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은 차가운 타일 바닥 위에서 안시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마에 핏줄이 뛰는 것을 느꼈다.그러나 몸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 문이 열렸다. 안시연은 끈이 달린 잠옷 위에 실크 가디건을 걸치고 나타났다. 안시연은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의사를 불렀어요.” 소문이 나길 바랐다.연정훈은 얼굴이 굳어지며 눈을 감고 말했다. “나를 일으켜 줘.”안시연은 연정훈으로부터 받은 고통 때문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연 대표님, 그냥 앉아 계세요. 이런 상황에서 움직이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대요.”그 말이 끝나자 안시연은 문을 덜컥 닫았다.연정훈은 바닥에 앉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안시연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밖에서 안시연은 자신이 한 행동에 뿌듯해하며 그 순간을 되새기며 기분이 좋았다. 연정훈이 찬 바닥에 앉아 떨면서 정신을 차리기를 바랐다. 방을 나가려던 안시연은 갑자기 하체에서 무언가 흐르는 감각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안시연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었다. 연정훈을 다시 한번 속으로 저주했다. 옆방에서 서둘러 정리한 후 방을 나서자마자 벨이 울렸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시연 씨!”부승희의 목소리가 들렸다.안시연은 깜짝 놀라며 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 때 약간 긴장했다. 비록 연정훈의 수치스러운 상황이 안시연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다.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안시연은 깜짝 놀랐다. 문 밖에는 부승희가 손을 주머니에 넣고 멋지게 서 있었다. 그 뒤에는 이승우, 부승원, 한우빈이 일렬로 서 있었다. 연정훈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그 옆에는 안경을 낀 젊은 남자가 하얀 가운을 입고 서 있었다.이승우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안시연은 놀랐다. 이 늦은 밤에 어떻게 그들이 이렇게 모두
거실에서.연정훈은 직사각형 테이블에 앉아 차가운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나왔고, 이승우가 친절하게 도와주겠다고 나서자 거절했다. “난 괜찮아. 너희 없어도 돼.”연정훈은 비꼬듯 말했다.이승우는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율건을 밀어내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왜 의사까지 밀어내냐? 율 박사는 최고의 전문가인데도 믿지 못하겠어?”율건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마른기침하며 말했다.“연 대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부승원이 말했다.“문제가 있다면 빨리 치료해야지.”한우빈도 이어서 말했다.“우리는 너와 가족 같은 사람이야. 다들 소문내지 않을 거야.”연정훈은 답이 없었고 그저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안시연은 끝에 서서 이들이 연정훈을 궁지로 몰아넣는 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그러다가 갑자기 부승희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안시연을 율건 앞으로 밀어붙였다. “율 박사님, 먼저 환자를 쉬게 하고 보호자가 상황을 설명하게 하세요.”안시연은 당황했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모든 사람의 눈이 커졌다.“맞아요. 여기 보호자가 있잖아요?”이승우의 입꼬리는 내려가지 못했다. “어서 보호자에게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라고 하세요!”안시연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했지만, 이미 자리에 앉혀진 상태였다.말하려는 순간에 부승희가 잠시 기다리라며 부엌에서 씻어 놓은 딸기 한 접시를 들고 와서 손을 든 채로 말했다“말씀해도 좋습니다.”부승원과 다른 사람들이 차례로 앉았다.안시연은 당황해서 머뭇거렸다.안시연은 단순히 연정훈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 자신이 나설 생각은 없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잠깐 바라보았다.연정훈은 분노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고 안시연이 자신을 바라보자, 콧방귀를 끼며 턱을 쳐들었다. “말해 봐, 목격자.”안시연은 침묵했다.“…”안시연은 이를 악물고 자세를 곧추세웠다.그런 것쯤은 말하면 된다. “율 박사님, 질문해 주세요.”율건은 종이
율건은 안시연이 고의로 연정훈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을 알아채고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음을 확신했다.율건은 웃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평소에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왜 쓰러지셨나요?”안시연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대답했다.“정훈 씨가 열이 나서 방금 주사 맞았어요.”이승우가 즉시 말을 받았다.“열이 났는데도 쉬지 않았다고요?”안시연은 당황했다.“…”안시연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눈을 크게 떴다.“정훈 씨가 스스로 나서신 거예요!”모두가 감탄했다.“오!”안시연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연정훈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갑자기 위장이 소란을 피웠다.꼬르륵하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모두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율건은 의사라는 신분을 방패 삼아 대담하게 물었다. “대표님, 공복 상태에서 관계를 하신 건가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안시연은 그 죽을 생각하면 더욱 화가 났다. 안시연이 힘겹게 연정훈을 집으로 데려와 죽까지 끓여 주었는데 연정훈은 먹지도 않고 괴롭히기만 했다.안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정훈 씨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율건은 눈썹을 추켜세웠다.부승희는 마침내 말을 꺼낼 기회를 잡았다. “이건 너무하네요. 그래도 뭐라도 먹였어야죠.”부승희의 직설적인 말에 안시연은 당황하여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부승원이 말했다.“이러면 기절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한우빈이 이어서 말했다.“기계라도 이 정도면 고장 날 텐데요.”이승우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안시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시연 씨, 당신을 만나기 전엔 우리 대표님 이렇게 나약하지 않았어요. 운동도 꾸준히 하고 몸이 정말 건강했거든요!”부승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안시연의 허리에 손을 대며 장난쳤다.“이 시간에 이렇게 입고 환자 곁에 있어도 괜찮나요?”안시연은 부승희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놀랐다.“승희 씨!”“괜찮아요. 다 여자잖아요.”부승희는 안시연에게
율건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안시연도 덩달아 긴장한 듯 몸을 움츠렸고 결국 부승희가 먼저 정적을 깨면서 물었다.“왜 그러세요? 임신했어요?”그 순간, 안시연은 연정훈과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쳤고 지난 한 달 동안 밤낮없이 사랑을 나눴던 것이 떠올라 머릿속이 하얘졌다.‘정훈 씨가 매번 피임을 한 걸로 기억하는데, 설마...’그녀는 오늘 밤 그의 과감했던 행동 때문이었는지 그동안의 위험했던 순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서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그러나 연정훈은 괜한 걱정을 하는 안시연을 보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오늘 밤을 제외하고는 위험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저렇게 걱정이 가득한 표정인 거야!’율건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뜸을 들였고 곧이어 이승우를 포함한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이때 참다못한 이승우가 율건을 재촉하기 시작했다.“율 박사님, 빨리 말해봐요!”율건은 가볍게 기침을 내뱉고는 천천히 말했다.“아가씨의 맥박이...”안시연은 긴장한 나머지 두 손을 꽉 쥐었다.“매우 건강합니다.”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시연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연정훈은 화를 참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으며, 이승우는 대뜸 언성을 높였다.“그럼, 왜 한숨을 내쉰 거죠?”“사실은 아까 승희 아가씨가 했던 말이 일리가 있는 말이거든요.”“그게 무슨 뜻이죠?”“시연 아가씨의 맥박을 체크해보니 확실히 보양을 많이 한 것 같네요.”아직도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안시연은 그의 한마디에 다급하게 손을 뺐다.“율 박사님, 전문가가 맞으세요?”이에 이승우가 그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왜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거죠? 우리 율 박사가 20년 동안 남녀 사이만 연구했다고요.”그러나 안시연은 아직 20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율건이 20년 동안 그 방면을 연구했다는 이승우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에이, 거짓말이요?”이때 부승희가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정훈 오빠가 시연 씨의 기를 보충해 주려다가 기절한 거
연정훈은 안시연이 율건과 대화하는 동안 계속 그녀를 주시했다.그녀는 계속 손을 등 뒤에 놓고 부자연스럽게 입술을 깨물면서 눈꺼풀까지 떨었다.연정훈은 율건이 안시연에게 친절함을 넘어 상냥한 태도를 보이자, 단번에 그가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이때, 심상치 않음을 느낀 부승원이 윤건을 잡아끌었고, 안시연은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약국에서 피임약을 배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사람들이 다 가자, 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연정훈은 자기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는 안시연을 보면서 온순했던 첫 만남이 떠올라 화가 났지만, 다 큰 남자가 여자를 혼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다른 사람을 만나도록 내쫓는 건 더욱 말이 안 되었기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얼마 뒤, 현관문 벨 소리에 연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고 부승희가 주문한 음식과 의문의 약봉지를 보고는 곧장 문을 닫고 방 쪽을 응시했다.한편, 안시연은 기진맥진해서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잠이 들 뻔하다가 갑자기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곧이어 연정훈은 약을 그녀의 손 옆에 버리고 나갔다.그의 행동에 상처를 받은 안시연이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방 안에 있던 주전자에 물을 끓이면서 약봉지를 뜯었다.연정훈도 자기가 저지른 일에 그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현실에 거실을 나온 이후로 기분이 좋지 않았고 약봉지를 뜯는 소리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그녀는 약을 다 먹은 후, 오늘 밤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다가 방을 정리하고 문 앞에 서서 연정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빨리 음식 먹어요. 당신이 또 쓰러지면 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연정훈이 아무 대답이 없자, 안시연은 또다시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다시는 연정훈 때문에 울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그녀였지만, 조용한 방 안에 누워 조금 전 일들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얼마나 지났을까, 연정훈이 방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뒤에서 감쌌고, 그녀는 눈물을
연정훈은 자기한테서 받은 위자료로 혼수 준비를 하겠다는 안시연의 한마디에 화가 치밀어 올라 밤잠을 설쳤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는 텅 빈 침실에 앉아 있다가 탁자 위에 놓인 아침밥을 보고 내심 기뻐했지만, 어제 먹다 남은 음식을 데운 것임에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이때, 방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나더니 진수빈이 들어왔다.“진 비서가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아가씨께서 비밀번호를 알려주면서 대표님을 뵈러 올라가라고 하셨어요.”연정훈의 안색이 급격히 수그러들었다.“그녀가 진 비서한테 올라가라고 했다고?”“네! 조금 전 우연히 아가씨를 만났는데 출근 준비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대표님을 걱정하시더라고요.”진수빈은 계속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꺼냈다.“대표님, 오늘...”“금방 준비하고 내려갈 테니까 아래에서 기다려.”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면서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오늘 하루는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시연 아가씨도 점심에 돌아와서 밥을 차려주겠다고 하셨거든요.”연정훈은 어젯밤 자기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가 손수 점심을 차려주러 오겠다고 했다니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진수빈은 그의 마음이 조금 움직인 것을 눈치채고는 한마디 덧붙였다.“대표님께서 검토하실 자료들은 제가 서재에 놓을 테니 괜찮아지시면 보세요.”연정훈은 진수빈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고, 그녀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정인 과학기술.아침 일찍 도착한 양혁수는 안시연이 오기만을 기다렸고, 그녀는 어젯밤 일로 어색한 나머지 그를 보자마자 두피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이때, 양혁수가 그녀에게 다가오면서 한마디 했다.“장난 아니던데요?”안시연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진정시킨 후, 오는 길에 산 아침을 테이블 위에 놓으면서 물었다.“아침 먹었어요?”“날 주려고 산 거예요?”“많이 사서 나눠 먹어요.”“설마 이게 입막음 비용인 건가요?”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속으로 연정훈을 욕했고, 이내 컴퓨터를 켜면서 말했다.“빨리
안시연은 연정훈과의 일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양혁수와 얽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혁수 씨, 당신이 이 일에 정말 관심이 있어서 나랑 잘 지내려는 거면 몰라도, 다른 목적이라면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양혁수가 아무 대답이 없자, 그녀는 곧장 가방을 들고 벚꽃동으로 향했다.얼마 후,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집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서재에서 나지막하게 들리던 그의 목소리도 그녀가 거실로 들어가는 순간 멈췄다.안시연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만두를 만들 재료를 준비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40개가 넘는 만두를 빚었다.그녀가 찐만두를 식탁에 놓으려는 순간, 연정훈이 서재에서 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마주쳤다.곧이어 그가 식탁에 앉자, 안시연은 만두를 그의 앞에 놓았고 남은 만두들을 도시락통에 넣으면서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연정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결국 먼저 말을 건넸다.“넌 점심때 뭐 먹어?”안시연은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다가 답했다.“당신이랑 똑같이 만두를 먹어야죠.”그녀가 손수 만든 찐만두는 배가 고팠던 그의 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안시연은 이내 도시락통을 챙겨 현관문 쪽으로 갔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나 저녁에 운전 연습을 해야 해서 늦게 돌아올 것 같아요.”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신발 끈을 묶고 있는 그녀를 보고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냉담하게 말했다.“마음대로 해.”또다시 혼자 남겨진 연정훈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집안이 다시 차가워진 것도 모자라 앞에 놓인 만두마저도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그는 한꺼번에 만두 두 개를 집어서 입안에 쑤셔 넣었고, 몇 번의 젓가락질 만에 텅 비어버린 그릇을 보고는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서둘러 회사로 돌아온 안시연은 점심시간 때문인지 반쯤 비어 있는 사무실에 양혁수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안혁수는 그녀가 태연하게 자기를
“고수가 얼마나 맛있는데요!”사실 양씨 가문에서는 양혁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고수를 좋아했다.“세상에서 제일 징그러운 채소가 고수예요!”“에이, 난 전 세계에서 고수를 심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멈추었고, 양혁수는 자기를 밀어내려는 안시연의 마음도 모른 채 또다시 말을 걸었다.“점심때 정훈 씨를 만나러 갔어요?”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투덜대기 시작했다.“시연 씨는 자존심도 없어요? 그 사람한테 팔려 간 것도 아닌데 점심시간까지 짬 내서 보고 오고, 피곤하지도 않나 보네요.”그러나 곧장 그녀의 허탈한 표정을 보고 혀를 내두르더니 말을 바꿨다.“그한테 팔렸다고 가정해도 약속을 어기는 것도 안 되는 거예요?”“혁수 씨, 계약을 위반하면 위약금이란 걸 내야 해요.”“내가 대신 내줄게요!”“그러면 내가 혁수 씨한테 팔려 가는 거잖아요?”“전 정훈 씨와 달리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라서 당신만 원한다면 평생 지켜줄 자신이 있어요”안시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됐어요, 뭐니 뭐니 해도 나 자신한테 의지하는 것이 제일 믿음직한 것 같네요. 내가 능력이 생기는 날이면, 무조건 나 자신부터 되찾을 거예요!”그녀는 자기가 연정훈에게 빼앗긴 건 단지 일 년의 시간만이 아니라 자존감과 자신감도 포함되었다고 생각했기에 하루빨리 모든 걸 되찾을 거라고 다짐했다.양혁수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고집이 세요, 난 정말 정훈 씨랑은 완전 다르다니까요!”“난 그 누구의 소유물이 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따라다닌다는 단어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난단 말이에요!”“설마 정훈 씨가 당신과 결혼하길 바라는 건가요?”안시연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그럼, 나랑 결혼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요?”양혁수가 조심스럽게 건넨 물음에 그녀가 잠시 멍하니 있더니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별로예요.”사실 양혁수도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그녀를 보면 볼수록 왠지 모르게 친분이 있는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