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홍은 소지영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웃으며 말했다.“누나 말이 맞아요. 참, 제가 누나를 위해 호텔을 예약해 뒀는데 우선 호텔로 가요!”“그래!”소천홍 부자는 소지영을 데리고 공항을 떠났다.BMW 안, 소천홍은 운전하고 있었고 해외에서 돌아온 소지영은 뒷좌석에 앉아있었다.그녀는 미간을 구기면서 차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구질구질하네. 공기도 탁하고 말이야. 저것 좀 봐. 거리가 아주 더럽고 지저분해. 역겨워 죽겠어!”소지영이 계속 투덜대도 소천홍은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누나, 이번에는 국내에 얼마나 있을 생각이에요?”“내가 왜 여기서 지내? 여기처럼 구질구질한 곳에는 1분이라도 더 있을 생각이 없어!”소지영이 불평했다.“그러면 누나는 이번에 소채은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돌아온 건가요?”소천홍이 물었다.“소채은을 위해서라니? 말도 안 돼! 솔직히 얘기할게. 이번에 내가 돌아온 건 네 형부 쪽의 한 협력업체가 국내에 투자를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우선 상황 좀 알아보려고 온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곳에 왜 왔겠니?”소지영이 같잖다는 듯이 말했고 그 말에 소천홍은 미소를 지었다.“누나, 누나가 떠난 10년 동안 우리 소씨 일가가 많이 달라졌어요.”소천홍이 갑자기 감개하며 말했다.“달라졌다고?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데?”소지영이 냉소했다.“휴, 말하자면 긴 얘기예요. 누나는 모르겠지만 우리 소씨 일가는 지금 외부인에게 점령당했어요. 심지어 저도 쫓겨났어요!”소천홍은 말하다가 갑자기 울먹거렸다.“뭐? 네가 쫓겨났다고? 무슨 뜻이야?”소지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소천홍은 억울한 척하면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솔직히 얘기할게요. 저랑 소진이 지금 소씨 일가에서 쫓겨나서 길거리에 나앉았어요.”“응? 그럴 리가 없잖아. 넌 소씨 일가 장남이잖아. 그런데 네가 왜 집안에서 쫓겨나?”소지영은 의문 가득한 얼굴이었다.“제가 소씨 일가 장남이기 때문에 절 집안에서 내쫓은 거죠
“기억을 잃은 남자? 소진, 하나도 빼먹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소지영이 매섭게 다그쳤다.소진이 말했다.“소채은 그 계집애가 올해 중해그룹 아들이랑 정략 결혼하기로 했었거든요? 우리 소씨 일가의 발전에 도움이 되니까요. 그런데 결혼하기 며칠 전에 그 계집애가 갑자기 다른 남자랑 놀아난 거예요. 심지어 우리에게 딱 걸렸죠! 그뿐만 아니라 소채은은 결혼 약속을 어겼고 심지어 그 남자를 소씨 일가로 데려왔어요. 그 빌어먹을 놈은 싸움을 아주 잘해요. 그래서 우리는 차마 건드리지를 못했어요. 그리고 결국... 결국... 저랑 저희 아빠는 집안에서 쫓겨났어요.”소진의 말에 소지영은 화가 울컥 치밀었다.“젠장! 아주 나쁜 놈들이네! 소청하, 정말 대단한 딸을 뒀네. 감히 이렇게 우리 집안에 먹칠하는 뻔뻔한 일을 하고 말이야. 소진, 이번에 소채은이랑 결혼한다는 사람이 설마 걔랑 만난다던 그 자식은 아니지?”소지영이 호된 목소리로 물었다.“맞아요. 그 남자예요.”소진이 말했다.“고모, 그 남자는 심지어 기억을 잃었어요. 예전에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는지, 사람을 죽인 적은 없는지 알 수도 없다고요!”소진이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소지영은 화가 단단히 났다.“뻔뻔하네! 정말 뻔뻔해! 소청하가 이렇게 수치도 모르는 딸을 뒀을 줄이야. 심지어 나한테 결혼식에 참석하라고 연락을 해? 소천홍, 지금 당장 방향 돌려. 지금 바로 소씨 저택으로 가야겠어! 난 그 뻔뻔한 계집애가 대체 어떤 빌어먹을 놈이랑 만나는 건지 봐야겠어!”소천홍은 그 말을 듣더니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누나 말대로 할게요.”말을 마친 뒤 그는 갑자기 급커브를 돌았고, 곧 소씨 저택으로 달렸다.처량한 처지의 두 부자는 드디어 소망을 이루었다.그들은 외국인인 척하는 소지영이 본인들을 대신해 소씨 일가의 산업을 빼앗아와 주길 바랐다.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소씨 저택.마당에 있던 소청하는 갑자기 소지영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소지영이 비행기에서 내려 그곳
민규현을 본 소청하는 서둘러 그에게 달려가서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저번에 용인 빌리지에서 윤구주의 실력을 알게 된 뒤로 소청하는 겁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오늘 민규현을 보게 되자 소청하는 진심으로 두려웠다.민규현은 소청하를 같잖게 생각했기에 그저 짧게 대꾸했다.“밖에 나가려는 겁니까?”민규현은 소채은도 따라 나온 걸 보자 소청하에게 물었다.“아뇨, 아뇨. 저희는 그저 저희 소씨 일가의 친척을 마중 나온 것뿐이에요. 채은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특별히 해외에서 돌아온 제 친척 누나예요!”소청하가 서둘러 말했다.소채은의 결혼식을 축하해주러 온 사람이라는 말에 민규현은 가만히 있었다.햇빛 아래, 소청하는 천희수와 소채은을 데리고 문 앞에서 기다렸다.잠시 뒤 검은색 BMW 5시리즈가 먼 곳에서 달려왔다.“왔나?”소청하는 차가 소씨 저택을 향해 오자 서둘러 앞으로 나갔다.천희수와 소채은도 시선을 들어 앞을 내다보았다.차가 멈춘 뒤 먼저 차에서 내린 건 짙은 화장에 선캡을 쓴, 외국인인 척하는 소지영이었다.해외에서 거의 10년을 산 소지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국내의 공기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누나!”소청하는 소지영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고 흥분해서 그녀에게 달려갔다.천희수도 뒤에서 인사를 건넨 뒤 소채은을 데리고 다가갔다.“채은아, 빨리 고모한테 인사해야지!”소채은은 그녀를 힐끗 본 뒤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안녕하세요, 고모.”차에서 내린 소지영은 소청하 등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어머, 소씨 저택이 원래 이랬던가? 난 또 어떻게 변했나 했네! 천홍, 소진, 너희도 차에서 내려!”소지영의 말에 차 문이 다시 한번 열렸고, 소씨 일가에서 내쫓겼던 소천홍 부자가 차에서 내렸다.“어? 여, 여, 여긴 어떻게 왔어요?”소천홍 부자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소청하의 안색이 달라졌다.소채은의 표정 또한 순식간에 굳었다.차에서 내린 소천홍은 소지영의 곁에 서서 말했다.
“저 사람들이 예전에 저한테 무슨 짓을 했었는지 잊었어요?”소채은이 분통을 터뜨렸다.“채은아,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만 얘기해. 어쩌면 네 결혼을 축하하러 온 걸지도 모르니 말이야.”천희수가 옆에서 설득했다.“제 결혼을 축하하러 왔다고요? 저 사람들에게 그런 양심이 있겠어요?”소채은이 매섭게 말했다.“됐어, 됐어.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무슨 상황인지 지켜보자. 만약 두 부자가 예전처럼 군다면 내가 바로 집에서 내쫓을게.”결국 소청하의 설득 끝에 그들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소청하 일가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암부 구성원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민규현의 곁으로 다가갔다.“지휘사님, 조금 전에 왔던 사람들 때문에 소채은 씨 심기가 불편하신 것 같은데 저희가 나설까요?”민규현은 이미 마당 안으로 들어간 소청하 등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됐어. 그들 집안일인 것 같으니 말이야.”“네!”민규현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등 뒤에서 두 목소리가 들렸다.“형님!”어느샌가 정태웅과 천현수가 그곳에 와 있었다.“정태웅? 천현수? 너희가 여긴 웬일이야?”민규현은 두 사람을 보자 흥분해서 달려갔다.뒤에 있던 암부 부하들은 정태웅과 천현수를 보자 곧바로 외쳤다.“정태웅 지휘사님, 천현수 지휘사님, 안녕하십니까!”정태웅은 통통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인사는 됐어. 여기서는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정태웅, 천현수, 너희 둘이 여긴 웬일이야? 저하는 만났어?”민규현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서 물었다.“형님, 저하는 이미 뵙고 왔습니다!”천현수가 말했다.“그러면 저하랑 같이 있지 여긴 왜 온 거야?”민규현이 물었다.“전부 이 정태웅 때문입니다!”천현수가 정태웅을 향해 눈을 흘겼다.“정태웅?”민규현은 당황했다.“맞습니다, 형님. 사실 정태웅이 저하가 곧 결혼한다는 걸 알고 나서 저하와 결혼하는 소채은 씨를 꼭 보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새벽부터 절 끌고 여기까지 온 겁니다.”천현수가 상황을 설명했다.“그리고 마침 형님도 보
“천현수, 저기 봐!”말하는 사이 그는 다시 날아올랐다.눈 깜짝할 사이, 공처럼 뚱뚱한 몸을 가진 그는 이미 소씨 저택 거실의 지붕 위에 서 있었다.천현수가 곧 그를 뒤따랐다.소씨 저택 거실 안.이제 막 해외에서 돌아온 소지영은 온몸에 명품을 걸치고 거만한 태도로 거실 중앙의 의자에 앉아있었다.짙은 화장을 한 얼굴은 이기적이고 막무가내인 듯한 느낌을 줬다. 마치 해외에서 돌아와서 몸에 금이라도 한층 두른 것 같았다.소천홍 부자는 그녀의 양쪽에 나뉘어져 앉아있었다.안으로 들어온 소청하 가족은 아래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지붕 위에서 거실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바라보던 정태웅이 중얼거렸다.“저하의 약혼녀는 어디 있지?”“바보야? 저기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보이지 않아?”천현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채은을 가리켰다.정태웅은 아름다운 소채은을 본 순간 눈을 반짝였다.“세상에, 저분이 바로 저하의 약혼녀야? 너무 아름다운데?”천현수는 웃으며 말했다.“당연한 소리! 우리 저하는 세상에 둘도 없는 대단한 분이야. 심지어 잘생기셨지. 그러니 약혼녀도 당연히 훌륭하지 않겠어?”“그렇지, 그렇지. 아름다워! 정말 너무 아름다워! 난 마음이 고운 사람들은 얼굴은 예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정말 놀라워! 우리 저하의 약혼녀는 정말 엄청난 미인이야. 문아름 그 지독한 여자보다 만 배는 더 아름다워!”정태웅이 흥분해서 말했다.그의 말대로 소채은은 확실히 아주 아름다웠다.비록 평범하디 평범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아름다운 얼굴은 감출 수가 없었다.백옥 같은 피부에 오뚝한 코, 여신처럼 아름다웠다.소채은을 바라보던 정태웅은 넋을 반쯤 놓고 있었다.그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우리 저하 약혼녀 집에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지?”“손님 아닐까?”천현수가 말했다.“아아!”두 사람은 계속 지붕 위에서 그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채은을 훔쳐보았다.거실 안.소지영은 명품 가방 안에서 길고 가느다란 숙녀용 담배를
해외에서 돌아온 소지영은 그 말을 듣고 말했다.“둘째야, 확실히 네가 좀 선을 넘었다. 어찌 됐든 천홍이는 네 형이야. 너랑 같은 소씨 일가 피가 몸에 흐르고 있어. 그런데 어떻게 네 형을 집안에서 내쫓을 수 있어?”소청하는 차갑게 웃었다.“누나, 형의 편을 들어주려고 할 필요 없어요. 형은 예전에 우리 가족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따지고 들려 한다니,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그 말에 소지영은 차갑게 코웃음쳤다.“설마 내가 한 말도 소용없다 이거야?”“맞아요!”소청하가 강하게 말했다.“이 자식!”소지영은 탁자를 내리쳤다.그녀가 보기에 소청하는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성질을 내는 걸까?심지어 그녀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둘째야, 네 딸이 지금 소씨 일가 가업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서 네가 대단하다고 착각하지 마! 흥, 겨우 소씨 일가가 1년에 돈을 얼마나 번다고 그래? 너희 소씨 일가의 모든 재산을 다 더해도 해외에서의 내 연봉보다 낮아.”소지영은 담배를 피우면서 거드름을 피웠다.옆에 있던 소천홍이 이때 말을 보탰다.“그러니까. 감히 누나랑 비교하려 들다니, 그건 닭과 봉황을 비교하는 것과 다름없지. 그리고 네 딸이 이번에 결혼하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그 남자 정말 별 볼 일 없던데. 직장도 없고 돈도 없고 심지어 예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도 모를, 기억을 잃은 쓸모없는 사람이랑 딸을 결혼시키려 하다니. 하하, 우리 소씨 일가 선조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너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나실 거야.”소천홍의 말에 소청하는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입 다물어요! 감히 한 번 더 내 사위를 모욕한다면 그 입 찢어버릴 거니까요!”소천홍이 같잖다는 듯이 말했다.“난 사실만 말했을 뿐이야.”소천홍과 소청하가 거실에서 크게 싸우고 있을 때, 지붕 위에 있던 정태웅이 미간을 잔뜩 구겼다.“천현수! 저 빌어먹을 자식이 우리 저하를 욕한 거지?”
“창피하다면서 왜 돌아왔는데요? 외국물 좀 먹었다고 정말 외국인이라도 된 것 같아요? 참! 배꼽 빠지는 소리를 하고 있네요.”소청하는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그는 지금 안중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누가 감히 윤구주에게 무례하게 굴면 그는 끝까지 달려들 것이다.그러자 소지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소청하! 뭐라고? 감히 어디서 그런 말을.”그런데 소청하는 더 당당하게 말했다.“한 번 더 말해줄까요? 명품 입고 담배를 한 대 물었다고 정말 자기가 외국인 된 줄 아나 봐요. 퉤! 제기랄! 우리 소씨 가문은 당신들 같은 쓰레기는 환영하지 않아요!”소청하는 마구 욕을 퍼부으면서 소지영을 내쫓았다.“너, 감히 나를 내쫓아?”소지영은 팔짝 뛰면서 말했다.“내쫓지 못할 건 없잖아요! 지금 소씨 사람들은 우리 딸 말을 들어야 해요!”소청하는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여봐라, 이 쓰레기들을 집에서 쫓아내!”그의 명령에 하인 몇 명이 빠르게 뛰어 들어왔다. 그러자 소지영과 소천홍 부자는 겁을 먹었다.“좋아! 소청하, 딱 기다려! 나중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천홍아, 가자!”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진 소지영은 결국 소천홍을 데리고 소청하의 집에서 쫓겨났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더니 소채은은 소청하 곁으로 빠르게 달려와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아빠, 잘했어요!”그러자 소청하도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그럼! 쓰레기들 주제에 감히 우리 사위를 뭐라 해? 그들의 입을 찢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역시, 우리 아빠!”소지영과 소천홍 부자가 떠난 후 옥상에 서 있던 정태웅과 천현수는 화가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정태웅은 엄하게 말했다.“X발! 저 쓰레기들이 감히 우리 저하를 욕해? 정말 참을 수가 없네! 현수야, 너는?”그러자 얌전하기만 하던 천현수의 눈에서는 살의가 맴돌았다.“참을 수 없으면 우리가 손 좀 써야지. 안 그래?”“하하! 같은 생각이군! 가자! 이 자질구레한 새끼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소천홍이 차를 몰고 달리고 있을 때, 검은 그림자 두 개가 마치 귀신처럼 갑자기 차 앞에 나타났다.“아버지, 조심하세요!”조수석에 앉아 있던 소진은 그림자가 나타나자 소리를 질렀다. 소천홍도 그림자를 본 뒤 오른발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었지만 차의 속도가 너무 빨라 옆 가드레일에 쾅 하고 부딪혔다. 그러자 찌그러진 차 앞부분은 흰 연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차 안에 있던 소천홍 부자와 소지영은 다치지 않았다.소천홍의 차량이 가드레일을 들이박은 후,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수야, 바로 이 세 쓰레기야. 아까 우리 저하를 욕하던 사람들.”방금 말을 한 사람 화진 암부 3대 지휘사중 한 명인 백곰 정태웅이었다.천현수는 고개를 끄덕이었다.“그럼 내가 먼저 가서 사람 됨됨이를 가르쳐줄게. 너는 여기서 잠시 기다려.”정태웅은 말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태웅아, 대충 해. 그래도 채은 형수님 친척인데.”천현수는 정태웅이 일을 크게 만들까 봐 귀띔해 주었다. 그러자 정태웅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깐 너는 지켜보기만 해!”그리고 그는 공처럼 불룩한 배를 비틀며 그쪽으로 걸어갔다.가드레일에 부딪힌 소천홍 부자는 소지영을 차에서 부축하여 내렸다.소진은 길을 막은 정태웅과 천현수를 보자 욕설을 퍼부었다.“X발! 어디서 튀어나온 뚱보야? 눈 감고 다녀? 차에 치여 죽고 싶어?”욕을 먹는 정태웅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어이. 전에 당신들이 우리 저하를 욕했어?”응?“이 뚱보가 뭐라는 거야?”소진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소천홍과 소지영도 어리둥절해했다.“대답 안 해?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을게. 너희가 우리 저하를 욕했어?”정태웅의 말을 듣자 소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야, 뚱보! X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개뿔 저하야...”소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쩍이는 빛과 함께 정태웅은 그의 목을 빠르게 찔렀다. 선현은 마치 분수처럼 소진의 목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