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원은 양석진이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희미하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가 살이 찐 건지 빠진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저릿함은 그가 분명히 살이 빠졌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했다.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양석진과 그의 일행이 어느새 그녀 앞에 다다라 있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쥔 채 순간 말을 잃었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예전에 본 적 있던 용 국장의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용 국장 역시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고 서른네다섯쯤 되어 보였고 또래들 사이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다.하지만 양석진을 마주하면 그는 어딘가 빛을 잃는 듯했다.그가 먼저 운명 같은 우연이라며 말을 꺼냈다. 대운산을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로 이곳에서 회의가 잡혔고 그 책임자가 다름 아닌 양석진이었다.“양 대표님, 우연의 일치네요. 막 완공된 이 대회장의 첫 번째 사용자가 바로 당신 가족입니다.”양지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최대한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오빠’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대신 직함을 부르며 입을 열었다.“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오늘은 더우니까요. 조금 후에 제가 임원분들을 모시고 천천히 둘러보시게 해드릴게요.”양석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2시에 출발하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좋아요.”양지원은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돌아서 앞장섰다.그 일행은 의외로 조용히 정리되어 있었고 마치 더는 움직이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쉬었다.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홀은 금세 고요해졌다.양지원은 아래층에 홀로 앉아 차를 마셨지만 입안에는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둘러 스쳐 지나갔고 양석진은 그녀에게 단 한 마디를 남겼다.비록 이제는 서로 마주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그녀의 시간과 기억은 여전히 십 년 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그가 모든 것을 그녀를 중심으로
비 오는 날, 검은색 벤틀리 뒷좌석에서.차 안의 어두운 불빛 때문에 남자의 허리춤을 휘감고 있는 여자의 희고 부드러운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간지럽고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시연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튕기면서 눈앞의 사람이 빨리 끝내길 바랐다.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읍!”안시연이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몸짓을 멈추었다.“처음이야?”안시연은 몸을 불태우던 열기가 조금 식은 것 같았다. 잇따라 허전한 기분이 들더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더 단단히 감아 들었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정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그는 여자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긴장 풀어.”차 안의 온도가 급상승했다.정신은 흐릿했지만 이상하게 감각은 예민했다.안시연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더니 어금니를 깨물고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그녀는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만 했다.두 달 전, 그녀는 주지혁의 팔짱을 끼고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석했었다. 연정훈은 성진대학교의 우수 졸업자 겸 학부 특임 교수로서 그 동문 모임에 참석했는데 두 사람에게 선남선녀라며 칭찬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주지혁은 바람을 피워 곧 명문 가문 아가씨와 결혼한다.그리고 그녀는 연정훈의 아래에 누워 그가 순결을 앗아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경인시에서의 연씨 가문은 권력이 대단했다.연정훈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갑자기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정인 그룹을 맡았다.그리고 지금의 그는 경인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번듯해 보이더니 이런 일을 할 때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안시연을 사정없이 괴롭혔다.안시연은 하마터면 그의 차에서 숨이 멎을 뻔해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일이 끝난 후, 그녀는 옷을 꼭 껴안고는 힘이 풀린 채
안시연은 경찰서에 세 시간의 취조를 받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는데, 이때 주지혁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어금니를 깨물다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지혁 씨,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요. 굳이 내 인생을 망칠 생각인가요?”그 8억은 분명 그가 그녀에게 직접 전화해 빼내라고 한 것이다.주지혁은 그녀의 분노를 예상했는지 덤덤하게 말했다.“시연 씨,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면 안 되었어요.”“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안 꺼내면 당신이 어떻게 조이현 씨를 안을 수 있겠어요?”안시연이 비꼬며 말했다.주지혁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이 뻔뻔스럽게 말했다.“나 다음 달에 이현이와 약혼해요. 하지만 난 이현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시연 씨, 3년만 기다려요. 3년 뒤면 내가 이혼하고 꼭 시연 씨와 결혼할게요.”안시연은 헛웃음이 나왔다.“그럼 3년 동안 나는 어떡하라고요.”“외국으로 유학 보내줄게요.”뻔뻔스럽네!명문 가문 출신인 조이현과 결혼은 해야겠고, 또 그 돈으로 안시연을 ‘내연녀’로 만들게 하다니, 어떻게 이런 염치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안시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지만 난 이미 다른 남자와 잤어요.”주지혁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농담은 하지 마요. 나 화나게 만들면 시연 씨에게 좋을 것 없어요.”안시연이 심호흡하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나 찾으러 와요. 내가 시연 씨 외국 보내줄게요.”“꿈 깨요!”주지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시연 씨, 만약 내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시연 씨는 돈의 행방을 모두 찾아내는 것으로 결백을 증명해야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나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8억이면 시연 씨 감옥에서 10년 갇히고도 더 남아요. 시연 씨가 감옥에 들어가면 누가 외할머니를 돌보겠어요?”안시연에게 힘이 남아돌았다면 진작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내가 정말
안시연은 그제야 연정훈 눈빛의 의미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그녀는 빠르게 거울 앞을 지나 옷을 벗고는 욕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다 씻고 나서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욕실 안에는 남성 가운 하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어젯밤 연정훈을 떠올렸는데 그가 여색을 밝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어쩌면 이미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녀는 가운을 입고 문을 열고는 조심스럽게 연정훈을 불러보았다.“연 교수님?”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빠르게 나가 데스크에 전화해 옷을 부탁하려고 했다.침대에 앉아 이제 막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정이슬이 그녀에게 보내준 스크린샷이었다.“시연아, 무슨 일이야? 전민준에게 부탁하러 간 거 아니었어? 왜 싸우게 된 거야? 그 새끼가 단톡방에서 너 꽃뱀이라며 욕하고 있어.”안시연이 단톡방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정말 정이슬의 말대로 전민준은 그녀에게 온갖 욕설과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거짓말에 사람들은 그에게 위로도 건넸다.[걸레 같은 년은 나도 싫어. 그 와중에 보답 없이 부탁하는 것 좀 봐. 퉤!]안시연은 이 보름 동안 불행의 시간을 보냈다.그녀에게 도움을 베푼 사람이 있기는커녕 지금 단톡방에서 또 이런 비난을 받고 있으니, 그녀는 분노가 끓어올랐고, 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 코끝이 찡했다.“옷은 이따가 누가 가져다줄 거야.”맑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그제야 연정훈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뭐야? 왜 소리를 안 내?’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연정훈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느긋하게 말했다.“난 대답했는데 당신이 못 들은 거야.”그 말인즉 자기 탓이 아니라는 뜻이었다.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발목에서 고통이 몰려와 그녀는 작은 신음을 뱉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게 되었다.연정훈
안시연이 얼어붙었다.잠깐 생각하고서야 그의 뜻을 알아챘다.어제는 그녀의 첫날밤이었고 연정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니 그의 뜻은 전에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는지 물어보는 것이었다.안시연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는데 그녀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그녀와 잠자리를 가져본 사람은 연정훈밖에 없었다.주지혁이 바람피우기 전 두 사람의 스킨십은 포옹과 키스에 그쳤고, 잠자리는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그녀는 경험도 없어 이런 얘기가 꺼내질 때마다 어색한 마음이 들곤 했다.연정훈이 또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그녀는 겨우 대답했다.“습관 되지 않아서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사실이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맑은 눈을 가진 그녀였기 때문이다.“넌 참 착한 여자야.”연정훈이 덤덤하게 뱉은 말에 안시연은 입술을 꽉 물었다.방금까지 단톡방에서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받은 불공평한 대우까지 떠오르니 그의 말에 그녀는 왠지 모르게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분명 그녀는 잘못한 게 없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녀를 비난하곤 했다.연정훈이 무심하게 말을 뱉고는 약을 다 바른 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안시연이 서둘러 몸을 뒤로 뺐는데 허벅지 사이로 약간의 고통이 전해졌다.어젯밤의 부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연정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리를 모을 때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포착했다.“다리에도 상처가 있어?”그 얘기를 듣자, 안시연은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그녀의 눈가, 그리고 코끝이 빨개졌다.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는데 마치 비바람 속에 피어난 장미꽃 한 송이 같았다.연정훈이 한 발짝 다가서자, 안시연은 몸을 더 뒤로 뺐다.“안시연.”연정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녀는 긴장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뒤에 있는 침대 시트를 꽉 잡았다.연정
안시연은 테이블 위에 누워있었는데 마침 주인을 기다리는 정교한 선물 같았다.연정훈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는 달콤한 입술을 맛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여자가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풀었다.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가는 허리에 달라붙어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사실 아까 병풍을 사이 두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부터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탐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때 안시연은 전민준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연정훈은 목덜미를 물어뜯자, 안시연은 온몸에 전율이 퍼지는 것 같았다.점점 거칠어지는 남자의 숨소리와 손길, 그리고 자연스럽게 버클을 푸는 남자를 보며 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어두운 불빛 아래 뭔가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젖은 눈을 크게 뜨고는 빛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의 형체를 똑똑히 보려고 했다.연정훈 손에 낀 반지였다.그것도 약지에 끼어 있었다.순간 뜨겁게 달아오르던 안시연의 몸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대충 세어보니 연정훈도 거의 서른 되는 나이였다.명문 가문의 후계자라면 이 나이에 진작 결혼했을 텐데 말이다.“집중해.”남자는 여자의 귓불을 깨물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를 꽉 잡아 벌리려고 하자 안시연이 갑자기 몸을 뒤로 빼며 남자를 밀어냈다.“안 돼요!”연정훈의 새까만 눈동자는 욕망으로 타올랐다.그는 안시연이 그에게 도움을 부탁할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 조건을 내세울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그는 여자의 발목을 잡았다. 물론 상처 난 부위를 피해 잡았다.그리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힘으로 제압했다.안시연이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의 입술을 피했다.연정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숨을 헐떡이고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왜 그래?”“결혼하셨잖아요!”안시연이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주지혁이 바람피워서 마음고생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내연녀’라는 존재를 싫어했다. 그래서 절대 다른 사람의 결혼에 끼어들 생
호텔 로비에서.연정훈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샤워를 마쳤고 다른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였다.김세연이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임유정이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잡지 속의 주얼리를 가리키며 김세연과 얘기를 나눴다.연정훈이 걸어오자, 임유정은 바로 그를 발견했다.“정훈 씨.”그 말에 김세연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로 샤워한 사실을 알아차렸다.하지만 아들이 체면도 지켜줘야 했으니, 김세연은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왜 이제야 내려와? 나랑 유정이가 너 거의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덤덤한 얼굴로 소파 위에 앉고는 말했다.“데스크에서 약혼녀가 왔다고 하던데요. 약혼녀와의 첫 만남이니까 제대로 꾸미고 내려와야죠.”김세연이 의아한 얼굴을 보이고는 임유정에게 고개를 돌려다.임유정의 얼굴에 홍조가 띠더니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약혼녀? 데스크가 그래?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김세연은 그녀의 연기를 간파하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연정훈을 보며 말했다.“데스크에서도 너랑 유정이가 선남선녀로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이런데도 기회 안 잡고 뭐 해?”임유정의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그녀는 김세연의 팔을 끌어안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김세연이 그녀의 팔을 툭툭 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연정훈을 흘겨봤다.연정훈은 기분이 좋았는데도 임유정이 연기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그는 김세연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너 집에 안 들어온 지 몇 달이나 됐잖아. 전화해도 계속 건성건성 대답하고. 유정이랑 밥 먹다가 네가 이곳에 묵고 있다는 걸 알았어. 아니면 엄마가 아들 얼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즘 바빠서요.”“핑계는.”김세연은 아들 얼굴 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 임유정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도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대신 네 엄마에게 안부도 물어
안시연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주지혁에게 준 집 열쇠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탁’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멀지 않은 곳에 양복과 구두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주지혁이었다.남자는 천생 배우라더니 주지혁도 다를 것 없었다.잘생긴 그는 평소 안시연에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지금 음침한 얼굴빛을 드러내 안시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안시연이 그를 쫓아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전민준 만나러 갔어요?”그는 분명 단톡방 내용을 봤을 것이다.안시연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와 더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누굴 만나든 당신과 상관없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죠? 열쇠는 여기 두고요.”불같이 화를 내는 안시연을 보더니 주지혁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자기에게도 이렇게 모질게 구는데 전민준 같은 인간에게 자존심을 굽혔을 리가 있을까?“시연 씨 일이니까 당연히 신경 써야죠.”안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주지혁이 한발 앞서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한쪽을 버리고는 여세를 몰아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거 놔요!”안시연이 소리를 질렀다.주지혁은 강세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소파에 눕혔다.“출국하는 거, 고민해 봤어요?”안시연이 발버둥 치더니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요!”주지혁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는데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빨갛게 물든 그녀의 입술을 발견해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다른 사람과 키스했어요?”안시연이 멈칫했다.곧이어 복수했다는 쾌감이 들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네, 키스했을 뿐만 아니라 잠자리도 가졌죠.”주지혁은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하지만 고집스러운 안시연의 얼굴을 보며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설득했다.‘나의 시연 씨는 절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자신의 추측에 힘을 실으려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시연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안시연은
양지원은 양석진이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희미하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가 살이 찐 건지 빠진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저릿함은 그가 분명히 살이 빠졌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했다.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양석진과 그의 일행이 어느새 그녀 앞에 다다라 있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쥔 채 순간 말을 잃었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예전에 본 적 있던 용 국장의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용 국장 역시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고 서른네다섯쯤 되어 보였고 또래들 사이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다.하지만 양석진을 마주하면 그는 어딘가 빛을 잃는 듯했다.그가 먼저 운명 같은 우연이라며 말을 꺼냈다. 대운산을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로 이곳에서 회의가 잡혔고 그 책임자가 다름 아닌 양석진이었다.“양 대표님, 우연의 일치네요. 막 완공된 이 대회장의 첫 번째 사용자가 바로 당신 가족입니다.”양지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최대한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오빠’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대신 직함을 부르며 입을 열었다.“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오늘은 더우니까요. 조금 후에 제가 임원분들을 모시고 천천히 둘러보시게 해드릴게요.”양석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2시에 출발하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좋아요.”양지원은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돌아서 앞장섰다.그 일행은 의외로 조용히 정리되어 있었고 마치 더는 움직이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쉬었다.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홀은 금세 고요해졌다.양지원은 아래층에 홀로 앉아 차를 마셨지만 입안에는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둘러 스쳐 지나갔고 양석진은 그녀에게 단 한 마디를 남겼다.비록 이제는 서로 마주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그녀의 시간과 기억은 여전히 십 년 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그가 모든 것을 그녀를 중심으로
[청년기]“내일 돌아오는 거예요?”대운산으로 향하던 길 양지원은 집에 있는 양혁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감기에 걸린 지 이틀째였다.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었고 그나마 양혁수와 이야기하는 순간만이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주었다.“가능하면 돌아가려고 해.”몇몇 선생님들의 불만이 떠오르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집에서는 좀 얌전히 지낼 수 없을까? 너 때문에 맨날 선생님 앞에서 얼굴을 못 들겠어.”한창 말썽꾸러기 시절을 지나 양혁수는 이제 누구에게도 귀여움을 받지 못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몇몇 선생님이 함께 교육을 맡으면 그는 종종 머리를 치켜들고 반항했다.“저 정도면 엄청 얌전한 편 아닌가요? 같이 농구도 하잖아요.”양지원은 눈동자를 굴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무더운 여름날 예민한 성격의 선생님들이 누가 그런 말썽꾸러기와 농구장에 나가고 싶겠는지 의문스러웠다.“알겠어. 어쨌든 조금만 얌전히 있어 줘.”“알겠어요. 엄마는 밖에서 몸조심하고 집에 오시면 제가 생일 챙겨드릴게요.”양지원은 말끝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 작은 녀석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통화가 끝나자 차의 속도도 서서히 줄어들었고 비서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양 대표님, 먼저 접대소에서 잠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용 국장 쪽 점검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대운산 관광 프로젝트는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그동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위쪽에서 이 지역을 외교 관련 주요 회의 장소로 활용하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그건 분명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행궁’을 조성하려면 결국 관계자들의 사전 점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양지원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일주일 전 이곳에 도착해 현장을 둘러보며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점검했다.최근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에어컨이 있는 곳과 뜨거운 태양 아래를 오가다 보니 체력이 많이 지쳐갔다.비서는 그녀의 얼굴 색
양지원은 화려한 의상에 휩싸인 채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그녀는 오빠의 팔에 살며시 팔짱을 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우리 오빠는 당연히 멋져요.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했는걸요.”진병수는 이마를 짚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양석진은 길을 걸으며 양지원에게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지만 현장에 도착하자 그녀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두 세트를 함께 찍기로 했다.예복을 입고 양지원과 함께 거울 앞에 서자 주위에서 감탄의 말들이 흘러나왔다.그는 마음속에서 불안이 스멀거리자 양창수의 애매한 미소를 피하려 애써 시선을 돌렸다.결혼사진을 찍는 자리였지만 양지원에게는 가족사진을 남기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예쁜 옷을 입었으니 기념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었고 중간에 진병수에게도 함께 찍자며 부탁했다.“자,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해 주면 좋겠네요.”사진사가 말하자 양석진의 눈빛이 흔들렸고 양지원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저기요. 이분은 제 오빠예요.”사진사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아. 깜빡했네요.”양창수가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키스하는 게 뭐 어때? 얼굴에 하는 거면 괜찮아.”진병수도 거들었다.“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안 돼. 그건 너무 이상해.”양지원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손명우가 조용히 제안했다.“카메라 각도를 조절해서 찍으면 돼.”양지원과 양석진은 동시에 외쳤다.“안돼.”순간 현장은 조용해졌다.“...”양지원은 웃으며 옆에 앉은 오빠를 바라보았다.“오빠, 우리 둘 진짜 잘 맞는 것 같아요.”그녀는 그의 팔을 감싸며 바르게 자세를 고쳤다.“오빠, 우리 사진 한 장 찍어요. 처음 오빠를 만났을 때도 가족사진 찍느라 소파에 나란히 앉았잖아요.”양석진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감정을 억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맞아.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지.”두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고 찰칵하는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이 고정되었다.수많은 사진 중 그 사진은 양지원이 가장 아끼는 사진이 되었
배가 콕콕 쑤시는 걸 제외하면 양지원은 꽤 신나게 놀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미소가 가득했다.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양석진이 양창수를 뒤뜰로 불렀고 늦여름이라 뒤뜰에는 매미 소리가 귀를 울렸다. 양창수는 계단에 뚝 멈춰 섰다가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뒤뜰에서 양석진이 말했다.“지원이 이제 어리지 않으니 지원이 앞에서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지 말았으면 해.”“내가 뭘 또 아무 말이나 했다고 그래요?”양석진은 시시콜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너 자꾸 까불면 바로 입대시켜 버린다?”양창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마음대로 하세요.”양창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위층을 슬쩍 보다가 양석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내가 헛소리했다 치죠.”그리고 몸을 휙 돌려 자리를 떠났다.양석진은 뒤뜰에 홀로 남아 사라지는 양창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의미심장한 양창수의 시선은 마치 오래된 전등처럼 깜빡깜빡하며 양석진의 마음을 괴롭혔다.양석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러다가 위층에서 양지원이 저를 부르자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양석진은 그날 밤 또 불면증에 시달렸다. 하룻밤 내내 뜬눈으로 지새우는 건 양석진에게 있어 흔한 일이 되었다.어느 날부터인지, 양석진은 감히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할 감정이 생겼고 아무리 억눌러도 아무도 없는 새벽이 되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양석진도 이게 무슨 감정인지, 본인이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그저 양지원만 떠오를 뿐이었다.어쩌면 양지원도 나이가 좀 더 들고, 각자 연인이 생기면 이런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를 양석진은 늘 기도했고 한편으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날 뒤로, 양석진은 며칠 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양지원의 걱정을 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집을 비우는 것을 택했다.그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양석진은 바로 진병수의 연락을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