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인님도 군인이신가요?”’다무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윤구주에게 물었다.조금 전 윤구주는 오로지 검을 보고 단번에 다무의 신분을 추측했다. 그래서 다무는 꽤 놀란 상태였고 저도 모르게 윤구주에게 물었다.윤구주는 싱긋 웃기만 할 뿐, 자신이 구주군의 창시자이며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최강자라는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윤구주는 그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고 할 수 있죠.”윤구주도 한때 군인이었다는 말을 듣게 되자 다무는 매우 흥분했다.“실력이 그렇게 대단하신 이유가 있었네요. 정말로 우리 화진의 군인이셨군요!”다무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은인님은 아마 예전에 장군이셨겠죠? 당시 우리 구주군은 정말 유명했어요. 특히 우리 왕은 천하무적의 최강자였죠!”용맹스러웠던 과거를 떠올린 다무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여실히 드러났다.“어르신, 혹시 왕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윤구주가 궁금한 듯 묻자 다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쉽게도 본 적은 없어요. 솔직히 얘기해서 전 74군단의 취사병이었을 뿐입니다. 대도팀 팀원은 아니었죠. 그래서 저 같은 사람들은 신화와도 같은 그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다무가 머쓱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네? 조금 전에는 대도팀 팀원이라고 하셨잖아요.”윤구주는 궁금한 듯 말했고 다무는 멋쩍게 웃었다.“하하, 아까는 설국의 그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얘기한 겁니다. 사실 저 같은 노인이 무슨 수로 제74군단의 팀원이 되겠습니까? 전 그저 주방에서 일하는 평범한 취사병이었을 뿐이에요.”다무는 드디어 솔직히 얘기했다.사실 다무는 조금 전 설국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일부러 자신이 제74군단 대도팀 팀원이라고 했다.74군단은 설국을 이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다무를 물끄러미 보았다. 다무는 나이가 꽤 많은 편이라서 74군단 대도팀의 팀원일 수가 없었다.윤구주는 평범한 취사병이 설국의 건장한 병사를 죽일 수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어르신, 전 어르신이 존경스럽습니
다무는 그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했다.“알고 있죠. 은인님은 국경 쪽에 가보고 싶은 건가요?”“네!”“그러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저도 국경에 안 가본 지 오래됐거든요!”노인은 갑자기 흥분하며 말했다.“그러면 부탁드리겠습니다!”윤구주가 말했다.“별말씀을요. 은인님은 저희 마을 사람들을 구해준 은인이신데 그곳까지 안내해 드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죠. 괜찮으시다면 잠깐 상황 정리를 한 뒤 안내해 드려도 괜찮을까요?”다무가 말했다.“좋아요.”다무는 부족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다무가 노약자들을 돌보고 있을 때 7, 8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윤구주의 앞에 섰다.“형! 우리 할아버지랑 같이 국경 쪽에 가는 건 설국의 나쁜 놈들을 물리치기 위해서인가요?”소년은 윤구주가 하늘에서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구해준 순간부터 윤구주를 신이라고 여겼다.아이는 반짝이는 눈망울로 윤구주를 바라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구주는 웃으면서 쭈그려 앉아 대답했다.“그래.”“와! 형, 그러면 저도 데려가면 안 돼요? 저도 군인이 되고 싶어요!”소년이 갑자기 군인이 되고 싶다고 하자 윤구주는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왜 군인이 되고 싶은 거야?”“군인이 되면 형처럼, 할아버지처럼 나쁜 사람들을 무찌를 수 있잖아요! 형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퇴역한 뒤로 매일 밤 제게 구주군이 얼마나 용맹한지를 얘기해 주셨어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평생 가장 후회되는 것이 전설 속의 구주왕을 만난 적이 없는 거라고 하셨어요. 만약 제가 군인이 되어서 할아버지를 대신해 그 소망을 이루어준다면 할아버지는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소년의 말을 들은 윤구주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걱정하지 마. 너희 할아버지는 분명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거야!”‘응?’“형, 그 말이 사실인가요?”아이의 질문에 윤구주는 대답하지 않았다.그가 바로 그 전설 같은 존재, 천하무적의 구주왕이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그들의 앞에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윤구주의 정체를 몰랐다.“아이야, 앞으로 인연이
윤구주는 그 말을 듣더니 곧바로 대답했다.“네.”다무는 낙타를 이끌고 소년의 앞에 섰다.“할아버지는 이틀간 집에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집을 잘 지켜야 해. 돌아오게 되면 할아버지가 맛있는 간식을 사줄게!”7, 8살쯤 되는 소년은 웃으면서 가슴팍을 툭툭 쳤다.“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집은 저한테 맡기세요!”다무는 손자의 말을 듣더니 미소 띤 얼굴로 아이의 얼굴에 뽀뽀했다.“그러면 할아버지는 가볼게.”말을 마친 뒤 다무는 손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작별 인사를 나눈 뒤 다무와 윤구주는 각자 낙타를 탄 뒤 인적이 드문 흑여산맥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다무의 말대로라면 이곳에서부터 국경 지역까지 가려면 적어도 이틀이 걸렸다.사실 윤구주는 날아서 가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진짜 능력을 선보이면 다무가 겁을 먹을까 봐 걱정되어 그와 함께 낙타를 타고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흑여산맥은 아주 황폐할 뿐만 아니라 날씨도 아주 추워서 이곳에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가는 길에 하늘에서 매 몇 마리가 나는 것이 이따금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살아있는 생물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다무는 입담이 좋아서 가는 길 내내 윤구주에게 지난 2년간 국경 지역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윤구주가 죽었다고 알려진 뒤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쳤던 구주군은 문아름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리고 2,000명쯤 되는 군인들로 이루어진 국경수비대가 현재 국경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그러나 작년부터 설국은 끊임없이 흑여산맥에 병사들을 보냈고, 심지어 설국의 세나스 장군도 흑여산맥의 국경 쪽에 온 적이 있었다.현재 흑여산맥에 주둔하고 있는 설국 군인들은 대략 10만 명 정도 되었고, 반대로 화진은 겨우 2,000명뿐이었다.그것이 설국 병사들이 대놓고 화진의 영토에 침입한 이유 중 하나였다.“은인님은 모르시겠지만 설국 놈들은 비록 수가 많긴 하지만 솔직히 얘기해서 만약 천하무적인 구주왕이 계셨더라면, 우리 구주군의 한 군단이 이곳에
다무는 비록 아주 두꺼운 밍크를 입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흑여산맥의 찬바람을 이길 수는 없었다.거침없이 휘몰아치는 찬바람이 뺨에 닿으면 얼굴이 칼에 베이는 것만 같았다.“헉, 헉.”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다무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의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큰일이에요. 하늘을 보니 눈보라가 칠 것 같아요. 은인님, 저희 하룻밤 쉬었다가 다시 출발할까요?”윤구주는 어둑어둑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괜찮아요.”“하지만 이 흑여산맥의 눈보라는 정말 무시무시한걸요. 만약 저녁에 정말로 눈보라가 친다면 얼어 죽을지도 몰라요.”다무가 말을 마치자마자 윤구주는 갑자기 허공에 대고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부적이 나타나자 윤구주는 손을 들어 그것을 톡 쳤고 곧 빛이 다무를 감쌌다.“제가 있으니 마음 놓고 길을 재촉해도 돼요.”윤구주가 말을 마쳤다.조금 전까지 찬바람 때문에 추위에 덜덜 떨던 다무는 윤구주의 빛이 몸을 감싸는 순간 한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빛에서부터 전해졌다. 다무는 마치 엄동설한이었다가 화창한 봄날을 맞이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빛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다무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세상에, 정말 놀랍네요! 이 빛의 막에서 온기가 느껴져요! 은인님은 정말 대단하시군요!”다무는 이렇게 신기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참지 못하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보잘것없는 재주인걸요. 자, 우리는 계속 가요.”말을 마친 뒤 두 사람은 계속해 길을 재촉했다.곧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곧 눈보라가 칠 것만 같았다.차가운 바람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며 흑여산맥에서 기승을 부렸다.싸늘한 돌풍이 불어옴과 동시에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했다.그러나 윤구주의 보호막을 두르게 된 다무는 한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걸으면 걸을수록 땀이 날 정도였다.다무는 윤구주를 점점 더 존경하기 시작했고 저도 모르게 속으로 물었다.‘은인님은 대체 정체가 뭐지?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실력을 갖추고 계신 거지?’늦은 밤이
“은인님, 도착했습니다. 어서 보세요. 저기가 바로 우리 화진 국경수비대가 있는 막사입니다.”이때 다무가 흥분한 얼굴로 먼 곳에 있는, 타오르는 모닥불이 보이는 막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윤구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곳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있을 때부터 윤구주는 이미 화진 국경수비대의 기운을 느꼈다. 그저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은인님, 저랑 같이 가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다무는 낙타를 타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바람은 아주 차가웠고 폭설도 내렸지만, 두 사람의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그들은 곧 화진 국경수비대의 막사에 도착했다.다무의 말대로라면 그곳에는 한 개의 소대만 있을 뿐이었기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겨우 수십 명 정도밖에 없었다.윤구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설국 병사들을 상대할 때 그는 많은 임시 주둔지를 만들었었다.그렇기에 주둔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도 정상적인 일이었다.막사에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안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기랄, 날씨가 왜 이 모양이야? 왜 또 폭설이 내리는 건데?”“야, 왜 아직도 넋을 놓고 있어? 얼른 가서 술 좀 데워 와. 우리 오늘 진탕 마실 거니까!”“좋아, 좋아!”막사 안에서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에 윤구주의 안색이 폭설보다도 더욱 차갑게 변했다.“은인님, 갑시다. 제가 사람들을 소개해 드릴게요!”다무는 그렇게 말하더니 낙타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뒤 윤구주를 데리고 막사 안쪽으로 걸어갔다.군영은 꽤 컸는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십여 명의 두꺼운 겉옷을 입고 군영 안에 모여서 큰 그릇에 술을 담아 마시고 고기를 먹는 병사들이 보였다.그들은 비록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다들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다무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술을 마시고 있던 병사들은 눈보라 속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서 말했다.“누구야?”그중 손에 술이 담긴 큰 그릇을 들고 있던 까무잡잡한 피부의 건
“은인님, 어찌 됐든 이 사람들은 우리 화진의 군인들이에요. 게다가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날씨에 술을 좀 마셔서 몸을 따뜻하게 덥히는 것은 이해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부디 한 번만 살려주세요.”다무는 선한 사람이었다.윤구주가 국경수비대 병사들을 죽이려고 하자 그는 서둘러 애원했다.윤구주는 싸늘한 눈빛으로 중상을 입고 쓰러진 십여 명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좋아요. 어르신 체면을 봐서 오늘을 일단 살려주도록 하죠. 말해봐. 당신들 상사는 누구지? 누가 이렇게 멋대로 술을 마시도록 허락한 거야?”윤구주는 중상을 입고 쓰러진 십여 명의 병사들에게 물었다.과거 구주왕이었던 윤구주는 군인들이 규율을 어기는 것은 상부에서 묵인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그래서 그는 대체 누가 이런 행위를 묵인한 건지 알아낼 생각이었다.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던 병사 한 명이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우리 통령은... 기병 교위 원호산 통령입니다.”그 이름을 들은 순간 윤구주는 곧바로 신해를 이용하여 설국과 결탁했던 국경수비대 교위 이름을 떠올렸다. 그가 바로 기병 교위 원호산이었다.기산에 있을 때 윤구주가 마지막으로 죽였던 설국 제사장 파마는 설국과 결탁했던 장군들의 이름을 직접 알려줬었다.그중에 기병 교위 원호산, 진부대장 진추해, 좌익 국경 장군 강문정 등등이 있었다.그런데 국경에 도착하자마자 나라를 배신한 매국노와 마주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원호산은 어디 있지? 지금 당장 날 만나러 오라고 해.”윤구주나 매섭게 말했다.“원 통령님은 어제 총병으로 가셔서 이제 곧 돌아올 겁니다.”국경수비대 병사는 전전긍긍해서 말했다.윤구주는 그 말을 듣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둠을 바라보았다.오늘 밤, 그는 반드시 나라를 배신한 매국노들을 처단할 것이다.오직 그래야만 국경수비대 병사들로 하여금 화진의 땅을 절대 잃어서는 안 된다는 걸, 땅을 잃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걸 알게 할 수 있었다.그것이 바로 구주왕
쾅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리더니 8명의 두꺼운 옷을 입은 국경수비대 병사들이 차 안에서 내렸다.그중 가장 앞에 선 사람이 바로 기병 교위 원호산이었다.원호산은 구레나룻이 짙고 몸이 다부졌다.그가 나타나자 윤구주에게 중상을 입은 십여 명의 병사들은 곧바로 밖에서 그를 향해 외쳤다.“원 통령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원호산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는 병사들이 눈보라를 맞으면서 추위에 덜덜 떨며 밖에 서 있는 걸 보고는 살짝 화가 난 얼굴로 물었다.“멍청한 것들. 왜 안에 있지 않고 밖에 나와 있는 거야?”십여 명의 병사들은 겁을 먹고 덜덜 떨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묻잖아. 대답해!”원호산은 병사들이 대답하지 않자 계속 물었다.그런데 갑자기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내가 밖에 서 있으라고 했거든.”그 목소리를 들은 원호산은 흠칫했다가 고개를 돌려 군영 쪽을 바라보았다.군영 안에는 흰옷을 입은 윤구주가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군영 속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얼굴을 본 원호산은 서늘한 눈빛으로 호통을 쳤다.“당신은 누군데 감히 우리 군영에 멋대로 들어온 거지? 죽고 싶어?”윤구주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그가 눈을 뜨는 순간,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원호산 등 사람들을 감쌌다.원호산과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그들은 마치 윤구주의 시선에 겁을 먹은 듯했다.“당신이 바로 기병 교위 통령 원호산이야?”윤구주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나라면 뭐?”원호산이 인정하자 윤구주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묻지. 화진의 군율에 따르면 무단으로 이탈한 자는 죽어 마땅하지?”그 말에 원호산은 심하게 당황했다.“또 물을게. 규율을 어기고 부하가 멋대로 하게 놔두는 자도 죽어 마땅하지?”윤구주의 싸늘한 말이 마치 우레처럼 다시금 원호산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마지막으로 묻지. 나라를 배신하고 화진의 국민들을 해치는 자는 그 삼족까지 전부 죽여 마땅하지?
원호산의 피범벅인 머리가 바닥에 굴러떨어지자 그 자리에 있던 병사들도, 다무도 전부 넋이 나갔다.윤구주가 기병 교위 한 명을 죽인 것은 중죄였기 때문이다.“우, 우리 원 통령님을 죽인 겁니까?”국경수비대 병사들은 그제야 반응했다. 그들은 들고 있던 총을 꽉 쥐면서 두려움에 찬 얼굴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총을 쏠 기세였다.그러나 윤구주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당당한 얼굴로 원호산의 시체를 바라보며 말했다.“원호산 같은 매국노는 죽어 마땅하지 않아?”“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근거로 우리 원 통령님이 설국과 결탁했다고 하는 거죠?”한 병사가 물었다.“나 윤구주가 한 말이 바로 증빙이야!”윤구주가 이름을 대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당황했다.그러나 윤구주가 과거 천하무적이었던 구주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그들은 그저 윤구주의 이름에 어떠한 마력이 있다고 느꼈을 뿐이다. 왠지 모르게 윤구주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아무도 더는 묻지 못했다.“얘기해 봐. 지금 국경을 지키는 국경수비대의 지휘관은 이름이 뭐야?”윤구주가 갑자기 물었다.국경수비대 지휘관은 흑여산맥의 국경 지역을 지키는 최고 지휘관이었다.윤구주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자 병사들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우리 지휘관님 성함은 유기철입니다.”“그였다니.”그 이름을 들은 순간 윤구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사실 10국과의 전재에서 유기철은 구주군 제6군단의 소대장이었다.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러 그때의 그가 국경수비대 지휘관이 된 것이다.과거를 떠올린 윤구주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유기철에게 당장 날 만나러 오라고 해.”‘뭐?’“우, 우리 지휘관님에게 당신을 만나러 오라고 하라고요?”국경수비대 병사들은 모두 당황했다.“그래. 너희는 그에게 지인이 방문했으니 빨리 가보라고 하면 돼.”윤구주는 말을 마친 뒤 병사들을 뒤로하고 빠르게 군영 안으로 돌아갔
단 한 걸음,그 한 걸음만 넘기면, 그는 곧 성급 바로 직전 경지에 이른다.그리고 그 마지막 문턱을 박살내는 순간 반쯤 성인이 된 경지, 반성급이다!지금 이 자리, 그 반성급 경지에 선 자는 바로 인마라고 불리는 무명이었다.“과연... 화진의 인황, 구주왕이라 불릴 자격은 있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 지금 네 수준으론 몸을 직접 이 판에 던지지 않는 이상 나랑 맞붙을 자격조차 없어. 네가 그 잘난 원신출체를 어떻게 하겠다는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무명이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쳤다.팔기귀일에 도달한 윤구주의 전투력은 이미 황의 지경을 뛰어넘었다.하지만 무명과의 경지 차이는 여전히 너무 컸다.실력은 분명 엄청났지만 격이 다르였다.지금 상태로도 보통의 황자의 경지까지 초월한 상태지만 무명을 상대하긴 아직 한참 부족했다.심지어 무명이랑 싸울 실력은커녕 참마검조차 손에 제대로 못 잡는 게 현실이었다.“팔기로 부족하다면... 제구기는 어때? 구기:적선!”부우우우웅!윤구주의 온몸을 하얀 선기가 감싸는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고 있던 무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뭐라고? 이건 네 따위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잖아! ”그 순간, 무명조차 숨을 삼켰다.이건 상식의 틀을 깨부수는 광경이었다.근대에 들어서면서 도에 대한 수련는 사실상 약해졌다.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세상에 흐르는 천지영기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봉신전쟁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영기가 소모됐고 그 전쟁이 끝난 후 곤륜구역은 세상의 영기 90%를 신계에 봉인해버렸다.거기서 마음껏 영기를 탕진한 것도 모자라 바깥의 산수들까지 무분별하게 빨아들인 탓에세상의 영기는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말았다.결국 세상은 고위 수련자가 태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그래서 화진에선 500년에 한 번 황자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이고 황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임정설이 황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윤구주를 돕기 위해 왕
마기가 검종 제자들의 혼백에 침투하자 그 순간 제자들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이를 목격한 장인 대진인은 망설임 없이 즉시 결단을 내렸다. 오염된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화해 버린 것이다.“모든 제자들아, 입문 첫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서요산은 찬란한 성지 화진 정통의 계승지다. 정은 사악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정은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서요산 제자들이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도의였다.입문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도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저 화진 정통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그 순간 진요탑 외곽에서는 7대 진인을 중심으로 전 종문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진요탑을 사수하고 있었다.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기의 기세는 점점 거세져 어느새 검종의 경내 전역을 삼켜버렸다.검종 제자들은 마기를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진요탑의 결계를 유지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정도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이었다.산 아래 상황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온갖 요괴와 귀신들이 들이닥치는 가운데 임정설은 황운을 등에 업고 이씨 가문의 국운을 모두 모아 홀로 수백만 마기를 막아서고 있었다.백호는 마인으로 완전히 변신해 광란의 충격 속으로 몸을 던졌고, 스스로 마를 품은 채 적진을 난도질했다.청해는 천뢰신술을 펼쳐 수만 개의 천뢰를 무기로 변환시켜 온갖 사도와 악귀를 쓸어내기 시작했다.그 무렵 진요탑 내부에서 풍무극의 기세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구주야, 내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내 500년 수련의 혼을 너에게 바치겠다."”풍무극의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제천 법기를 꺼냈고 전법이 발동되는 순간 그의 육신은 산산조각 부서졌다.그의 정기와 천지 정기를 모두 품은 찬란한 진신 영혼은 한 자루의 참마검으로 변해 윤구주 앞에 떠올랐다.“풍 종주...” 윤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슬프고 아쉬
윤구주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국운의 기운이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가 진요탑의 문에 도달했을 무렵 모든 국운이 윤구주에게 집중되었다.윤구주의 주변으로는 천인신광이 펼쳐져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그가 천지의 주재자 화진의 영겁을 관통한 유일한 존재였다.윤구주는 홀로 진요탑 안으로 들어섰다.겉보기에 거대한 산 같았던 진요탑의 내부는 참혹한 말세의 풍경이었다. 땅은 끝없이 펼쳐진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강줄기가 거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불과 물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꾸로 흐르는 강물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서요산 검종의 종주였다.밖에서 보이던 강건한 중년의 모습은 단지 화신에 불과했으며, 본체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진요탑에서 마인을 봉인해 왔다.서요산 검종 종주는 극도로 지쳐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호흡으로 버티고 있었다.“드디어 왔구나.” 서요산 검종 종주는 허약한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오백 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종주님.” 윤구주는 고개를 숙였다.풍무극은 현 서요산의 종주이자 당대 최고의 영웅, 화진 제일 검으로 불리던 남자였다.원래는 풍속을 다루는 수련자로 젊은 시절엔 검 하나로 화진을 호령한 사내로 알려졌다.그의 검은 아무도 궤적을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500년 전 마인이 봉인되고 서요산의 조사가 승천한 후, 풍무극은 서요산의 거자로서 종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그날 이후 진요탑에 몸을 묻고 마인과의 싸움을 500년간 지속해 왔다.풍을 다루던 그였지만 지속적인 봉인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수속까지 수련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그가 마도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그래도 괜찮다. 다행히 이 시대에 또다시 인황이 나왔으니. 화진은 연달아 두 명의 인황을 배출했다. 임정설이 인황에 등극한 지금 쇠락하던 이씨 가문의 국운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천지의
마인이 출현하면 곤륜 구역조차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서요산 검종의 진요탑은 이미 오백 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이는 곧 그 마인이 오백 년 동안 진요탑 안에 봉인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은 저 마인이 지난 오백 년간 수련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오백 년 동안 분명 무언가를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정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가 이곳을 벗어나 다시 한번 돌파에 성공하여 진정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 우리 종문의 선대 종주께서 이 마인을 직접 봉인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종주께서는 진요탑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아셨지요. 그래서 마침내 구천으로 비상하셔서 바깥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기를 찾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장인 대진인이 비밀을 털어놓자 임정설은 왜 그 옛날 서요산 검종을 창립한 선조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이해했다.“구천을 비상했다고? 전설 속 그 이야기 설마 전부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 세상 위에 더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건가?” 임정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성인이란 육지에서 신선이 된 자를 이르는 말이고 준성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반쯤 신선이 된 존재라 하더군요. 우리보다 더 풍부한 영기의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이 몸 역시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장인 대진인은 고개를 저었다.그때였다.진요탑이 거칠게 흔들렸고 모든 호법 제자의 얼굴이 딱딱해졌다.수련이 부족한 제자 몇몇은 그 자리에서 마기의 침식으로 피를 토했다.“모든 제자에게 고한다. 나와 함께 현문을 수호하라.” 장인 대진인이 친히 자리에 앉아 온 종문의 기운을 모아 마인을 억제하기 시작했다.마인은 일시적으로 제압되었지만 산 밖의 요괴들과 악귀들은 마기의 부름을 받아 사방팔방에서 서요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임정설은 이제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