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원이 반우희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반우희는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다가 부승원이 눈을 깜빡이자 웃음을 터뜨렸다.이어 반우희는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어서 이만 가볼게요.”그리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고쳐 썼고 부승원을 향해 말했다.“침대까지 부축해 줄 게요. 오늘엔 샤워도 하지 말고 내일 아침 일어나서 하는 게 어때요?”부승원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고 반우희가 눈을 반짝였다.“꿀물이 이렇게 효과가 좋은 건가?”부승원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정말 멍청하긴.’‘꿀물이 무슨 보약도 아니고.’부승원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반우희가 떠나려는 걸 지켜봤다. 반우희는 지하철을 놓치면 높은 비용의 택시를 타야 한다고 말했다.부승원은 손을 뻗어 반우희의 손목을 잡았다.기사를 불러 반우희를 바래다주게 하겠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사실 부승원은 반우희가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계속 종알거리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왜 그래요?”반우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잡힌 손을 바라봤다.“뭐예요? 손 놔야 내가 부축하죠.”부승원은 알아들었지만 그렇지 못한 척을 했다.더 정확하게는 반우희가 바라는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방으로 데려가면 반우희는 힘들게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우희를 빤히 바라봤다.그 시선에 기분이 이상해진 반우희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렇게 말했다.“부승원 씨, 손 놔줘요. 나 이만 집에 가봐야 한다니까요?”반우희는 아주 나긋하게 부승원을 타일렀다.부승원은 잡힌 손에서 땀이 나는 게 느껴졌고 또 방금 반우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게 묘하게 느껴졌다.“들려요?”반우희가 또 부승원을 톡톡 두드렸다.그러나 부승원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다가 다른 손으로 반우희의 보드라운 머리를 쓰다듬었다.반우희는 깜짝 놀라 두 눈을 커다랗게 떴고 부승원은
반우희는 깜짝 놀라버렸다!양시연한테 몰래 했던 말인데 부승원이 어떻게 알아버린 걸까!‘설마 시연 언니가...’‘시연 언니 나빠!’반우희는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고 따뜻한 모자까지 쓰고 있는 탓에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부정을 했고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뒤로 물러서며 손가락질했다.“변호사님 사실 취한 거 아니죠?”“그래.”‘뭐지?’방금 부승원의 볼을 잡아당기던 행동이 떠올라 반우희는 깜짝 놀라버렸고 손까지 덜덜 떨렸다.그래서 도망이라도 갈까 했는데 몰래 살펴본 부승원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왜 그러지?’반우희는 한 번 더 곁눈질했다.‘정말 취한 거야? 아닌 거야?’‘술 마신 사람들은 보통 취해도 아닌 척하잖아.’반우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조금 다가가 부승원을 휙 밀쳤다.부승원은 여전히 표정 변화 한번 없었다.그래서 반우희는 긴장되던 기분이 조금 풀어졌고 좀 더 용기를 내어 손가락으로 부승원의 볼을 콕콕 찔렀다.“...”부승원은 어이가 없어 차가운 시선으로 반우희를 노려보았다.그러나 이번에도 화를 내지 않는 부승원을 보며 반우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가슴을 내리 쓸었다.“아, 깜짝이야. 정말 멀쩡한 줄 알았잖아요.”그리고 그 옆으로 척 앉으며 말을 꺼냈다.“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건 다 시연 언니가 변호사님한테 잘 보이려고 거짓말한 거예요.”부승원은 잠시 침묵했다.“시연 씨가 알려줬다고 말한 적 없어.”반우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겨우 안심했던 심장이 다시 쿵쿵 뛰었다. 그래서 몰래 부승원의 표정을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정말 취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멀쩡한 것 같은데?’부승원은 반우희 옆으로 조금 더 다가가 시선을 고정했다.더 정확하게는 반우희의 볼살로 향했다.모자가 꽉 쪼인 탓에 볼살이 더 통통하게 보였다.양시연이 자주 반우희의 볼살을 꼬집던 걸 부승원도 지켜봤었다.반우희는 어떻게 변명을 늘어놓을지
반우희는 이번만큼은 먼저 예상했던 터라 부승원과 너무 가깝게 붙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더니 부승원을 향해 손가락질했다.“또 볼 꼬집으려고 그러는 거죠? 흥, 꿈 깨요!”‘내가 이 볼살을 찌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걸 변호사님이 홀랑 꼬집게 할 수는 없지.’‘흥흥.’이런 생각을 하며 부승원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부승원은 가만히 자리에 기댄 채로 물끄러미 반우희를 바라봤다. 부승원의 시선은 깜빡이는 반우희의 눈에서 발그스름한 두 볼, 그리고 입술로 떨어졌다.그러다가 부승원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부승원도 자신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러나 술을 마신 덕에 그 생각이 잘못된 거라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반우희는 여전히 부승원의 손과 씨름을 하고 있었고 부승원이 한 번 더 끌어당기자 또 눈앞으로 다가갔다.반우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이젠 인내심이 바닥이 났다.‘그만 좀 해요!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요!’그러나 그때, 나른하게 기대앉아 있던 부승원이 갑작스레 고개를 들더니 반우희의 앞으로 다가갔다.하마터면 코끝이 닿을 뻔했고 깜짝 놀란 반우희는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손이 꽉 잡혀 겨우 고개만 살짝 돌릴 수 있었다.반우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부승원이 잠시 멈칫했다.그렇게 시선이 마주치고 부승원은 여전히 조용히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반우희는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부승원이 키스하려는 것 같았다!그래서 숨도 크게 내쉬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뻗어 부승원을 밀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변, 변호사님, 이 집에 홈캠이 있는 걸 알고 있는데 내일 아침 후회...”부승원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입술로 향하자 반우희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그리고 예상대로 부승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점점 더 다가왔다.처음 닿은 입술이 차가웠으나 말랑거렸다.반우희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쿵쿵...반우희는 머릿속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부승원은 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멀쩡했고 현재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다만 알코올의 힘을 빌려 내일은 잠시 잊기로 했다.부승원은 키스 한 번으로 부족했고 머릿속엔 오래전 그날 밤이 떠올랐다.그날엔 키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일을 했었다.반우희와의 키스는 달콤했고 점점 더 욕심이 났다. 그래서 반우희의 손목을 잡고 품 안으로 더 넣었다.그러다가 반우희의 숨소리가 가빠지자 부승원은 다정하게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또 참지 못하고 얼굴을 맞대다가 반우희의 귓불에 키스했다.반우희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먼 곳의 크리스탈 조명을 바라보다가 점점 이성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그래서 부승원이 방심한 사이 손을 뻗어 단숨에 부승원을 밀어냈다.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했던 부승원은 자칫하다가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그러나 부승원은 다행히 자세를 바로잡아 떨어지는 불상사를 피했고 반우희의 얼굴을 마주하기도 전에 다시 소파 등받이로 밀려났다.등 뒤로 푹신한 소파 쿠션이 느껴졌고 안 그래도 어지럽던 머릿속이 확 밀려 뒤죽박죽이 되어갔다.반우희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그러나 고민하다가 빠르게 몸을 돌려 도망을 갔다.부승원은 소파에 멍하니 앉은 채로 머리를 재부팅했다.그때, 반우희는 빠르게 집 밖으로 나갔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어 1층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안의 자신을 확인하며 이마의 온도를 체크했다. 사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빨갛게 되었을지는 예상이 되었다.반우희는 자기 입술을 매만지며 아직 남은 온기를 느꼈다.그러자 얼굴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띵.아래층에 도착하고 반우희는 멍하니 밖을 걸었다. 그리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서는 찰나 찬 바람이 불어오자 지하철을 타려면 핸드폰이 필요하다는 게 떠올랐다!‘핸드폰을 어디에 뒀더라?’‘
반우희는 어려운 고민 끝에 위층으로 올라가 핸드폰을 가져오기로 했다.‘가방만 챙기고 튀는 거야.’‘부승원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어쨌든 부승원이 먼저 시작한 거니까 나한테 책임은 없어.’‘그래. 그게 맞아!’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고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런데 엘리베이터는 바로 1층에 멈춰 섰다.‘응?’‘이런 우연이?’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먼저 타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반우희는 그 사람이 부승원 일 거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고 귀신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바로 몸을 돌려 도망가려 했다.이번엔 부승원이 한발 빠르게 반우희 패딩 모자를 확 잡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었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이 닫히고 반우희는 또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두 사람은 다른 버튼을 누르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부승원은 무의식적으로 반우희를 잡았으나 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했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아등바등했다.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자 얌전히 그 자리를 지켰다.그때, 머리 위로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 목소리에서 알코올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핸드폰도 없이 어떻게 집으로 가려고?”반우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그걸 아는 사람이 물어?’“일단 이거부터 놓고 말해요...”반우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부승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모자에서 손을 놓았다. 자신이 모자를 움켜쥔 흔적이 남자 대신 정리도 해주었다.반우희는 모자가 불편하게 느껴져 손을 뻗어 정리하려 했다.그러다가 부승원의 손과 닿게 되었다.그 순간 전기가 통하듯 찌르르했고 황급히 손을 내렸다.“...”엘리베이터 안의 분위기는 너무 이상했고 부승원은 다시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래서 모자를 정리해 주고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반우희는 밖으로 쏙 나가버렸다.그 뒤의 남자도 따라 밖으로 나왔다.반
부승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만 어떻게 입을 열지 난감했다.그래서 말없이 조용해진 반우희를 자꾸 힐끔거렸다.‘오늘 밤 일에 대해 반우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그러다가 자신의 이미지가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생각되었고 인상을 찌푸린 채로 크게 심호흡했다.다른 한편 쪼그리고 앉아 있는 반우희는 사실... 부승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감히 부승원을 바라볼 자신이 없는 거였다.‘젠장! 어떡해!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너무 어색해 죽을 것 같아.’반우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목도리를 다시 두르며 부승원을 애써 외면했다.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릴 때면 방금 부승원과 키스했던 게 떠올라 부승원이 오해라도 할까 빠르게 표정을 풀었다.‘엉엉... 어떡해.’반우희는 순결을 빼앗긴 것 같아 입술을 버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예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던 마음이 부승원의 한방에 아예 무너지고 있었다.회사 다니는 건 그렇다고 쳐도 집 청소 알바는 이제 그만둬야 할 것 같았다. 다시 마주치면 그냥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을 것이다.‘내가 부자 되는 꼴을 못 봐요.’부승원은 반우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오로지 붕괴된 이미지를 되찾으려는 계획만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자신이 얼마나 반우희를 신경 쓰고 있는지를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하지만 부승원은 자신이 반우희의 눈에 변태로 보이는 건 피하고 싶었다.두 사람이 동상이몽을 하는 동안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유리문을 통해 보니 부승원의 차가 도착한 게 보였다.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온몸으로 문을 밀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문은 무거운 편이라 반우희는 힘에 부쳤지만, 부승원이 바로 그 뒤에 서서 손으로 힘을 실어주었고 문이 손쉽게 열렸다.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다가 빠르게 틈을 타 밖으로 나섰다.그리고 부승원도 그 뒤를 따르려는데 반우희가 휙 몸을 돌리며 말했다.“변호사님은 나오지 마세요!”반우희는 뒷걸음질하며 말했다.“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세요. 안
부승원이 이상하다.이건 며칠 동안 모든 회사 직원이 내린 결론이었다.“그제부터 자꾸 사소한 실수를 하셨어.”“맞아. 자꾸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 같기도 하고.”“아까는 내가 눈앞에 서 있는데 날 다미 씨라고 부른 거 있지? 난 강아영인데.”양시연은 따뜻한 우유 한잔을 들고 회의실을 지나치다가 그 대화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양시연도 요즘 들어 부승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은 또 한 명 있었는데...그게 바로 반우희였다!반우희는 늘 간식 시간이 되면 시간 맞춰 양시연의 주변을 맴돌며 간식을 먹는 낙으로 살았었다.그런데 이 며칠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더니 먼저 말을 걸어도 속이 불편해 간식을 끊었다며 거절했었다.‘참 이상하단 말이지!’반우희는 부승원 쪽에서 무슨 일인지 알아내 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그래서 부승원의 비서부터 손을 쓰기로 했다비서는 이상한 점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이었으나 털어놓은 사람이 없어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양시연에게 낮은 소리로 속닥였다.“백 퍼센트 두 사람이 싸운 거예요. 그것도 엄청 크게 다툰 거죠.”“정말요?”양시연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두 사람이 어떻게 다퉈요?”사실상 부승원이 늘 우세를 가지고 반우희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비서는 살짝 웃음을 터뜨리더니 양시연을 향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러니까 흥미로운 거죠. 우리 변호사님 일상에 변화를 일으킨 일이면 아주 큰 일 아니겠어요?”그리고 비서는 주변을 살피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어쩌면 아주 민망한 일인지도 몰라요. 변호사님이 실수한 거라 그렇게 당당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요.”그 말에 양시연은 점점 호기심이 깊어져 갔다.오후 시간, 사람이 드물 때를 틈타 양시연은 길 가던 반우희를 잡아 사무실로 끌었다.“어어! 이러시면 안 돼요!”반우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쫑알거리며 기회를 보아 도망가려 했으나 양시연이 임신한 걸 생각해 결국 얌전히 끌려갔다.“시연 언니 왜 그래요?”양시
“내가 돈만 많았어도 회사 때려 치고 더 좋은 사장 아래에서 일했을 거예요.”반우희가 양시연에게 했던 말을, 양시연은 바로 냉큼 부승원에게 고자질을 했다.부승원은 그 옆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다가 하던 일을 멈췄다.양시연은 예민하게 그 변화를 캐치했다.“부 대표님, 소감이 어떠신가요?”그리고 농담 섞인 목소리로 부승원을 취재하듯 물었다.부승원은 슬쩍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본인이 할 일이나 완성하시죠.”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대체 누가 진짜 회사 대표인 거야!’사실 부승원이야말로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이튿날 잠에서 깬 부승원은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반우희에게 키스했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날 아침, 부승원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출근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써도 연차를 쓸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일단 해야 할 일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회사를 나갔다.그러나 회사에서 반우희를 마주치는 순간 부승원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반우희는 아예 부승원을 모르는 사람 취급하더니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몰래 빠져나갔다.예전에는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애용하던 반우희였지만 부승원이 안에 탄 걸 확인하고 얌전히 사람으로 꽉 찬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비집고 올랐다.이렇게 선을 긋는 반우희를 보며 무언가 변명이라도 하려던 결심은 눈 녹듯 사라져 갔다.결심이라고 말하는 것도 참 웃긴 상황이었다.어쩌다가 반우희와 대화하는 일에 결심까지 해야 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그리고 냉전이 시작된 것도 참 이상했다. 첫 만남에 대화를 망설이자 그 뒤의 만남은 더 어색해졌고 입을 열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반우희가 자신을 피한 첫날엔 그냥 체면을 구겼다고만 생각했다.그러나 두 번, 세 번... 반우희가 자신을 피하는 차수가 많아질수록 점점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부담이 생겼다. 부승원은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