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비하황궁의 첨탑 너머로 스며들며, 고성에 생기를 불어넣었다.황궁 곳곳엔 자주색과 금색의 비단 장식이 걸려 있어 축제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오늘은 제인 황자가 새로운 비하황으로 즉위하는 날이었다.이제 그는 비하 15세였다.전대 비하황의 죽음은 안 그래도 비하국의 정세가 복잡한 상황에 굳이 더 혼란을 줄 필요 없다는 연유로 고위층들에 의해서 비밀로 지켜졌다. 그들은 새 황제가 즉위를 끝마친 후, 다시 공포할 생각이었다. 염구준은 옆에서 조용히 그 흐름을 지켜보았다.제노스가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비하국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그와 상관이 없었다. 이번에 온 것도 단지 배후의 사람을 찾기 위해 서일뿐이었다. 그는 이 복잡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제인이 즉위하기를 기다릴 때, 염구준의 휴대폰이 울렸다.이 전화벨 소리에 그는 갑자기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크흐흐,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염 전주.”휴대폰 너머에선,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면 상대방이 꽤 늙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람도 보지 못했고, 목소리도 처음 들어봤지만, 염구준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제노스, 어서 나타나. 끝장을 내자.”...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염구준을 바라보았다. 비하국에서 제노스의 이름은 금기나 다름없어 감히 입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요? 우리 사이에 원한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제노스는 태연하게 말하며 슬쩍 권유했다.과거의 만행은 꺼내지도 않고 말이다.“원한이 없다고?”“손씨 그룹 본사를 습격하고, 청해시 항구에 함정을 만들고, 비하황가 항구에 비인간적인 실험실을 만든 게 네놈이 아니야?”염구준은 굳은 얼굴로 분노하며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면서도 태연하게 말하는 상대방이 너무 역겨웠다.그러나 제노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거래를 제안했다.“염 전주께서 저를 붙잡지 않으신다면, 제가 비하황이 된 후 비하
중앙에 있는 제일 큰 성이 바로 비하황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다.주변은 다섯 걸음마다 초병이 서 있고, 열 걸음마다 경비가 교대했으며, 스무 개가 넘는 순찰대가 사방을 돌고 있었다.그러나 이 모든 건 겉으로 드러난 것뿐이었다. 보이지 않은 곳에는 더 많았다.염구준은 경비가 이렇게 삼엄한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요즘 고성은 모기조차 못 들어가겠네.”이처럼 많은 무인들이 총동원되었다는 건, 비하황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지금은 만나기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지만, 염구준은 반드시 이곳에 와야만 했다.“하아. 겉보기엔 평온해도, 비하국엔 다른 속셈을 품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곁에 선 혁뢰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지만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다.제노스의 등장에 비하국은 크게 흔들렸었고, 상황은 날로 악화되었었다.현재 비하국은 완전 봉쇄 상태라 밖으로 나가는 건 가능해도, 안으로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염구준은 더 이상 말없이 혁뢰특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한편, 황궁 깊숙한 곳의 주 침실에서.침대 위엔 비하황이 누워 있었다.그의 얼굴은 늙고 초췌했고, 몸에서는 곧 죽을 사람의 독특한 악취가 희미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는 너무 늙었다. 올해로 백이십 살이나 되니까 말이다.반보천인의 내공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살기 어려웠을 거였다.침대 옆엔 열다섯, 아니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서 있었는데, 그는 끊임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제인아, 울지 마.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니까.”“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네 앞길을 막는 장애물은 다 치우고 황위를 잘 이을 수 있도록 도와주마.”비록 거의 죽어가는 몸이었지만, 그 말엔 아직도 기개가 묻어 있었다.황실 후계자들 중, 제인은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알겠어요. 노력할게요.”제인은 눈물을 멈추고 굳건한 눈빛을 띠었다. 그에게선 언뜻 왕으로서의 분위기가 느껴졌다.황위 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건 평범하지 않다는 걸 뜻했다.그 모습을 본 비하황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염구준은 이야기가 점점 비현실적이 되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럼 이 남자가 바로 관건이네요. 아는 거 전부 말해주세요.”마침내 조금의 실마리가 잡혔다.단서를 따라가면 틀림없이 배후를 찾아내 이 모든 일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었다.위리는 잠시 좋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남자는 캐리라고 합니다. 제노스 황자의 하인이었죠. 계략에 능했어요.”“제노스 황자는 4년 전에 반란에서 황위 탈환에 실패한 후, 비하황에게 쫒겼어요.”“그리고 그를 모시고 있던 캐리 역시 마찬가지였죠. 죽음의 숲까지 몰린 두 사람은 결국 숲으로 들어갔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죽은 사람이었야 해요.”말을 이어갈수록 위리의 얼굴엔 걱정이 어렸다.제노스는 단순하지 않았다. 싸움 실력이 강한 건 물론, 전략에 능하기까지 하니까 말이다.전에도 비하황실의 강자들이 총출동해서야 그의 반란을 막을 수 겨우 있었다. 특히, 일부 숨은 고위층들은 줄곧 그를 충배해왔다.“그럼 거의 확실하네요. 그 사람이 한 짓일 겁니다.”염구준은 일련의 단서들을 하나로 엮어 결론을 내렸다.하지만 골치 아픈 문제는, 죽지 않고 돌아온 그 황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이제 혐의에서 벗어난 위리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이를 들은 다른 고위층들은 한목소리로 분노를 쏟아냈다.“제노스 그 자식, 나타나기만 해봐라. 내가 갈기갈기 찢어줄 거니까!”“그 반란으로 내 아들 셋이 다 전사했어! 다 그놈 잘못이야!”“제노스는 야심가니까 모두 경계를 늦추지 맙시다!”순식간에 고궁 안의 분위기는 점점 오묘해졌다.비록 모두 화를 내고 있긴 하지만, 그들 전부 속으로는 겁에 질린 상태였다. 혹여나 자신도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다들 조용히 해요!”이때, 무언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염구준이 소리를 질러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똑각.정적 속에서 희미하게 시계 태엽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으나 문제는 고성 안에 시계
“이거... 놔! 비하국 황궁은 고수들이 수두룩하니 너흰 절대 못 나갈 거야.”라비특은 지금 오는 게 구원군인 줄 알고 원망 어린 눈빛으로 주작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비하국 황궁에는 수만 명의 정예 친위대가 있었는데, 합심해 반보천인을 죽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주작이 손에 힘을 더 주자 라비특은 고통에 이를 드러내고 몸을 움찔거렸다.그때, 문이 열리며 친위대가 들이닥쳤다. 그 선두에는 부친위대장이 있었다.“비하국 황궁 내에서는 일체의 폭력행위를 금지한다!”그러나 염구준을 본 순간, 그는 바로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바로 낮에 친위대장인 혁뢰특이 염구준에게 죽기 전까지 맞은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혁뢰특은 비하국의 강자로 유명했다.방금 전에 주작을 기습했던 반보천인이 포크를 뽑아내며 부친위대장에게 분부했다.“이 사람들이 소란을 피웠으니 전부 잡아들여.”사람이 많은 걸 보고 든든했는지 그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하지만 부친위대장은 조용히 염구준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물었다.“염 선생님, 혹시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하?”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벙찌게 되었다. 자기 나라 사람 편을 들지 않고 남의 나라 편을 드니까 말이다.“다친 데는 없는데, 네가 들어온 시간이 애매해서 밥 먹는 흐름이 깨졌어.”염구준은 입가의 기름기를 닦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 당장 사라지겠습니다.”부친위대장은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고는 손짓으로 병사들이 물러났다.그는 비록 염구준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지만 친위대장이 깍듯이 대하니 자신도 그렇게만 하면 된다는 건 알았다.한편, 이를 보고 있던 라비특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 희망이 다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퍽!주작은 손을 놓은 다음, 라비특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고, 그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벽에 부딪히고서야 멈췄다.“다시 시비 걸면, 다음엔 이 정도로 안 끝나.”이 말에, 다른
비하국 황궁.이곳은 고성 건축군이었는데, 비하황은 제일 안쪽에 있는 거대한 성에서 지내고 있었다. 오늘 열리는 연회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외곽에 위치한 또 다른 고성에서 열렸다.이번에 처음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염구준은 문 앞까지 걸어와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았던 것도 이미 몇년 전 일이었는데, 그때는 비하황이 직접 나와 그를 맞이하기도 했었다. “멈춰라. 여긴 황실의 금지구역이다. 외부인은 출입 불가야.”문 앞에 도열한 스무 명의 정예 황실 친위대가 염구준 일행의 길을 가로막았다.이에 성격이 급한 주작은 바로 무력을 쓰려 했으나 염구준이 팔을 뻗어 그녀를 제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혁뢰특이 내가 온다고 안 했나 봐?”혁뢰특은 황실 친위대장으로, 이들에게는 직속 상관이었다.친위대 소대장은 순간 당황하며 자세를 고쳐 정중히 물었다.“실례지만,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염씨 성이야.”염구준은 짧게 대답했다.비하황이 직접 초대하고, 혁뢰특이 맡았다면 분명 미리 말을 해두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염 선생님.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소대장은 깍듯이 인사하고는 길을 터주며 앞장섰다. 혁뢰특이 이 일을 말해두었을 때의 말투를 떠올려보면, 염구준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가자.”염구준은 굳이 더 따지지 않고 일행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섰다.그의 머릿속은 온통 항구에서 본 낡은 배와, 비하황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로 뒤엉켜 있었다.이번 일은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소대장은 불빛이 환히 밝혀진 한 고성 앞에서 멈춰 서서 말했다.“염 선생님, 우선 식사하세요. 고위층 분들은 회의가 끝나는 즉시 도착하실 겁니다.”고성 안에서 울려 나오는 환호성은 멀리서 들릴 정도로 또렷했다. 벌써 연회가 시작된 듯했다.“응.”염구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섰다.소대장도 들어가 함께 즐기고 싶었지만, 그의 신분으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고성
휴대폰 속 정보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하고 충격적이었다.“혈걸극, 나이 일흔다섯.”“여섯 살에 이미 괴물 수준의 지능을 보였으며, 비하국 로열 수석 과학자의 지도를 받음.”“열여덟에 스승 곁을 떠나 생체 실험을 감행하다 체포됨.”“서른 살에는 정신 감응을 검증한다며 쌍둥이 자매를 실험 도중 죽임.”“서른하나에는 친아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감행.”……이건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변태이자, 과학에 미친 광인이다. 수단은 잔혹 그 자체였다.펑!염구준의 몸 안에서 진기가 퍼져나가며 혈걸극의 몸을 강하게 내던졌다.“살아 있어 봤자 재앙일 뿐이다. 죽어라.”쾅!말이 끝나자마자 주작이 번개처럼 움직여 혈걸극의 몸에 손바닥을 꽂았다.그 자리에서 즉사.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혈걸극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값싼 죽음이군.”주작은 이 자의 죄악을 끝냈지만, 마음속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반보천인의 진기 파동이 퍼지자, 전투 중인 무리들의 시선이 쏠렸다.“미친놈, 네가 혈걸극을 죽였다고? 그 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나 해?”“대인,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오. 먼저 저놈들부터 처리해야 합니다.”열다섯 명의 통제 불능 운석강화인.제압은 힘들지만, 다치게 할 수도 없어 전투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깜빡했군,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염구준은 몸을 돌려 혼란한 전투 구역을 바라봤다.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에겐 그저 시시한 소란에 불과했다.“공격 개시. 무차별 공격으로 처리해라.”염구준은 구자검을 뽑아 들고 전투 구역으로 뛰어들었다.싸우는 자들이든 누구든, 더 이상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주작과 초상비도 명령을 받아 진기를 숨기고 그 뒤를 따랐다.슈슈!염구준은 손을 들어 응축된 검기를 여러 갈래 뿜어냈고, 전투 중인 자들에게 향했다.“아아아……”검이 닿기도 전에 여러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염구준의 눈에 그들은 너무도 미약했다.전투 중인 반보천인들이 분노했다. 아까워서 쉽게 해치우지 못하던 운석강화인 둘이 염구준에게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