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외출하려고? 어디 가는데?”소채은이 서둘러 물었다.“남릉!”윤구주가 대답했다.남릉은 서남에서 가장 큰 공업화 도시였다.서남의 다섯 개 도 중, 남릉은 서남의 가장 중요한 도시이자 서남의 경제 중심이기도 했다.그런데 윤구주가 남릉에 간다고 하자 소채은은 서둘러 물었다.“구주야, 왜 갑자기 남릉에 간다는 거야?”“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거든.”윤구주는 소채은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 간단히 대답했다.“그런데 가서 얼마나 오래 있을 거야? 언제 돌아올 거야?”소채은은 미련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걱정하지 마. 일 금방 끝날 거야. 일 끝나면 바로 돌아와서 너랑 같이 있을게.”윤구주는 소채은의 손을 잡았다.소채은은 비록 미련이 가득했지만 윤구주에게 볼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했다.“알겠어. 어쨌든 빨리 돌아와야 해.”“응, 걱정하지 마.”윤구주는 말을 마친 뒤 소채은을 품에 꼭 안았다.윤구주는 남릉 고씨 일가로 가보기로 마음먹고 그 일을 연규비와 백경재에게 알렸다.연규비는 남릉 고씨 일가에 봉안보리구슬이라는 귀한 보물이 있다는 걸 알고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구주야, 그 봉안보리구슬이 정말 천년초 하나와 맞먹을 수 있는 거야?”“응! 봉안보리구슬은 음기와 한기를 타고난 보물이야. 비록 한 개로는 천년초만큼의 한기는 없지만 숫자가 많아지면 천년초 하나와 맞먹을 수 있어.”윤구주가 말했다.“정말 잘됐네! 네 말대로 고씨 일가에서 봉안보리구슬을 얻을 수 있다면 천년초 두 개를 가진 셈이잖아?”연규비가 말했다.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말대로였다. 만약 고씨 일가의 봉안보리구슬을 팔찌를 얻는다면, 천년초 하나만 더 얻으면 실력이 전성기일 때로 돌아갈 수 있었다.실력이 전성기일 때로 돌아간다면 윤구주는 체내의 기린화독을 제거하고 소채은의 고독을 치료해 줄 수 있었다.“그렇다면 지금 당장 출발해서 고씨 일가를 찾아가자.”연규비가 흥분해서 말했다.그런데 윤구주가 갑자기 말했다.“규비야, 이번에 너랑 백
윤구주는 시괴 거인 동산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다.이곳에서 남릉까지 가려면 적어도 몇백 킬로미터는 가야 했다.그래서 윤구주는 KTX로 갈 생각이었다.연규비는 그를 위해 차를 준비해 줄 생각이었는데 윤구주가 필요 없다고 했다.KTX가 더 빠르고 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구주는 고시연과 동산을 데리고 역으로 향했다.역에 도착한 뒤 신분증이 없는 시괴 동산을 위해 윤구주는 손을 써서 동산이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갈 수 있게 해줬다.그와 고시연은 따로 티켓을 두 장 샀다.백 년 무도 세가인 고씨 일가의 셋째 아가씨로서 고시연은 어디로 가든 항상 비싼 차를 탔었다.그래서 KTX를 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는 비록 불만스러웠지만 윤구주가 두려워서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티켓을 사고 역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기다렸다.남릉으로 향하는 KTX가 도착한 뒤 윤구주와 고시연은 차에 탔다.그들은 비즈니스석 제일 앞줄 티켓을 샀다.그들이 차에 오르고 난 뒤 차가 출발했다.KTX는 아주 빨랐다. 이곳에서부터 남릉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정도 걸렸다.그래서 윤구주는 차에 앉은 뒤 봉안보리구슬을 꺼내서 손에 쥐고 놀았다.고시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옆에 앉아서 이따금 고개를 들어 윤구주를 몰래 살필 뿐이었다.윤구주의 잘생긴 얼굴을 본 순간, 고시연은 저도 모르게 살짝 가슴이 설렜다.그것은 그를 난 뒤로 고시연이 처음으로 윤구주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었다.단정한 눈썹과 반짝이는 눈, 그리고 잘생긴 이목구비까지.게다가 왕의 기세까지 느껴지니 고시연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잘생겼다며 감탄했다.‘그런데 왜 우리 할아버지가 준 내 봉안보리구슬을 가지려는 거지? 설마 이 구슬이 그에게 무슨 효과가 있는 걸까?’고시연은 속으로 짐작했다.KTX는 빠르게 달렸다.그동안 윤구주는 고시연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고시연은 자신의 미모라면 그 어떤 남자라도 충분히 유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윤구주는 가는 길 내내 고시연을 무시했다.그렇게 그들은 곧 남릉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려 역에서 나왔다.사람들이 북적대는 남릉역 입구에 선 윤구주는 먼 곳에 있는 높은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드디어 도착했네.”말을 마친 뒤 윤구주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고시연을 바라보았다.“남릉에서 고씨 일가가 가장 강한가?”“네.”고시연은 솔직히 대답했다.“아주 좋아. 그러면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으니 안내해 봐.”윤구주는 마치 하인에게 명령하듯 옆에 있는 고시연에게 말했다.금안화련 낙인이 몸에 남은 고시연은 당연히 거역하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뭘 먹고 싶은데요?”“아무거나.”고시연은 감히 더 물을 수 없었다.문 앞에서 택시를 하나 잡아서 탄 뒤 고시연은 윤구주를 데리고 밥 먹으러 갔다.남릉은 고씨 일가의 구역이었기에 고시연은 이곳이 너무도 익숙했다.곧 고시연은 윤구주를 데리고 남릉에서 가장 유명한 은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은월 레스토랑은 남릉에서 굉장히 유명했고 재벌들이나 재계 거물이 손님을 대접하거나 외식을 할 때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그래서 고시연은 윤구주를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은월 레스토랑이 있는 건물은 팔각 건물로 기세가 웅장했다.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레스토랑 밖의 주차장에 많은 비싼 차들이 있는 게 보였다.“이곳이 만족스러운가요?”고시연은 두려운 얼굴로 윤구주에게 물었다.윤구주는 건물을 슬쩍 보며 말했다.“괜찮네.”“그러면 지금 당장 가서 준비할게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곧장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고 윤구주와 동산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문 앞에 있던 직원이 빠르게 그들을 맞이했다.고시연이 직원에게 몇 마디 하자 직원은 곧바로 안색이 달라지더니 아주 정중한 태도로 그들을 은월 레스토랑에서 가장 좋은 위치로 안내했다.자리에 도착해서 앉은 뒤 고시연은 잘 나가는 요리를 몇 개 주문한 뒤 윤구주에게 메뉴판을 보여주려고 했다.그런데 윤구주는 손을 저었다.“필요 없어. 네가 알아서
안 대가는 싱긋 웃었다.“전동규 씨가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니 이 일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용호산의 천암사는 줄곧 고씨 일가와 사이가 좋았으니 말입니다.”눈앞의 안 대가가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대가님!”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다.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온 뒤 진동규는 곧바로 안 대가를 대접하기 위해 최고의 자리로 안내해달라고 직원에게 말했다.안 대가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고시연을 보았다‘어?’“저 사람은...”고시연을 본 그는 흠칫했다.“안 대가님, 왜 그러십니까?”옆에 있던 전동규는 안 대가의 반응을 보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안 대가는 고시연을 찬찬히 살피다가 말했다.“저분은 존귀한 고씨 일가의 셋째 아가씨인데 왜 여기 계시는 걸까요?”전동규는 고씨 일가 셋째 아가씨라는 말에 곧바로 흥분해서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정말로 셋째 아가씨군요!”안 대가는 고시연을 알아보더니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바르게 윤구주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전씨 일가의 전동규도 사람들을 데리고 달려갔다.“용호산 천암사 안경언, 셋째 아가씨를 뵙습니다.”안경언은 고시연이 있는 곳으로 다가간 뒤 곧바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고시연은 이 레스토랑에서 천암사 사람을 만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윤구주를 힐끗 보았다윤구주가 귀찮아서 시선 한 번 들지 않자 그녀도 말하지 못했다.“셋째 아가씨, 절 잊으신 겁니까? 전 천암사의 안경언입니다. 작년에 고씨 일가에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안경언은 고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계속해 말했다.고시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아름다운 눈동자로 눈앞의 윤구주를 바라볼 뿐이었다.안경언은 똑똑한 사람이었기에 고시연의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윤구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셋째 아가씨, 이분은 누굽니까?”그가 말하자마자 윤구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비켜. 나 밥 먹는 데 방해하지 말고.”윤구
안경언과 전동규는 레스토랑에서 쫓겨났다. 천암사에서 온 안경언은 침울한 얼굴로 밖에 서서 중얼거렸다.“이상해.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안 대가님, 뭐가 이상하단 말입니까?”전동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안경언은 은월 레스토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셋째 아가씨께서 오늘 너무 이상한 것 같습니다.”“무슨 뜻이죠?”“제가 기억하기론 고시연 아가씨는 절대 오늘처럼 우물쭈물하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계속 맞은편에 있는 청년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전 고시연 아가씨가 그 청년에게 협박당하고 있다고 확신해요.”“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무려 고씨 집안의 고시연 아가씨가 아닙니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 아니라면 어떻게 감히 고시연 아가씨를 협박하겠습니까?”전동규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고시연 아가씨께 분명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고 장담해요.”안경언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레스토랑을 다시 바라봤다.“전동규 씨, 지금 당장 사람을 데리고 고씨 일가로 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고씨 일가 가주님께 전부 얘기하세요.”안경언이 전동규에게 명령을 내렸다.“네, 지금 당장 가보겠습니다.”전동규는 그 말을 듣더니 서둘러 부하 몇 명을 데리고 고씨 일가로 향했다.전동규가 떠난 뒤 용호산에서 온 안경언이 눈빛을 번뜩이며 살기를 드러냈다.“이 자식,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감히 고시연 아가씨를 위협하는 거야?”레스토랑 안.윤구주와 고시연은 간단히 식사한 뒤 떠났다.레스토랑에서 나온 뒤 윤구주는 고시연에게 묵을 곳을 준비하라고 했다.고시연은 당연하게도 거절할 수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빠르게 윤구주를 위해 호텔을 예약했다.호텔 예약을 마친 뒤 고시연은 윤구주를 데리고 호텔로 향했다.거리가 비교적 가까웠기에 그들은 걸어서 갔다.그들이 앞에 있는 교차로를 돌아서 모퉁이 골목에 도착했을 때, 윤구주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호통을 쳤다.“쥐새끼처럼 따라다니지 말고 지금
용호산의 안경언을 쫓은 뒤 윤구주는 계속해 전진했다.조금 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윤구주는 고시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마치 그녀가 공기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곧 윤구주는 고시연의 안내에 따라 호텔에 도착했다.고시연이 윤구주를 위해 예약한 것은 스위트룸이었다. 그 스위트룸은 아주 크고 안에 없는 게 없었다. 심지어 서남에서 유명한 소금물 온천도 있었다.윤구주는 안으로 들어간 뒤 방 안을 쓱 둘러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고시연은 겁먹은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오늘 네가 한 일 모두 만족스러워. 이제 가서 물 받아.”윤구주가 갑자기 말했다.“네? 뭐라고요?”고시연은 당황했다.“온천물에 몸담고 싶어. 물을 안 받으면 어떻게 온천에 몸을 담가?”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에 고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녀에게 온천물을 받아달라고 하다니.그녀는 무려 고씨 일가의 셋째 아가씨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하인이나 할 법한 일을 한단 말인가?하지만 윤구주가 자신의 목숨을 장악하고 있다는 걸 떠올린 고시연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순순히 물을 받으러 갔다.콸콸콸...곧 고시연은 욕조 안에 온천물을 가득 받았다.그리고 난 뒤 윤구주는 곧장 옷을 벗고 온천에 몸을 담을 준비를 했다.고시연은 그가 자신의 앞에서 옷을 벗자 말문이 막혔다. 그러더니 서둘러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면서 속으로 욕했다.‘젠장, 젠장! 이 마귀, 감히 내 앞에서 옷을 벗어? 아아아아!’고시연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그러나 자신의 체내에 금안화련 낙인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결국 참았다.윤구주는 고시연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마치 고시연이 공기인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툭툭.윤구주가 옷을 벗고 있을 때, 눈을 가리고 있던 고시연은 윤구주의 옷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살짝 벌리면서 손 틈 사이로 윤구주를 몰래 힐끔댔다.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고, 윤구주가 너무 잘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고시연
윤구주의 말에 고시연은 너무 무안했다.당당한 고씨 일가 셋째 아가씨인 고시연이 몰래 낯선 남자의 몸을 훔쳐보다니, 게다가 더욱 중요한 건 상대방에게 들켰다는 점이었다.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고시연이 뻘쭘해하고 있을 때 윤구주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뭘 넋 놓고 있어? 이리 와서 내 등이나 밀어.”고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윤구주는 정말로 그녀를 종으로 여기는 듯했다.그녀에게 그의 등을 닦으라고 하다니.비록 무척 화가 났지만 그녀의 체내에는 금안화련 낙인이 있었고, 또 윤구주의 완벽한 몸매까지 떠올린 고시연은 결국 짧게 대답하며 그에게 다가갔다.완벽한 남자를 위해 등을 밀어주는 것이니 손해 볼 것도 없었다.고시연은 그렇게 생각했다.욕조 안, 윤구주는 상의를 탈의한 채 그 안에 누웠다.그의 등에는 눈에 띄는 용 머리가 그려져 있어 시각적인 충격이 컸다.고시연은 다가간 뒤 조심스럽게 쭈그리고 앉아서 옆에 놓인 흰색 타월을 들고 마치 종처럼 윤구주의 등을 닦기 시작했다.윤구주는 편안하게 누워있었고 고시연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타월이 그의 피부를 조금씩 스쳤다. 고시연은 심장이 쿵쾅댔다.‘세상에!’그녀는 고씨 일가 셋째 아가씨로서 처음으로 낯선 남자의 등을 닦아줬다.심지어 화진의 4대 가문 출신인 그녀의 약혼자도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시간은 1분 1초 흘렀다.윤구주는 그렇게 편안하게 누워있었고 그의 뒤에 있는 고시연은 열심히 윤구주의 등을 닦아주고 어깨를 주물러줬다.고시연이 힘들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윤구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늘 네가 종으로서 한 일에 난 아주 만족스러워.”윤구주의 어깨를 주물러주던 고시연은 그 말을 듣더니 말했다.“그러면 전 언제 풀어줄 거예요?”“이제 가 봐.”윤구주는 덤덤히 말했다.‘뭐라고?’“절 풀어주겠다고요?”고시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름다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앞의 윤구주를 바라보았다.“맞아. 이제 가보도 돼. 하지만 나
고씨 일가에서도 그녀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윤구주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됐어. 이제 가봐.”윤구주는 욕조에서 나온 뒤 흰색 타월을 몸에 걸치면서 말했다.고시연은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윤구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네!”그렇게 그녀는 정말로 떠났다....남릉 고씨 일가는 수백 년 된 고대 무술 세가였다.서남의 다섯 개 도에서 고씨 일가의 세력은 군형 5대 가족보다 더 대단했다.그들은 서남 무도 연맹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의 재산도 서남에서 손꼽힐 정도로 많았다.고씨 일가의 어르신 고진용은 육신으로 신급 경지에 다다른 대단한 사람이었다.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무적의 육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게다가 화진 무도 연맹 천방에서 7위였다.고씨 일가는 남릉에서 세력이 대단했고 발 한 번 구르면 서남의 다섯 개 도가 전부 흔들릴 정도였다.그뿐만 아니라 고씨 일가는 저력이 대단하고 인맥도 넓어서 다른 이들은 따라갈 수 없었다.이번에 고씨 일가 어르신의 80세 생신 때, 서남의 다섯 개 도의 모든 문파가, 심지어 옛 세대인 용호산의 천암도에서도 그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선물을 보냈다.그런데 윤구주는 고씨 일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을 원한다고 했다.게다가 내일 열 시에 직접 가지러 오겠다고 했다.널따란 고씨 일가의 장원은 남릉의 번화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수천 평에 달하는 고씨 일가의 장원은 기세가 웅장하고 아주 호화로웠다.고씨 일가 문 앞에는 두 개의 위엄 넘치는 사자 석상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고씨 일가의 부하들이 가득했다.이때 고씨 일가의 웅장한 대전 안은 분위기가 삼엄했고 정중앙에 도포를 입은 도인이 서 있었다.자세히 살펴보니 전에 윤구주의 뒤를 밟았다가 그에게 죽을 뻔했던 용호산 천암사 출신의 안경언이었다.“안 대가님, 오늘 시연이를 만난 게 확실합니까? 시연이가 남릉으로 돌아왔다고요?”차가운 목소리가 정중앙 위쪽에 앉아 있는 건장한 중년 남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그 남자는 분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