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요? 윤구주가 일반여성과 결혼하려고 한다고요?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 없어요!”바닥에 꿇어앉은 임진형이 말했다.“확실합니다. 제가 어찌 감히 저하를 속이겠습니까?”문아름은 윤구주과 소채은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끝없는 분노와 질투 때문에 그녀는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그녀는 부들거리면서 주먹을 꽉 쥐었고 아름다운 두 눈동자도 벌게졌다.“그 여자를 죽여야겠어요! 임형진 씨, 당신은 당장 그 여자의 주소를 알아내요. 내가 직접 그 여자를 죽여야겠어요. 그 여자를 죽여서 윤구주가 후회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게 할 거예요!”문아름은 미친 사람처럼 악다구니를 썼다....밤이 찾아왔다.소씨 저택.소채은은 저녁을 먹은 뒤 홀로 방으로 돌아가서 요가를 하기 시작했다.트레이닝복을 입은 소채은은 아름다운 몸 선을 그대로 드러내며 운동했고, 소채은의 부모님은 청첩장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밤이 깊어졌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소채은이 방 안에서 요가를 하고 있을 때 지붕 위에 귀신 같은 세 사람이 나타났다.방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요가하는 소채은은 이 상황을 전혀 몰랐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요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저하! 바로 저 여자입니다!”지붕 위, 임진형의 목소리가 문아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문아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래 있는 소채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소채은의 아름다운 얼굴과 완벽한 미모를 보았을 때 질투가 더 활활 불타올랐다.“저 여자가 바로 소채은인가요?”“그렇습니다, 저하!”“저하가 한 마디만 하신다면 저 여자를 죽여서 저하의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임진형이 말했다.“한? 무엇 때문에 내가 저 여자에게 한을 품었다고 생각하는 거죠?”문아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에게서 살기가 느껴졌다.임진형은 몸을 흠칫 떨면서 서둘러 말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문아름의 입가에 음험한 미소가 걸렸다.“명심해요. 내가 저
민규현의 뒤에는 네 명의 암부 구성원이 있었다.민규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임진형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저 사람은 암부의 호존 민규현 씨가 아닌가요? 그가 왜 여기 있는 걸까요?”문아름도 민규현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독사 같은 눈빛으로 먼 곳에 있는 민규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알겠네요. 윤구주가 뭔가를 눈치챈 게 틀림없어요.”화진의 이황왕이라고 불리는 문아름은 똑똑했다.민규현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곧바로 윤구주의 의도를 눈치챘다.“저하, 저하 말씀은 구주왕이 일부러 민규현 씨를 보냈다는 건가요?”임진형이 의아해하며 말했다.“당연하죠. 이 세상에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구주왕뿐일 거예요.”문아름이 중얼댔다.“저하, 그러면 어쩌죠? 소채은이라는 여자를 죽여야 할까요?”임진형이 물었다.문아름은 덤덤한 눈길로 먼 곳에 있는 민규현을 힐끗 보았다.“이틀은 더 살려두죠. 민규현이 나타났으니 곧 윤구주도 나타날 테니 말이에요.”“호존 혼자라면 제가 상대할 수 있습니다.”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칼을 안은 남자 독고명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그의 목소리는 마치 그의 성격처럼 무감정했다.그 말을 내뱉자마자 엄청난 전의가 그에게서 뿜어졌다.“됐어요. 일단 물러나기로 해요.”문아름은 독고명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그는 싸움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강한 상대일수록 그는 더욱 흥분했다.바위 같던 독고명은 문아름이 떠나자 싸늘한 시선으로 먼 곳의 민규현을 힐끗 본 뒤 자리를 떴다.명령을 받고 소채은의 집으로 온 민규현은 엄청난 살기를 느끼고 저도 모르게 바짝 경계했다.그러나 잠시 뒤, 그 살기는 감쪽같이 사라졌다.이러한 상황에 민규현은 미간을 찡그리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설마 내가 조금 전에 착각한 걸까?”중얼대던 민규현은 다시금 주위를 살폈고, 아무런 위험도 없다는 걸 인지하고 나서야 안도했다.그날 밤, 민규현은 네 명의 암부 구성원들과 함께 밤새 소채은의 집 문 앞을 지켰다.다음 날
소채은은 비록 민규현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민규현의 인상이 좋다고 생각했다.민규현이 자신을 형수님이라고 부르자 소채은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형님이 형수님을 지키라고 보내셨습니다.”민규현은 윤구주의 진짜 신분을 밝힐 수는 없어서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구주가요?”소채은은 당황했다.“그렇습니다, 형수님.”소채은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어머나, 구주도 참 걱정을 사서 하네요. 강성은 치안이 훌륭한데 왜 제 걱정을 그렇게 한대요?”“형님께서는 곧 형수님과 결혼하시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면 좋은 거죠.”민규현이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계속 밖에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서 물 좀 마셔요.”소채은이 예의 있게 말했다.“아닙니다, 형수님. 저희는 밖에 있으면 됩니다.”민규현이 말했다.민규현 일행이 절대 들어가지 않으려 하자 소채은도 별수 없었다.“알겠어요.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날 불러요.”“네, 네! 감사합니다, 형수님.”그러고 나서야 소채은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암부 호존이 직접 소채은을 보호했기에 윤구주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다음 날, 소채은은 웨딩드레스를 고를 생각이라 엄마와 함께 외출할 생각이었다.집에서 나오자마자 민규현이 나타났다.“형수님, 외출하시려고요?”소채은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샵에 가서 웨딩드레스 몇 벌 좀 골라보려고요!”“그러면 저희가 경호해 드리겠습니다.”민규현이 말했다.“그쪽도 가려고요?”천희수는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엄마, 괜찮아요. 구주가 절 지키라고 보낸 사람들이니까 그냥 같이 가요.”“그래.”천희수는 비록 불만스러웠지만 결국 동의했다.소채은은 자기 차를 타고 직접 운전 해서 갔다.그리고 민규현과 네 명의 부하들은 다른 차를 타고 그들의 뒤를 바짝 따랐다.소채은은 엄마와 함께 곧 웨딩드레스샵에 도착했다.민규현과 네 명의 부하들은 나이 많은 남자였기에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소채은은 엄마와
갑자기 나타난 검을 안은 남자를 본 순간, 민규현은 위험을 감지했다.민규현은 계속해 걸어가다가 독고명과 5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서 멈춰 선 뒤 시선을 들어 짙은 살기를 내뿜는 독고명을 바라보았다.“날 기다린 건가?”민규현이 입을 열었다.검을 안은 독고명은 천천히 무감정한 두 눈을 떴다.“그래. 민도살이라는 별명을 가진 암부 3대 지휘사 호존 민규현. 오늘 내 검으로 당신과 한번 겨뤄보고 싶군!”독고명은 말을 마친 뒤 천천히 손에 든 검을 뽑았다.검은 아주 길었고, 검을 뽑는 순간 서늘한 한기가 사방을 뒤덮었다.민규현은 그의 검을 바라보면서 냉소했다.“겨뤄보고 싶다고? 좋아. 내가 상대해 주지!”힘찬 외침과 함께 민규현은 빠르게 독고명을 향해 달려들었다.독고명이 검을 휘두르자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기가 날아들었다.많은 사람을 베었던 검날과 민규현의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민규현과 독고명이 싸우고 있을 때 민규현의 네 부하들은 샵 문 앞에서 소채은을 지키고 있었다.이때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민규현의 부하들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은 아니었기에 거센 바람이 느껴지자 그중 한 명이 바로 외쳤다.“조심!”그는 빠르게 몸을 피했고 쿵 소리와 함께 엄지손가락만 한 돌멩이가 날아왔다.본인들을 습격한 것이 돌멩이인 걸 확인한 민규현의 부하들은 안색이 달라졌다.“저기야! 쫓아가!”네 사람은 동시에 쫓아갔다.그런데 골목길 쪽에 도착하자마자 미모의 여성이 그들을 공격했다.민규현의 부하들은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눈앞이 까매지면서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곧이어 경국지색의 여성이 걸어 나왔다.그녀는 화진의 새로운 왕, 매우 아름답고 화려하게 빛나는 여자 문아름이었다.문아름은 아름다운 눈을 들어 눈앞의 웨딩드레스샵을 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웨딩드레스샵 안의 직원은 대단한 미인이 안으로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부러워하며 말했다.“저기 저 미인 좀 봐요! 엄청 아름답고 분위기 있어요!”천
문아름은 소채은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 속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차가운 단검이 그녀의 소매에서 나왔다.그 단검의 이름은 혈자로 그녀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었다.그 검으로 사람을 찌르면 1분도 채 되지 않아 사람의 몸에 있는 모든 혈액을 빼낸다.“죽여! 죽여!”문아름은 소채은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문아름이 손을 쓰려던 그때, 웨딩드레스샵 문이 열리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지저분한 차림의 어린아이가 안으로 들어왔다.“저, 혹시 저한테 먹을 것 좀 주실 수 있나요?”어린아이는 7, 8살쯤 돼 보였는데 손에는 낡은 그릇을 들고 있었다. 아이는 맨발로 들어온 뒤 웨딩드레스샵 직원들에게 구걸하기 시작했다.아이가 들고 있는 이 빠진 그릇 안에는 꼬깃꼬깃한 잔돈이 들어 있었다.어린아이가 안으로 들어오자 웨딩드레스샵 직원들은 곧바로 싫은 내색을 했다.“나가, 나가! 왜 자꾸 우리 샵에 와서 구걸하는 거야? 얼른 나가! 우리 영업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한 뚱뚱한 직원이 매섭게 말했다.맨발의 어린아이는 그 기세에 겁을 먹고 몸을 뒤로 물렸지만 그럼에도 계속해 말했다.“제발 부탁드려요. 아주 조금만 주셔도 좋아요!”“주긴 뭘 줘? 당장 나가. 지금 나가지 않면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뚱뚱한 직원이 손을 올리자 겁을 먹은 아이는 얼른 밖으로 뛰쳐나갔다.“잠깐만요!”이때 웨딩드레스를 입은 소채은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소채은이 입을 열자 문아름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소채은은 아이의 곁으로 걸어가더니 안타까운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며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꼬마야, 너 어려 보이는데 학교 안 다녀? 왜 여기서 구걸하는 거야?”맨발의 아이는 소채은의 질문을 듣더니 지저분한 얼굴을 들면서 말했다.“부모님 다 돌아가셔서 이젠 저 혼자예요. 그래서...”“휴, 알겠어. 그러면 누나한테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봐.”소채은이 말했다.“먹을 걸 사 먹을 수 있게 돈을 주셨으면 좋겠어요!”아이가 말
빵빵!이때 차 한 대가 먼 곳에서 달려왔다.돈을 훔치고 도망친 아이는 달리기가 무척 빨라서 달려오는 차를 미처 보지 못했다. 차를 보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겁을 먹은 아이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아이가 차에 치일 것 같은 순간, 한 사람이 빠르게 달려와서 목숨 걸고 아이를 안았다.“조심해!”그 사람은 당연하게도 소채은이었다.“채은아!”“손님!”웨딩드레스샵의 직원과 천희수는 소채은이 목숨 걸고 아이를 지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끼익!타이어와 지면이 심하게 마찰하며 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모든 이들이 소채은과 아이가 차에 치일 거로 생각했을 때, 그 차는 소채은을 가까스로 비껴가며 어렵게 멈춰 섰다.운전자는 곧바로 차에서 내리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채은아, 괜찮니?”천희수는 차가 멈춰선 걸 보고 겁을 먹어서 울먹거리며 달려가 소채은을 살펴봤다.웨딩드레스샵 직원도 황급히 달려가 소채은을 걱정했다.아이를 품에 꼭 안은 소채은은 아이가 원망스럽지도 않은지 오히려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위로했다.“괜찮아, 이제 괜찮아.”“손님, 너무 착하신 거 아니에요? 왜 이런 아이를 목숨 바쳐 구하신 거예요? 게다가 이 아이는 손님 돈까지 빼앗았잖아요!”웨딩드레스샵 직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그래, 채은아. 왜 이렇게 바보 같니?”천희수마저 참지 못하고 소채은을 나무랐다.소채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저 괜찮잖아요? 그리고 얘는 아직 아이일 뿐이잖아요.”말을 마친 뒤 소채은은 덜덜 떨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꼬마야,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제 괜찮아!”아이는 순박한 눈빛으로 소채은을 바라보았다.“누나, 왜 절 구해준 거예요?”소채은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널 구하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하지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저한테 이렇게 잘해준 사람은 없는걸요!”아이는 입을 쭉 내밀었다.소채은은 그 말을 듣더니 꼬질꼬질한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걱정하지 마. 앞으
“조금 전 상황에서 만약 운전자가 제때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 차에 치여서 죽었을 거예요. 정말 궁금하네요. 왜 당신의 돈을 빼앗고 도망친 아이를 구하려 했는지.”문아름이 다시금 물었다.소채은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맞아요. 아까 그 아이는 제 돈을 훔쳤어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아이는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게다가 아직 너무 어리잖아요.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많다고요. 제대로 가르치는 어른이 없다면 그 아이는 아마 평생 바른길로 들어서지 못할 거예요. 만약 제가 한 일이 그 아이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은 거 아니겠어요? 게다가 어린아이잖아요. 제가 아니라 당신이었다고 해도 발 벗고 나서서 아이를 구하려고 했겠죠.”소채은은 말을 마친 뒤 시선을 들어 문아름을 바라보았다.그 말에 문아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였다면 절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문씨 세가의 귀한 딸이자 화진의 새로운 왕인 그녀가 구걸하는 아이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걸 리가 없었다.문아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서 있는 소채은을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가 왜 당신을 좋아하는지 이제야 알겠네요.”“네? 뭐라고요?”소채은은 문아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리고 문아름은 설명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자조하듯 웃더니 소채은을 향해 손을 저으며 말했다.“오늘은 운이 좋아서 목숨 건진 줄 알아요. 앞으로는 절대 오늘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이상한 말만 남긴 뒤 문아름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소채은은 멍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문아름의 말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채은아, 저 여자 누구니? 너랑 무슨 말을 한 거야?”옆에 있던 천희수는 문아름이 떠나자 곧바로 소채은 곁으로 다가갔다.소채은은 고개를 젓더니 멀어지는 문아름의 뒷모습을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문아름은 자리를 뜬 뒤 오른손으로 수인을 맺고 앞을 가리켰다.그리고 그 순간,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민규현과 한창 싸우고 있던 독
검이 지나가자 모든 게 파괴됐다.민규현은 검을 막은 뒤 두 눈을 부릅뜨고 앞을 노려보았지만, 독고명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빌어먹을, 도망을 쳐? 젠장, 실력 있으면 다시 겨뤄보자고!”민규현은 이미 떠난 독고명 때문에 화가 나서 주먹을 움켜쥐고 욕을 했다.그러나 아쉽게도 독고명은 이미 떠난 상태였다.텅 빈 거리를 바라보던 민규현은 문득 소채은을 떠올렸다.“큰일이네. 형수님께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겠지?”다른 건 신경 쓸 새도 없이 민규현은 부리나케 달려갔다.웨딩드레스샵에 도착했을 때 민규현은 문 앞에 서 있는 소채은과 천희수를 보았다.소채은이 무사한 걸 본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형수님, 별일 없으시죠?”민규현이 달려가서 서둘러 물었다.“괜찮은데요. 왜요?”소채은은 자신이 조금 전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몰랐다.소채은이 괜찮다고 하자 민규현이 말했다.“괜찮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젠장, 애들은 어디 갔지?”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조금 전 그가 남겨두었던 네 명의 암부 구성원들은 전부 사라졌다.“형수님, 웨딩드레스는 고르셨어요? 다 고르셨으면 얼른 집으로 돌아가요!”민규현은 여기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 황급히 말했다.소채은은 할 일이 없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좋아요. 지금 바로 집으로 돌아가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천희수와 함께 차를 타고 떠났다.소채은과 천희수가 무사히 돌아간 걸 본 민규현은 그제야 서둘러 무전기를 꺼내며 자신의 네 부하를 찾기 시작했다.그러다가 그는 앞쪽 골목길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들을 발견했다.그들에게 다가간 민규현은 그들이 자기 부하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서둘러 허리를 숙이고 네 명의 상태를 살펴보니 정신을 잃은 것뿐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그래서 민규현은 빠르게 그들을 깨웠다.“지휘사님...”네 명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민규현을 보았다.“쓸모없는 놈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얘기해 봐. 너희들은 왜 다 여기 기절해 있었어?”민규현이 물었다.네 부하는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