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특수 요원들은 해외에 상주하며 귀국할 시간도 많지 않았고 구주왕을 뵙는 건 더욱 힘든 일이었다. 이번 갑작스러운 만남에 강인한 사내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번 힘을 써주길 바라!” 윤구주는 앞으로 나아가 요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왕!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은 본분입니다!” “왕의 휘하에서 복무할 수 있는 것은 더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미 언제든 나라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요원들은 하나같이 경례하며 말했다. 윤구주는 흐뭇했다. 세계 각국을 둘러봐도 화진의 전사들과 비교할 만한 나라는 없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잡담은 생략했다. 윤구주가 여기에 온 것은 일을 보기 위함이지 옛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다. 주작은 복귀하여 암부 부장을 다시 맡았다. 암부는 세계 각지에 분부 기지를 두고 있었다. 세계 정보를 수집하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 부서라고 할 수 있었다. 기지 안에서 주작의 정보 요원이 최근 발생한 한 큰 사건을 윤구주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윤구주도 주작의 보고를 통해 이 일을 알고 유럽으로 오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왕, 아사 신전의 세력은 주로 서유럽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서유럽이 그들의 발원지이기 때문이죠. 왕도 아시다시피 근대 서유럽 각국의 국력은 많이 약화하였습니다. 특히 우리 화진이 부상하면서 그들은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헨드리 제국은 세계의 오랜 강국입니다. 비록 이 제국은 현재 과거의 영광을 잃었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의 강국 중 하나입니다. 이 제국 자체는 아사 신전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는 헨드리 문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 나라는 아사 신전의 무술 정신에 흥미가 없습니다. 그들의 본업은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이죠. 곤륜 구역 정보는 우리가 가진 것이 제한적입니다. 다만 이곳은 세력이 많고 내부 경쟁이 치열하며 세력의 흥망이 잦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헨드리는 정확히 말해 특
정보 요원이 여기까지 말하자 백호는 의아해했다. “재미있군. 지원받은 왕실 구성원이라면 아사 신전에는 개나 다름없는 꼭두각시 왕 아닌가? 그런데 병권을 꼭두각시에게 줄 필요가 있나?” 주작과 현모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백호, 너랑은 달라. 너는 너무 미쳐서 혼령술도 통하지 않아. 하지만 그 지원받은 왕실 구성원은 아마 아사 신전에 완전히 통제당했을 거야. 그렇다면 병권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 아사 신전이 있으면 평범한 인간도 억지로 500년은 더 살 수 있어.” 현모가 설명했다. 주작도 한마디 보탰다. “500년은 적어. 한 번 노예가 되면 대대로 신전을 위해 봉사해야 해. 신이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이 말은 맞아. 옛날 봉신 때 그 신들은 화진 제국을 전복한 공으로 신이 되었어. 신이 되기는 쉽지 않아. 한 평범한 인간이 신이 되려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해. 혼자서 일생으로는 다 갚을 수 없어. 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당사자가 노예가 되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였을 거라고 생각해. 신앙이라는 건 정말 무서운 거야.” 윤구주도 말했다. 그는 곤륜 구역에서 수련했고 신전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지 알고 있었다. 최고 경지의 심술은 상대방이 기꺼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생각하며 윤구주는 문씨 가문을 떠올렸다. 과거 자신은 이미 문아름의 심술에 걸려 마음이 함락되어 그녀를 완전히 믿었지만 단 한 가지, 윤구주의 기준과 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문씨 가문은 윤구주가 말을 듣고 일을 하길 원했다. 옳은 일이라면 윤구주는 그대로 따랐다. 화진에 불리한 일이면 문아름의 말도 통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어떤 일들로 인해 갈등이 있었지만 윤구주는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툰다는 건 정상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말을 듣지 않고 문아름의 의지대로 행동하지 않아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에 문씨 가문이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아사 신전이 헨
정보 요원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가진 정보는 인간세계에 국한되어 있었고 곤륜 구역 일은 접할 자격이 없었다. “계속 보고해. 그 유일하게 남은 왕실 구성원은 지금 어디에 있지?” 윤구주가 물었다. “왕, 남은 이 왕실 구성원은 원래 내정된 계승자였습니다. 그녀는 헨드리의 진주이자 왕실의 총애를 받는 이자벨라 설윤입니다. 현재 황실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황실 섬 영진 장원에 거주 중입니다. 저희가 알기로는 아사 신전에 투항한 왕실 구성원인 설윤의 삼촌 디크스가 이미 그녀의 소재를 파악했습니다. 곧 이 공주를 처치할 것입니다.” 정보 요원은 보고하며 영진 장원의 상세 지도를 스크린에 띄웠다. 바로 이때, 한 줄기 차가운 기운이 닥쳐왔다. “극 신급 절정의 기운이야!” 백호, 주작, 현모 세 사람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한 줄기 빙기가 기지로 날아와 윤구주 앞에 멈춰 섰다. “빙신전의 잡놈들이야! 망할! 어떻게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알았지?” 백호는 욕을 내뱉었다. 주작과 현모는 백호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빙신전 부전주가 구주왕에게 귀순했으니 아마 윤구주가 이 사람에게 행적을 알려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의아해했다. ‘이 자는 북주에 남아있지 않았던가?’ “너희들도 모르는 걸 문씨 가문의 첩자들이야 오죽하겠어.” 윤구주는 웃으며 말했다. 이 말에 두 사람은 모든 걸 깨달았다. 그들의 왕이 일부러 이렇게 계획한 것이었다. 이 정보를 누설하도록 말이다. “왕, 음모를 꾸미시는 솜씨는 문아름도 따를 수 없겠습니다.” 깨달은 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윤구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말을 잘 못하면 하지 마, 입 다물어.” 윤구주가 꾸짖었다. 윤구주는 이 빙기를 받아들였고 하이렌의 전음도 동시에 들려왔다. “왕, 왕의 명령대로 제가 미리 헨드리 제국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빙신전은 이미 혼란에 빠졌고 희랍 신전과 화신전이 동시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섬 곳곳에 흩어져 비밀리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저택의 침실 안.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녀가 손에 든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방금 세상을 떠난 헨드리의 여왕이었던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멍하니 사진 속 어머니를 바라보던 소녀는 사진을 품에 껴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공주님.”이때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그 남자는 헨드리 정보부의 엘리트 요원 윌리엄이었다. 윌리엄은 수차례 외국의 테러 음모를 저지했고 항상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해 냈다.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윌리엄 경.”설윤 공주는 눈물을 닦으며 그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윌리엄도 억지로 미소를 짓고 공주에게 경례를 올렸다.“윌리엄, 어때요? 소식이 있나요? 해외에 주둔 중인 함대와 연락은 닿았나요?”그들은 헨드리를 벗어나야만 살 수 있었다.함대와 연락을 취해 먼바다로 나아간다면 아직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공주님, 실망시키게 되어 죄송합니다. 함대와의 연결은커녕 공주님의 지지자들과의 연락마저 끊겼습니다. 상황이 몹시 나쁩니다. 디크스 경이 이미 우리를 추적한 것 같습니다.”윌리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이 말을 들은 설윤은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현재 그녀의 위치를 안 삼촌이 섬과 외부의 연결을 끊은 것이 틀림없다. 그녀를 도와줬던 정보원들도 이미 처형당했을 것이다.“공주님, 저는 왕실에 충성을 맹세한 자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공주님을 보호하겠습니다. 섬에 주둔해 있는 로얄 특수부대도 전투 준비를 마쳤습니다.”설윤은 혼이 나간 듯 몸을 비틀거리며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공주님!”“윌리엄,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이젠 뭐든 받아들일 수 있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아요.”설윤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공주의 모습을 본 윌리엄은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최악의 소식을 전했다.“함대 한 척이 섬 근해에 접근 중인데 흑해골 특수부대
상상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냉혹했다.설윤 공주가 필사적으로 싸우려 할 때 함대에 있던 흑해골 부대는 이미 집결을 마친 상태였다.흑해골 부대는 헨드리 최정예 특수 요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외부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흑해골은 왕실 멤버 디크스의 친위대였다.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실은 이 부대가 아사 신전에 의해 개조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로봇 같은 존재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어둠이 내리자 흑해골 대원들은 고무보트를 타고 섬에 잠입하기 시작했다.흑해골이 작전을 개시하는 동안 함대 지휘실에서는 헨드리 군 지휘관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헨드리 제국의 군인임에도 이제는 외부인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그 외부인은 바로 아사 신전의 신들이었다.이번 작전을 총지휘하는 자는 아사 신전의 야신이라는 신이었다. 그는 암살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어둠의 신이었으며 주변의 십여 명 부하들 역시 반신급의 전사들이었다.“야신님, 첩보에 따르면 빙신전이 개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한 반신이 보고했다.와인을 마시던 야신이 동작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빙신전? 종말산 사건도 그놈들이 꾸민 게 분명해. 이미 구주왕과 손을 잡은 모양이군.”“그런데 왜 빙신전은 여전히 변명을 늘어놓고 있습니까? 그리고 빙황한테 일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화진 태백산에서 당했다더군요.”“맞습니다. 제자를 살리러 나섰다가 자신도 휘말렸다고 합니다.”다른 반신들이 수군거렸다.“너희들은 그게 모두 윤구주의 소행이라고 보는 건가? 걱정하지 마라. 제아무리 구주왕이라 해도 빙황을 상대해선 쉽게 이기지 못할 거다. 윤구주가 빙황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면 문씨 가문의 함정에 걸릴 리가 없지 않겠나? 기억해라. 문씨 가문의 계략이 성공한 건 윤구주가 약했기 때문이다. 오늘 밤의 목표인 설윤 공주 역시 힘이 없기에 오늘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다.”이 말을 하는 야신의 눈에서 음란
“모두들 방심하지 마세요. 흑해골 특수부대가 그렇게 약했다면 수많은 왕실 구성원들과 장군들이 암살당하지 않았을 겁니다.”윌리엄이 경고를 마치자마자 폭발로 사지가 조각난 흑해골 대원들이 불바다 속에서 걸어 나오는 장면이 모니터에 비쳤다.그 장면을 목격한 윌리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설마 정말 개조당한 슈퍼 전사인 건가요?”생물학 박사인 설윤 공주는 불길에 휩싸인 채 절반 남은 몸으로 일어서는 그들을 인간응으로 여기지 않았다.더욱 소름 돋는 것은 흑해골들의 비명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면 속 흑해골들은 아무런 표정 없이 조용히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망할. 이건 좀비가 분명해.”“저격수, 사격 준비!”펑!저격수가 흑해골 부대원들의 머리를 날려버렸으나 머리가 없는 시체도 열 걸음 더 전진한 후에야 천천히 쓰러졌다.윌리엄은 이 장면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들은 더는 인간이 아니었다.이때 다른 흑해골 분대가 접근하더니 조준도 없이 무기를 들어 수백 미터 밖의 저격수를 사격했다.“전원 사격. 저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줍시다.”숲에 숨어있던 로얄 특수부대원들이 명령을 받고 총격을 퍼부었다.흑해골 대원들은 순식간에 수십 발의 총알을 맞고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 침착하게 기관총을 들어 반격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숨어있던 특수부대원들이 차례로 쓰러졌다.섬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졌다.매복해 있던 로얄 특수부대는 지리적 우세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피해를 보았다. 10분 만에 100명의 병력이 절반으로 줄었다.탄약을 다 쓴 특수부대원이 흑해골을 기습해 단검을 그의 머리에 꽂았지만 흑해골은 아무 일도 없듯 주먹으로 그를 10미터 밖으로 날려버렸다. 그의 공격에 전사의 가슴이 관통당하는 모습이 모니터에 비추어졌다.“윌리엄, 삼촌이 신의 도움을 빌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저는 그저 교황과 같은 종교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요. 그럼 이 세상에 진짜 신이 존재한다는 말인가요?”설윤의 세계
남아 있는 로얄 특수부대 대원들은 영진 장원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윌리엄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왕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설윤 공주는 미리 그에게서 청산가리를 받아 두었다. 저택이 함락되면 그녀는 즉시 독약을 삼킬 작정이었다.쾅!이 긴박한 순간, 귀청을 찌르는 천둥소리가 섬 상공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바다에서 폭풍이 일더니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폭풍우로 인해 저택 내부에서는 외부의 상황을 전혀 관측할 수 없었다. 무전기에서는 끊임없이 병사들의 비명만이 들려왔다.“공주님, 마지막 순간이 왔습니다. 흑해골 특수부대의 수가 너무 많아요. 우리 병사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윌리엄은 가슴에 십자표를 긋고 나서 공주를 마지막으로 깊게 바라보고 결연히 방을 나서서 마지막 전투에 참여했다.영진 장원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찢겨 나간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흑해골들이 이미 저택을 완전히 포위한 상태였다.살아남은 10여 명의 특수부대원이 저택 내부로 후퇴해 윌리엄과 합류했다.윌리엄과 만난 병사들은 이미 멘탈이 무너져 더는 전투에 참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떤 병사들은 바닥에 웅크린 채 머리를 부여잡고 울고 있었으며 심지어 정신이 나간 사람도 있었다.윌리엄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 정예 병사들은 그를 따라 공주를 호위하며 헨드리를 탈출할 때부터 미리 유서를 써둔 죽음을 각오한 자들이었다.이번 임무도 자원으로 참여한 병사들이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만났기에 이 모양이 된 것일까?“윌리엄 경, 그들은 신이었습니다. 진짜 신이 나타났어요.”한 병사가 비틀거리며 외쳤다.공포에 질려 있는 그들의 말속에서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어떤 존재가 그들을 학살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특수부대의 무기는 그들에게 전혀 효과가 없었고 상대는 맨손으로 야수처럼 그들을 찢어버렸다고 한다.윌리엄은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보았다.흑해골 특수부대가 이미 저택을 포위한 상태였고 정원 중앙에 누가 서 있었다.핏빛 같은 붉은 눈동자가 윌리엄을 향했고 단 한 번의
현대 문명에서 가장 으뜸으로 뽑히는 무기들이 이 남자에겐 장난감 같아 보였다. 총알들은 마법처럼 멈춰 버렸고 완전히 무력화되었다.“아악!”윌리엄은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한편, 굉음과 함께 천둥이 연속으로 울려 퍼졌고 사나운 폭풍우는 점점 더 거세졌다.이 비바람 속에서 한 대의 수상비행기가 영진 장원이 있는 섬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냉철한 얼굴로 비행기를 조종하는 주작, 침착하게 지도를 살피는 현모, 느긋하게 뒤에 앉아 있는 윤구주 그리고 미친 듯이 문을 열어젖히며 거칠게 바다를 향해 포효하는 광전사 백호가 비행기에 있었다.“시끄러워, 좀 닥쳐.”윤구주는 짜증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비행기에 있는 내내 백호는 단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냥 사람 하나 구하러 가는 건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건지.“저하! 이 분위기 어때요? 하늘도 이 무시무시한 백호의 위엄에 벌벌 떨고 있잖아요.”백호는 큰소리로 웃으며 윤구주에게 튀어나온 가슴근육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윤구주는 할 말을 잃었다.백호의 말이 끝나자 비행기 안은 찬물을 뒤엎은 듯 조용했다.백호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죄 짓은 아이처럼 조용해졌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윤구주가 일어나더니 백호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꺼져! 이 미친놈아. 네 힘으로 헤엄쳐 가서 아사 신전의 가짜 신들을 박살 내 버려.”퍽!윤구주의 강력한 발길질에 백호는 비행기에서 차여 나가 거친 바닷속으로 떨어졌다.“저하, 이제 백호를 해방해 주셨군요.”현모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됐어. 시끄럽게 입만 살아서 진절머리 나게 하더라. 알아서 일하게 놔둬.”윤구주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에 백호로 실험을 했을 때 성수의 피를 성공적으로 융합시킨 뒤로 그가 더 미쳐버렸다.하지만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백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윤구주가 백호의 미친 기질을 고칠 방법을 고민하던 그때...한편,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