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연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연정훈을 쳐다봤다.연정훈의 시선은 자연스레 양시연의 얼굴로 향했다.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양시연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연정훈에게 손을 뻗어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빨리 안아줘요.”연정훈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휠체어에서 양시연을 안아 올렸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에 팔을 걸고 로맨틱하게 꾸며진 식탁을 보며 연정훈에게 뽀뽀했다.“언제 이렇게 꾸밀 생각을 다 했어요? 너무 예뻐요.”“누가 어젯밤 아들만 보고 있을 때 꿈에서 계획한 거야.”양시연은 뾰로통해진 연정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양시연이 식탁 앞에 자리를 잡자 연정훈이 준비한 요리를 하나씩 설명했다. 그리고 그때 나비와 영준이가 고개를 뿅 하고 내밀었다.‘어머!’양시연은 알파카 두 녀석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너희 둘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아까부터 있었는데 네가 못 본 거야.”양시연은 턱을 괴고 연정훈을 향해 말했다.“정훈 씨만 보느라 알파카가 눈에 들어오겠어요?”그 말에 연정훈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양시연도 기분이 한껏 좋아졌고 연정훈이 건네 온 스테이크를 한입 먹으며 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심으로 리액션을 했다.‘너무 맛있어요.’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뽀뽀로 답사하려 했다.그런데 스테이크를 먹게 좋게 썰어주고 이제 비빔밥을 비비던 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기분이 나빠서 뽀뽀 서비스는 거절할 거야.”양시연은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왜 자꾸 아들한테 질투하고 그래요?”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논리정연하게 말했다.“아들이 눈에서 멀어지면 불안해하고 그렇게 끔찍하게 아끼다가, 이제 커서 아내라도 찾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건 완전 손해잖아.”그 말에 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아내 생기면 난 아예 뒷전일까요?”“그건 모르지.”“그러니까 정훈 씨 말 안 믿을래요.”“나도 아들 노릇 해봐서 아는데 적어도 너보단 잘 알지 않
집으로 돌아온 이튿날, 양지원과 양석진이 양시연을 보러 왔다. 그리고 모녀는 어떻게 반우희에게 보답을 할지 상의했다.“그 아가씨 돈을 좋아한다고 들었어.”그건 사실이었기에 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연정훈과 다른 얘기를 하던 양석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그래도 돈을 덥석 쥐여 주는 건 너무 정 없지 않겠어?”양지원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그건 그래요.”양시연은 양지원이 생각을 바꾸기 전에 빠르게 반우희를 위해 기회를 잡았다.“아니에요! 돈이 최고죠. 돈 주면 제일 좋아할걸요.”양지원과 양석진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고 또 얼마나 주는 게 적당할지 고민했다.그러자 양시연이 말했다.“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좋았어. 그건 쉽지.’양지원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양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양혁수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양시연에게 사고가 났을 때, 양지원은 양혁수에게 바로 알리지 않았다. 이튿날에 전하긴 했으나 변백호와 오테라에서 급한 볼일을 처리하느라 숨 돌릴 시간도 없었다.그리고 갑자기 걸려 온 전화에 양시연은 양혁수가 경인으로 돌아온 줄만 알았다.그러나 양혁수는 양시연의 안부를 묻다가 바로 이런 질문을 했다.“지금 다들 양민아 찾고 있는 거지?”양시연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오후.반우희와 세 동생은 낮잠을 자고 있다가 데리러 온 카니발을 타게 되었다.승주는 좌석에 편히 기대앉아 좌수석의 사람에게 물었다.“집사 할아버지, 저희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예요?”집사는 양지원을 도와 부동산 관리를 했었고 양씨 가문에서 오랜 세월 근무했다. 그리고 이젠 나이를 먹어 머리가 희어졌다.반우희의 말에 따르면 척 보아도 친근한 집사 할아버지로 보였다고 한다.“승주 도련님, 도착하시면 알게 될 겁니다.”승주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도련님? 흐... 소름’승주뿐만 아니라 반우희와 두 동생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어깨를 쓸어내렸다.얼마 뒤, 차량은 물 좋고 산 좋은 위치의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반우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부승원은 갑자기 반우희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흥분에 겨운 반우희는 횡설수설하다가 이 말 한마디만을 반복했다.“변호사님, 여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요?”‘뭐가? 대단해?’“정말 너무 믿기지 않아서 미치겠어요.”핸드폰 넘어 반우희는 크고 넓은 별장 창고에 있었고 산더미처럼 쌓인 현찰을 마주하고 있었다.네 사람은 집사의 옆으로 서서 이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입을 떡 벌렸다.얼마 뒤 핸드폰을 내려 둔 반우희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집사의 팔을 살짝 잡으며 물었다.“집사님, 여기 현찰은 총 얼마예요?”“얼마 안 됩니다. 아마 160억쯤 될 겁니다.”반우희는 눈이 텅 비었고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얼마 안 되는데... 160억이라고요?”반우희는 지금 자신이 외계어를 듣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고 또다시 물었다.집사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이 외에도 600억가량의 자산과 지분이 있으며 잠시 전문가가 직접 방문해 반우희 씨를 위한 양도 계약서를 진행할 겁니다. 양 대표님께서 반우희 씨가 현찰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일부분만 뽑은 겁니다.”“...”‘정말 외계어인가 봐.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네.’반우희는 산더미처럼 현찰을 보다가 그대로 집사를 향해 쓰러졌다.방금 힘이 풀린 승주는 반우희의 몸 위로 쓰러져 있었고 견디지 못한 희주도 승주의 위로 몸을 기댔다.오직 동준만이 침착하게 검은 뿔테 안경을 벗어 소매로 닦더니 다시 안경을 고쳐 쓰고 일부 현찰을 꺼내 찬찬히 살폈다.현찰인 게 확실해지자 동준은 또 빠른 걸음으로 무리로 돌아가 희주의 몸으로 몸을 기댔다.“...”‘꽤 신중한 아이네. 직접 확인해 보기 전엔 놀라지도 않네.’세 시간 뒤.반우희는 거실 큼지막한 소파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위층의 승주가 아래층을 향해 외쳤다.“들려?”동준이 대답했다.“안 들려...”“...”‘안 들리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정말 미쳤어. 말도 안 돼!’반우희는 말도 안 되게
별장 거실에 모여 반우희는 가족회의를 진행했다. 회의 주제는 졸부라고 해도 초심을 변하지 말자, 였다.“우린 그래도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해. 지금 너희 너무 사치 부리는 거라고!”그리고 반우희는 동주의 접시에서 썰어 놓은 스테이크를 뺏어갔다.‘어머. 너무 맛있다.’‘역시 비싼 건 다르네!’반우희가 쩝쩝거리다가 또 한 입 먹으려는데 동준은 아예 접시에 얼굴을 파묻고 고기를 흡입하고 있었다.‘아이고. 너무 천박해.’희주는 우아하게 자리에 앉아 온몸에 각종 액세서리를 걸고 있었다.어린 나이에 벌써 겉멋이 들어버렸다.승주는 계산기를 척 꺼내더니 반우희에게 총재산을 알려줬다.“이 별장의 집값은 456억이고 160억의 현찰과 600억가량의 지분과 재산이 있다고 했어요.”반우희가 손을 들어 승주의 말을 잘랐다.“너 지분이 뭔지 알아?”“다 전문가한테 맡기면 돼요.”승주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제 말을 계속 들어주세요.”“그래...”“그 외에도 차고에 세워진 두 차량과 비싼 인테리어, 그리고 창고에 있는 장식품과 식량, 그리고 집사 할아버지의 리스트를 확인했을 때 적어도 200억 가치는 있을 것 같아요.”반우희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굽혀 계산했다.그때 희주가 대신 대답을 했다.“1416억이요.”반우희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래서?”승주는 동준을 바라보다가 검은색 뿔테를 자신이 고쳐 쓰며 분위기를 잡았다.“1400억가량이 있다고 했을 때, 은행의 가장 낮은 이율로 보아도 매해 20억 이자를 받을 수 있어요.”반우희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세상에 그렇게 많은 돈이!’승주는 한숨을 연거푸 내쉬다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말했다.“이게 뭘 의미할까요? 우린 눈만 뜨면 600만이 통장에 찍힐 테고 돈은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지기만 할 거예요!”승주는 다시 표정을 굳히며 가식적으로 말했다.“너무 큰 액수라 부담인걸요?”“...”‘정말 말이라도 못하면.’그러나 반우희는 점점 마음이 불안해졌다. 양지원이 이번엔 너무
양홍두가 딸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제기했지만 양지원은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반우희를 친딸처럼 대할 생각이었다. 그는 차라리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거액을 선물했다.조용히 지켜보던 표세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반우희를 양녀로 삼겠다고 선언했다.“어떤 방식으로 양녀로 받아들이실 건가요?”“길일을 정해 정식으로 연회를 열 생각이야.”연정훈이 말했다.‘그렇다면 꽤 정식적인 절차로 진행되겠군.’양시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며 말했다.“당신 어머니께서는 연회를 여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반우희 씨가 아직 승낙도 안 했는데 어머니는 벌써 부승원의 부모님을 초대할 준비를 하고 계셔.”‘푸.’양시연은 바로 눈치를 챘다.얼마 전 부승원의 어머니가 반우희를 만나러 갔을 때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후로 연락이 뜸했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반우희의 배경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연씨 가문에는 딸이 없었고 표세연 역시 특별히 아끼는 후배가 많지 않았다. 만약 반우희가 그녀의 양녀가 된다면 신분이 단숨에 상승할 것이고 이 변화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아질 터였다.“당신 어머니랑 부승원 씨 어머님이 사이가 안 좋으신 건가요?”“그래도 꽤 가까운 친구 사이야.”양시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왜 이렇게 대놓고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죠?”연정훈은 정곡을 찔렀다.“자신이 비를 맞아봤으니 다른 사람도 같은 비를 맞아야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거지.예전에 자신이 무시했던 며느리가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하는 걸 경험했으니 이제는 그 일에서 자신만 벗어날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친구란 함께 비를 맞으며 나아가는 거지.’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것도 나쁘지만은 않네요. 보니까 부승원 씨는 반우희 씨에게 진심이던데 당신 어머니 덕분에 둘의 관계가 더 순탄해질 수도 있겠어요. 게다가 앞으로 우리와의 인연도 더 단단해질 테고요.”감정적으로 보면 양
“반우희 씨가 바로 그 자리에서 부승원이 자기 남자 친구라고 선언했어.”연정훈이 말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양쪽 어머님들의 표정이 확 바뀌더라.”양시연은 아들을 품에 안은 채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다.“당신 어머니가 애초에 속셈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된 거죠. 이제는 계획대로 되지도 않고 어정쩡한 상황이 돼버렸네요.”연정훈은 그녀 옆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속셈이 있는 게 아니라 엄마는 진심으로 반우희 씨를 딸로 맞이하고 싶었던 거야.”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잘된 일이네요. 나는 원래 반우희 씨가 좋았어요. 그런데 아버님께서 아기 이름 정하셨다고 하지 않았어요?”그것은 그들 가족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었고 연정훈은 외투 주머니에서 작은 행운 부적을 꺼내 보였다.“이건 어머님께서 직접 구해오신 건가요?”연정훈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어느 신령사분이 만든 건지 한번 맞혀봐.”양시연은 그를 째려보며 피식 웃었다.“이제 그분을 신령사라고 부르네요? 전에는 당신 어머님이 당신이 그 사람을 점쟁이라고 불렀다고 엄청 뭐라 하시던데요.”그 사람은 바로 예전에 연정훈에게 반지를 주며 인연을 맺어줄 거라고 했던 점쟁이였다.연정훈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모르는 게 죄는 아니지. 그 반지가 그렇게 효과가 있을 줄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반지를 낀 그날 바로 아내가 생길 줄이야.”양시연은 피식 웃으며 연정훈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대며 그가 행운 부적을 천천히 펼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부적에는 아이의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고 작은 쪽지에는 ‘양승윤’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이름에는 ‘영광을 계승하고 희망을 이어가라’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그 이름은 의미가 깊어서 연재혁이 큰손자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고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정해졌다.“어떻게 생각해? 마음에 안 들면 바꿀 수 있어.”연정훈이 말했다.양시연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보였고 행운 부적을 건네받아 아기 침대에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
반우희는 표세연에게 붙잡혀 결국 다른 사람들과 동행하지 못했다.채정애는 부승원을 몇 번이고 노려보았지만 부승원은 아들로서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기로 하고 조용히 집까지 바래다주었다.가는 길에 채애정은 오랜 친구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며 살짝 억울해했다.“표세연이 예전에 엉망으로 행동한 걸 왜 나까지 끌어들이는 거야? 난 너희 아버지를 그냥 속으로만 못마땅해했지 겉으로 내색한 적은 없어. 반우희 씨를 보러 갔을 때도 충분히 예의를 갖췄다고. 사람은 행동으로 판단해야지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는 게 아니잖아?”부승원이 말했다.“행동으로 판단했죠. 그래서 반우희를 외국 유학 보내려 한 거였어요?”채애정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짜증 나서 미칠 것 같아. 괜히 아들을 낳았나 싶다.'“어쨌든 결국 안 보냈잖아?”“그건 내가 잘한 거죠. 당신들이랑 무슨 상관이에요?”채애정은 속으로 혀를 찼다.반우희가 사람들 앞에서 그냥‘남자친구’라고 한마디 한 걸 두고 뭐가 그리 자랑스럽다고 친엄마 앞에서까지 우쭐대는지 알 수 없다.채정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됐어. 나랑 네 아버지는 이제 상관 안 할 테니까 네가 알아서 해. 결혼할 거면 결혼하고 연애할 거면 연애하고.”‘어차피 네가 우리 말을 들을 리도 없잖아.’부승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반우희와의 미래에 대해서는 이미 계획이 있었다.채정애를 집에 데려다준 후 그는 원래 반우희를 다시 데리러 가려고 했지만 반우희는 세 명과 함께 연씨 가에서 놀다 갈 거라며 오늘 밤에는 안 간다고 했다.전화가 뚝 끊기고 나서 그는 한동안 침묵에 빠졌고 집으로 돌아와 침울한 얼굴로 샤워하러 들어갔다.교통사고 이후 반우희는 아직 회사로 복귀하지 않았다. 몸은 이미 회복되었고 복귀하기로 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양지원에게 거액을 받은 후로는 복귀 얘기를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부승원은 원래도 바빠서 함께 출퇴근할 때조차 마주치는 시간이 적었는데 이제는 아예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어졌다. 그제야 겨우 그녀를
식탁 앞에서 반우희는 은은한 분위기의 조명을 켰다.부승원은 앞에 놓인 케이크의 표면이 고르지 않다는 것을 보고 사 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묻기도 전에 반우희는 먼저 말했다.“이건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부승원은 케이크 위에 둥글고 통통한 복숭아 모양을 보고 마음에 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많은 사람에게 시달려 있었던 그가 이 케이크를 언제 만들었을지 궁금했다.부승원이 말했다.“내 생일은 이미 며칠 지나서 굳이 이렇게 축하해 줄 필요 없어.”“그럴 순 없죠.”반우희는 턱을 괴며 작은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당신은 내 남자친구잖아요. 매년 당신 생일마다 축하해 줄 거예요. 그날 사고가 없었으면 그날 바로 축하해 줬을 텐데.”“그날도 케이크 만들었어?”“네. 그날은 이거보다 더 잘 만들었어요.”부승원은 케이크를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이것도 마음에 들어.”반우희는 기뻐하며 부승원의 옆으로 살짝 다가갔고 그녀는 늘 그에게 가까이 있는 게 좋았다.부승원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았고 그녀가 예전처럼 자신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반우희가 조용히 물었다.“오늘 엄마가 짓궂은 농담 많이 했는데 기분 나쁘지 않았어?”부승원은 숟가락을 들어 케이크 한 숟가락을 먹었다.“아니.”반우희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힘껏 그의 얼굴에 입을 맞췄고 몸을 일으켜 하나씩 음식을 소개했다.부승원은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았지만 반우희가 직접 만든 것이라 예의상 하나하나 먹어 주었다. 맛은 특별하지 않았고 재료는 지나치게 화려했으며 금박의 양이 너무 많았다.마지막까지 다 먹고 난 후 부승원은 입을 닦으려던 종이에 금빛 가루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반우희는 승주의 일 처리가 지나치다며 불평했지만 정작 그녀도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부승원에게 음식을 먹여 주는 틈틈이 앞으로의 계획을 전했다.“집사 할아버지께서 나한테 수업 하나 신청해 줬어요. 성산시에 가서 한 달 정도 있어야 해요.”부승원은 잠시 멈췄다.“뭐 배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