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원은 어렸을 때부터 성적이 늘 좋은 편이었고 또래 중에서 천재로 불렸다.그리고 대부분의 천재는 바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반우희의 문제 풀이를 보며 부승원은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나도 알아요. 다시 할게요.”“자꾸 쳐다보지 마세요. 긴장된단 말이에요.”“차라리... 집에 가져가서 하면 안 될까요?”기초 문제 하나 또 틀리고 자꾸 시험지를 뒤로 빼는 모습에 부승원은 인상을 찌푸렸다.그리고 빠르게 반우희 손에 쥔 펜을 가져가 문제지 위로 엑스를 그렸다.반우희는 다시 찬찬히 읽어보더니 그제야 알겠다는 듯 말했다.“아, 4번이네!”문제를 제대로 읽지 않아 실수한 것이었다.부승원은 기혼 동료가 아이들 숙제를 가르치다가 혈압이 올라간다는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다.눈앞의 반우희가 여전히 헤헤 웃고 있는 걸 보다가 부승원은 펜을 들어 반우희의 볼 위로 엑스를 그렸다.그러자 반우희는 빠르게 얼굴을 가리고 경악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부승원은 펜을 내려 두고 차갑게 말했다.“이젠 제대로 기억할 수 있겠지?”반우희가 입을 삐죽였다.“네...”“계속 해.”“네.”반우희는 도망칠 구멍이 보이지 않자 한숨을 내쉬고 다시 문제를 풀었다.연이어 정답을 맞히고 반우희가 꽤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부승원은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그래서 의자에 등을 기대 피곤한 몸을 쉬게 했다. 그러다가 집을 찾은 이유가 문서 때문이라는 게 떠올랐다.‘쯧. 저 멍청이 때문에 계획이 다 망가졌어.’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시험지를 모두 풀고 나니 시간이 많이 늦어버렸다.부승원은 부승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방을 나서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문이 빼꼼 열리고 작은 머리가 쏙 보였다.부승원은 멈칫하고 반우희를 바라봤다.반우희는 토끼 모양인 귀여운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고 볼에 그린 엑스표도 이미 지워져 있었다.“변호사님...”반우희는 늘 부승원을 말꼬리를 늘리며 불렀다.부승원은 고개를 돌렸고 서재의 온도가 후끈 올라가는
반우희는 발이 미끄러진 건지 크게 뒤로 넘어졌다!우당탕.“아이고. 내 엉덩이.”반우희는 눈 속에 파묻혀 앓는 소리를 냈다. 온몸에 찾아온 고통에 반우희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그러다가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뭐지?’몸을 일으키려고 시도하는데 상대는 이미 반우희의 옆으로 다가왔다.“변호사님?”반우희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부승원은 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와 호흡이 많이 거칠었다. 방금 창가에서 보다가 반우희가 사라지자 넘어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앉은 채로 꼼짝도 못 하는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왠지 심장이 철렁했다.“일어나지 못하겠어?”반우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큰 어른이 이렇게 크게 넘어지다니.그래서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좀 쉬고 있었어요.”부승원이 인상을 찌푸렸다.“일단 일어나봐. 어디 다친 건 아니야?”“아, 네!”굳은 부승원의 표정에 반우희는 아픈 것도 꾹 참고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움직이다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갔다.부승원은 빠르게 반우희를 부축했고 제대로 자리에 설 수 있자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몇 걸음 걸어봐.”“네네.”반우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몇 걸음 걸었으나 다리를 절뚝였다.부승원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갔다.“어디가 아픈데? 왜 다리를 절어?”반우희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별거 아니에요. 엉덩이로 넘어져서 그래요.”반우희는 다시 헤헤 웃으며 말했다.“요즘 살이 쪄서 그런지 다행히 지방이 충격을 많이 흡수해 줬어요.”“...”부승원은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오늘 집에 돌아가 지켜보고 내일 아침에도 아프면 병원 가.”반우희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시간이 많이 늦었고 더 지체를 하면 동생들이 걱정할 것 같아 다시 인사를 건네고 절뚝이며 밖으로 걸었다.부승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멀어지는 반우희를 다시 불러세웠다.“왜요?”“기사는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
부승원은 심장이 떨려왔고 이를 꽉 깨물어 겨우 표정 관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반우희를 바라봤다.반우희는 크게 심호흡하더니 손가락질하며 말했다.“봐요! 변호사님도 넘어질 뻔했잖아요!”그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내가 많이 미끄럽다고 말했잖아요.”“...”감정에 무딘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어이가 없었다.반우희는 한참 호탕하게 웃다가 부승원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꽉 쥐고 있던 손의 힘을 스르르 풀었고 얼굴도 점점 붉어졌다.사실 반우희도 완전히 감정에 무딘 사람은 아니었다.부승원은 옅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자세를 고쳐 안았다.“꽉 안아. 또 넘어지고 싶어?”그 말에 반우희는 부승원을 슬쩍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추운 겨울밤, 두 사람은 뜨거운 온도를 함께 나눴다.몰래 침을 삼킨 반우희는 조용히 부승원을 살폈고 부승원은 반우희의 숨결이 얼굴과 목 언저리에 떨어지는 걸 느끼며 온몸이 간질거렸다.주변은 아주 조용했고 눈밭을 내딛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반우희는 왠지 온 세상에 두 사람만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왜 코트 하나만 입고 있어요?”“집히는 대로 입었어.”“안 추워요?”다시 얌전해진 반우희를 슬쩍 바라보다가 부승원이 물었다.“춥다고 하면 모자 빌려줄 거야?”“당연하죠.”반우희가 냉큼 대답했다.“...”부승원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반우희가 모자를 벗으려 손을 뻗자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너나 쓰고 있어. 난 안 추워.”“그래요.”그러자 반우희는 고분고분 손을 내렸다.오피스텔 아래층부터 대문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눈이 많이 쌓여 걸음걸이가 더디었다.대문에 거의 도착하고 보니 익숙한 차량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기사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있다가 부승원이 반우희를 안고 나오자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반우희는 부끄러운 마음에 부승원더러 내려 달라고 말하려 했으나 무표
드디어 새해 아침이 밝았다.펑펑 내리던 눈이 드디어 새해 첫날엔 멈추고 따뜻한 햇살이 세상을 비췄다.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않았으나 연정훈은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며 아침상을 가지고 나타났다.연정훈은 침대 옆에 앉아 양시연을 불렀고 양시연은 아직도 이불 안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연정훈이 허리로 손을 뻗어 겨우 자리에 앉게 했다.“아직 일어나고 싶지 않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기대 칭얼거렸고 그 모습이 아기 고양이 같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어제 누가 아침 7시에 일어나 어머님 아버님께 인사 가겠다고 말했더라?”양시연은 눈을 감은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말실수예요. 아침 7시에 엄마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인사를 드려요?”연정훈도 같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런데 지금 벌써 9시가 다 되어가는걸.”“아이참. 엄마 9시에도 안 일어난단 말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허리를 잡고 품 안에 머리를 비볐다.어차피 중요한 일도 아니었으니 연정훈도 재촉하지 않고 양시연의 칭얼거림을 받아줬다.두 사람은 한참 알콩달콩하다가 고기만두 냄새를 맡은 양시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양시연이 먼저 연정훈을 향해 손을 척 내밀었다.“세뱃돈 줘요!”연정훈은 미리 준비를 해뒀고 서랍을 열어 봉투 두 개를 건넸다.그러자 양시연은 활짝 웃으며 세뱃돈을 쥐고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아기야, 새해 복 많이 받아. 아빠가 우리 두 사람한테 세뱃돈도 챙겨줬어.”그리고 양시연은 다시 연정훈의 목에 팔을 둘렀다.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연정훈은 바로 양시연을 안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씻으러 가야지.’민수희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연호민은 세운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연정훈의 부모님이 직접 세운으로 향했다.그렇기에 양시연과 연정훈은 전화로 인사를 대신했고 바로 양씨 저택으로 향했다.9시가 넘긴 시간이었으나 아래층엔 할아버지만 홀로 앉아
“널 낳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다시 아이 낳고 싶지 않아.”양지원의 말에 양시연은 과거 양지원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그러고 보니 양석진도 다시 양지원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모녀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연정훈과 양홍두가 바둑을 두는 게 보였다.양석진도 구경하고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양지원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떠났다.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자 양홍두는 그곳을 슬쩍 보다가 혀를 찼다.‘나이가 몇인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애가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말이야.’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겨우 웃음을 참았다.두 사람은 양씨 가문에 한참 머물다가 여러 친척 집을 다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그러니 양시연은 지칠 대로 지쳐버려 몸이 노곤했다.손님을 모두 보내고 연정훈은 양시연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노곤하긴 한데 잠이 오지는 않아요.”연정훈은 요즘 양시연의 말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주고 싶은 심정이었고 양시연이 따분해 보이자 소파에 나란히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승우가 매해 남산 저택에서 파티를 여는데, 같이 갈래?”“파티에서 뭘 하는데요?”“네가 생각하는 그 모든 게 있을 거야.”그러자 양시연이 눈을 반짝였다.“가요!”그렇게 두 사람은 바로 행동에 옮겼고 연정훈이 운전해 남산 저택으로 향했다.남산 저택 반경 1km 안으로 보이는 풍경 곳곳에 새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게 모두 남산 저택이 꾸민 거라 생각 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주차하고 차에서 내리자 누군가 양시연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시연 언니!”밝고 당찬 목소리가 들려오고 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그래서 입구 쪽에 있는 반우희를 향해 손을 저었고 예상대로 세 꼬맹이도 함께 보였다.양시연은 연정훈의 팔에 팔짱을 걸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다들 여기 있어요?”반우희가 대신 대답했다.“승주가 승우 씨한테 새해 인사를 해야 한다고 아우성쳤고 승우 씨가 흔쾌히 대
부승희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또각또각 이곳으로 걸어왔다.이승우는 부승희를 바라보다가 또 양시연과 연정훈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요즘 밤을 자주 새웠더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네요.”그리고 담배랑 라이터를 모두 한편에 내려 두었다.부승희는 그 옆자리에 앉더니 양시연과 연정훈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다시 이승우를 바라봤다.“대체 무슨 상황이야? 새해 전날까지 하다가 온 거야? 아주 영혼까지 털린 것 같은데?”“...”이승우는 자세를 바로 앉으며 말했다.“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어제 밤새운 건 새해 카운트 다운 때문이라고.”“어디에서 어떻게 밤을 새운 건지는 모르지.”부승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침대에서도 카운트 다운은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그러자 연정훈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말조심해.”“아이도 가진 사람이 부끄러워하긴.”그러나 양시연이 뱃속 아기를 가리키자 부승희는 바로 알겠다는 듯 입의 지퍼를 닫는 행동을 했다.“아차차. 태교도 아주 중요하다는 걸 깜빡했어요.”부승희는 양시연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기야 태어나면 꼭 우리 오빠를 닮아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해.”양시연은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부승원은 독설인 걸 제외하면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이의 성별을 막론하고 부승원처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그런데 이승우가 이런 말을 했다.“넌 말해도 참. 정훈이 아이인데 네 오빠를 닮으라고 하면 뭐가 돼?”“...”“...”부승희는 쯧하고 혀를 차더니 손에 집히는 물건을 이승우에게 던졌다.“그 입 다물어.”이승우는 부승희가 던진 빵을 손에 쥐더니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방금까지 생기가 없던 얼굴에 드디어 웃음이 번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원도 도착했다.요즘 들어 양시연에게 있어 부승원은 ‘귀인’ 같은 사람이었고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부승원을 맞았다.그러나 부승원은 아주 침착하고 무뚝뚝했고 대체 누가 대표인지
이승우와 그의 진짜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양시연도 연정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시작은 화려했지만 끝은 초라했고 결국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그야말로 이승우답게 제멋대로 굴다가 끝난 일이었다.이승우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 부승희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는 양시연조차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연정훈은 이를 단순히 해석했다.“아마도 조금 모자라서 그럴 거야.”양시연은 그 말에 장난스럽게 응수했다.“정훈 씨는 다른 사람 얘기할 때는 유독 말을 잘하네요.”연정훈은 침묵했다.“...”지금도 양시연이 다른 사람들을 힐끔거리는 것을 본 연정훈은 슬며시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물었다.“어디 보고 있어?”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에 기대 안겼고 연정훈은 한 손으로 대충 포커를 하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불평을 터뜨렸는데 이승우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포커 테이블에서 애정행각이라니 진짜 양심도 없네.”연정훈은 양시연을 흘끗 바라봤고 그녀는 눈치를 채더니 그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하면 어쩔 건데?’이승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부승희는 양시연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시연 씨도 이제 많이 뻔뻔해졌네요.”양시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곁에 오래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물들게 마련이죠.”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 대화에 어이없어하며 잠시 침묵했다.“...”이들의 유쾌한 티키타카가 오가는 동안 부승원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 그였기에 지금 그의 기분을 짐작하기는 더욱 어려웠다.얼마 지나지 않아 반우희가 이승우의 뒤에 조용히 다가왔다. 이승우는 입이 독한 편이라 그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제 뒤에 서지 마세요. 우희 씨가 내 패를 훔쳐보고 부 변호사님한테 일러바칠까 봐 무섭단 말이에요.”반우희는 순간 멈칫하며 부승원을 힐끔 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고 당황하며 더듬거렸다.“그럴 리 없어요. 저는 절대 반칙 같은 거 안 해요.”이승우는 비웃으며 응수했다.“
반우희는 솔직하게 말했다.“친구 한 명이 돈이 조금 모자란다고 해서 승주랑 상의하고 건담 피규어를 팔았어요.”“의리 있네요.”이승우가 반우희를 칭찬하자 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그 친구가 누구예요?”연정훈이 갑자기 물었고 반우희는 물으면 뭐든 답하는 성격이라 솔직하게 말했다.“장서진이요.”양시연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물었다.“그때 승주 생일 때 너희 집에 왔던 그 남자애 맞죠?”“네. 맞아요.”‘오호라.’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허리를 살짝 밀며 눈짓했다.‘정훈 씨, 엄청 예리하네요.’연정훈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고 사실 그는 반우희의 친구가 그 한 명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 만남에서 그의 관심은 온전히 양시연에게 쏠려 있었지만 장서진과 반우희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이승우는 다시 활기를 되찾은 듯 일부러 말했다.“재산 다 털어서 도와줄 정도면 진짜 친한 친구인가 보네요.”반우희는 가슴을 툭 치며 대답했다.“저랑 장서진은 함께 자랐어요. 장서진의 일이 곧 제 일이죠. 돈이 뭐가 대수겠어요.”“말 잘하네요.”이승우가 박수를 치며 그녀를 응원하듯 말한 후 일부러 부승원을 힐끗 쳐다봤다.‘쯧쯧.’부승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카드를 밀며 조용히 말했다.“끝.”이승우는 눈썹을 치켜세웠고 부승희는 제일 먼저 패배를 인정하며 말했다.“돈 내야지.”조금 떨어진 곳에서 승주가 크게 반우희를 불렀고 반우희는 모두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그쪽으로 뛰어갔다.반우희가 떠나자마자 이승우는 부승원에게 묘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반우희 씨가 너를 피하는 것 같은데?”부승원은 속으로 불쾌함을 느꼈다. 반우희가 자신의 물건까지 팔아가며 돈을 빌려준 상대가 그 남자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자신도 힘든 처지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의 구세주 노릇을 하는 거지?’이승우의 말을 곱씹으며 부승원은 미간을 찌푸렸다.‘반우희가 나를 피한다고?’곰곰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