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해진 고씨 가문의 저택 문 앞에는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그는 돌처럼 묵묵하고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시괴 거인 동산이다.얼마 후 갑자기 고씨 가문의 대전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자세히 보니 이 두 사람은 다시 돌아온 정태웅과 남궁서준이였다.“뭐지? 저 자식은 어디서 나타난 거야?”정태웅은 장엄한 동산을 보고선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동안 고씨 가문에서 동산을 본 적이 없었기에 호기심이 극에 달했다.그의 곁을 따라다닌 남궁서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동산을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이봐, 그쪽은 누구지? 어디서 나타난 거야?”정태웅은 다가와 물었다.비록 동산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파리 한 마리가 눈에 떨어졌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이 모습을 본 정태웅은 답답함이 밀려왔다.“야, 내가 지금 물어보잖아! 벙어리냐?”동산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X발,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그럼 이제는 내가 손을 쓸 수밖에 없겠네.”정태웅은 주먹을 들어 동산을 위협하려고 했다.“바보, 아무리 겁을 줘도 상대해 주지 않을 거예요.”이때 남궁서준이 한마디를 내뱉었다.“왜?”정태웅은 궁금해서 물었다.“왜냐하면 사람이 아니잖아요.”남궁서준의 답에 정태웅은 의아한 듯 다시 물었다.“뭐라고?”“살아있는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잖아요. 설마 그것도 몰랐어요?”그 말에 충격받은 정태웅은 얼른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동산을 자세히 살펴보았다.그제야 확실히 살아 있는 사람의 기운이 없다는 걸 깨닫고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어머, 진짜 사람이 아니었네. 잠깐만, 사람이 아닌데 여긴 왜 있는 거지? 봐봐, 심지어 눈을 뜨고 있잖아.”남궁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동산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다.“됐다, 신경 끄고 얼른 군왕님 만나러 가자.”말을 마친 그는 곧장 남궁서준을 데리고 대전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굉음과 함께 동산이 움직였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윤구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남궁서준을 바라봤다.“꼬맹이, 오랜만이야. 나 안 보고 싶었어?”“당연히 보고 싶었죠.”남궁서준은 단숨에 윤구주 앞으로 달려가 그를 꼭 껴안았고 동시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화진의 제일 소년후가 윤구주의 가장 좋은 동생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윤구주는 동생을 껴안은 채 웃으며 말했다.“1년 동안 못 봤는데 그 새에 키 많이 컸네.”남궁서준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그만 울어. 화진 제일 소년후가 이런 연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지.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윤구주는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남궁서준을 보고선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비록 눈물은 멈췄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울먹였다.그는 눈앞의 윤구주를 바라보며 물었다.“형, 정말 살아있었군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다 죽었다고 하는 거죠?”“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날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만 알아둬.”“꼬맹아, 내 말 맞지? 군왕님이 살아있을 거라고 했잖아. 기운 넘치는 것 좀 봐, 심지어 전보다 더 잘생긴 것 같은데?”정태웅이 입을 열었다.남궁서준은 더 이상 그를 경멸하지 않았고 그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형제가 한자리에 모였다.남궁 가면의 도련님이자 화진 제일 소년후인 남궁서준이 윤구주의 동생이라는 건 아마 이 세상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심지어 남궁서준의 검법마저도 윤구주가 직접 전수해 준 것이다.윤구주와 남궁서준이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정태웅이 일어서서 입을 열었다.“군왕님, 찾으시던 물건 제가 가져왔습니다.”정태웅은 말하면서 봉안보리구슬을 꺼냈다.윤구주는 그 구슬을 보자마자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꼬맹이랑 고씨 가문에 다녀온 거야?”“네,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나같이 좀 모자랐어요. 군왕님, 명령을 내려주신다면 지금 바로 꼬맹이랑 같이 고씨 가문을 초토화시키겠습니다.”정태웅이 살의를
“군왕님, 원하는 물건을 얻었으니, 저희는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정태웅의 질문에 윤구주는 재빨리 답했다.“서두르지 마, 아직 처리해야 할 작은 일이 남았어."“작은 일이라뇨?”정태웅은 궁금해서 물었다.“꼬맹아, 고씨 가문의 셋째 딸이 남궁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는다고 하던데 알고 있었어?”윤구주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남궁서준에게 물었다.“알고 있었어요. 사실을 실제 남궁 가문이 아니라 직계 자제일뿐이에요. 이름은 남궁혁으로 알고 있어요.”그 말을 들은 윤구주는 미소를 지었다.“그렇구나. 예전에 고씨 가문에서 남궁 가문과 손잡은 거로 날 억압하려고 했거든.”그 말을 들은 남궁서준의 눈에는 순식간에 살기가 번졌다.“형만 원한다면 지금 당장 고씨 가문을 처리할 수 있어요.”윤구주는 손사래를 쳤다.“죽일 필요까지는 없어. 난 단지 혼인 관계를 맺은 상대가 일개 개미에 불과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윤구주는 흥미로운 듯 입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800년 동안 무도 세가를 유지해 온 고씨 가문은 늘 한 단계 더 높아지는 걸 목표로 삼고 있었다.하여 채부처의 도움을 받아 고시연은 남궁 가문에 시집보낼 계획을 했다.만약 이 혼인이 성공한다면, 고씨 가문은 서남 지대에서의 지위가 더 굳건해진다.심지어 화진 4대 무술 세가인 남궁 가문을 이용해 윤구주를 상대할 수도 있다.다만 그들은 진정한 남궁 가문과 윤구주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계산해 내지 못했다....정태웅에게 한방 맞아 중상을 입은 고준형은 여태껏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씨 가문에 남은 수제자는 단 십여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허름한 대전.그 안에는 고씨 가문의 가까운 친척 몇명 만이 앉아 있었다.그중에는 고씨 가문의 형제와 고시연, 그리고 기성세대의 인물들이 있었다.“시연아, 가주님이 다쳤으니 이제 너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겠구나.”한 노장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고시연에게
곧이어 고씨 가문의 노장 한 명이 격분하면서 입을 열었다.“화진 4대 무술 세가인 남궁 가문이 정말 나타났어!”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자 고씨 가문 가족들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하나같이 문 밖을 내다보았다.“가자, 우리가 마중 나가야지.”사람들은 말을 마치자마자 개처럼 뛰쳐나갔고 순식간에 입구에는 10여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제일 앞에 선 사람은 노란빛 피부와 움푹 들어간 눈을 가진 남자였는데, 욕심이 가득해 보였다.그 곁에는 비범한 기질을 지닌 남궁 가문의 제자들이 서 있었다.그중 얼굴에 곰보가 가득한 노인이 있었는데, 언뜻 봐도 고수 중의 고수였다.“도련님, 약혼녀가 서남 고씨 가문 출신입니까?”노인은 명판을 올려다보며 옆에 있는 노란빛 얼굴의 남성에게 물었다.이 남자를 자세히 보면, 지나치게 방종한 얼굴을 제외하고 절름발이라는 걸 발견할 수 있다.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소문에 의하면 고씨 가문은 서남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부처님은 화진 무도계 랭킹 7위에 달하는 인물이니, 만약 고씨 가문 아가씨와의 혼인이 결정 난다면 남궁 가문의 직계 서열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곰보 노인은 느긋하게 말했다.“다 어르신 덕분이죠. 어르신이야말로 남궁 가문의 직계 핵심 인물이 아니겠습니까.”알고 보니 눈앞의 이 절름발이가 남궁 가문의 제자인 남궁혁이었다.그는 몇 년 전에 음 주운전으로 크게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는데 그때 다리를 다치게 되어 절름발이가 되었다.작년에는 이맘때쯤, 친구들과 함께 서남에 놀러 왔다가 우연히 고시연을 만났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때부터 그는 반드시 고씨 가문의 셋째 딸과 혼인을 맺겠다는 생각하고 있었다.게다가 고진용의 손녀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욱 감격했다. 고씨 가문도 나름 잘나가는 가문이었으니까.고씨 가문이라는 버팀목이 생기면 그 지원을 받아 남궁 가문이 직계 핵심 구성으로 거듭나는 게 그의 목표였다.남궁혁과 점보 노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때,
“당신들 옛 조상님도 살해당했다고?”남궁혁이 깜짝 놀라 물었다.“네!”고해식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저희 조상님들 시신이 아직도 연맹 대전에 있습니다!고씨 세가의 한 노인이 눈물을 닦으며 흐느꼈다.“도련님께서 저희 고씨 세가를 위해 꼭 정의를 실현해 주세요!”“도련님, 저희 고씨 세가를 대신해 피의 복수를 해주세요!”고씨 세가 사람들은 말하며 하나둘씩 남궁혁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남궁혁은 미간을 찌푸렸다.고씨 세가가 혼인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 자신을 부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원수를 갚기 위해서일 줄은 미처 몰랐다.남궁혁은 속으로 내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앞으로 고씨 세가를 의지해야 할 처지였기에 고민 끝에 말했다.“걱정하지 말고 이 복수는 나한테 맡겨! 지금은 내 약혼녀를 보고 싶은데 어디 있지?”고해식은 서둘러 말했다.“동생은 지금 대전에 있습니다!”“능욕을 당한 건 아니겠지?”“아닙니다… 다만 윤구주 그놈이 제 여동생을 노예로 부려 먹었어요!”뭐?“감히 이 남궁혁의 여자를 노예로 부려 먹어?” 이 말을 들은 남궁혁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럼 아직 순결한 몸인가?”고해식은 당황해서 얼른 대답했다.“도련님, 제 여동생은 아주 깨끗하니 걱정하지 마세요...”반면 남궁혁은 침울한 표정을 보아 그 말을 믿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그의 눈에 고시연은 아름답고 몸매도 훌륭했기에 어떤 남자가 봐도 마음이 동할 것 같았다.고시연이 윤구주의 노예로 있었다는 말을 듣자 남궁혁은 살롱에서 즐겼던 메이드 게임을 떠올렸다.노예? 메이드?그러고도 더럽혀지지 않았다고?“이런 개자식! 이 남궁혁의 여자는 절대 더럽힐 수 없어!”남궁혁은 분노에 찬 포효와 함께 연맹 대전 안으로 곧장 걸어 들어갔다.대전의 홀 안에는 아리따운 실루엣이 서 있었다.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훌륭한 몸매 라인은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다름 아닌 미모가 아름다운 고시연이었다.절뚝거리며 들어온 남궁혁은 단번에 고시연을 발견했다.“시연
하지만 남궁혁은 비웃었다.“무슨 소리를 하냐고? 너처럼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를 보고 어떤 남자가 가만히 있어? 그놈이 너한테 딴마음 품었을지 누가 알아!”고시연은 쏘아붙이는 그의 말에 화가 나서 이를 꽉 깨물었다.“남궁혁 씨! 헛소리하지 마세요. 당신이 뭔데 내 순결에 대해 함부로 얘기해요?”반면 남궁혁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약혼자로서 내가 짐작도 못 해?”“남궁혁 씨, 나를 의심한다면 지금 당장 고씨 세가와의 혼인을 취소하세요. 내 순결에 대해 모욕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고시연도 화가 났다. 그녀는 애초에 남궁혁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이젠 자신의 순결까지 모욕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시연, 감히 그 망할 놈 때문에 나와의 혼인을 파기하려는 거야?”남궁혁은 너무 화가 나서 얼굴이 거의 일그러질 지경이었고 고시연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이미 이 남자와의 혼인을 취소하려고 마음먹었다.고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궁혁은 얼굴이 거의 보라색으로 변할 정도로 화가 났다.“그래 고시연, 너 딱 기다려! 내가 윤구주 그놈 죽이고 나서도 네년이 나와의 혼인을 깰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남궁혁의 독기 어린 말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대문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야, 날 죽이려는 놈이?”그 말이 떨어지자 대전 입구에서 신과 같은 형상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윤구주!엇?“그놈이다!”“악마가 왔다!”윤구주의 모습이 나타나자마자 그곳에 있던 고씨 세가는 모두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질렀다.이쪽에 있던 남구혁 일행도 윤구주를 노려보는 와중에 윤구주가 다가오고 있었고 뒤에는 시괴 동산과 정태웅, 남궁서준도 있었다.하지만 윤구주의 기운이 너무도 강렬해 마치 하늘의 별처럼 우뚝 서 있는 윤구주의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어떤 망할 놈이 감히 나한테 저런 식으로 말을 하지?”남궁 세가 출신인 남궁혁은 거만함에 익숙해져 있었고 윤구주를 보자마자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윤구주는 주근깨 노인 따위 개의치 않고 고시연에게 계속 말했다.“고시연, 충고하겠는데 저런 쓰레기 같은 놈이라면 더 늦기 전에 결혼을 철회하는 게 좋을 거야! 저런 쓰레기는 남궁 세가의 이름을 받을 자격도 없거든!”이 말에 고시연은 알아들었는지 모르는지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딜 감히!”주근깨 노인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그가 한 발짝 내딛자 순식간에 주위의 현기가 공기를 흔들었고, 그의 두 눈동자는 윤구주를 죽기 살기로 노려보고 있었다.“꼬마야, 감히 내 앞에서 남궁 세가를 손가락질해? 목숨이 몇 개나 되길래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하지?”주근깨 노인이 기세 강하게 나서자 정태웅도 덩달아 앞으로 나왔다.“늙은이, 감히 군왕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디라고 끼어들어? 당신이야말로 죽고 싶어?”정태웅이 욕하는 것을 본 남궁 세가의 원로는 화가 나 수염까지 곤두설 지경이었다.“죽고 싶나 보구나!”주근깨 노인은 기함 소리와 함께 하늘을 가르는 장법으로 정태웅을 공격했다.6급 대가인 노인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도 정태웅은 움직이지 않고 미소만 지으며 서 있다가 노인의 장법이 자신에게 닿으려는 순간 입을 열었다.“꼬맹아, 아직도 안 나서고 뭐 해?”말이 떨어지자 정태웅의 눈앞에 흰옷을 입은 형체가 나타났다!쾅-주근깨 노인의 장법이 흰옷을 입은 소년의 가슴에 향했고 소년은 그의 공격을 맞고도 움직이지 않고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에서 무한한 살기를 뿜어내며 눈앞의 노인을 죽기 살기로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자신의 장법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던 노인이 다시 한번 공격하려던 찰나, 갑자기 그의 동공이 커지더니... 겁에 질려 온몸을 덜덜 떨었다.노인은 안색이 잿빛으로 변한 채 눈앞의 흰옷을 입은 소년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세상에... 당... 당신은... 서준 도련님?”말을 마치기 바쁘게 노인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남궁 세가의 노인이 무너지는 모습을 본 남궁 세가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
진정한 기린의 아들은 윤구주 앞에서 서늘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꼿꼿한 소년이었다!“하하하! 늙은이, 그리고 거기 절뚝거리는 놈, 조금 전까지 남궁 세가 사람이라고 잘난 척하지 않았나? 어디, 계속해 봐!”정태웅은 무릎을 꿇은 이들을 보고 비웃음을 터뜨렸다.안타깝게도 남궁혁과 조금 전 나섰던 주근깨 노인은 놀라서 영혼까지 빠져나갈 지경이었다.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뉘우쳤다.“제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서준 도련님이 계신 줄 모르고…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용서하라고? 네가 뭔데?”정태웅이 바로 쏘아붙였다.“자자 꼬맹아, 저 멍청한 고씨 세가 사람들과 절름발이에게 보여줘 봐. 누가 진짜 남궁 세가 기린의 아들인지!”흰옷을 입은 소년은 확실히 정태웅처럼 요란떨지 않고 말없이 서 있었다.“고씨 세가 멍청이들은 잘 들어. 너희가 혼인을 맺으려던 남궁 세가는 사실 쓰레기야, 알아? 저 절름발이 따위가 뭔데 자길 남궁 세가라고 하는 거야. 이 정태웅이 알려주지. 쟤는 남궁 세가 지파 쓰레기일 뿐이야. 아니, 쓰레기보다도 못하지. 그리고 이 사람이 진짜 남궁 세가 기린의 아들이란 말이다!”정태웅은 눈앞에 있는 남궁서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그의 말에 고씨 세가 사람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자신들이 자랑스러워하던 혼인이 이런 결말을 맞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한편 주근깨 노인은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제 죄를 반성합니다… 제가 눈이 멀었나 봅니다… 서준 도련님께서 저를 가엽게 여기시어 한 번만 살려주시옵소서…”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흰 옷을 입은 소년의 서늘한 눈동자가 번뜩이더니 백색 섬광이 그의 목을 관통했다.애석하게도 남궁 세가의 노인은 목이 뚫려 몇 번 경련을 일으키다 피를 머금은 채 쓰러졌다.“내 형님을 건드리다니 죽어 마땅하다! 게다가 넌 사리 분별도 못하는 늙은이가 아닌가.”흰옷을 입은 소년은 단칼에 노인의 목숨을 거두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남궁서준이 휘두르는 칼에 주근깨 노인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