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군 단장이 견배영의 말을 믿지 못하니 윤구주가 직접 전음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말을 못 알아듣나?”윤구주의 목소리를 들은 단장은 너무 기뻐 저하라고 외칠 뻔했다.“입 다물고 있어. 내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눈치는 있어야지. 내가 이곳에 온건 너만 알고 있으면 돼.”단장은 말을 하지 않고 울음 반 웃음 반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윤구주는 산을 이동한 뒤 지하 궁전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저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만약... 만약 그 마인이 정말 살아있다면 저희 방어선이 마인을 막을 수 있을까요?”“구오 경지라면 괜찮지만 만약 극 신급 절정에 도달했다면 좀 골치 아프겠지. 지하 궁전에 들어가는 입구가 하나뿐인 게 아니듯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야. 밖에서 기다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이 말을 남기고 윤구주는 궁전 안으로 사라졌다.그는 산체의 갈라진 틈을 따라 지하 궁전 입구까지 내려갔다. 신념으로 주변을 살피니 돌계단이 구불구불하게 깊은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대략 살펴보니 이 지하 궁전은 지표면 최소 3000미터 아래에 있었다. 현재 화진에서 가장 깊은 지하 시설도 2400미터밖에 안되는데 전조 시대에 이런 시설을 지었다는 건 너무 놀라웠다. 이는 당시 기술로는 상상도 못 할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었음을 의미했다.계단 주변에는 수많은 유골이 묻힌 구덩이들이 보였고 남아있는 옷과 장비로 보아 전조 시대 노동자들의 시체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윤구주는 계속 내려가다가 바닥에 떨어진 사탕 포장지를 발견했다.4대 군신 중 주작만이 항상 사탕을 지니고 다녔다. 그녀가 사탕을 먹지 않지만 지니고 다니던 이유는 어렸을 적 가난했던 자신을 만족하기 위함이었다.평소에 애지중지하던 사탕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윤구주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쉭!윤구주는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계단을 벗어나 돌벽을 밟으며 아래로 내려갔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짓밟힌 돌들은 산산조각이 났다.십여 초 후, 윤구주는 좁은 계단을 벗어나
지하 궁전 속에는 무수한 사악한 생물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사냥꾼처럼 윤구주를 먹잇감으로 삼고 있었다.“이상하군, 이 살기는 그들 몸에서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아.”윤구주가 중얼거렸다.어둠 속에서는 계속해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신념이 영향을 받아 주위의 위험을 감지할 수 없었다.“당장 나타나라!”“팔기지, 부자결, 화무유성.”윤구주가 그린 부적이 붉은빛을 내뿜으며 윤구주의 명령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가 천만 개의 유성으로 변해 지하 궁전을 환히 밝혔다.이미 심하게 파괴된 지하 시설 곳곳에 잔해가 널려 있었다.불빛이 어두운 지하 궁전을 비추면서 숨어 있던 사악한 생물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철로 만들어진 인형 꼭두각시였고 그 수가 천 개를 넘었다.이 꼭두각시들 몸에 새겨진 부적을 보고 윤구주는 마씨 가문이 한 짓임 알아차렸다.“마씨 가문의 꼭두각시? 단순한 꼭두각시가 아닐 텐데.”주변에는 전투 흔적이 남아 있었고 백 미터 앞에 커다란 피 웅덩이가 있었으며 멀지않은 곳에 무너진 지하 궁전 건축물이 보였다.쉭!윤구주는 쏜살같이 그쪽으로 달려갔다.그가 움직이자 꼭두각시들도 함꼐 움직이기 시작했다.그들은 인간과 같은 사나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으며 빨간 눈동자에는 끝없는 원한이 가득했다.“팔기기, 부자결.”윤구주가 꼭두각시를 파괴하는 특수 부적을 사용했다. 이상한 것은 부적이 꼭두각시에 정확히 부착되었는데도 그들을 파괴하지 못했다.“이 지하 궁전의 꼭두각시는 보통 꼭두각시가 아니야. 곤륜의 술법인 거 같아.”윤구주가 말을 마치자마자 십여 개의 꼭두각시들이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그들은 모두 신급의 실력을 갖췄으며 지하 궁전에 침입한 자를 없애는 임무를 수행했다.펑!윤구주는 순식간에 십여 개의 꼭두각시와 수백 회의 교전을 벌였다.강철로 된 몸체지만 속도가 매우 빨랐고 힘도 엄청나게 강했다.한 꼭두각시가 윤구주와 주먹을 맞부딪쳤다. 윤구주는 반걸음쯤 물러났고 그 꼭두각시는 수백 미터 날아갔
휙!순간 모든 꼭두각시가 윤구주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들이 함께 금술을 발동시키자 찬 공기가 밀려오며 지하 궁전의 절반 이상이 얼어붙었다.이때 윤구주가 손을 들어 허공에 대고 결계를 그었다. 결계 밖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안쪽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흠, 역시 예상대로군. 이 작은 크리스털이 바로 꼭두각시의 혼이로구나.”윤구주는 크리스털 안팎에 새겨진 문양과 가운데 떠도는 물질을 유심히 관찰했다.신념으로는 수정을 뚫고 그 물질을 감지할 수 없었다.으드득!윤구주가 수정을 으스러뜨리자 안에 있던 불빛이 반투명한 악귀 모습으로 변해 덮쳐왔다.“원한의 혼이로구나. 영혼의 힘으로 꼭두각시들을 움직이게 했군.”윤구주는 손가락으로 악귀를 눌러 제압한 뒤 신념으로 그 정체를 탐색했다.잠시 후,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이 원혼들은 생전에 무술 고수들이었으나 마씨 가문의 오랜 고문 끝에 원혼이 되어 꼭두각시의 핵심이 된 것이었다.“이젠 편히 잠드세요. 마씨 가문은 이미 제가 멸문시켰어요. 제가 복수를 해주었어요.”“팔기지, 뇌왕인.”윤구주가 기술을 발동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응? 이럴 리가.”윤구주는 발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궁전 잔해 위에서 지면으로 이동하자마자 수많은 번개가 땅을 파고 나와 뱀처럼 꼬물거리며 모든 꼭두각시를 옭아맸다.천둥이 크리스털 문양을 타고 깊숙이 파고들어 원혼들을 정화했고 핵심을 잃은 꼭두각시들은 움직임을 멈췄다.“해결.”꼭두각시들을 처리한 윤구주는 술법을 써서 잔해를 움직였다. 그 아래엔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누워 있었다.“국주님?”윤구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화진의 국주 임정설이였다.현재 그의 몸에서 생기를 느낄 수 없었으나 몸 안에서 기운이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임정설을 눕혀놓자 가슴팍이 찢겨 나간 채 내장이 드러난 모습이 보였다.“상처가 심각하군.”윤구주가 중얼거리며 신념을 써서 그의 몸을 검사했다.몸이 거의 으스러진 상태였는데 이런 상황
귀문십삼수.이는 화진 침술의 왕이 쓰는 술법이었다.윤구주는 이 술법을 알고 있었지만 배우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더 강한 침법인 천문삼십이수를 장악했기 때문이다.이 침법은 죽은 이를 되살리는 능력이 있었으며 심지어 한 사람의 운명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었다.이런 침법은 이미 평범한 이가 다룰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섰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침법은 금술을 사용하는 것과 같아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되레 피해를 보게 된다.“국주의 목숨이 위태로워. 지금 침을 놓지 않으면 국주님은 목숨을 잃을 거야. 과거 주작이 침술의 왕을 구한 적이 있어서 침술의 왕이 주작에게 귀문침법을 전수했었지. 이 침법은 킬러인 주작에게 아주 적합해.”암살자는 무기로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암살자는 다양한 독을 다루는 데 능한 법인데 귀문십삼수 중 독을 쓰는 기법이 존재한다.다시 국주를 살펴보니 임정설은 이미 죽을 목숨이었다. 단순히 내공으로 숨을 붙여둔 상태였다.주작의 침법은 임정설의 반쯤 남은 생기를 봉인했는데 일시적으로 생명을 보호하긴 했지만 너무 희한한 독을 사용해 오히려 상처를 악화시켰다.“생기를 봉인한 것은 마씨 가문 꼭두각시의 공격을 피하기 위함이군. 이 꼭두각시들은 모든 살아있는 생물을 공격하지.”윤구주는 굳어버린 꼭두각시들을 힐끗 보며 중얼거렸다. 주작의 현재 내공을 알 수는 없었지만 구오의 경지로 가정한다면 그녀와 국주가 손을 잡아도 이 꼭두각시들을 당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이상한 것은 임정설의 상처가 꼭두각시의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그를 치료한 주작 역시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국주를 구해야만 주작의 행방을 알 수 있겠군.”“국주님, 제 스승들이 나선다 해도 단지 국주님의 생기를 잠시 연장할 뿐이지만 저는 달라요. 의술을 배우는 자들은 죽을 운명이나 이미 죽은 이를 치료하지 않죠. 하지만 제가 목숨을 걸고 결과를 바꾸려 한다면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아직 반쯤 숨이 남아있는 국주님이야말로 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것은 인간의 손에서 태어난 지혜를 가진 괴물이었다.신급 꼭두각시들이 윤구주를 호위하며 체내의 영기를 모아 수호 전법을 형성했다. 이 모든 준비를 마친 뒤에야 윤구주는 비로소 마음을 가다듬고 모든 잡념을 지워버렸다.“완성.”윙!침 하나가 서른두 개로 분화되었고 서른두 개의 천지 영기를 담은 침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만약 화진의 침술의 왕이 현재 윤구주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 놀라서 기절할 것이다.서른두 개의 침이 동시에 임정설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천지의 영기가 국주의 체내로 흘러 들어가자 윤구주는 자신의 일부 정원도 함께 전해줬다.윤구주가 이 술법으로 국주를 구하려 한다면 윤구주도 함께 죽음의 길에 들어설 것이다.하늘의 노여움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사람을 구할 수 있다.침의 힘은 순식간에 귀문십삼수의 독을 없애줬다. 독기가 완전히 제거되자 반쯤 남았던 생기가 더는 봉인되지 못하고 밖으로 새어 나왔다.윤구주는 자신의 정원으로 임정설의 반쯤 남은 생기를 보호한 후 침으로 국주의 부서진 경맥을 하나씩 치료해 나갔다. 천지 영기의 역할은 치유를 가속화하고 새로운 신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었다.경맥이 치료되고 부서진 뼈가 재생되며 살과 피가 다시 자라났다.매 순간이 위험천만했다. 이때 조금이라도 실수가 발생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된다. 임정설을 구하지 못할 뿐 더러 윤구주 역시 심하게 다치게 된다.천하에 윤구주처럼 감히 죽은 이를 살리는 술법을 사용할 담력이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시간이 흐르자 원래 죽을 운명이었던 임정설은 점점 생기를 되찾았다. 감겼던 눈이 미세하게 떨리며 의식이 돌아왔다.반면 윤구주는 죽음의 기운에 휩싸여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아 보였다.웅!거대한 천지 영기가 임정설의 체내로 흘러 들어가자 서른두 개의 침도 순수한 영기로 변해 임정설과 하나가 되었다.임정설이 드디어 의식을 되찾았다.눈을 뜨자마자 생기를 잃은 윤구주가 그의 눈에 띄었다.“구주야! 너 왜 이렇게 어리석은 거야.”임정설은 초조
갑자기 용암 아래에서 거대한 기류가 분출되었다. 마치 그 속에서 어떤 절세의 흉물이 세상에 나오려는 듯이.쾅!수 톤의 용암이 아래의 거대한 물체에 의해 솟구쳤고, 곧이어 불빛처럼 붉은 신작이 날아올랐다.슛!이내 아래에서 또 한 사람이 뛰쳐나와 몸이 마치 금강으로 단조되기라도 한 듯, 뜨거운 용암을 꿰뚫으며 벽력 같은 일격을 가했다.신작은 이 기습을 몸으로 받아 위쪽 지층으로 튕겼다.이 일격에 거의 산산조각이 날 뻔 한 신작의 부서진 날개 아래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감싸져 있음이 어렴풋이나마 보였다."저건 곤륜 지역 수신전의 술법, 성수인이다!"임정설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하하하! 수신전의 성수인도 이 정도밖에 안 되나!"금강불괴의 몸을 가진 남자가 용암을 밟으며 방자하게 웃었다.그는 한눈에 이성설을 알아보았고 그다음 한순간 혼란에 빠졌다.방금 전에 용암 속에서 주작과 싸우며 환각을 본 줄."이 씨 집안의 꼬마야, 너 이미 죽지 않았어? 그럴 리가, 오장육부를 반이나 뽑아냈는데 어떻게 살아남았지?""설마 그놈의 쌍둥이 형제냐고?"남자는 커다란 의구심을 금치 못했다.임정설은 남자를 날카롭게 응시했고, 그 날카로운 눈빛은 남자로 하여금 그가 방금 자신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던 임정설이 맞음을 대번에 알아차리게 되었다."구주야, 저자가 바로 전조의 마지막 군주 진파천이다."임정설은 윤구주에게 그 사람을 알렸다."진파천이라고?"윤구주의 미간은 순간 찌푸려졌다.그는 화진 5천 년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폭군이었다.화진이 근대에 겪은 모든 치욕은 모두 진파천 때문에 시작되었고, 바로 이 폭군의 등극과 맞물려 항상 세계 문명을 선도하던 화진이 급속도로 퇴보하게 되었다.그뿐만 아니라, 당시 거의 전 세계 국가들이 화진으로 몰려와 이익 침탈을 시도했을 때, 진파천은 이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적국들이 화진에 주둔하는 것을 환영하기까지 했다.그 결과 화진은 적국들의 야망에 휘둘려 사분오열되었고, 진파천은 이런 상황에서도 백성들을 미친
윤구주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과연 희대의 폭군이 맞았다.멸족을 밥 먹듯 쉬이 얘기하는 잔혹한 수단이라니."오? 승낙한 건가? 그럼 어서 내려와 짐에게 절을 하거라!"윤구주가 대답하기도 전에 상부에서 배회하던 주작이 분노를 터뜨렸다."건방지도다! 우리 저하께서 폭군인 네놈한테 절을 하라고? 네가 어디 그럴 자격이 있느냐!""죽어랏!""성수인!"주작이 성수인을 재가동하며 진파천을 향해 돌진해 내렸다."건방진 건 네놈이여. 이미 기진맥진한 놈이 허세를 부려? 패체강인!"진파천의 몸에서 갑자기 붉은 부적이 떠올라 폭발하더니 그의 공격을 천 배 증폭시켰다.단 한 방.진파천의 공격에 부딪친 주작의 성수인은 산산조각났다.중상을 입고 피를 토하며 날아가던 주작은 정확히 윤구주의 품에 떨어졌다."저하...""이건 곤륜 지역의 술법이야. 너는 당할 수가 없으니 일단 물러서."윤구주는 호신 기를 운용하며 주작을 호송해 임정설에게 전달했다.바락에 내려놓은 주작이 다시 진파천에게 덤비려 했지만 임정설이 막아섰다."무리하지 마라. 모두 구주한테 맡겨. 이 자는 극 신급 절정에 오른 자다. 네가 졌어도 부끄러운 게 아니야."임정설은 알고 있었다.실력 차이가 큰 게 아니라 진파천의 공법이 주작을 완전히 억누르고 있었던 것.특히 강풍호체로 인해 진파천의 몸은 무적의 상태가 되어 있었고, 암살자형인 주작은 그 방어를 뚫을 수 없었다.혹여 성수인이라도 없었다면 윤구주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쓰러졌을 주작이었다.진파천은 서두르지 않고 윤구주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이씨 가문 녀석이 그쪽을 매우 믿고 있는 모양이군.""그쪽도 왕이라 했지? 아직 왕 호칭을 듣지 못했구나."모든이들의 짐작을 떠나, 진파천이 윤구주에게 예를 차리며 말했다.허나 이러한 가식적인 예의 따위에 대꾸할 윤구주가 아니었다.윤구주가 대답하지 않자 임정설이 대신 외쳤다."이 분은 구주왕이시다!""구주...왕? 허험, 호기가 장난 아닌데?""짐도 이런 왕호는 감히
진파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바보가 아닌 이상, 그는 윤구주의 눈빛으로부터 가득한 악의를 읽어낼 수 있었다. 경멸로 가득 찬 악의를."대체 무슨 뜻이냐?"진파천이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무슨 뜻 까지는 아니고.""당신이 자격이 없다는 건 둘째 치고, 설사 황제 경지에 도달했다 해도 안 되지. 왜냐면 내 출신은 결코 나한테 조상님의 뜻에 저버리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윤구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진파천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네놈은 그럼 정체가 뭐야? 어느 가문의 후예지?"잔뜩 가라앉힌 목소리로 진파천이 물었다."내 성씨는 윤, 이름은 구주다.""백 년 전, 당신이 죽인 수많은 사람들 속엔 우리 윤 씨 일가도 있었지."쿠궁!윤 씨 가문의 후예!진파천의 동공이 갑자기 떨리며 두려움의 빛이 스쳤다.윤 씨 가문은 화진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으로, 그 유서는 가히 삼황오제 시절까지 거스를 수 있는 깊이였다.너무 먼 역사는 고증할 수 없다 차치하고서라도, 최근 천 년간 윤 씨 가문의 행보는 화진 방방곡곡에 자취를 남겼다.천여 년간 윤 씨에선 수많은 인걸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문단의 리더이자 무림 고수였으며 장군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심지어는 후작 작위도 열 명 이상이나 되었다.하지만 화진에서 실제 그 자신이 어떤 신분이든, 윤 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항상 외부인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그럼 사명감을 위해 천 년간 피를 흘리며 화진 무도계에 도전했고, 한때는 화진 무도를 선도하기도 했었다.화진의 세가들은 윤 씨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아마 윤 씨 일가는 타고난 반골기에 문제를 일으키길 좋아하는 걸로 여겨졌다.진파천은 윤 씨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윤 씨는 화진 종문들에게 있어 천년의 숙적 있었는바, 종문 연합의 부상을 수없이 막아 나섰는 바, 윤 씨의 개입만 없었더라면 지금의 화진은 애초 진작 종문들의 천하가 되었을 터!특히 진 씨 왕조 말기, 진파천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윤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