이승우가 다시 말을 보탰다.“주변에 사골 곰탕 파는 가게가 어디 있어!”“그럼... 아무거나 사.”부승희는 이를 꽉 깨물었다.어젯밤 비를 폭삭 맞은 것만 아니었다면 이승우를 사골 곰탕으로 우릴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그러나 부승희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로 흔들지도 않고 바로 문밖으로 나섰다.“나간다. 알아서 잘 쉬고 있어.”“내가 재료 손질해놓을 테니 저녁에 와서 해주라.”이승우는 고집스레 졸랐다.“시간 없어!”“시간 내줘.”펑.문이 닫혔다.“...”이승우는 굳게 닫힌 현관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성격도 참. 어제 비밀 좀 들춰본 거로 버럭 하기는.’이승우는 저도 모르게 창가로 걸어가 떠나는 부승희의 뒷모습을 쫓았다.그런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차에 오르기 전에 부승희가 고개를 휙 돌려 위층을 올려다봤다.이승우는 창문을 열고 활짝 웃었고 손을 저어 인사 하려는 찰나, 부승희는 매몰차게 차에 올라 문을 쾅 닫았다.‘쩝. 매정하긴.’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진동했다.보낸 이가 바로 부승희였다.[까치집 생긴 머리로 바보처럼 웃지나 말고 머리나 빗어.]“...”이승우가 답장하기도 전에 차는 시동이 걸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부승희는 소파에 앉아 한참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이승우는 과일을 예쁘게 썰어왔고 한입씩 부승희의 입에 넣어주며 오늘 자리 분위기가 어땠는지 물었다.이승우가 아픈 뒤로 부승희는 계속 이승우의 집을 오가며 보살폈고 며칠 내내 이승우의 집에서 잠을 잤다. 저녁만 되면 두 사람은 함께 영화를 보거나 보드 게임을 했고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오늘 오후, 부승희가 이승우에게 전화를 걸어 일정의 세부적인 문제들을 알려주고 있는데 옆에서 가만히 듣던 비서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었다.“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오래된 부부 사이인 줄 알겠어요.”그 말을 듣고 부승희는 심장이 철렁했다.그때 오렌지 과즙이 톡 터져 입안으로 퍼졌다.마침 테이블에 올려 둔 이승우의 핸드폰이 울렸고 부승희는 고개도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오빠 전화 왔어.”“네가 대신 받아줘.”‘아, 귀찮게.’부승희는 나른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겨우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수신자를 확인한 부승희는 입안의 오렌지도 채 씹지 못하고 멈춰 섰다.이승우는 해장국을 끓이다가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거의 다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그 말이 끝나자마자 부승희는 핸드폰을 들어 이승우에게 보였다.그리고 사과 한 조각을 아삭아삭 씹으며 말했다.“이거 봐봐. 오빠 찐 사랑한테서 걸려온 전화니까 오빠가 직접 받아.”이승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지은설은 화서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빠르게 새 남자친구를 만났고 바로 결혼해 아이도 낳았다.이승우는 지은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이승우는 지은설에게 보상금을 건네며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었다.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돕겠다고 말이다.그러나 오래 시간이 지나도록 지은설은 단 한 번도 이승우를 찾지 않았었다.해장국은 보글보글 끓고 있고 부승희는 소파에 앉아 이승우가 통화하는 걸 지켜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여보세요?”그 목소리에 부승희의 입꼬리가 경직되었다.부승희는 두
“정말 내가 돕지 않길 바라?”“응.”“그래. 알겠어.”이승우는 핸드폰을 꺼내 직접 지은설의 번호를 차단하는 걸 보여줬다.부승희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 행동을 막아섰다.“뭐하는 거야?”“앞으로 돕지도 않을 텐데 연락처 남길 필요도 없지.”“아깐 그렇게 미안해하더니 왜 지금은 의리 없이 바로 차단하는 건데?”이승우는 침착하게 말했다.“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내가 도우려고 했던 건 단순히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지만, 네가 싫다면 기꺼이 나쁜 사람 할래.”“오빠도 오빠가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기나 해?”“그래. 많은 사람 눈엔 내가 그렇게 보이겠지. 그런데 난 상관없어.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도 너한텐 좋은 사람 되고 싶어.”“나 때문에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차단하고 돕지 않는 행동 자체가 나쁜 사람인 거야.”“그럼 차단 풀고 네 말대로 그 아이 도울게.”“그만!”‘젠장. 하마터면 넘어갈 뻔 했네.”이승우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두 사람은 한참 문 앞에 서서 대치했다.부승희는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과거 찐 사랑이라 칭했던 그 사람과는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게 확실했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짜증이 났다.부승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등을 돌렸다.“오빠 마음대로 해!”“돕든지 말든지!”“어차피 우린 겨우 협력 파트너일 뿐이지 연인도 아니잖아. 내가 뭔 상관이야.”이승우는 하고 싶은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로 말을 삼켰다.부승희는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안 가고 뭐 해?”부승희는 이승우가 역병인 것처럼 내쫓았다.며칠 동안 사이가 겨우 풀어졌는데 전화 한 통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이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부승희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술 많이 마셨으니 너무 뜨거운 물로 샤워하지 말고 일찍 쉬어.”그리고 대신 문까지 닫아줬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부승희는 입을 삐죽거렸고 얼굴을 굳힌 채로 문에 기대앉았다.부승희는 샤워하지 않고 한참 문에 기대
지은설의 연락 한 번에 이승우는 지금까지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뻔했다.하지만 더 큰 불행이 찾아오고 있었는데... 배여진이 다시 돌아와 버렸다.결론적으로 두 사람은 아직 이혼하지 못했다. 배여진이 임신을 했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의 오랜 대치에 애꿎게 새우등이 터진 건 이승우였다.선기현은 계속 이혼을 고집했고 전주까지 찾아왔다.부승희는 배여진의 옆을 지켰고 이승우는 선기현을 만났다.“기현이는 그래도 이혼하고 싶어해. 아이도 지우길 바라고.”조금 티가 난 배여진의 배를 보며 부승희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부승희와 배여진은 꽤 오랜 인연이었으며 성격도 아주 비슷했다. 과거 배여진은 부승희보다도 한 성격을 했었는데 꽃다운 청춘을 선기현의 짝사랑하며 보냈고 선기현 한 사람에게만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드디어 선기현이 마음을 받아줘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는데 또 다른 막장의 시작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정말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룸안의 배여진은 술을 마실 수 없었으나 만취한 것보다도 더 심란해 보였다.배여진은 머리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고 그동안 선기현과의 아름답던 추억을 수도 없이 꺼냈다.“내가 만나주지 않는다고 몇천 자나 되는 장문을 보냈었어.”“나만 보이고 나만 좋아해 준다고 약속도 했는데.”“그렇게 하늘에 대고 맹세를 했는데 어떻게 그 약속을 이렇게 쉽게 저버릴 수 있어? 정말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젠장. 이 시나리오 왜 이렇게 익숙하지?’부승희는 이승우가 보낸 장문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몰래 인상을 찌푸렸다.이 세상 모든 남자는 결국 다 똑같은 걸까? 다들 생각하는 게 비슷한 것 같았다.그러나 이어진 배여진의 눈물 섞인 목소리에 부승희는 바로 생각을 접었다.“만약 기현이가 나에게 돌아와 버렸다 않았다면 난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어쩌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굳이 날 돌려세운 기현이 너무 미워.”“승희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라고 하잖아. 그
배여진은 깨진 유리 컵으로 손목을 그었다.깊게 파인 상처만큼 배여진은 삶의 미련이 없었다.마치 선기현을 위해 결혼식 당일 도망친 것처럼 배여진이 선기현을 향한 사랑은 나방이 불꽃을 날아드는 것처럼 무모했다.부승희는 많이 당황했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배여진의 심정이 많이 이해가 갔다.그리고 배여진이 했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승희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라고 하잖아. 그런데 그 마음이 변하는 걸 지켜보는 게 얼마나 지옥인지 알아?”이승우와 선기현도 빠르게 병원으로 움직였다. 의사는 배여진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수혈을 하고 있었다.부승희는 선기현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대신 주먹부터 날리려 했다.“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여진 언니 배신하면 천벌 받을 거라고 맹세했다면서! 그럼 천벌 받아!”선기현은 몰아치는 주먹에도 막아서지 않았고 잔뜩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부승희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자 이승우가 막아서며 말했다.“먼저 여진이부터 만나게 해줘.”“만나긴 뭘 만나? 여진 언니가 기현 오빠 만나고 더 흥분하면 어떡하라고.”부승희는 한참 생각하다가 선기현의 팔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더는 여진 언니 자극하지 마. 벌써 나이가 서른셋인데 책임져야 할 일은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 언니 지금 아이도 임신 중인데!”선기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부승희는 병실 앞을 지켰고 안쪽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몰라도 수혈 중인 배여진이 선기현의 품에 안겨 엉엉 우는 게 보였다.만약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정말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면 배여진은 정말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다 버릴 것 같았다.부승희는 그 광경을 보며 점점 손발이 차가워졌고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랐다.이승우는 이런 부승희를 이끌고 복도에 있는 좌석에 앉혔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두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잘 지내보려고 해도, 배여진이 피를 흘리는 결과가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