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여름은 양혁수의 성의를 봐서 바로 팔찌를 착용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고리가 아닌 건지 몇 번의 시도를 해도 착용이 쉽지 않았다.이에 양혁수가 말했다.“내가 해줄게.”그러자 변여름은 냉큼 팔을 그쪽으로 내밀었다.양혁수는 한 손으로 변여름의 가녀린 팔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팔찌의 고리를 맞췄다.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팔찌가 변여름의 손목에 걸어졌다.그때 양혁수의 시선이 변여름의 팔 안쪽에 머물렀다. 최소 3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상처가 눈에 띄었다.“이거 어떻게 된 거야?”변여름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몇 년 전에 큰오빠랑 공장에 내려갔을 때 생긴 상처예요. 제품 하나가 문제를 일으켜 폭발했고 그 파편에 긁혔어요.”변여름이 말한 제품이란, 당연히 군사 무기를 가리킬 것이다.변씨 가문이 해외에서 이 업계를 운영하는 것은 합법이었지만, 워낙 강경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집안이라 주변엔 적들이 많았다.양혁수는 애초에 변여름이 이 사업에 끼어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몇 년 전, 변백호 역시 변여름을 가문의 사업에서 멀어지게 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해 버렸다.변여름이 워낙 영리하고 재능이 뛰어나기에 부모와 형제들이 변여름의 능력을 낭비할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하지만 이미 발을 들인 변여름이 왜 다시 그 사업에서 빠져나왔는지, 그리고 변씨 가문 사람들이 왜 허락을 했는지 궁금해졌다“네 오빠는 알고 있어?”양혁수의 질문에 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아직 말 안 했어요.”양혁수는 대충 짐작은 했었다.그리고 마지막 한 입 남은 케이크를 입에 털어 넣고 차에서 내려 쓰레기통에 버렸다.“여기에서 공부가 끝나면 뭘 할 생각이야?”“병원에 취직해 의사해야죠.”양혁수는 더 의아해졌다.“네 가족이 허락할 것 같아?”“당연하죠. 다들 허락했어요.”정말 이상하다 싶었지만 양혁수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시간이 지나고 이쯤이면 됐다 싶은 변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며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집엔
요양센터 쪽은 변여름이 미리 사람을 배치해 두었고, 양혁수가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물건은 이미 변여름 손에 전달되었다.그리고 실험실 건물 아래에 앉은 변여름이 양혁수와 나눈 메시지를 훑어보며 디테일을 체크했다. 보통 젊은 남녀가 메시지를 주고받는 방식은 대체로 이러했던 것 같았다. 노지혜도 그렇고, 연구실 다른 동료들도 그러했다. 그래서 변여름은 자신이 보통 연애를 꽤 비슷하게 따라 했다고 생각했다.변여름의 옆에는 두 개의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온통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팔찌였고, 다른 하나는 루비 목걸이였다. 세밀하게 조각된 루비는 그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뜨거운 태양 같았다. 그리고 두 개를 나란히 비교해 보니, 화려한 붉은 색감이 더욱 생동감 있고, 더 정성을 들여 고른 선물로 보였다.변여름은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물건을 정리한 뒤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허예나가 선물을 받는 데 걸릴 시간을 계산한 후, 변여름은 따로 준비해 둔 작은 상자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섰으며 목적지는 대나무 숲길 근처였다.한편, 양혁수가 막 책상에 앉으려던 찰나, 휴대폰 화면이 반짝였다. 뜻밖에도 영상 통화 요청이었으며 상대는 허예나였다.식사도 여러 번 같이했고 대화도 자주 나눴지만 영상 통화는 처음이었다. 양혁수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별생각 없이 통화를 받았다.영상은 연결되었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양혁수는 카메라를 자신에게 맞추지 않았고, 상대 화면에서도 허예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화면은 온통 어둡기만 했고, 마른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어디야?”양혁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어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이에요.”양혁수는 허예나의 평소 말투를 떠올려 보았다. 허예나 성격상 말끝을 길게 늘이며 이야기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차분했다.“돌아가는 길에 가로등 없어?”“고장 났는데 좀 무서워서 전화했어요.”양혁수는 대답 없이 휴대폰을 한 손에 쥐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이 길
두 사람 사이 정적이 흐르자 허예나가 양혁수를 불렀다.양혁수는 어이가 없었지만 말없이 화면을 전환하여 제 얼굴을 드러냈다.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허예나 한 사람에게 더 보여준다고 덧나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변여름은 양혁수가 갑자기 얼굴을 보일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방금 실물로 본 사람이 갑자기 화면으로 보이자 깜짝 놀라버렸지만 아까보다 훨씬 차가운 얼굴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리고 왠지 가슴 언저리가 시큰거렸다.‘오빠는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이랑 영상 통화도 하는구나.’‘어휴.’‘세상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오빠도 당하기 참 좋은 사람이네.’“아직도 선물 박스 못 열었어?”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변여름은 서둘러 목걸이를 꺼내 손에 쥐었다.“이거 루비죠? 너무 예뻐요.”“응.”“오빠가 직접 고른 건가요?”“브랜드 매니저가 고른 거야...”“아... 네...”그러자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고 그 모습이 꽤 웃기기도 했다.그러나 이대로 굽혀질 변여름이 아니었다.“그럼 내일에는 빨간 국물로 준비해 볼게요. 얼큰하고 시원하게 말이에요.”바로 음식 채널로 전환해버렸다.양혁수는 저녁을 따로 챙겨 먹지 않고 디저트만 먹었으니 얼큰한 국물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벌써 내일 점심 메뉴가 기대되었다.“매일 요리할 시간은 돼?”양혁수의 목소리는 한껏 다정해졌다.이를 눈치챈 변여름은 눈치껏 말을 지어냈다.“매일 엄마를 보살피는 것 외엔 별다른 일정도 없어요. 오빠 밥도 하고 엄마 밥도 챙기는 거죠.”“참, 내일은 안 되겠네요. 엄마는 매운 음식 드시면 안 되니까 오빠만을 위한 도시락을 따로 차려야겠어요.”그 말에 양혁수는 잠시 멈칫했다.“너무 애쓸 필요 없어.”“알아요.”변여름은 벌써 어떤 요리를 할지 구상을 마친 뒤였다.변여름은 매일 2인분씩 요리를 했고 그 뜻인즉 두 사람은 매일 점심을 같은 메뉴로 먹었다는 말이었다.노지혜는 변여름에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러한 행동이 참 변태처럼 보인다며
선물을 받고 허예나는 계속 양혁수에게 점심 도시락을 보냈고 가끔은 저녁에도 도시락을 보냈다.양혁수는 저녁 늦게 돌아와도 도우미더러 따로 밥을 챙겨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그리고 어느 날 점심시간.해외 파견을 갔던 차장이 돌아왔고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다. 직급이 있다고 하지만 두 사람은 오랜 친구 같은 사이었고 해외에서도 좋은 성과를 따냈기에 양혁수는 흔쾌히 차장의 점심 약속에 응했다.허예나는 매일 점심시간에 맞춰 도시락이 입에 맞는지 물었고 오늘에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러나 약속에 정신이 팔린 양혁수는 대충 대답을 했다.[맛있었어.][갈비도 맛이 잘 들었던가요?][그래.]짧은 말 한 마디에 허예나는 한참 침묵했고 양혁수는 왠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그리고 이어 슬퍼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이 우수수 쏟아졌다.“...”[오늘 내가 한 건 계란국이거든요!]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오빠, 설마 지금까지 먹지도 않고 날 속였던 건 아니죠?][먹었어.]그러자 허예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오늘만 못 먹은 거야.][왜요?][요즘 들어 음식이 입에 잘 안 맞았어요? 왜 안 먹었어요?][설마... 질린 거예요?][지금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 먹고 있는 거죠?]“...”여러 임원과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양혁수는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해보려 했지만 허예나는 놓아주지 않았다.[레스토랑 셰프가 만든 거야.][왜 레스토랑 가신 건데요...][누가 밥을 사줘서.][오늘 일정에 없던 약속인데 혹시 개인적인 약속이에요? 설마 여자?]양혁수는 가끔 여자의 육감이 소름이 끼친다고 생각했다.오늘 점심을 함께 한 차장은 확실히 성별이 여자가 맞았으며 나이도 어린 편이었다.양혁수는 인상을 찌푸렸고 다른 임원들과 얘기하다가도 고개를 숙여 타자를 했다.[남자야.]그러나 허예나는 또 울상인 이모티콘을 보냈다.‘겨우 도시락 한 번 챙겨 먹지 않았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저녁에 꼭 먹을게.][다 식어버렸을 텐데요.][다시
양씨 가문과 허씨 가문은 일로 엮인 적이 없었고 양혁수 역시 허씨 가문에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그러나 허예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속인다면 자신이 받은 재산의 90%를 넘겨준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이런 이윤이라면 양혁수 쪽에서는 절대 손해를 볼 장사가 아니었으며 고작 좋은 말 몇 마디 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그래서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회의실로 안내하세요.”“네. 알겠습니다.”허씨 가문은 최근 10년 동안 계속 내리막길만 걸었고 이건 허현무 본인과 큰 상관이 있었다.양혁수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다. 술과 유흥에 절어 퀭한 눈빛을 한 채, 불룩한 배를 내밀고 앉아 있는 허현무가 정말 허예나 같은 딸을 낳을 수 있었단 말인가?두 사람은 나이 차가 꽤 있었지만 허현무는 양혁수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흐릿한 눈빛에 순간적으로 빛이 도는 걸 보니, 딱 봐도 흥미로운 제안을 품고 나온 모양이었다.형식적인 인사가 오간 후, 허현무는 말을 빙빙 돌리며 슬쩍 양혁수의 속내를 떠보려 했다.“우리 예나는 어릴 때부터 제 엄마랑만 지냈어요. 내가 사업한다고 정신이 없어서 가족을 제대로 못 챙겼죠. 그래도 애가 정말 착하고 부모한테 효도도 잘하고, 마음씨도 고운 아이예요.”‘그래서, 이제 와서 그 착한 애를 돈으로 바꿔보겠다는 건가.’양혁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허현무를 바라봤다. 양혁수는 이런 부류의 인간을 제일 혐오했다. 그래서 별 대꾸 없이 차만 한 모금 마시며, 허현무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허현무는 양혁수의 반응을 살피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튕겼다. 그런데 분위기가 썰렁해질 즈음, 양혁수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허예나 씨 대학은 졸업했죠?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그 질문에 허현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딸이 뭘 했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허현무가 알 리가 없었다.연예계 루머라면 실시간으로 꿰고 있겠지만, 정작 자기 딸의 근황은 아예 모르고 있었다.“예나가 원래 좀 독
변여름이 허예나를 중개자로 선택해 이 비열한 일을 맡긴 것은 단순히 양지원이 마침 허예나와 접촉한 적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허예나가 오랫동안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솔직히 말해 어느 날 허예나가 세상을 떠나도 그녀의 친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그래서 그녀의 사진을 보정 후 허예나의 모든 신분증 정보를 바꿔치기해도 양혁수를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사실 허예나는 양시연과 전혀 닮지 않았다.설령 양혁수가 의심하더라도 그가 허예나의 친오빠인 변백호에게 직접 조사를 맡기지 않는 이상 쉽게 밝혀낼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변백호의 성격을 고려하면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재미 삼아 모른 척할 가능성이 컸다.허예나가 허 회장과 통화한 기록을 보며 변여름의 표정은 냉담하고 무표정했다.원래 그녀는 직접 도청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불법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법을 지키는 사람이었고 매년 변여름에게 허용하는 불법 행위의 한도가 정해져 있었다. 올해는 그 한도를 아껴 써야 했다.조용히 기다린 끝에 마침내 허예나가 전화를 걸어왔고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변여름 씨, 대단해요. 어떻게 양혁수 씨가 이렇게 빨리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죠?”변여름은 당황했다.???‘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몸을 바로 세우고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현재로선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을 들으니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허예나 씨, 아버님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그녀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허예나에게 물었다.허예나는 모든 정보를 빠짐없이 알려주며 기쁜 듯 말했다.“우리 아빠가 양혁수 씨를 찾아갔어요. 양혁수 씨가 나 아니 당신한테 조금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빠 생신 잔치에 참석하기로 했어요. 아빠가 기분이 좋아서 요즘 엄마를 보러
변여름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양혁수가 그리웠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점심을 챙겨 먹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비서가 그녀를 위층으로 안내했고 문을 열자 이미 방 안에는 구수한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그건 바로 갈비구이 냄새였다.변여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보온 통을 바라보았다.“갑자기 여기 왜 온 거야?”양혁수가 그녀에게 물었다.변여름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자연스럽게 웃었다.“밥 얻어먹으려고요. 오빠, 나 안 반가워요?”“내가 환영 안 한다고 하면 네가 우리 회사 시스템을 무너뜨릴까 봐 두렵네.”비서는 그 말을 듣고 변여름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고 양혁수는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반찬 두 개 더 주문하고 양송이 크림수프도 추가해.”그녀는 그가 정확히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고르는 걸 보고 혀를 살짝 내밀며 가져온 차를 마셨다.“사실 반찬 추가 안 해도 돼요. 오빠랑 같은 거 먹으면 되니까요.”그녀가 테이블 위의 음식을 가리키자 양혁수는 음식을 한 번 훑어보며 말했다.“...부족해. 그리고 이 반찬은 금방 만든 게 아니라 맛없어.”“그러면 왜 먹어요?”양혁수는 귀찮은 여자 셰프와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는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렇다고 대충 둘러대는 것도 어색했다. 어차피 먹지 않으면 허예나가 눈치챌 것이었다.그는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 맞은편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쌀 한 톨 한 톨이 다 농민들이 어렵게 지은 건데 누가 알아주겠어.”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손을 뻗어 준비된 젓가락을 집었다.양혁수는 그녀의 움직임을 잠시 멈춰 바라보았다.그녀는 갈비구이 한 조각을 집어 손으로 받쳐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그러다 갑자기 먹던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양혁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변여름이 입을 열었다.“맛없어요.”“맛없다고?”양혁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젓가락을 다시 집어 들고 갈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도시의 불빛 속에서 운전하며 집으로 가는 동안 양혁수는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해졌지만 조수석에 간식을 먹고 있는 변여름이 있다는 느낌은 꽤 좋았다.집에 도착하자 둘은 각자 방으로 갔다.욕실에서 나온 양혁수는 침대에 기댄 채 앉자 변여름이 마치 그 옆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 듯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경험이 쌓인 양혁수는 차분히 카메라를 마주했다. 반대편에서 검은 화면을 보여줘도 그는 별말 없이 기다렸다.“무슨 일 있어?”‘에휴.’반대편에서 변여름은 어쩔 수 없이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혹시 일이 있어야만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는 거야?’그녀는 목소리를 조정하며 말했다.“있어요.”“뭐?”“아빠가 방금 저한테 거액의 돈을 보내줬어요.”변여름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났다.양혁수는 속으로 허 씨 아저씨도 눈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응. 그럼 좋네.”“아빠가 말씀하시길 양혁수 씨가 저한테 꽤 좋은 인상을 받으신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한테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당신을 사로잡으라고 하셨어요. 정말 안 되면 당신의 아기를 낳아도 된다고 하셨어요.”‘컥.’다행히 양혁수는 물을 마시지 않고 있었다.그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며 차마 이름을 붙여 불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말을 골라가면서 해.’변여름은 일부러 양혁수를 괴롭히고 있었다.그녀는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무릎에 턱을 괴며 악랄하고 교활한 눈빛을 띠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오빠, 듣고 있어요?”“...응.”“혹시 무서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말한 거예요. 저는 아빠랑 다르게 원칙이 있어요. 아빠는 돈만 밝히지만 저는 그래도 원칙이 있거든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이제 이 소녀가 점점 더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걸 알아차렸다.“얼마 보내 줬어?”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2억 원 보내 줬어요.”“2억밖에 안 보내 줬어?”양혁수는 눈살을 찌푸렸다.허씨 가문에는 엄청난 재산이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