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연약해 보이는 이 여인은 꽤 큰 힘으로 안시연을 퍽 밀었다.안시연은 약간 휘청이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상대방이 안시연에게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양혁수가 나서서 앞을 가로막았다.젊은 남성의 듬직하고 힘 있는 뒷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완전히 가렸다. 너무 가까이 선 탓에 상대의 은은한 남성 향수 향기가 풍겨오자, 그녀는 덫에 걸린 토끼처럼 화들짝 놀라 얼른 뒤로 두 걸음 더 물러섰다.이어 양혁수의 비웃는 듯한 말이 들려왔다.“내가 누군지 당신과 무슨 상관이야.”“혁수야...”“착한 척 오지네. 낸데 먹힐 줄 알았어?”여인은 목소리가 점점 꺼져 들어갔지만 그래도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혁수야, 난 그래도 네 웃어른이야!”“가지가지 한다, 정말. 요즘 세대는 스폰녀도 어른 행세를 할 수 있었나?”“너!”“빨리 꺼져요, 당신 얼굴만 봐도 짜증 나는데.”안시연은 살벌한 분위기에 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입이 독하네. 아까 건드리지 않아서 다행이야...’그 여자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던 것 같았지만 끝내 참고 입을 다물었다.안시연이 고개를 내밀고 양혁수의 등 뒤에서 나와 서자, 상대방 증오의 눈빛이 마침 그녀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마치 방금 양혁수에게 당한 굴욕은 모두 그녀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그녀가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그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양혁수의 농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우리 집사람이 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안시연은 소름이 끼쳤는지 목을 움츠렸다.그녀는 가방을 메고 두 손을 몸 앞에 공손히 모아 다시 한번 사과했다.“양혁수 씨, 오늘 정말 죄송합니다.”양혁수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태도가 산만했다.“걱정 마, 연정훈에게 고자질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너희 둘 사이 감정에 영향이 없을 거야.”“...”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오자, 그녀는 양혁수를 한 눈 쳐다보았다.양혁수는 그녀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안시연은 들어가고 나서
오성호가 깜짝 놀라 물었다.“당신 혁수 만나러 갔어?”소현정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우리 엄마가 아프셔서 내가 병문안을 갔는데 마침 병원에서 혁수를 만났지 뭐예요. 어느 미친년에게 교통사고를 당해서 머리에 온통 피범벅이라 내가 몇 마디 관심해 줬는데 조금도 고마워할지언정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단 말이에요!”“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당신이 어떤 신분이고, 걔가 어떤 신분인데 당신에게 좋은 태도로 대할 수 있겠어?”소현정은 듣자마자 더욱 큰소리로 엉엉 울어댔다.오성호는 화가 치밀어 언성을 높여 말했다.“당신 또 이렇게 함부로 굴어봐! 고의로 그에게 접근했다가 일이 발각되면 아들이 양씨 가문을 계승할 생각은 하지도 마!”소현정은 흐느끼며 울부짖었다.“상속 안 하면 안 했지, 지금 상황이 이런데 돈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내 아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데!”“우리 아들이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럼, 지원이는? 지원이는 나와 쟤 딸을 얼굴도 본 적이 없다고!”오성호는 얼굴이 극도의 분노로 새파랗게 질려있었다.“애초에 당신을 위해 두 아이를 바꿨는데, 지금 또 이 바보짓을 한다고?! 당신은 정말 내가 죄책감이 없다고 생각해? 지원은 나의 초혼 아내야!”이 말을 듣자, 소현정은 울음을 그쳤다.그녀를 위한 거고 뭐고, 이 따위 말은 모두 그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양지원의 아이는 딸로 태어났는데 해산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해 자궁을 뗐고, 오성호는 또 일편단심으로 아들을 원했기 때문에 아이를 바꾸는 일이 생겼다.하지만 그녀는 이런 말을 당연히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었다.“당... 당연히 속이 타서 그랬죠. 혁수를 못 본 지 1년이 넘었는데.”그녀가 아직 제정신인 것을 보고 오성호는 태도를 누그러뜨려 소파에 털썩 앉았다.“다시는 걔 앞에서 얼씬거리지 마, 뜻밖의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반년만 더 있으면 어르신께서 수혁이를 이사회에 들어오게 할 생각이야.”“정말?”소현정은 놀라서 되물었다.
안시연은 양혁수의 연락처를 몰라 목걸이를 돌려줄 방법이 없었다.오후 내내 쉴 새 없이 바빴던 그녀는 황급히 집에 돌아가 씻고 정리하고는 이 일을 금방 잊어버렸다.연정훈이 직접 차를 몰고 집 아래까지 데리러 왔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갈 때 마침 황혼 무렵이었고, 저녁놀의 여운이 하늘에 아름답게 걸려 있어 마치 황금 비단을 수놓은 것 같았다. 남자는 주름 한결 안 잡힌 말끔한 수트를 차려입고 차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남다른 고귀한 분위기를 자랑했다.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달려갔다.“운전기사는요?”연정훈은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았다.그녀는 흰색 슬림핏 롱드레스에 검은색 가디건을 걸친 채 온몸의 주얼리라고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보석 반지 하나뿐이었으나 전체적으로 매우 고급지고 우아하면서도 속되지 않았다.“내가 직접 운전한다면, 싫어?”안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연 교수님에게 이런 궂은일을 시킨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불편하네요.”연정훈은 그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그러자 그녀는 두 손을 등 뒤로 한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교활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연정훈이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한 것을 그녀가 눈치 빠르게 예측했기 때문이다.그는 입가를 살짝 올리며 조금도 어색한 기색 없이 시선을 그녀의 뒤로 향했다.“뭘 들고 있어?”안시연은 쑥스러워하며 반대로 물음을 그에게 던졌다.“저녁 드셨어요?”“아직 안 먹었는데.”“배고프실까 봐 디저트를 조금 싸 왔어요.”안시연은 이렇게 말하며 뒤에 숨긴 물건을 꺼냈는데 아기자기하고 네모난 도시락이었다.연정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그녀에게 잠시 후 참석할 저녁 연회에 배불리 먹어도 남을 만큼 한 음식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하지만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망울에 담겨있는 진심을 보며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고마워. 마침 배고팠어.”안시연은 흐뭇했다.차에 오르기 전,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도시락 뚜껑을 열고 두 손
“안시연.”“아니, 이름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너랑 무슨 사이냐고.”이승우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모두가 궁금해하며 연정훈의 대답을 기다렸다.한우빈이 건넨 술잔을 받아 든 연정훈은 안시연을 한 눈 쳐다보며 그에게 되물었다.“네 생각엔?”“생각할 필요가 있어? 당연히 여자 친구 아냐?”이승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가득한 태도로 말했다.“우리 연 대표님은 여성분들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그런 인간 아니고 진지한 분이시지.”안시연은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감당하기 어려워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연정훈은 그때 구혜은 등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한 적이 있지만, 오늘 이 사람들은 달랐다. 이들은 모두 그와 알던 사이였고 이후에도 계속 접점이 생길 사람들이었다.‘설마 그러시진 않을 거야...’“내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 앞으로 그런 쓸데없는 말은 삼가.”연정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안시연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주위가 금방 떠들썩해졌고 벌써 그녀가 어디에서 일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었다.그녀는 놀라움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이미 상대방에게 대답하고 있었다.“정인 과학기술이요.”“진짜 여자 친구 맞네요. 어느 정도로 아끼고 숨겨두고 계셨으면...”상대방이 웃으며 농담했다.안시연은 수줍은 기색이 드러났고 귓가의 온도가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하얀색 큰 텐트 아래로 천천히 걸어갔다.그동안 그의 손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온도는 그녀의 초조한 마음을 따뜻하게 달래주었다.텐트는 상당히 컸고 달빛만 살짝 가렸을 뿐 사방이 뚫려 있었으며 어두운 불빛이 몽롱하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안시연은 미리 준비한 선물을 한우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한 대표님, 개업 축하합니다.”“감사하네요.”그때 누가 걸어와 연정훈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안시연은 그의 곁에 조용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우빈은 금방 눈치채고 매너 있게 그녀더러 여자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한우빈은 사람들을 이끌고 와이너리 내부로 들어가 2층 플랫폼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안시연은 물배만 가득 채우고 서둘러 화장실에 갔다.화장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안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잘난 척 쩐다, 진짜. 우리랑 놀기 싫다고?”“설마 연 대표님이 말한 여자 친구가 진짜 서로 사랑하는 여자 친구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이 말을 한 여인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승우 씨는 나랑 자고 난 다음날에 내 이름도 모르면서 친구를 만났을 땐 그래도 여자 친구라고 불렀잖아.”문밖에서 듣고 있던 안시연은 누군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은 것만 같았다.하룻밤 사이에 쌓아두었던 기쁨이 한순간 무자비하게 무너져버렸다.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여인들이 나오기 전에 위층으로 올라갔다.넋 나간 사람처럼 화장실에 다녀온 그녀는 싱크대 가장자리를 짚고 찬물을 얼굴에 두 번 끼얹었다.그녀는 줄곧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자신이 연정훈을 좋아한다는 마음에 확신하고 연정훈이 그녀를 아무 조건 없이 아껴준 후부터는 판단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정훈은 많은 사람 앞에서 그녀를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대범하게 인정했는데, 그녀는 뜻밖에도 이 말을 진짜로 여겼다.연정훈 같은 사람들은 일을 할 때 항상 체면이 일 순위라는 사실을 그녀는 잠깐 잊고 있었다.‘여자 친구’라는 네 글자는 그와 침대 위에서 있었던 일들을 합리화하는 수단일 뿐이었다.찬바람이 복도에서 불어 들어오자, 그녀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머릿속이 점차 맑아졌고 그녀는 자신의 겉모습을 정리한 뒤 플랫폼으로 돌아갔다.플랫폼 중앙에는 연정훈 등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테이블 한 바퀴가 모두 남자인 가운데 유일한 여자인 양민지가 끼어있었다.그녀는 담담하고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고 연정훈 등이 그녀의 관점을 진지하게 듣고 분석하고 있음을 쉽게 보아낼 수 있었다.안시연은
안시연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이승우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이승우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날 못 믿겠어요?”“그게 아니라...”“이렇게 해보죠. 내가 원리를 좀 설명해 줄게요.”안시연은 “...” 이승우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남자가 당신을 좋아한다면, 당신이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걸 질투하지 않겠어요?”안시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승우는 몸을 바로 세우고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가만히 있어요.”안시연은 의아해했다.하지만 사람들이 많은 공개된 장소였기에 이승우가 함부로 행동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고 그녀는 정말 가만히 있었다.갑자기!이승우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았고,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뺨에 스쳐 지나간 감촉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이승우는 재빨리 그녀를 놓아주었지만, 그녀는 얼굴이 붉어져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근처에 있는 연정훈이 생각나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승우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움직이지 마요! 절대 움직이면 안 돼요! 움직이면 연정훈의 마음을 얻을 수 없어요.”안시연은 “...”그녀는 순간 굳어버렸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승우가 웃었다.“연정훈이 그렇게 좋아요?”안시연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고, 고개를 숙였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승우 씨, 뭐 하시는 거예요!”이승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못 알아보겠어요? 연정훈이 질투하는지 시험해 보는 거죠.”안시연의 시선은 완전히 그에게 가려져 연정훈의 반응을 전혀 볼 수 없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연정훈이 있는 쪽을 보려 했다.하지만 이승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어이, 조급해하지 마요. 조금만 참아요.”안시연은 그의 말에 더욱 당황스러워졌다.멀지 않은 곳에서 부승원 등은 이쪽 상황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그들의 시선에서 보면 이승우가 거의 안시연에게 입을 맞춘 것처럼
이승우는 셋째 이야기를 하려다 일부러 오래 멈췄다.안시연은 호기심이 생겨 그가 무슨 말을 더 할지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그녀의 순진한 표정에 이승우는 여러 번 웃음을 참아야 했다.그녀가 조급해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셋째, 그가 끝까지 아무 말 없이 모르는 척하다가 집에 가서 침대에서 당신을 마음껏 굴리고 나서, 다 끝나고 나서야 무심한 듯이 내가 당신한테 뭐라고 했는지 물어본다면, 당신은 그를 봐주지 말아야 해요.”안시연은 그가 갑자기 그런 얘기를 꺼낼 줄 몰라 당황스러워 손을 꽉 쥐었지만, 그래도 계속 듣고 싶어 참았다.이승우는 잠시 멈췄다가 또박또박 말했다. “봐주지 마요.”안시연의 얼굴이 완전히 붉어졌다.이승우가 물러섰다.그녀의 얼굴이 아침노을처럼 붉어진 것을 보고 그는 또 장난스럽게 다가갔다.안시연은 그가 또 얼굴을 비비려나 싶어 얼른 얼굴을 가리고 한 걸음 물러났다.이승우는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얼굴을 비비고 싶어 하지도 않을 텐데.”안시연은 마침내 연정훈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아까와 같은 모습이었다.그녀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고, 이승우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장난치세요.”이승우도 연정훈 쪽을 한번 보았다.그는 다시 안시연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서서 재빨리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연기하는 거예요, 긴장하지 마요.”“...”그녀는 약간 무력한 듯 다시 둘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더 이상 저를 놀리지 마세요.”이승우는 웃으며 샴페인 잔을 들어 반쯤 마시고는 여유롭고 멋진 자세를 취했다.농담이라고.연정훈이 마음이 멀었다고 해서 자기까지 눈이 멀 순 없지.실내 분위기가 묘해지고 있을 때, 갑자기 테라스의 유리문이 열렸다.쾅!꽤 큰 소리가 났다.키가 큰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그녀는 20대 초반으로 보였고, 살짝 웨이브가 있는 중간 길이의 머리를 높게 묶었다. 순수한 검은색 청바지 반바지에 흰색
순간 안시연은 상대방의 선악을 판단하기 어려워 무의식적으로 연정훈의 손목을 잡았다.하지만 연정훈은 아무 내색 없이 손을 빼냈다.그녀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다음 순간, 남자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표정을 살펴보았으나 기분 좋아 보이진 않았다.부승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얼굴로 임유진은 불문하고...”그녀는 양민아를 흘깃 보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민아 언니도 당신 신발 끈 묶어주기도 버거울 거예요.”이 말은 겉으로는 칭찬 같았지만, 오히려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하지만 양민아는 침착하게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옆에 있던 이승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민아가 시연 씨 신발 끈을 묶어준다고? 넌 뭘 하고 있는 거야?”“나? 난 비교할 필요가 없지.”부승희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난 정훈 오빠 아내가 되고 싶지도 않고, 연정훈 오빠의 몸에 욕심내지도 않아. 내가 뭘 비교한다는 거야?”그녀는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양민아를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요, 민아 언니?”공기 중에는 화약 냄새가 가득했다.연정훈의 품에 안겨있던 안시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긴장시킨 건 연정훈의 침묵이었다.테이블 위의 설전을 그는 한마디도 듣지 않은 것 같았다.그녀가 몇 번이나 그의 품 안에서 움직이려 했지만, 그는 더 큰 힘으로 그녀를 붙잡았다.맞은편에서 양민아가 말했다. “네 승우 오빠도 시연 씨를 많이 좋아하더라.”안시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그녀는 재빨리 이해했다. 이 아가씨가 십중팔구 이승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과연 부승희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가 이내 고개를 꼿꼿이 들며 말했다. “그가 좋아한다고 뭐해요? 안시연 씨의 눈은 크고 반짝이는데,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멀쩡한 눈을 가졌는데 연정훈 오빠 놔두고 그를 택하겠어요?”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완화하려는 듯 안시연에게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