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연정훈의 눈을 바라봤다.어두운 불빛 아래 그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였다.하지만 연정훈의 시선이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안시연은 심장이 떨려왔고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그래서 고개를 돌리고 이성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연정훈은 바로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이어 연정훈이 안시연의 입술을 탐하고 그녀는 겨우 남은 공간으로 숨을 헐떡였으나 그는 남은 숨마저 모조리 빼앗아 갔다.“천천히... 조금만 천천히...”안시연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긴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평소 금욕의 얼굴을 하고 지내던 연정훈은 모든 가면을 벗고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그는 안시연의 얇은 원피스를 벗기지 않고 어깨끈만 내려 치마가 허리춤에서 파도처럼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그녀의 두 손을 뒤로 모으면 더 마음에 들었다.안시연은 숨을 헐떡이며 지쳐 쓰러질 위기였으나 연정훈은 그녀에게 물을 챙겨주며 체력을 보존시켰다.그러나 안시연은 물을 마시다가 또 연정훈에게 입을 뺏겼다.둘은 장소를 거실로 옮겼고 연정훈은 안시연을 소파 위로 올렸다. 다시 입을 맞추는 연정훈은 아주 부드러웠다.그렇게 방심한 안시연은 또 천천히 그에게 잠식되었다.이제 눈물 흘릴 힘조차 없었으나 연정훈은 계속 키스를 이어갔다.그는 그녀를 이렇게 다독였다.“조금만 힘 풀어. 힘 풀면 다 괜찮아질 거야.”‘거짓말! 다 거짓말이야!’안시연은 오늘 밤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딸깍.침대 헤드의 무드 등을 켜는 순간 안시연은 죽다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이제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연정훈은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 위로 눕히고 자리에서 떠났다.겨우 눈을 뜬 안시연은 연정훈이 한 무더기의 무언가를 휴지통에 버리는 걸 목격했다.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나쁜 놈.’마지막에 연정훈이 안전 조치를 제대로 취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저번에 아이를 낳아 날 협박하겠다고 했잖아. 기회 줄게. 아기 가져봐.”깜짝 놀란
늦은 밤.안시연은 이불로 온몸을 돌돌 말고 눈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다.멀지 않은 곳의 주방에서는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직접 만든 만둣국이 먹고 싶다는 건 사실 일부러 고집을 피운 것이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고작 만둣국 하나는 연정훈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런데 안시연이 예상하지 못했던 건, 연정훈이 연락을 돌려 예쁘게 빚은 만두를 배송받아 지금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그녀는 은근슬쩍 주방을 살폈다.검은색 가운 차림은 정장도 아닌데 고급지고 우아해 보였다.연정훈이 요리를 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나 이것저것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꽤 믿음직스러웠다.그러다가 불이 세져 만둣국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자 연정훈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뒤로 살짝 물러섰다.“난 육수 싫어요.”안시연이 입을 열었다.“육수밖에 없어.”“뜨거운 물도 없어요?”‘육수밖에 없긴 바보 같아.’“...”안시연의 날카로운 지적에 연정훈은 말없이 다시 물을 받았다.자신을 온밤 괴롭혔던 연정훈을 생각하며 만약 흐지부지한 만둣국이 완성되면 그녀는 그를 실컷 놀려먹으려고 했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완벽한 만둣국이 완성되었다.‘쳇. 배송받은 만두가 좋아서 그런 거야.’연정훈이 안시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껴안으려 했다. 그러나 안시연은 경계의 눈초리로 이불을 더 꽁꽁 싸매고 식탁에 앉았다.연정훈은 할 말이 없었다.체력적으로는 연정훈도 똑같이 소모되었을 텐데 그는 배가 고프지도 힘들지도 않은지 그는 안시연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안시연이 드디어 맛을 보았다.예상과는 달리 간이 적당하고 입에 맞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어때?”안시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며칠 전 가게에서 먹었던 만둣국보다 별로예요.”“맛이 없어?”“가게보다 조금 별로?”“이 만두 그 가게 꺼야.”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만두 맛은 같아요.”연정훈은 그제야 안
안시연은 만둣국을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웠다.배를 두드리면 통통 소리도 날 것 같았다.시간은 많이 늦었지만 야식을 먹었으니 조금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그래서 몸에 걸쳐진 이불을 보며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이불로 온몸을 두른 안시연이 몸을 일으키자 연정훈이 바로 잡아당겨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안시연은 깜짝 놀라버렸고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연정훈을 쳐다봤다.연정훈은 아주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밥 먹고 바로 눕게?”“옷 갈아입고 산책 좀 하려고요.”연정훈은 아무 말없이 휴지를 꺼내 그녀의 입가를 닦아줬다.안시연은 그제야 입가도 닦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손을 뻗어 직접 닦으려는데 연정훈은 고집을 피우며 안시연이 어린아이인 듯 직접 닦아줬다.입가를 닦은 휴지를 버리고 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옷 입고 와.”안시연은 입을 삐죽이며 그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안방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으며 방금까지 입고 있던 원피스는 당연하게도 더럽혀졌다.안시연은 안전하게 긴 소매와 긴 바지로 갈아입고 거실로 돌아왔다. 맨발로 거실의 카펫을 밟는 기분이 좋았다.연정훈은 가만히 앉아 안시연을 지켜봤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안시연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생각해 보니 배가 그렇게 부른 것도 아닌 듯싶어 안시연은 안방으로 돌아가 씻고 누웠다.“먼저 잘게요.”안시연의 말이 끝나고 연정훈이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고 누운 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을 품에 가뒀다.편히 자고 싶었던 안시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전에 기사를 하나 봤는데요. 어느 남자가 여자 친구에게 밤새 팔베개를 해주다가 이튿날에 팔에 감각이 없어졌다는 거예요.”연정훈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데?”“병원에서 가서 검사를 해보니 신경이 괴사되어서 팔을 잘랐대요.”그리고 그의 팔로 시선을 슬쩍 돌리며 말했다.“지금 우리 이 자세가 바로 그래요.”“.
연정훈이 이철수를 폭행한 사건은 알 만한 사람들이면 다 아는 사건이었지만 소문이 크게 퍼지지 않았다.재벌가 사람들은 눈치가 빠르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사람들이었고 모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안시연은 부승희한테서 이철수가 아직 입원 중이고 연정훈은 병문안 한번을 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병문안을 가지 않은 건 그렇다고 해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니까요. 그래도 이철수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어요. 게다가 이승우를 통해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부탁하기도 했어요.”안시연은 묵묵히 주먹밥을 먹었다.그녀는 이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창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 주임 사무실에서 호출이 왔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다름 아닌 연명걸이었다.연명걸은 아주 친절한 말투로 그녀더러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연 대표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시연 씨가 잘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해요.”안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연명걸은 그녀에게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이철수 씨의 사건은 저도 따로 알아봤는데 그날 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먼저 결례를 범한 것 같네요.”안시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연명걸은 사무실 책상에 몸을 기댄 채로 마치 일상 대화를 하듯 말을 이어갔다.“연정훈이 폭행을 했다더라도 잘못은 이철수 쪽에 있으니 이렇게 넘어가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가면 화를 불러오기 마련이에요.”연명걸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연정훈도 오늘날 여기까지 오게 된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러니 옆에 원수를 많이 두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에요.”안시연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하고 싶은 말씀 하세요.”연명걸이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솔직하게 말할게요. 연정훈 씨에게 대신 부탁드려주세요.”“부탁이요?”“네. 이제 그만 이씨 가문에 대한 억압을 멈추어 달라고 말 좀 전해주세요.”안시연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연정훈이 먼저 주먹
연명걸은 계획이 틀어지지 않도록 먼저 안시연에게 USB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USB는 암호로 잠겨 있었지만 전문 인력이 손만 보면 해제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래서 연명걸은 호텔 담당자를 지시해 안시연에게 전화하게 했다.“안시연 씨, 갑자기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어젯밤 연회에 참석한 고객 중 한 분이 회사 USB를 유실하셨는데 카메라 확인 결과 안시연 씨가 무심결에 챙겨가신 걸 확인했습니다.”안시연은 전화를 받고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연명걸이 이철수를 밀어내고 안시연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담았으며 특별한 물건은 기억나지 않았다.“지금은 회사에 있어 확인이 불가능하고 확인 후 저한테 소지품이 있으면 바로 퀵으로 보내드릴게요.”호텔 담당자는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안시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통화를 종료했다.재고 조사 업무도 거의 막바지에 달하고 이제 경인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다.주임은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했다.“함풍목재 경영은 그럭저럭해도 장부는 정말 아무 문제도 찾을 수가 없네요.”안시연도 동감이었다. 정말 가히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여러 선배도 말을 보탰다.“이렇게 문제가 티끌 하나도 없는 장부는 처음이에요.”안시연은 선배를 바라보다가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그때 주임이 말했다.“아무 문제가 없는 건 좋은 일이지요.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요. 어쩌면 내일이면 경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사무실은 환호성이 이어졌다.출장에 몸이 힘들었지만 수고비와 이어질 휴가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안시연도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오전 소현정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대충 뜻은 연정훈과의 관계가 부적절하니 빨리 끝내라는 것이었다.외할머니도 자주 전화를 걸어와 그녀가 보고 싶다고 전했다.안시연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일에 몰두했다.드디어 퇴근 시간 전으로 모든 업무를 끝마쳤다.주임이 휴가라고 외치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했다.안시연은 바로 부승희의 연락을 받았는데 교외
의도와는 다르게 부승원의 비밀을 듣게 된 안시연은 빠르게 걸음을 멈춰 섰다.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녀는 다시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부승희는 드롱의 전국 입점권을 따내고 기쁜 마음에 찻집에서 한턱을 내기로 했다.부승원과 한우빈을 제외하고 몇몇 낯선 얼굴도 보였다.찻집은 규모가 꽤 컸으며 저녁 식사는 그중 한 방으로 예약이 잡혀 있었다. 작은 별장 같은 공간에서 커튼만 열면 전체 차밭이 보였다.저녁노을이 진 차밭은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안시연이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 사람이 자리에 착석했고 연정훈의 왼쪽 자리만 비어 있었다.부승희가 그녀를 그쪽으로 밀었다.“빨리 앉아요. 안시연 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고요.”안시연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오늘이 축하 파티인 줄도 모르고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다음번에 보충해도 될까요?”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편한 대로 해요.”이어 웨이터가 요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웨이터들은 모두 선명한 이목구비에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는데 안시연은 속으로 평범한 웨이터는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안시연이 웨이터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는데 옆에 앉은 여자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그 여자는 바로 아까 부승원과 함께 있었던 소녀였는데 안시연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려 활짝 웃어 보였다. 입꼬리가 올라가자 귀여운 송곳니가 톡 튀어나왔다.“...”역시 19살의 소녀는 달랐다.이런 생각에 안시연은 또 몰래 부승원을 살폈다.안시연은 부승원이 연정훈의 친구 중에서 가장 진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사람을 겉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었다.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앞접시에 고기 한 점이 놓였다.“얼굴에 금이라도 붙었어?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불만이라는 연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안시연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안시연은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말했다.“귀엽잖아요.”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렸다.‘부승원이 귀여워?’“저 아이는 부승원 변호사님 여자 친구인
안시연은 심장이 덜컹했다.하지만 우 대표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고 술잔을 들어 짠을 요청했다.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안시연도 예의를 갖춰 응했다.술잔을 내려 두고 안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연정훈은 이런 그녀의 모습에 두 사람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도 노래 부르라고 시키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먹어.”안시연이 깜짝 놀라 연정훈을 바라보았다.그는 가끔 안시연은 왜 이렇게 눈치가 무딜까, 라는 생각을 했다. 연정훈이 직접 음식을 앞접시에 덜어주며 챙기는데 감히 누가 그녀에게 장기 자랑을 시킬 수 있겠는가?평소 생각은 많아 보이는데 이런 쪽으로는 참 무딘 모양이었다.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식사 자리에 꼭 장기 자랑을 해야 해요?”“그건... 다른 사람들의 룰이야.”“멈춰 달라고 할 수 없어요?”“안돼.”안시연은 조금 실망했다.“난 내 사람만 지키지 다른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아.”“그래도 연정훈 씨가 말하면 다 들을 텐데요?”연정훈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물었다.“누가 그래?”“꼭 말해줘야 알아요? 이철수 씨를 폭행하고 사과도 안 하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요. 오히려 이철수 쪽에서 사과하고 싶다고 난리던데.”연정훈은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물었다.“지금 폭행한 사건을 비꼬는 건가?”안시연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아니요. 그냥 연 대표님은 전지전능하고 못 하는 게 없다는 소리네요.”세상에 어떤 남자가 제 애인이 자신을 전지전능하다고 말하는 걸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당연히 연정훈도 예외는 아니었다.물을 한 모금 들이켠 연정훈은 계속해서 수육을 앞접시로 옮겼다.벌써 세 앞접시에 가득 찬 수육을 보며 안시연은 어이가 없어졌다.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푸념했다.“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건데, 왜 넌 꼭 내가 빌런이라는 것처럼 말하지?”안시연은 심장이 찌르르했다.‘정말 모두 날 위해서 그런 거라고?’안시연이 고개를 들었다.“그럼 이씨 가문을 억압한 것도 모두 어젯밤 이철수가... 날 괴롭
소녀가 입을 여는 순간 모든 사람이 동작을 멈췄다.마침, 국을 입에 넣으려던 안시연도 멈춰 섰다.“요로레이디오레이디오로우디오로우디오레이디오레이우디리...”최고조에 달하고 안시연은 참지 못하고 입에 넣은 국을 뿜었다.풉...하지만 다행히 손 빠르게 냅킨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식사 자리에도 웃음소리가 터졌다.이 업계에서 꽤 입지를 다진 사람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부승희도 깔깔 웃더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그쪽은 이름이 뭐예요?”소녀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반우희입니다.”“어느 희를 써요?”“기쁠 희예요.”부승희는 눈을 반짝이더니 잔을 번쩍 들었다.“우리 완전 자매 같네요. 저도 기쁠 희 돌림이거든요.”안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아쉽게도 안시연 씨는 저희랑 같은 돌림이 아니네요.”“그러게요. 아니면 세 자매라고 해도 믿겠어요.”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이승우는 요들송이 아직도 웃긴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특히 요로레이디 이 부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이승우는 참지 못하고 부승원에게 물었다.“대체 어디에서 만난 천재 소녀야?”반우희는 칭찬인 줄만 알고 바보같이 웃었다.“에이 아니에요.”“...’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웃음을 터뜨렸다.부승원은 굳은 얼굴로 설명했다.“내 피고인이야.”안시연도 다른 사람들처럼 두 사람의 사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피고인이기에 약속 자리에도 동행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옆에 앉은 연정훈은 다른 사람들 과는 달리 아주 덤덤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정말 인내심도 좋아.’방금 부승원도 눈썹을 찡그리며 겨우 표정을 숨겼으나 연정훈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에 미소를 살짝 올릴 뿐이었다.“안 웃겨요?”안시연이 몰래 물었다.“웃겨.”“...”‘그런데 왜 웃지 않는 걸까?’안시연이 눈을 깜빡이며 연정훈을 가만히 쳐다보자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체 지금은 또 뭐가 웃긴 거야?’연정훈은 아주 잠깐 웃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