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방부.이황전.이곳은 문아름의 침궁이었다.금빛의 망포를 입은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대전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뒤에는 목석같은 검을 안은 남자 독고명이 서 있었다.이때 누군가 빠르게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저하! 군형 삼마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안으로 달려 들어온 자는 다름 아닌 후방지원부대의 임진형이었다.군형 삼마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말에 문아름의 악랄한 두 눈동자가 천천히 떠졌다.“말해요.”임진형은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저하, 군형 삼마는 계획대로 임무를 완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채은이라는 여자의 몸에 군형에서 가장 지독한 천시 고충을 심어뒀다고 합니다. 소문에 따르면 천시 고충은 군형에서 독성이 가장 독한 독충으로 이것을 치료할 방법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고충에 당한 사람은 당장 죽는 것이 아니라 몸이 서서히 썩어 들어가면서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하하하하!”임진형의 말에 문아름은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잘했군요!”그렇게 말하더니 문아름은 악랄함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윤구주, 이제 너도 괴로워지겠지? 네가 아무리 천하무적이라고 해도, 네가 화진의 왕이었다고 해도 그게 뭐가 중요해? 그래봤자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력한 인간인데 말이야. 하하하하! 딱 기다려, 난 네 여자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괴로움을 느끼게 해줄 거고, 네가 평생을 후회 속에서 몸부림치게 할 거야!”...시간은 물처럼 빠르게 흘러 곧 이틀이 지났고 마침내 10월 8일이 되었다.이날은 윤구주와 소채은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그리고 온 도시가 윤구주와 소채은의 결혼을 축하하는 날이어야 했다.그러나 지금, 소씨 저택 앞은 더없이 썰렁했다.초대를 받은 친지들이 전부 떠난 뒤 소씨 저택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용인 빌리지는 경비가 아주 삼엄했다.산 아래에는 천하회와 암부 사람들뿐이었다.용인 빌리지
윤구주는 그들을 쓱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나랑 같이 로비로 가지. 할 얘기가 있어.”“네!”곧이어 다들 윤구주를 따라 로비로 향했다.커다란 로비 안, 윤구주는 제일 위쪽에 자리를 잡았고 박창용, 민규현, 원성일, 정태웅 등 사람들은 차례대로 아래쪽에 앉았다.모두 자리에 앉은 뒤에야 윤구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오늘 자네들을 부른 건 아주 중요한 일을 통보하기 위해서야.”“말씀하십시오, 저하!”사람들이 말했다.윤구주는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쭉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지금부터 다들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도록 해.”‘뭐라고?’그의 말에 사람들은 당황했다.“저하, 저희에게 가라고 하신 겁니까?”정태웅이 가장 처음 말했다.다른 사람들도 답답한 심정으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다들 돌아가. 용인 빌리지를, 강성을 떠나.”“저하, 왜입니까? 저희는 소채은 씨의 복수도 하지 못했고 저하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저희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민규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윤구주가 대답했다.“지금 당장 결혼식을 진행하기는 어려워. 그리고 자네들을 돌려보내려는 이유는, 자네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야.”“저하!”“저희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소채은 씨 복수도 하지 못했지만, 그건 차치하더라도 저하의 곁은 꼭 지켜야겠습니다!”박창용마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윤구주가 말했다.“틀렸어! 난 지금 평범한 사람이니 자네들이 곁을 지켜줄 필요는 없어. 다들 자기 자신이 화진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알아야지. 박창용 자네도 그래. 자네는 백만 대군을 호령하는 창용부대의 총사령관이야. 그리고 다른 세 명은 화진 암부의 3대 지휘사지. 자네들이 있다면 화진은 당분간 안전할 거야. 그러나 자네들이 없다면 화진은 혼란에 빠지게 될 거야. 그건 자네들도 잘 알겠지. 자네들을 지켜보는 건 국방부의 문아름뿐만이 아니야... 10국에서도 호시탐탐 자네들을 노리고
윤구주가 모두를 돌려보내자 다들 쓸쓸한 얼굴을 해 보였다.특히 정태웅은 눈시울이 빨개져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저하, 그러면 저하를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는 겁니까?”윤구주는 웃으며 말했다.“곧 만나게 될 거야.”윤구주의 위로에 정태웅은 엉엉 울었다.옆에 있던 민규현 역시 눈이 빨개졌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윤구주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그가 무릎을 꿇자 천현수, 원성일, 주세호 등 화진의 거물들도 잇달아 윤구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오직 박창용만이 윤구주의 곁으로 걸어가서 감개하며 말했다.“저하! 그렇게 결정하셨으면 저희 모두 저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저희 80만 창용군은 언제나 저하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하께서 서울로 돌아와 문씨 가문에 복수할 때까지 말입니다.”윤구주는 박창용을 바라보며 무겁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그렇게 윤구주는 모두를 돌려보냈다.이별은 언제나 슬픈 법이다.특히 윤구주의 형제들이 그랬다.그들에게 있어 윤구주는 신일 뿐만 아니라 친형과 다름없는 존재였다.그러나 그들은 윤구주가 그들보다 더욱 슬퍼하는 걸 몰랐다.그들은 윤구주에게 있어 형제일 뿐만 아니라 가족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구주는 반드시 멀리 내다봐야 했다.그는 본인의 사리사욕 때문에 화진의 평화를 홀시하고 그들을 이곳에 남겨둘 수 없었다.화진은 그의 나라이자 집이었기 때문이다.형제들과 작별한 뒤 용인 빌리지는 조용해졌다.용인 빌리지에는 백경재, 주세호, 소청하 부부만 남았다.“저하, 민 지휘사님과 박 사령관님, 원성일 씨 모두 떠났습니다...”주세호가 말했다.강성 최고 부자인 주세호는 당연히 강성에 남아있을 생각이었다.“그래요.”윤구주는 형제들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다가 덤덤히 말했다.“저하, 제가 저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주세호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소채은의 중독으로 인해 윤구주가 틀림없이 괴로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채은이를 위해 장거리 이동에 적합한 휠체어를 주문해 주세요.
윤구주가 소채은을 데리고 강성을 떠날 생각이라는 말에 천희수는 곧바로 말했다.“내 딸은 지금 혼수상태인 데다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얘까지 데려간단 말이야?”“어머님, 절 믿어주세요! 전부 채은이를 살리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채은이를 데려가려는 거예요.”윤구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현재 소채은은 의식이 전혀 없어서 죽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오직 윤구주의 소생술, 만이 소채은을 버티게 할 수 있었다.때문에 윤구주는 반드시 언제든 치료할 수 있게 소채은을 옆에 두어야 했다.그러나 천희수는 이런 점들을 몰랐다.그녀가 말했다.“내 딸을 데려갈 거라고? 안 돼... 절대 안 돼! 게다가 내 딸은 지금 혼수상태야. 채은이가 깨어난다고 해도 난 절대 채은이가 너랑 같이 가게 놔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 딸을 어디로 데려갈 생각인 거야?”윤구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서남쪽을 바라보면서 솔직히 말했다.“전 채은이를 데리고 가서 채은이를 해친 사람들을 죽일 거예요!”“사... 사람을 죽인다고?”천희수는 그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 안색이 흐려졌다.“맞아요! 전 아주 많은 사람을 죽일 거예요! 그들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치려고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들은 죽어 마땅해요!”윤구주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천희수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오히려 소청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구주야, 난 널 응원한다! 가 봐. 가서 채은이를 죽인 나쁜 놈들을 전부 죽여. 전부 죽여서 채은이를 위해 복수해!”소청하의 말을 들은 천희수는 그를 덥석 잡았다.“미쳤어요? 어떻게 사람을 죽이라고 구주를 부추길 수 있어요?”“그러면 죽이지 말아야 해? 우리 딸은 그놈들 때문에 저 꼴이 됐어. 그 나쁜 놈들은 죽어 마땅하다고!”소청하는 눈이 벌게진 채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천희수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불쌍한 우리 딸은 어릴 때부터 너무 착해서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던 아이였는데. 그 나쁜 놈들이 우리 딸
군형은 화진의 서남쪽에 있다.예로부터 군형은 요술의 기원지라는 전설이 있었다.군형의 모든 이들이 수련한다고 할 수는 없으나 대부분의 사람이 군형의 요술과 고독의 전설에 대해 들어본 적 있었다.현대 사회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요술과 고독에 관한 이야기는 군형 일대에서도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현재 군형에 현지 민족 풍습과 고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일반 도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군형은 현재 화진에서 아주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었다.매년 관광으로 낸 수익만 해도 몇십조에 달했다.군형은 이미 완전히 현대화된 대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3일 뒤, 군형 공항. 훤칠한 남자 한 명이 출구 쪽에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휠체어를 밀고 있었고 휠체어 위에는 혼수상태인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정체를 감추기 위해, 또 감긴 눈을 가리기 위해 여자의 얼굴은 커다란 선글라스로 가려져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윤구주와 천시 고독에 당한 소채은이었다.“저하, 저희 드디어 군형에 도착했군요!”등 뒤에서 흥분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윤구주의 등 뒤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백경재였다.짐을 바리바리 싸고 온 그는 누런색의 도포를 입고 있었다. 도포만 아니었어도 사람들은 그를 건설 노동자로 여겼을 것이다.이번에 윤구주는 군형에 백경재만 데리고 왔다.“그러게. 도착했네.”윤구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먼 곳에 있는 높은 빌딩들을 바라봤다.이번에 군형에 온 이유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였다.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이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이 모든 건 군형 삼마 때문이었다.“저하, 저희 이제 어떡합니까?”백경재는 짐을 바리바리 들고 윤구주의 앞에 섰다.“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할 테니 일단 묵을 곳부터 찾아야겠어. 채은이도 너무 힘들면 안 되니까 말이야.”“네, 네!”백경재는 말을 마친 뒤 서둘러 공항 밖으로 나가서 택시를 잡고 호텔을 예약했다.백경재가 일을 처리하러 갔을 때 윤구주는 계속 소채은의 곁
군형 삼마의 두목이 군형 5대 가족 중에 숨어있단 말에 윤구주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번뜩였다.“군형 5대 가족이 감히 그 자식을 감싸주려 한다면 5대 가족까지 죽여버릴 거야!”민규현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그는 윤구주의 광포한 성격을 알고 있었고 그가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저하, 또 한 가지 일이 있는데 얘기해야 할지 말지 모르겠습니다.”민규현이 갑자기 말했다.“말해, 뭔데?”윤구주가 물었다.“저하, 혹시 전에 저하를 아주 깊이 사랑하던 연규비 씨를 기억하십니까?”갑자기 연규비 얘기가 나오자 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렸다.“백화궁의 연규비 말이야?”“네, 맞습니다! 사실 저하께서 연규비 씨를 거절한 뒤 연규비 씨는 군형으로 갔습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연규비 씨 지금 백화궁 본거지인 서남에 있다고 합니다.”연규비의 백화궁 본거지가 서남에 있다는 얘기에 윤구주는 과거 아름다웠던 그녀를 떠올렸다.백화궁의 주인인 연규비는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던 전설적인 절색 미녀였다.아무도 연규비가 과거 무슨 일을 했었는지, 연규비가 어떻게 유명해졌는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백화궁이 천하회, 영문, 약왕전과 함께 화진의 4대 문파라고 불린다는 것뿐이다.백화궁은 그 이름처럼 전부 엄청난 미녀들만 모인 곳이었다.그러나 절대 그녀들을 무시해서는 안 됐다.그들은 사람들을 죽이는 수법도 대단하지만 무도 실력도 약하지 않았다.백화궁의 주인인 연규비는 거의 신급에 다다른 강자였다.연규비에 관한 소문은 수도 없이 많았다.누군가는 그녀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라고 했고, 누군가는 그녀를 아름다운 요괴라고 했으며, 누군가는 그녀가 화진의 왕 윤구주의 첩이라고 했다.소문은 정말 너무 많았다.그러나 연규비가 사실은 윤구주의 아주 친한 친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연규비의 무도 중 일부는 윤구주가 가르친 것이었다.윤구주가 없다면 연규비도 없고, 그녀의 백화궁도 없었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
다음 날, 백경재는 아침 일찍 깨어나 윤구주를 위해 아침을 준비했다.두 사람이 간단히 음식을 먹은 뒤 윤구주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백 선생, 백 선생이 해줘야 할 일이 있어.”“말씀하세요, 저하!”백경재가 서둘러 다가갔다.윤구주는 미리 써둔 처방을 꺼내서 백경재에게 건넸다.“위에 적힌 약재들을 구해줘. 채은이를 위해서 단약을 만들 생각이거든.”“네!”백경재는 곧 약재를 구하러 갔다.백경재가 단약 재료를 구하러 간 뒤 윤구주는 민규현이 보낸 파일을 받았다.군형 5대 가문에 관한 내용이었다.파일을 열어 보니 군형 5대 가족이라는 글자가 윤구주의 차가운 눈앞에 나타났다. 곧이어 아주 짙은 살기가 윤구주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군형 5대 가족은 군형 최대의 5대 고대 시력이었다.5대 가족은 군형 5대 가문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5대 가문은 군형에서 천 년 동안 존재해 와서 뿌리가 깊고 역사가 깊다고 할 수 있었다.5대 가족은 류, 여, 길, 전, 설씨 가문이었다.군형 5대 가족은 모두 무신을 신봉하고 요술과 고독술을 수련했다.그중 오래된 류씨 일가의 실력이 가장 강했고, 전씨 일가가 가장 악랄했다.군형 5대 가족은 서남의 무도 세계와 지하 세계를 장악하고 있었다.비록 요술과 고독술이 점점 잊히고 있었지만 서남 사람들은 5대 가족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소문에 따르면 서남에서는 제일 대단한 정치인도 5대 가족에 휘둘린다고 한다.파일 속 5대 가족의 상황을 본 윤구주는 살기가 점점 강해졌다.5대 가족이 얼마나 강한지는 윤구주의 관심 밖이었다.이번에 군형에 온 이유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였다.누가 찾아오든 윤구주는 전부 죽일 생각이었다.설령 상대가 염라대왕이더라도 상관없었다.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천시 고독에 당해 혼수상태인 소채은을 바라본 윤구주는 중얼거렸다.“채은아, 걱정하지 마. 내가 곧 복수해 줄게.”점심 때쯤, 백경재가 약재를 사 들고 돌아왔다.약재를 얻은 뒤 윤구주는 소채은을 위해 호신단을 만들기
곧이어 백경재는 몇 년간 보지 못한 동문 사형에게 연락했다.백경재의 말에 따르면 그의 사형은 명재철이라고 한다.당시 사문에서 백경재와 명재철의 사이가 가장 좋았다.그러나 명재철이 사문을 떠난 뒤 두 사람은 더는 만나지 못했다.2년 전, 백경재는 그 사형이 서남 군형에 왔고, 어느 한 큰 세력이 귀하게 모시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래서 군형에 도착한 지금 갑자기 그 사형이 떠오른 것이다.연락한 뒤 백경재는 명재철과 내일 만나자고 연락했다.곧 다음 날이 되었다.백경재는 아침 일찍 새 도포로 갈아입고 깔끔히 단장한 뒤 윤구주와 함께 사형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저하, 제 사형은 사문에 있을 때 저에게 굉장히 잘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재능도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났어요. 그 사형이 지금 서남의 한 큰 세력에서 귀하게 모시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배경재는 윤구주의 앞에서 그 사형을 칭찬했다.윤구주는 그의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대꾸하지 않았다.잠시 뒤, 먼 거리에서 검은색 차량 두 대가 먼 곳에서부터 달려왔다.차가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정장을 입은 멀끔한 남자들이 차 문을 열어주었고, 회색 도포를 입은 키 작은 남자가 차 안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1m 50cm 정도로 보였는데 회색 도포가 너무 커서 웃겨 보였다.그러나 그의 고고한 분위기는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차에서 내릴 때 그는 아주 거만한 얼굴로 고개를 높게 쳐들고 있었다.그 키 작은 남자가 나타나자 백경재는 곧바로 그를 알아보았다.“사형!”백경재는 그렇게 말하면서 흥분한 얼굴로 빠르게 달려갔다.그 키 작은 남자가 바로 배경재의 사형이었던 것이다.명재철은 백경재를 보고도 별로 반가운 듯하지는 않았다. 그는 덤덤히 말했다.“역시 경재였구나!”백경재는 들뜬 얼굴로 말했다.“사형, 십여 년 만에 만나는 건데 예전보다 훨씬 더 좋아 보이시는군요.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하하!”칭찬을 받은 명재철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경재 너는 말을 예쁘게 잘하는구나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