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사케 푸아그라가 식탁에 올랐다.양시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승리를 거머쥐게 되었다.배부르게 먹어 집에 돌아가 따로 챙겨 먹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씨 저택에서 나온 양시연은 방문 전보다도 기분이 퍽 좋았다.그래서 차에 올라 목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다.“그래도 방금 너무 심했던 거 아니에요? 오늘 할머니가 따로 눈치를 준 것도 없는걸요.”연정훈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속 시원하지?”“...”양시연은 반듯하게 자리에 앉아 있다가 입가를 가린 뒤 빠르게 연정훈의 옆에 찰싹 붙었다.“시원해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그리고 자연스럽게 양시연을 제 품에 가두었다.깜짝 놀란 양시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다시 뜨니 어느새 연정훈의 품 안에 있었다.이 품에서 벗어날까 고민도 했지만 연정훈이 두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결혼을 한 이상 네가 편히 지내게 해주고 싶어.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억울한 일을 막아줄게.”그리고 눈을 뜨고 양시연을 가만히 바라봤다.진지한 연정훈에 양시연은 조금 민망해졌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그리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품 안에서 벗어날 생각을 했다.하지만 오늘 꽤 잘 챙겨준 걸 떠올리며 잠시 품 안에 안겨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연정훈은 이런 속마음을 읽고 기분이 퍽 좋아졌다. 그래서 양시연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꼭 껴안았다.양시연은 이렇게 더운 여름철에 신혼여행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고 결혼 뒤 3일 동안 집에서 푹 쉬기로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달 동안 어떻게 양가 친척들에게 인사를 드릴지 계획을 세웠다.집에 도착하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꼬리처럼 졸졸 붙어 다녔다.“친척들, 친구들 정보를 전부 다 알려줘요. 그리고 내가 이어받아야 할 재단도 다시 말해줘요. 작은 디테일일수록 좋아요.”연정훈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시원하게 말했다.“좋아. 노트북 챙겨 서재로 따라와.”“오케이!”양시연은 기쁜 마음으로 뒤를
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너무 서운한 척하지 마세요. 배우자끼리 지식을 나누는 데도 비용을 따지다니 정훈 씨 진짜 너무 짠돌이 아니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여보라는 두 글자가 그렇게 말하기 어려워?”‘아직도 배우자라고 하다니.’양시연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양시연은 복숭아를 들고 있다가 연정훈의 말에 그가 본가에서 입만 열면 ‘내 아내’라고 말하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뜨거워졌다.“그거나 그거 아닌가요?”양시연은 눈을 돌리며 허세를 부리듯 연정훈을 흘겨보았다.“이제 설명할 거에요 말 거에요? 수업 시간 45분 내내 말장난으로 날아가겠어요.” “무료 강의는 원래 이 정도 퀄리티야. 말장난이 마음에 안 들면 유료 강의로 업그레이드해.”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연정훈은 평소엔 말수가 적었지만, 한번 말싸움을 하면 양시연은 이길 수가 없었다.“입만 열면 과외비 이야기네요.”양시연은 등을 곧게 펴며 단호히 말했다.“일단 설명부터 해요. 나중에 필요하면 어떻게 결제할지 얘기하죠.”연정훈은 살짝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요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기억해. 어떤 계약이든 상대와 먼저 가격을 협상한 뒤에 시작해야 해.”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큰 문제를 겪게 될 수도 있어.”이 점은 양시연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대충 메모하며 알았다는 사인을 보였다.한참 잡담을 나눈 후에야 두 사람은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불을 켰고 연정훈은 외투를 벗은 채 하얀 셔츠와 검정 바지 차림으로 손에 레이저 포인터를 들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자 강단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그대로 재현되는 듯했다.양시연은 몰래 몇 번이고 연정훈을 쳐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교수님이라고 부를 뻔했다.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인간관계의 복잡함과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며 자선 사업 운영 방식과 그 뒤에 숨겨진 이익과 위험에 대해 가르쳤다.양시연은 꼼꼼히 메모하다가 암흑 적은 것을
양시연은 혼인신고서에 마법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혼인신고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연정훈과의 관계가 이렇게 자연스럽지는 않았는데 증명서를 받고 결혼식을 치른 후에는 어느새 거리감이 사라진 듯했다.연정훈이 한마디를 던지자 양시연은 그가 무슨 암시를 하는지 금세 눈치챘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손을 뺐다가 새우 칩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또 한 조각을 연정훈의 입가로 가져다주었다.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이제 비용 지급한 거예요.’연정훈은 진지하게 그녀와 따지려는 듯하다가도 양시연의 입가에 묻은 양념 가루를 발견하곤 자연스럽게 휴지를 꺼냈다.그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몇 살인데 먹으면서 입에 이렇게 묻히고 다녀?”양시연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핥았다.하지만 그 순간 연정훈은 막 양시연의 입술을 닦아주던 중이었고 휴지를 사이에 둔 채로 그녀의 혀가 연정훈의 손가락에 살짝 닿는 느낌이 들었다.연정훈의 손이 멈추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움직이며 남은 자국을 닦아냈다.그러나 연정훈의 시선은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이 지나치게 세심하게 닦아주는 것 같아 어딘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주변은 조용했고 프로젝터 화면이 바뀌면서 조명도 살짝 달라졌다.눈이 피로했던 그녀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불편함을 덜어내려 했다.다시 눈을 떴을 때 연정훈은 이미 모든 걸 마치고 양시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연정훈의 깊은 눈빛과 양시연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치더니 곧 얽혀들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의도를 읽어냈고 어젯밤의 키스가 떠올라 손으로 과자 봉지를 꽉 쥐었다.아무 말 없이 연정훈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심장이 요동쳤고 양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쨌든 오후 내내 강의를 들었고 부부라는 명분도 확실하니 한 번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시연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똑똑똑!양시연은 깜짝 놀랐다.“
양시연은 민수희가 참 웃긴다고 생각했다. 한가해서 손주 신혼부부에게 괜히 불편을 주려는 건지 의심스러웠다.연정훈이 아래층에서 정 할머니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양시연은 여 아주머니와 함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여 아주머니가 말했다.“아직 눈치 못 채셨나요?”“뭘요?”여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아씨께서 이미 다 예상하셨어요. 예전에 결혼 전 연호민 씨가 주식 천천히 넘겨준다고 한 거 기억 안 나세요? 최소 3개월은 걸린다던 그거요. 3개월이라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반년은 걸릴 거라니까요!”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엄마가 혹시 할머니가 중간에서 방해해서 나랑 연정훈이 이혼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그럼요!”“설마요. 할아버지는 저희 가문과의 관계를 더 단단히 묶고 싶어 하시잖아요.”“연호민 씨는 그렇지만, 민수희 씨는 또 다르죠!”여 아주머니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 바닥에서 결혼하고 바로 이혼하는 게 흔한 일인 거 모르세요?”양시연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연정훈은 정 할머니를 정중하게 내보내려 했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오랫동안 연씨 가문에서 일해온 터라 아무리 연정훈이라도 너무 모진 말은 하지 못했다.결국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정 할머니는 아래층에서 반나절을 앉아 있다가 스스로 짐을 챙겨 보모 방에 정착해 버렸다.양시연은 정 할머니가 연세가 많다는 걸 고려해 연정훈에게 표세연을 통해 설득해 보자고 제안했다.연정훈은 그날 밤에는 비교적 온화하게 동의했지만, 다음 날 저녁에는 폭발하고 말았다. 직접 정 할머니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정 할머니를 데려가라고 했다.사실 연정훈이 24시간 넘게 참은 것만 해도 그는 충분히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첫날 정 할머니는 연정훈과 양시연의 키스를 방해했다.‘좋아.’연정훈은 참았다.밤에 양시연과 침대에 기대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첫날밤을 보냈다.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연정훈은 양시연을 품에 안고 추천한 영화를 함께 보았다. 양시연은
정 할머니의 아들과 손자가 함께 경인으로 와 그날 오후 바로 정 할머니를 데려갔다. 떠나면서도 정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연정훈에게 사과 했다. 혹시라도 연루될까 봐 두려운 모습이 역력했다.양시연은 부승희와 통화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연정훈이 몇 번이나 분위기를 잡으려다 방해받고는 약이 올라 보였던 표정을 떠올리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그때 부승희도 기다렸다는 듯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부 변호사께서 쓰레기통 뒤졌다고요?”양시연은 충격을 받았다.잠시 후 부승희는 라이브 사진을 보내왔다.라이브 사진도 모자라 이모티콘까지 만들어 보냈다.사진 속에서 부승원은 종이봉투를 들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고 부승희는 여기에 자막까지 넣었다. [가방 어디 갔어? 내 이만큼 큰 가방 어디 간 거냐고?]양시연은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했다.“혹시 반우희 씨 가방이라도 찾아주려던 거예요?”그럴 리가 없었다.양시연은 예전에 부승원이 반우희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쏟아냈던 독설을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부승원은 더없이 차가웠다.부승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오빠는 진짜 지독한 츤데레에요.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더 싫다고 하는 타입이라니까.”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말을 잃었다.“...”‘진짜 독특한 성격이네...’이틀 후 만날 약속을 잡은 뒤 전화를 끊고 양시연은 고개를 들었다. 마침 연정훈이 윗층에서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양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피식 웃음을 지었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살짝 냉기가 도는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며 그녀 옆에 천천히 앉았다.양시연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가 말했다."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그래도 정 할머니는 정훈 씨 잘되라고 그러신 거잖아요. 그 약재로 만든 한약 엄청 좋은 거라던데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째려보며 말했다."대낮이라 내가 너를 어쩌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양
부승원은 정인 본사에서 업무를 보다 연정훈에게 몇 가지 확인 사항을 메시지로 보냈다.연정훈은 짧게 답했다.[바빠. 좀 일이 있어.]부승원은 다시 짧게 응답했다.[응.]굳이 세부적인 걸 묻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정훈이 먼저 상황을 털어놨다.[방금 양시연 사진 찍어줬는데 내가 못 찍었다고 잔뜩 투덜대더라. 수정해 달라길래 지금 차 안에서 고치는 중이야. 밤에는 아무것도 못 할 듯 싶어. 오늘은 계속 사진 수정만 하다 끝날 것 같아.]부승원은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자세히 말하는 거야? 완전 어이없네.’“이거 괜찮은데요!”차 안에서 양시연은 연정훈이 수정한 사진을 보고 고개를 쭉 내밀며 강하게 긍정했다.연정훈은 그녀를 힐끔 바라보다가 물었다.“보내줄까?”“네.”양시연은 들뜬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사진을 받을 준비를 했다. 몇 장이 저장되지 않아 다시 요청했고 저장한 후에는 나중에 인쇄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연정훈은 그녀의 모습을 힐끗 살폈다. 양시연이 사진을 친구들에게 공유하거나 인스타에 올릴 법도 했지만, 의외로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는 무심하게 물었다.“너 인스타에 게시물이 많지 않네?”양시연은 태연히 대답했다.“난 일상을 공유하는 습관이 없어요.”“...그래.”연정훈은 더 묻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양시연은 잠시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그의 속내를 깨달았다.잠깐 생각에 잠긴 양시연은 일부러 태연한 척 물었다.“오랜만에 나왔는데 우리 셀카 찍을까요? 인스타에 올리게요.”연정훈은 순간 설렜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말했다.“앞으로 가서 더 좋은 배경을 찾아보자.”양시연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생각했다.‘배경은 무슨 배경? 그냥 셀카잖아.’잠시 후 그녀는 차를 세우라고 하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손에 작은 미니 탕후루를 들고는 연정훈에게 건넸다.“이거 들고 있어요.”연정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양시연을 바라봤다.
신혼 초기였던 만큼 양시연이 올린 하루치의 인스타 게시물은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돈독하다는 소문을 빠르게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날 밤늦게 연정훈이 양시연의 사진을 모두 저장한 뒤 자신의 계정에 다시 업로드한 것이 화제를 더욱 증폭시켰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이야기가 뜨거운 화두가 되었다.부승희는 댓글을 남겼다.[낡은 집에 불이 붙으니 걷잡을 수 없구만요.]하지만 양시연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생각했다.‘불이 붙긴커녕 지금까지 우리 사이는 정말 순수하다고.’그럼에도 양시연과 연정훈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어디를 가든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연정훈은 늘 양시연과 함께였다. 양시연이 밖에 놀러 갈 때면 그는 운전기사 역할을 자처했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그녀를 데리러 왔다.양시연은 가끔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어느 날 오후 연정훈은 양시연을 데리고 정인 그룹 본사로 향했다. 자신의 측근 팀을 미리 양시연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였다.마침 부승원도 개인 자산 일부를 연정훈에게 넘기기 위한 서류 작업 때문에 와 있었다.부승원은 몇 명의 변호사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중에는 송 변호사와 반우희도 포함되어 있었다.며칠 만에 다시 만난 반우희는 조금 초췌해 보였다. 얼굴은 한층 더 홀쭉해져 있었다.“반우희 씨,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양시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반우희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요. 혼자 끙끙 앓지 말고요.”양시연은 그녀에게 조언했다.반우희는 고마운 눈빛으로 양시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공적인 대화가 끝나자 양시연은 가져온 과자와 간식을 꺼내 반우희에게 건네며 손님용 대기실에서 저녁으로 먹으라고 권했다.그 시각 옆방에서는 연정훈과 남자들 몇이 모여 한창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반우희가 케이크를 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돈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양시연이 여러 번 도와준 덕분에 반우희는 이를 악물
한 고위 임원이 말을 꺼내며 반우희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보자고 제안했다.부승원은 차갑게 받아쳤다.“36세 박사가 아직 결혼도 안 했다고요.”그 말에는 상대방에게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송 변호사는 단호히 말했다.“제 동창이고 사람은 믿을 만한 분입니다!”부승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반박했다.“7~8년 동안 못 본 사람을 어떻게 믿을 만하다고 단정할 수 있나요?”이때 양시연이 눈치를 채고 송 변호사를 향해 물었다.“송 변호사님, 올해 몇 살이세요?”송 변호사는 질문의 의도를 눈치채고 머뭇거렸다. 주변 사람들도 장난스레 덧붙였다.“어라, 송 변호사님도 조건에 딱 맞는데요?”송 변호사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사실 저도 반우희 씨가 참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회사는 사내 연애 금지잖아요. 아니었으면 대시한 지 오래됐죠!”그의 말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슬쩍 부승원을 힐끗 봤지만, 그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있었다.송 변호사는 농담 섞인 말투로 부승원을 향해 말했다.“대표님, 저희 오랜 친분을 생각해서 한 번만 봐주세요.”부승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때 연정훈이 양시연의 허리를 감싸며 미소 지었다. 주변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즐기며 말했다.“송 변호사님은 인품도 훌륭하시고 우리와 오래 함께 일한 분이니 한 번 봐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송 변호사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덧붙였다.“연 대표님까지 제 편을 들어주시는데 대표님, 이번 한 번만 좀 봐주세요.”부승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냉랭한 기운을 풍겼다.“연 대표는 당연히 당신 편을 들겠죠. 마치 늙은 호랑이가 새끼 사슴을 노리며 신데렐라를 구한 척하는 것처럼요. 그런 의도에 대한 발언권은 연 대표가 더 많을걸요.”주변 사람들과 양시연은 동시에 침묵했다.“...”연정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양시연을 더욱 가까이 끌어안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같은 나이 많은 호랑이라도 어떤 사람은 노리기는커녕 그저 신경만 쓰게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