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인, 진압!”현모의 몸에 새겨진 녹색 문양이 다시 강렬한 빛을 발하며 번쩍였다.네 개의 돌기둥에서 그물 모양의 에너지가 쏟아져 나와 영역을 형성하며 귀산을 봉쇄했다. 이 영역은 십만 대군 위에 떠 있는 국운을 보호하고 있었다.하지만 호천신은 갑작스러운 에너지파에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영역을 향해 돌진했다. 영역을 들이받는 순간 강한 힘에 의해 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게 부적인가 전법인가? 대체 뭐야? 당장 깨져라!”호천신은 신술을 발동해 영역을 마구 두들겼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멍청한 놈! 이건 성수인이야. 구주왕 휘하 네 명의 군신이 사용하는 필살기지! 이런 망할 놈 같으니라고! 윤구주가 성수전의 봉인된 술법을 부하들에게 전수했단 말인가!”상공의 검은 구멍에서 분노와 질투로 가득 찬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윤구주가 그런 귀한 술법을 얻었으면서도 그것을 네 명의 평범한 부하에게 전수했다는 것이었다.필살기라니!필살기라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호천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신이 그렇게 말했다면 현모의 이 술법이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현모가 다루는 성수인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것이다. 네 눈은 장식품인 것이냐?”호천신은 신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상공에는 신귀수의 허상이 떠올라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성수였다.“헉! 성경이다!”호천신의 이마에 차가운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사방의 네 개 돌기둥을 바라보니 돌기둥은 실체로 존재했고 그 위에 부적과 토템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이 정보들로 호천신은 현모의 능력을 대략 알아챌 수 있었다.“성수의 허상은 주로 날짐승과 들짐승을 제압하는 데 사용되며 인간이나 신에게는 효과가 미약할 것이야. 그뿐만 아니라 현모 내공의 제한을 받아 이 전법의 위력은 그리 크지 않아.”“하지만 이건 성수전의 천술입니다. 저 혼자서는 깨기 어려워요.”곤륜 출신의 호천신은 마음을
“하왕결, 천하무쌍!”현모가 기법을 바꾸어 화진 임씨의 금술을 펼쳤다.금술과 함께 왕의 기운이 넘쳐흘렀다. 어두운 금색의 기세가 천하를 흔들며 호천신의 얼음의 왕좌를 순식간에 산산조각냈다.호천신이 반응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상황이 뒤바뀌었다.“뭐야! 이게 뭐야! 현모가 화진 임씨의 금술을 익혔다고? 젠장! 임씨가 저자를 왕실로 삼은 거야?”뭔가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호천신의 금창이 부서졌다.법기와 전법이 연이어 파괴되며 그 부작용으로 호천신은 반쯤 죽은 목숨이 되었다.“하우, 왕은 무적이다.”현모가 다시 금술을 펼치자 구름 속에서 금빛 신검이 내려와 호천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꿰뚫었다.이 일격으로 호천신은 몸이 갈기갈기 찢겨 더는 몸을 일으킬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내공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이런 쓸모없는 놈! 곤륜 대원만이 구오 후기를 이기지 못하다니. 너는 우리 신계의 수치야!”구름 위로부터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호천신이 윤구주의 목숨을 거두겠다고 큰소리를 쳤기에 호천신과 윤구주의 대결을 기대했는데 윤구주의 얼굴도 못 보고 그의 수하인 현모에게 목숨을 빼앗길 뻔하다니 참 망신이로다.연이은 금술로 현모도 힘이 빠져 더는 술법을 펼칠 수 없었고 간신히 신수인으로 국운을 지킬 뿐이었다.“저희 계획에 현모는 없었잖아요. 저는 현모가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고.”호천신이 간신히 숨을 내쉬며 구름 위에 있는 상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육신이 망가진 네가 무슨 쓸모가 있지? 그래도 마지막 기회를 주마. 내가 너에게 귀신족의 귀기를 주겠다. 네 영혼을 움직여 윤구주를 죽여라.”신의 말을 들은 호천신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지금 이 지경이 된 나더러 윤구주를 죽이라고? 현모도 못 이겼는데 어떻게 윤구주를 죽이란 말이지? 게다가 나는 내공이 부족해 강제로 영혼을 내보냈다가 귀기가 사라지면 죽을 거야.’“일을 완수하면 네 잔혼을 거둬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바로 네 혼을 흩어버릴 것이야.”신의 목소리가 다
수옥인은 음령을 제압하는 부적으로 기습공격을 했다.“감히 기습을 해? 내가 널 못 본 줄 알았나? 겨우 구오 초경의 실력으로 진동왕보다도 못한 것이 누가 너에게 그런 배짱을 줬냐!”호천신은 귀기로 수옥인의 부적을 깨뜨리고 그를 쓰러뜨렸다. 수옥인은 반쯤 얼어붙은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온몸에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수옥인을 처리한 호천신은 즉시 윤구주를 향해 돌진했다!“윤구주, 죽어!”으스스한 바람이 크게 일며 사신이 윤구주의 목숨을 노렸다.지금 이 자리에서 윤구주를 죽인다면 빙신전의 가장 큰 적을 해결하는 것이니 호천신은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윤구주 영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순간 윤구주가 갑자기 눈을 떴다.“팔기지, 이화금안.”금안이 발동되자 공간을 왜곡되는 듯하더니 혈홍색 연꽃이 피어나며 호천신의 영혼을 불태웠다.그로 인해 귀신족의 귀기는 순식간에 타버렸고 호천신의 영혼은 진법 안에서 허우적댔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리자 정신을 차린 수옥인도 함께 울부짖었다.호천신의 영혼은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천천히 사라졌다. 호천신이 사라졌는데도 수옥인은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시끄러워. 내가 저놈 태우는데 너는 왜 비명을 지르는 거야?”귀청을 찌르는 비명에 짜증이 난 윤구주는 금안으로 수옥인을 기절시켜 버렸다.호천신이 죽자마자 또 다른 형체가 진법 안에 나타났다.그 투명체는 천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형체를 이룬 것인데 이는 극 신급 절정만이 가능한 일이다.“빙신전의 대 제사장께서 직접 오다니. 하지만 아무 소용 없다는 걸 그쪽도 알고 있을 텐데.”윤구주가 웃으며 말하자 그 형체의 표정이 굳어졌다.윤구주의 말은 그를 이곳으로 유인해 죽이려는 것 같게 들렸다.“윤구주, 너무 건방지게 굴지 마라! 우리가 바보로 보이나? 우리가 섣불리 나서면 우리 사람이 죽고 다른 신전이 이득을 보겠지.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나.”형체가 냉소하며 말했다.이 말을 들은 윤구주는 어이가 없어서 욕설을 퍼부었다.
“어디서 감히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이냐! 너 같은 인간이 어찌 감히 곤륜 신계를 거스르려 하느냐?”형체가 노발대발해서 소리쳤다.“곤륜뿐만이 아니다. 누구든 화진을 건드리면 바로 나 윤구주의 적이다. 그게 신이든 마귀이든, 나 윤구주가 빠짐없이 죽여버릴 것이다!”형체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윤구주에게 섣불리 손을 쓸 수 없었기에 더욱 답답했다. 윤구주가 말한 대로 그가 직접 왔다 하더라도 윤구주를 이길 확신이 없었다.직접 와서도 윤구주를 이기지 못하면 이 소식을 들은 곤륜의 다른 신전들이 배꼽을 잡고 웃을 것이 틀림없다.“건방지게 굴지 말고 기다려라. 내가 혼쭐을 내줄 터이니.”“당장 꺼져! 오지도 못하면서 내 앞에서 떠들지 마.”윤구주는 그와 더는 말싸움하기 싫어 금안을 발동해 그 형체를 지워버렸다. 그는 곤륜의 이놈들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세력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싸우더라도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진짜로 운구주를 죽이려는 것은 문씨 가문이다.윤구주는 문아름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그의 예감이 맞았다. 형체가 망가진 빙신전의 대 제사장은 즉시 문아름에게 연락을 보냈다.“웃기고 있네요. 말은 잘만 하더니 어디로 간 거죠? 저희가 정면에서 방해하면 그쪽이 숨에서 공격한다면서 어디로 사라진 거죠? 그리고 현무는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쪽이 해결하겠다며 죽지 않고 오히려 임씨의 금술을 익혀 구오 후기로 우리 구오 대원만 천신을 죽일 뻔했잖아요.”대 제사장이 비꼬는 말투로 문아름에게 물었다.화진 변경의 설산 꼭대기.법기 속에서 그녀를 꾸짖는 형체를 바라보며 문아름은 담담히 대답했다.“현무가 살아있는 것은 정말 예상 밖이었어요. 저도 임세현이 현무를 그렇게 중히 여길 줄은 몰랐어요. 윤구주에게 금술을 맡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현무에게 전수하다니. 윤구주의 실력이 더욱 정진했나 봐요.”형체는 잠시 당황하더니 의심스러운 눈길로 문아름을 바라보았다.“제 뜻은 임씨 가문의 절학이 윤구주에게는 쓸모가 없다는 얘기에요. 윤구주
“드디어 왔군!”윤구주도 다시 눈을 떴다.그는 문아름의 수단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이번에 온 자는 강적이 아니라 윤구주가 차마 죽이지 못할 친구일 것이다.천옥 북쪽에서 한 사람이 산을 뚫고 나와 귀산에 나타났다.그의 모습을 본 십만 대군은 환호성을 멈출 수 없었지만 진동왕은 표정이 어두워지며 속으로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십만 병사들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화진의 북경왕이었다.새로운 세대의 왕으로 윤구주와 거의 동시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윤구주보다 먼저 왕위에 올랐다. 그는 화진 북쪽 영토를 빼앗아 와서 국치를 씻은 영웅 같은 존재였다.그의 명성은 화진에서 윤구주에 버금갈 정도였다.그 때문에 왕실은 그를 미래 윤구주의 오른팔로 키우려 했다.“현모, 정신 차려!”진동왕은 지쳐 의식이 흐릿해진 현모에게 소리쳤다. 동시에 북경왕을 맞이하려던 모든 부하에게 후퇴를 명령했다.“후퇴하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북경왕은 우리 편이 아니었나요?”장수들이 하나둘 의아해하며 물었다.“이 바보들아! 저 사람이 우리 편처럼 보이냐!”진동왕이 크게 꾸짖었다.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북경왕은 온몸에 살기가 넘쳤고 차가운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현모도 무언가를 깨닫고 북경왕을 향해 소리쳤다.“북경왕! 그쪽은 화진의 왕입니다! 저와 목숨을 나눈 전우였고 저희 왕은 그쪽을 형제처럼 대했어요. 문아름 씨가 그 쪽에게 무슨 짓을 시켰든 이건 그쪽 본의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아요.”현모가 절규했다.북경왕이 지금 손을 쓰면 새로 태어난 국운이 위태로워진다. 국운을 위해서라도 진동왕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새로운 국운이 북경왕의 손에 망가져서는 안 된다.만약 북경왕이 국운을 깨뜨린다면 화진 사람의 손에 의해 국운이 깨진다면 화진은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정말 훌륭한 계략이로군. 윤구주, 나올 것인가 숨어있을 것인가.”빙신전 대 제사장은 블랙홀 속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며 웃었다.북경왕이 현모와 진동왕을 쓸어버리고 화진의
수옥인이 북경왕을 말리려 했지만 북경왕은 더는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그는 한 손으로 수옥인을 내리쳐 기절시킨 뒤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윤구주 씨, 지난번 싸움은 승부가 나지 않았어요.”이 말을 들은 윤구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그건 몇 년 전 일이었죠. 그땐 저도 아직 구주왕이 아니었죠.”“그래요. 그때 저도 아직 북경왕이 아니었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지난번은 그쪽이 온 힘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긴 거라는 겁니다.”이 말을 들은 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뜻이죠? 이번에 제가 온 힘을 다하길 바라는 겁니까 아니면 저번처럼 비겨주는 걸 원하는 겁니까?”이 질문에 북경왕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제가 왜 문씨 가문과 손을 잡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윤구주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그 이유가 뭐든 중요하지 않아요. 오늘 반드시 저와 싸워야 한다면 장소를 바꾸는 게 어때요?”“안 됩니다. 문씨 가문은 저더러 천옥 전법을 파괴하고 폭주하는 영기를 외부로 흘러 나가게 하라고 했어요. 그쪽을 죽이는 건 주요한 임무가 아니에요.”웅!북경왕은 윤구주에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걸음을 내디뎌 얼음을 만들어냈다. 차가운 기운이 전법의 절반을 얼려버렸다.윤구주는 이제야 그의 의도를 이해한 듯했다.전법을 파괴해서 영기가 새어나가면 화진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팔기지, 부자결.”수많은 화염 부적이 나타나 북경왕의 한기를 막아냈다. 이번 대결은 북경왕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북경왕은 이것이 윤구주의 진짜 실력인지 아니면 전법을 지키느라 너무 많은 힘을 써 지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북경왕은 두 손을 모아 앞으로 힘껏 밀어냈다. 극한의 한기가 윤구주의 부적을 순식간에 얼려버렸다.한기가 전법의 핵심을 얼려버리기 직전...“팔기지, 이화금안.”홍!끝없이 치솟는 불이 사방으로 퍼지며 순식간에 상황을 역전시켰다.굉음과 함께 산이 뚫리더니 봉황 모양
“이는 지극히 순수한 공법으로 제가 수련한 얼음의 술법을 완전히 억누르는군요. 천지 음양, 오행 팔괘. 그쪽의 공법이 천지 음양에 속하고 제 오행보다 우위에 있으니 제가 수련한 이 술법은 완전히 억눌려 더는 상대가 되지 못하겠군요.”북경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번에는 누가 승리할지 알 수 없지만 만약 지난번 싸움에서 윤구주가 처음부터 구양진용결을 사용했다면 북경왕은 단 한 판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극 신급 절정에 도달한 그는 내공을 믿고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마리의 용도 깨뜨리지 못했다.“북경왕, 그쪽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죽음을 자초한 셈입니다. 절대로 제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니 지금 후회하면 살길을 남겨줄 거에요.”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말을 마친 그는 다시 천옥 진법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저와 대결하면서도 다른 데 신경을 쓰는 겁니까? 윤구주, 그쪽은 완전히 저를 무시하는군요. 다시 생각해 보니 구주왕과 제 옛정도 거짓이었던 거 아닐까요? 이 위선적이고 간악한 악당의 목숨은 제가 가져갈 것입니다.”북경왕이 다시 돌진했다. 윤구주가 다른 데 신경을 쓴 틈을 노려 공격한 것이다.그는 여전히 윤구주에게 완전히 억눌리는 얼음의 술법을 사용했기에 연이은 공격으로도 윤구주를 보호하는 아홉 마리의 용을 깨뜨리지 못했다.“북경왕! 문아름은 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그쪽의 술법이 저에게 억눌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쪽을 이곳으로 보냈죠. 그쪽 내공이 저보다 강하더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거란 말입니다. 말해보세요. 문아름이 또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윤구주가 진지하게 물었다.빙신전과 북경왕보다 문아름이 윤구주에게 더 큰 위협이었다.그 여자에게 반드시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그렇게 알고 싶나요? 그럼 먼저 저를 이기세요. 승자만이 조건을 내세울 자격이 있습니다.”“금술, 빙역만리.”금술로 인해 대지가 얼어버렸고 주변의 산마저 꽁꽁 얼어붙었다.동시에 천지에 이
북경왕의 영혼을 본 윤구주의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금술을 사용했지만 자신의 두 손으로 북경왕의 목숨을 빼앗기는 힘들었다.하지만 저 모양이 된 북경왕에게 어쩌면 윤구주의 손에 죽는 것이 제일 좋은 결과일지도 모른다.“문아름은 그녀의 계획에 참여한 사람들을 죽음보다 못한 경지로 몰아넣죠. 자신의 편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북경왕! 저는 그쪽이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쪽의 양혼을 보았을 때 저는 이미 그쪽을 용서했어요. 천주 금술, 신마소멸.”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세상을 삼켜버릴 듯한 기세로 반경 수백 리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불길이 사라지자 조용히 땅에 누워 있는 북경왕의 양혼이 보였다. 그의 영혼은 이미 투명해져 있었고 혼이 흩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드디어 해방되었네요. 구주 씨, 고맙습니다.”북경왕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에 드리워진 어둠이 드디어 사라졌고 인제야 그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윤구주는 조용히 북경왕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친구의 마지막을 지켜주었다.“구주 씨 손에 죽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북경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도 북경왕과 싸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윤구주가 대답했다.“구주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곤륜이 화진의 통일을 방해하고 화진의 부흥을 막는 것은 그들이 화진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화진을 내버려 뒀다가 언젠가 봉신 전쟁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까 봐 두려웠겠죠. 만 년 전, 우리 화진의 인황은 구주와 오방을 다스렸고 하늘과 맞먹는 존재였죠. 인황이 살아있을 때 수련자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하게 살았죠. 인황이 죽자 신과 귀가 함께 세상에 나왔고 온갖 요괴와 마귀들이 스스로 신이라 자칭하기 시작했어요.“저도 제 입장이 있으니 함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어요. 문씨 가문도 권력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구주 씨는 단지 제가 구주 씨 편이라는 것을 알면 됩니다. 현재 청룡이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