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히 밥을 먹다가 굳이 이렇게 태클을 걸어 가족 모두가 기분이 망쳐야 하겠어?”연호민이 언짢은 듯 말했다.“시연이도 괜찮다고 하지 않느냐!”연정훈은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았다.“시연이가 괜찮다고 말한 건 예의를 차려 한 말이에요. 그걸 악용해 괴롭히라는 의미가 아니라고요.”“누가 악용을 하고 괴롭혔다고 그래?”민수희도 참지 못하고 말했다.“집에 식재료도 없는 요리 하나로 이렇게 상을 뒤엎어야겠어? 너희들이 온다고 해서 특별히 준비한 음식인데 네가 직접 봐봐. 어느 요리가 평범하고 무난한 요리이지?”“자세히 보면 시연이가 좋아하는 요리는 하나도 없는걸요.”민수희는 말문이 막혔다.연정훈이 냉소를 터뜨렸다.“결혼한지 이튿날 양가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요. 양씨 가문 사람들은 차를 끓여도 내 입맛이 뭔지 물어봤어요.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시연이가 좋아하는 음식은커녕 모든 가족이 할머니 입맛대로 건강식을 먹어야겠어요?”그 말에 민수희가 화를 내기도 전에 연재혁과 표세연이 고개를 갸웃했다.‘정말?’‘네 장모님이 그렇게 잘 챙겨줬다고?’‘지어낸 거지?’양시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마른기침했다.가끔 연정훈이 이렇게 안색 한번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할 때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탁!이번에는 연호민이 수저를 큰 소리로 내리쳤다.민수희는 남편이 제 편을 들어주는 줄 알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너희들이 오늘 이 집을 찾은 이유가 나와 네 할아버지에게 태클을 걸기 위해서였구나! 결혼한 지 둘째 날부터 가문에서 주름을 잡으려는 거지!”연정훈은 대꾸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강하게 나갈 생각이었다.양시연은 앞접시에 놓인 반찬을 젓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불쌍한 척 어깨를 구겼다.분위기가 어느새 살벌해지고 연재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어머니, 정훈이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번만 봐주세요.”“정훈이는 입이 없는 거니?”민수희가 냉소를 터뜨렸다.“네 아들이 이사회에서 이사진들을 말로 아주
결국 사케 푸아그라가 식탁에 올랐다.양시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승리를 거머쥐게 되었다.배부르게 먹어 집에 돌아가 따로 챙겨 먹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씨 저택에서 나온 양시연은 방문 전보다도 기분이 퍽 좋았다.그래서 차에 올라 목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다.“그래도 방금 너무 심했던 거 아니에요? 오늘 할머니가 따로 눈치를 준 것도 없는걸요.”연정훈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속 시원하지?”“...”양시연은 반듯하게 자리에 앉아 있다가 입가를 가린 뒤 빠르게 연정훈의 옆에 찰싹 붙었다.“시원해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그리고 자연스럽게 양시연을 제 품에 가두었다.깜짝 놀란 양시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다시 뜨니 어느새 연정훈의 품 안에 있었다.이 품에서 벗어날까 고민도 했지만 연정훈이 두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결혼을 한 이상 네가 편히 지내게 해주고 싶어.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억울한 일을 막아줄게.”그리고 눈을 뜨고 양시연을 가만히 바라봤다.진지한 연정훈에 양시연은 조금 민망해졌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그리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품 안에서 벗어날 생각을 했다.하지만 오늘 꽤 잘 챙겨준 걸 떠올리며 잠시 품 안에 안겨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연정훈은 이런 속마음을 읽고 기분이 퍽 좋아졌다. 그래서 양시연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꼭 껴안았다.양시연은 이렇게 더운 여름철에 신혼여행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고 결혼 뒤 3일 동안 집에서 푹 쉬기로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달 동안 어떻게 양가 친척들에게 인사를 드릴지 계획을 세웠다.집에 도착하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꼬리처럼 졸졸 붙어 다녔다.“친척들, 친구들 정보를 전부 다 알려줘요. 그리고 내가 이어받아야 할 재단도 다시 말해줘요. 작은 디테일일수록 좋아요.”연정훈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시원하게 말했다.“좋아. 노트북 챙겨 서재로 따라와.”“오케이!”양시연은 기쁜 마음으로 뒤를
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너무 서운한 척하지 마세요. 배우자끼리 지식을 나누는 데도 비용을 따지다니 정훈 씨 진짜 너무 짠돌이 아니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여보라는 두 글자가 그렇게 말하기 어려워?”‘아직도 배우자라고 하다니.’양시연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양시연은 복숭아를 들고 있다가 연정훈의 말에 그가 본가에서 입만 열면 ‘내 아내’라고 말하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뜨거워졌다.“그거나 그거 아닌가요?”양시연은 눈을 돌리며 허세를 부리듯 연정훈을 흘겨보았다.“이제 설명할 거에요 말 거에요? 수업 시간 45분 내내 말장난으로 날아가겠어요.” “무료 강의는 원래 이 정도 퀄리티야. 말장난이 마음에 안 들면 유료 강의로 업그레이드해.”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연정훈은 평소엔 말수가 적었지만, 한번 말싸움을 하면 양시연은 이길 수가 없었다.“입만 열면 과외비 이야기네요.”양시연은 등을 곧게 펴며 단호히 말했다.“일단 설명부터 해요. 나중에 필요하면 어떻게 결제할지 얘기하죠.”연정훈은 살짝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요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기억해. 어떤 계약이든 상대와 먼저 가격을 협상한 뒤에 시작해야 해.”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큰 문제를 겪게 될 수도 있어.”이 점은 양시연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대충 메모하며 알았다는 사인을 보였다.한참 잡담을 나눈 후에야 두 사람은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불을 켰고 연정훈은 외투를 벗은 채 하얀 셔츠와 검정 바지 차림으로 손에 레이저 포인터를 들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자 강단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그대로 재현되는 듯했다.양시연은 몰래 몇 번이고 연정훈을 쳐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교수님이라고 부를 뻔했다.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인간관계의 복잡함과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며 자선 사업 운영 방식과 그 뒤에 숨겨진 이익과 위험에 대해 가르쳤다.양시연은 꼼꼼히 메모하다가 암흑 적은 것을
양시연은 혼인신고서에 마법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혼인신고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연정훈과의 관계가 이렇게 자연스럽지는 않았는데 증명서를 받고 결혼식을 치른 후에는 어느새 거리감이 사라진 듯했다.연정훈이 한마디를 던지자 양시연은 그가 무슨 암시를 하는지 금세 눈치챘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손을 뺐다가 새우 칩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또 한 조각을 연정훈의 입가로 가져다주었다.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이제 비용 지급한 거예요.’연정훈은 진지하게 그녀와 따지려는 듯하다가도 양시연의 입가에 묻은 양념 가루를 발견하곤 자연스럽게 휴지를 꺼냈다.그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몇 살인데 먹으면서 입에 이렇게 묻히고 다녀?”양시연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핥았다.하지만 그 순간 연정훈은 막 양시연의 입술을 닦아주던 중이었고 휴지를 사이에 둔 채로 그녀의 혀가 연정훈의 손가락에 살짝 닿는 느낌이 들었다.연정훈의 손이 멈추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움직이며 남은 자국을 닦아냈다.그러나 연정훈의 시선은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이 지나치게 세심하게 닦아주는 것 같아 어딘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주변은 조용했고 프로젝터 화면이 바뀌면서 조명도 살짝 달라졌다.눈이 피로했던 그녀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불편함을 덜어내려 했다.다시 눈을 떴을 때 연정훈은 이미 모든 걸 마치고 양시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연정훈의 깊은 눈빛과 양시연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치더니 곧 얽혀들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의도를 읽어냈고 어젯밤의 키스가 떠올라 손으로 과자 봉지를 꽉 쥐었다.아무 말 없이 연정훈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심장이 요동쳤고 양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쨌든 오후 내내 강의를 들었고 부부라는 명분도 확실하니 한 번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시연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똑똑똑!양시연은 깜짝 놀랐다.“
양시연은 민수희가 참 웃긴다고 생각했다. 한가해서 손주 신혼부부에게 괜히 불편을 주려는 건지 의심스러웠다.연정훈이 아래층에서 정 할머니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양시연은 여 아주머니와 함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여 아주머니가 말했다.“아직 눈치 못 채셨나요?”“뭘요?”여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아씨께서 이미 다 예상하셨어요. 예전에 결혼 전 연호민 씨가 주식 천천히 넘겨준다고 한 거 기억 안 나세요? 최소 3개월은 걸린다던 그거요. 3개월이라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반년은 걸릴 거라니까요!”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엄마가 혹시 할머니가 중간에서 방해해서 나랑 연정훈이 이혼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그럼요!”“설마요. 할아버지는 저희 가문과의 관계를 더 단단히 묶고 싶어 하시잖아요.”“연호민 씨는 그렇지만, 민수희 씨는 또 다르죠!”여 아주머니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 바닥에서 결혼하고 바로 이혼하는 게 흔한 일인 거 모르세요?”양시연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연정훈은 정 할머니를 정중하게 내보내려 했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오랫동안 연씨 가문에서 일해온 터라 아무리 연정훈이라도 너무 모진 말은 하지 못했다.결국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정 할머니는 아래층에서 반나절을 앉아 있다가 스스로 짐을 챙겨 보모 방에 정착해 버렸다.양시연은 정 할머니가 연세가 많다는 걸 고려해 연정훈에게 표세연을 통해 설득해 보자고 제안했다.연정훈은 그날 밤에는 비교적 온화하게 동의했지만, 다음 날 저녁에는 폭발하고 말았다. 직접 정 할머니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정 할머니를 데려가라고 했다.사실 연정훈이 24시간 넘게 참은 것만 해도 그는 충분히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첫날 정 할머니는 연정훈과 양시연의 키스를 방해했다.‘좋아.’연정훈은 참았다.밤에 양시연과 침대에 기대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첫날밤을 보냈다.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연정훈은 양시연을 품에 안고 추천한 영화를 함께 보았다. 양시연은
정 할머니의 아들과 손자가 함께 경인으로 와 그날 오후 바로 정 할머니를 데려갔다. 떠나면서도 정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연정훈에게 사과 했다. 혹시라도 연루될까 봐 두려운 모습이 역력했다.양시연은 부승희와 통화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연정훈이 몇 번이나 분위기를 잡으려다 방해받고는 약이 올라 보였던 표정을 떠올리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그때 부승희도 기다렸다는 듯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부 변호사께서 쓰레기통 뒤졌다고요?”양시연은 충격을 받았다.잠시 후 부승희는 라이브 사진을 보내왔다.라이브 사진도 모자라 이모티콘까지 만들어 보냈다.사진 속에서 부승원은 종이봉투를 들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고 부승희는 여기에 자막까지 넣었다. [가방 어디 갔어? 내 이만큼 큰 가방 어디 간 거냐고?]양시연은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했다.“혹시 반우희 씨 가방이라도 찾아주려던 거예요?”그럴 리가 없었다.양시연은 예전에 부승원이 반우희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쏟아냈던 독설을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부승원은 더없이 차가웠다.부승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오빠는 진짜 지독한 츤데레에요.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더 싫다고 하는 타입이라니까.”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말을 잃었다.“...”‘진짜 독특한 성격이네...’이틀 후 만날 약속을 잡은 뒤 전화를 끊고 양시연은 고개를 들었다. 마침 연정훈이 윗층에서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양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피식 웃음을 지었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살짝 냉기가 도는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며 그녀 옆에 천천히 앉았다.양시연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가 말했다."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그래도 정 할머니는 정훈 씨 잘되라고 그러신 거잖아요. 그 약재로 만든 한약 엄청 좋은 거라던데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째려보며 말했다."대낮이라 내가 너를 어쩌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양
부승원은 정인 본사에서 업무를 보다 연정훈에게 몇 가지 확인 사항을 메시지로 보냈다.연정훈은 짧게 답했다.[바빠. 좀 일이 있어.]부승원은 다시 짧게 응답했다.[응.]굳이 세부적인 걸 묻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정훈이 먼저 상황을 털어놨다.[방금 양시연 사진 찍어줬는데 내가 못 찍었다고 잔뜩 투덜대더라. 수정해 달라길래 지금 차 안에서 고치는 중이야. 밤에는 아무것도 못 할 듯 싶어. 오늘은 계속 사진 수정만 하다 끝날 것 같아.]부승원은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자세히 말하는 거야? 완전 어이없네.’“이거 괜찮은데요!”차 안에서 양시연은 연정훈이 수정한 사진을 보고 고개를 쭉 내밀며 강하게 긍정했다.연정훈은 그녀를 힐끔 바라보다가 물었다.“보내줄까?”“네.”양시연은 들뜬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사진을 받을 준비를 했다. 몇 장이 저장되지 않아 다시 요청했고 저장한 후에는 나중에 인쇄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연정훈은 그녀의 모습을 힐끗 살폈다. 양시연이 사진을 친구들에게 공유하거나 인스타에 올릴 법도 했지만, 의외로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는 무심하게 물었다.“너 인스타에 게시물이 많지 않네?”양시연은 태연히 대답했다.“난 일상을 공유하는 습관이 없어요.”“...그래.”연정훈은 더 묻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양시연은 잠시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그의 속내를 깨달았다.잠깐 생각에 잠긴 양시연은 일부러 태연한 척 물었다.“오랜만에 나왔는데 우리 셀카 찍을까요? 인스타에 올리게요.”연정훈은 순간 설렜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말했다.“앞으로 가서 더 좋은 배경을 찾아보자.”양시연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생각했다.‘배경은 무슨 배경? 그냥 셀카잖아.’잠시 후 그녀는 차를 세우라고 하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손에 작은 미니 탕후루를 들고는 연정훈에게 건넸다.“이거 들고 있어요.”연정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양시연을 바라봤다.
신혼 초기였던 만큼 양시연이 올린 하루치의 인스타 게시물은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돈독하다는 소문을 빠르게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날 밤늦게 연정훈이 양시연의 사진을 모두 저장한 뒤 자신의 계정에 다시 업로드한 것이 화제를 더욱 증폭시켰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이야기가 뜨거운 화두가 되었다.부승희는 댓글을 남겼다.[낡은 집에 불이 붙으니 걷잡을 수 없구만요.]하지만 양시연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생각했다.‘불이 붙긴커녕 지금까지 우리 사이는 정말 순수하다고.’그럼에도 양시연과 연정훈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어디를 가든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연정훈은 늘 양시연과 함께였다. 양시연이 밖에 놀러 갈 때면 그는 운전기사 역할을 자처했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그녀를 데리러 왔다.양시연은 가끔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어느 날 오후 연정훈은 양시연을 데리고 정인 그룹 본사로 향했다. 자신의 측근 팀을 미리 양시연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였다.마침 부승원도 개인 자산 일부를 연정훈에게 넘기기 위한 서류 작업 때문에 와 있었다.부승원은 몇 명의 변호사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중에는 송 변호사와 반우희도 포함되어 있었다.며칠 만에 다시 만난 반우희는 조금 초췌해 보였다. 얼굴은 한층 더 홀쭉해져 있었다.“반우희 씨,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양시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반우희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요. 혼자 끙끙 앓지 말고요.”양시연은 그녀에게 조언했다.반우희는 고마운 눈빛으로 양시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공적인 대화가 끝나자 양시연은 가져온 과자와 간식을 꺼내 반우희에게 건네며 손님용 대기실에서 저녁으로 먹으라고 권했다.그 시각 옆방에서는 연정훈과 남자들 몇이 모여 한창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반우희가 케이크를 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돈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양시연이 여러 번 도와준 덕분에 반우희는 이를 악물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