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집밥은 몇 년 동안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진숙영의 요리 솜씨도 매우 훌륭했기에 식사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염구준이 식사하는 모습은 우아하지 못했다. 사실 게걸스럽게 먹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처음에 진숙영은 그 모습에 매우 놀랐으며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었다.인정하기 싫지만 그래도 자기 사위가 아니던가. 아마 5년 동안 밖에서 갖은 고생을 했을 터였다."염 서방, 이 일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네."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밥을 먹던 손태석이 마침내 결심을 내리고 그에게 따져 물었다."지난번 파티 때, 자네 친구들 말이야. 대체 언제 그런 실력 있는 친구들을 사귄 것인가?"염구준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일전의 전쟁터에서 한 전우의 목숨을 구해준 적 있는데, 나중에 그 친구가 어마어마하게 출세했거든요. 제가 돌아왔다는 걸 전해 들은 그 친구가 손을 쓴 겁니다."염구준은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게 되면 처가에 득 될 것이 없었다.그렇게 된 거로군.가족들은 안도의 숨을 내뱉는 한편 어쩐지 조금 실망스러웠다.진숙영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그럴 줄 알았지. 남들이 도와준 거였어."그러면서도 염구준에게 고기 한 점을 더 얹어 주었다.손태석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언제까지 신세만 지고 살 순 없잖나. 그러니 스스로 할 일을 찾아보게.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지는 말아야지."염구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퍼먹었다.손태석이 또 질문했다."그럼 포르쉐를 구입한 돈은 어디서 났는가?""군 복무도 오래 했었고, 또 선박 일을 하면서 모은 돈이 꽤 됩니다."손태석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반신반의하며 염구준을 쳐다보았다.히긴, 군 생활도 5년이나 했고 어쩌면 정말로 원양어선에서 돈을 많이 줬을지도 몰랐다."장인어른. 차는 정말 제 돈으로 샀어요. 다리 다 나으시면 제가 장인어른께도 차 한 대 뽑아 드릴게요."수저를 내려놓은 염구준이 장난스레 말했다.거실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한편, 손영 그룹, 손태진 사무실."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어?"손태진이 탁자 위에 찻잔을 툭 올려놓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아물지 못한 흉터가 그의 얼굴 곳곳에 나 있었고 팔도 깁스를 한 상태였다.수감된 며칠 동안 그는 지옥을 맛보았다. 곽승환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를 처참하게 짓밟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염구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렸다."알아냈습니다."책상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의 양아들 손호민이었다. 그가 이를 갈며 욕설을 퍼부었다."뇌물을 먹이는 데만 거의 1억을 썼어요. 용준영 부하를 잔뜩 취하게 만들어서 겨우 얻어낸 정보입니다. 예전에 용준영이 군 복무를 했었는데, 아마 염구준과 함께 근무했을 겁니다. 그 등신 새끼 도움을 꽤 많이 받은 것 같더라고요."손태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손가을이 용준영의 침대로 기어들어 간 게 아니었다. 이번 협력의 배후에는 뜻밖에도 염구준이 있었다. 그 등신이 뒤에서 몰래 손을 썼던 것이다."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용준영은 야심가예요. 고작 그 정도의 친분에 얽매일 자가 아닙니다. 이번 프로젝트 협력을 끝으로 더 이상 접점이 없을 겁니다."손태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용준영 같은 자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체면을 중요시했다. 이번에 손가을을 도와준 것으로 신세를 갚았으니 남들 눈에는 은혜를 절대 잊지 않고 보답하는 좋은 사람으로 비칠 터였다. 명성이 올라가는 건 덤이었다. 그러나 용준영이 평생 염구준을 싸고돌진 않을 것이다.염구준이 자신의 체면을 잔뜩 구겨 놓았으니 이 원한은 반드시 갚아줘야 했다."공사장 쪽은 다 세팅해 뒀지?""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완벽하게 준비해 놨거든요. 손가을도 곧 깨닫게 될 거예요. 이 프로젝트를 맡은 게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는 걸요."손호민의 서늘한 눈동자에 독기가 잔뜩 서렸다.잠시 휴식을 취했던 염구준은 손가을을 차에 태우고 프로젝트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엄마랑 무슨 얘기 나눴어?"손가을이 무척 궁금
노랑머리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겁대가리를 상실했네. 감히 경찰을 부르시겠다? 얘들아, 모조리 때려 부숴버려."한 무리의 양아치들이 우르르 몰려와 저마다 쇠파이프나 몽둥이를 휘두르며 돌진했다."저년은 내 거야."음험하게 웃은 노랑머리가 손가을의 머리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휘두르려 했다. 기절시켜 데려가면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을 터였다. 예쁜 여자는 따먹어야지 않겠는가.창백하게 질린 손가을이 쇠파이프를 피해 몸을 비틀려는 찰나,우드득-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노랑머리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손가을의 앞을 막아섰다.바로 염구준이었다.노랑머리는 바닥에 패대기쳐진 채 고통스러워했다. 그의 두 다리는 모두 부러져 있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군."염구준이 싸늘하게 일갈하며 노랑머리의 팔을 지그시 밟았다. 밀려오는 끔찍한 고통에 노랑머리는 하마터면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뭐야, 저 새끼 막아!"분노에 찬 한 무리의 불량배들이 염구준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이곳에서 대놓고 소란을 피우는 중이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덤벼드는 자들이었다. 쪽수도 자기들이 더 많았으니 전혀 두려울 게 없었다."구준 씨…."안색이 퍼렇게 질린 손가을은 당장이라도 염구준을 끌고 도망가려 했다.그러나 낮게 웃음을 터뜨린 염구준이 그들을 향해 날렵하게 달려들었다. 사나운 맹수 같은 기운을 풍기며 불량배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 속도는 눈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열 명이 넘는 불량배들은 도미노처럼 픽픽 쓰러졌다. 저마다 바닥을 구르고 코피를 줄줄 흘려대며 고통에 몸부림쳤다.불량배들을 가볍게 처리한 염구준이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마치 개미를 손가락으로 짓이기듯 손쉬워 보였다."……" 손가을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공사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어안이 벙벙했다.염구준과 손가을을 번갈아 쳐다본 그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용맹한 보디가드가 미녀를
불량배들이 꼬리를 말고 도망갔지만 손가을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녀가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구준 씨, 사실 희주 생일 파티 때부터 묻고 싶었는데... 대체 이런 격투 기술은 어떻게 익힌 거야?" 순식간에 불량배들을 제압하던 모습은 가히 두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딸아이의 생일 파티에서 보여준 실력은 또 어떠한가. 주먹 한 방에 백 명이 넘는 경호원들이 모조리 바닥을 굴렀다. 액션 영화 감독도 감히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없으리라. "별거 아니야. 오랫동안 군에 몸담았는데 망나니조차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개망신이지." 염구준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벌레보다 못한 놈들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감히 손가을을 넘보다니, 아주 죽여달라고 고사를 지내는 거나 다름없었다. 염구준은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가차 없이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손가을은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시공팀에게 다가간 그녀가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했다.몇몇 책임자들은 손영 그룹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는 손가을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 퍽 불만이었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맡았던 베테랑들이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가 고까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염구준이 떡하니 버티고 있자 그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순순히 손가을의 말에 따랐다."두 달 안에 완공하고, 석 달 뒤에는 공장을 가동할 거예요." 기한을 정하는 손가을 앞에서 몇몇 담당자들은 고장 난 인형처럼 연신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손가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생산라인만 잘 건설하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에요. 또한 후반에는 각 부서와 협력하여 고품질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데, 여러분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손가을은 뭐든 진지하게 임하는 스타일이었다. 무엇하나 대충 얼버무리는 법이 없었다. 꼼꼼하고 때론 박력이 넘쳤으며 신중하면서도 결단력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엘리트였다. 가만히 앉아
돈이 너무 적어서 귀찮은 게 틀림없었다. "고객님, 잠시만요." 잔뜩 흥분한 은행 직원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받들고는 진숙영에게 양해를 구했다. 마치 보물을 감싸 안듯이 카드를 소중하게 품은 은행 직원이 재빨리 지점장에게 달려갔다. 문을 두드리는 것도 잊은 채 다짜고짜 쳐들어간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점장에게 말했다."지점장님. 큰... 큰일 났어요!"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던 뚱뚱한 중년 남성이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냈다."웬 소란이야. 무슨 일인데." "이것 좀 보세요." 여직원이 급히 카드를 내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중년 여성분께서 이 카드 안에 있는 돈을 전부 출금하려고 해요." 은행 카드를 힐끗 바라본 지점장이 둔중한 몸을 움찔거렸다. 손에 쥐고 있던 물고기 사료가 와르르 어항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습할 겨를도 없이 블랙카드를 홱 낚아챈 지점장은 1분 동안 카드를 뚫어지게 관찰했다. 모든 디테일을 꼼꼼하게 살펴본 그가 마침내 결론에 다다랐다.이건 VVIP 블랙 카드였다. 전국 은행에서 통용되며 안에는 적어도 2000억이 들어있었다. 이 많은 액수를 전부 인출한다고? 현금 2000억을 보유한 은행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 고객님 옷차림은 어땠어?" 간신히 냉정함을 되찾은 지점장의 머리가 그제야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나 신청할 수 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신청인은 매우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어야 했다. 상사의 말만 들어보았을 뿐, 그로서는 처음 실물로 접해보는 카드였다. "딱히 특별한 건... 사실 좀 초라해 보이긴 했어요." 진숙영이 입은 외투는 십여 년 전에 유행했던 스타일이었다. 즉, 지금은 구할 수조차 없는 옷이었기에 여직원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설마, 카드를 주운 건 아니겠죠?" 이윽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은 여직원이 되는대로 지껄였다."훔친 걸 수도 있고요… 지점장님, 어떡해요?" "젠장,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야? 어떻게 이런 걸 훔칠 수가 있어!" 지점장이 분노를
"얌전히 따라오십시오." 다짜고짜 진숙영을 지점장실로 끌고 간 보안 요원 중 한 명이 그녀를 힘껏 소파에 처박았다. 그가 지점장의 눈치를 살피며 살살 아부했다."지점장님, 말씀대로 끌고왔습니다." 혹시나 지점장의 눈에 들어 내일 당장 보안 팀장으로 승진할지도 몰랐으니, 그에게 잘 보여야 했다. 진숙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졌다."뭐 하는 짓이야. 당장 이거 놓지 못해?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이래!" 지점장이 냉소했다."뭐야,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순순히 인정하시지." 진숙영은 잠시 멍해졌다. 대체 뭘 인정하란 말인가?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뻔뻔하기는."여직원이 진숙영을 위아래로 기분 나쁘게 훑었다. 주름지고 건조한 피부에 낡고 허름한 옷... 기껏해야 건물 청소나 할 법한 사람이었으니 절대 이 블랙 카드의 주인이 아니었다. "이 카드, 어디서 훔쳤어?" 여직원은 진숙영을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벙찐 진숙영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이 번 돈으로 당당하게 살아온 그녀였다. 한데 어떻게 도둑이라는 누명을 쓴단 말인가? "헛소리하지 마!" 블랙 카드를 노려보던 진숙영이 이를 악물었다."이건 우리 딸 카드야." "정말 웃기는 여자네. 끝까지 발뺌이지. 경찰 앞에서도 그럴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여직원이 한껏 비아냥댔다.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은행에서 막중한 피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 징계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일 테고. "이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니, 늙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 여직원의 말은 비수가 되어 진숙영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댔다. 잔뜩 화가 난 진숙영이 여직원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짝-그러나 보안 요원이 진숙영의 뺨을 후려갈기며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죽고 싶어?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손바닥 자국을 따라 진숙영의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그녀의 여린 자존심도 한없이 짓밟혔다
"도둑년. 마지막으로 할 말은?"지점장은 신문지로 진숙영의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며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면 자신은 아주 큰 공을 세우는 셈이었다."나... 나... "보안 요원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바닥에 엎드리게 된 진숙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잔뜩 쉰목소리로 그녀가 울먹거렸다."가족들과 연락하게 해줘."공사 현장.프로젝트에 관한 지시를 내린 손가을은 몹시 뿌듯했다.현장에 오기 전, 그녀는 단단히 각오를 다진 상태였다. 사실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풀릴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작업반장은 자신의 결정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비위를 맞춰주기까지 했다. 지난번의 방문과는 무척이나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철저하게 무시하던 사람들이었다. 고개를 돌려 염구준을 슬쩍 훔쳐보았다. 손가을은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염구준이 그녀를 위해 미리 사람들을 제압했을 터였다. "수고하세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마지막 당부를 마친 손가을이 빠른 걸음으로 염구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도중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그녀의 어머니였다. 전화를 받은 손가을이 웃으며 말했다."엄마, 방금 퇴근했어요! 곧 집으로 돌아갈..." "가을아." 울먹이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왔다."엄마가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렸어..." 진숙영은 조금 전 은행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낱낱이 토로했다."가자." 염구준은 군말 없이 손가을을 포르쉐에 태웠다. 포르쉐가 무서운 굉음을 내며 은행을 향해 질주했다. 가는 내내 손가을은 분노를 삭이며 눈물을 훔쳤다. "이렇게 억울한 일은 아마 처음 겪으실 거야. 자존심이 강한 분이신데... 지금쯤 분명…" 도둑으로 몰려 경찰서에 끌려가게 생겼다니, 그녀는 한없이 절망하고 있을 터였다. 비록 그들은 돈도 없고 생활고에 시달렸으나, 법을 어기는 부끄러운 짓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빠도 엄마한테 욕을 한 적 없는데.
그야말로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는 자였다."그쪽 장모가… 남의 카드를 훔쳤다는데... 감히 이딴 식으로 소란을 피우다니!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야! 악!" 여직원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으나 바로 염구준에게 뺨을 얻어맞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지점장의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지더니 지린내가 공기 중에 퍼졌다. 다른 사람의 카드를 훔쳤다고? 지점장 손에 들려 있는 검은 카드를 힐끗 쳐다본 염구준의 동공이 가늘게 수축했다.G.J? 저건 분명히 자신의 카드였다. "그 카드인가?" 염구준이 카드를 노려보며 살벌하게 물었다."내가 장모님께 드린 용돈 카드야. 훔친 카드라고?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그런 생각을 하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지점장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이 사람아. 이 카드가 어떤 카드인지 아나? 용돈? 개떡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이 카드 안에 들어있는 예금만 해도 자그마치 2000억이었다. 어지간한 중소기업의 시가총액보다 많은 액수였다. 그런 걸 용돈이라고 덥석 쥐여준다고? 허풍도 이런 허풍이 없었다.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그러나 염구준은 쓸데없는 일로 실랑이를 벌이는 건 딱 질색이었다. 지점장을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그가 해외에 전화를 걸며 낮게 으름장을 놓았다."당장 아서와 연결해." 이는 해당 카드 본사에서 VIP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특별 설치한 전용 라인이었다. 곧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친애하는 염 선생. 어쩐 일로.." 그의 말을 끊은 염구준이 싸늘하게 질책했다."아서, 해명이 필요해. 당신 부하들이 감히 겁도 없이 내 장모님을 괴롭히고 있더군. 당신이 준 VVIP 카드가 내겐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야." 깜짝 놀란 아서가 커피를 바닥에 쏟았다. 그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제 보좌관을 노려보았다. 당장 조사해! 귀한 분의 심기를 건드린 자를 절대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보좌관은 서둘
그의 재력이라면 대형 수영장을 만들어 향유고래를 키울 수도 있지만 바다가 고래의 고향이라 그러지 않았다.“선장, 고래가 엄청난데 잡지 않아요?”갑판에서 몸이 건장한 흑인 선원이 불만을 토로했다.눈앞에서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 돈이니 그럴만했다.“독수리, 주둥이 닥쳐!”선장은 아직도 누군가 향유고래에 미련을 두자 버럭 화를 냈다.염구준이 어디 출신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발산하는 기운은 보는 사람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독수리가 염구준을 힐끗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나머지 선원들도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선장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저기, 아직 볼일이 남았어요?”선장은 염구준이 조용히 앉아 있자 조심스럽게 물었다.“여기서 가까운 부두로 데려다줘요.”염구준은 끝없는 바다를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이곳은 바닷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일단 상륙한 후에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울 생각이었다.“그게…”선장은 난처한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어려우면 말씀하세요. 그렇다고 폭행을 휘두르면서 강요하지 않으니까.”염구준은 선장의 태도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 분명하게 말했다.선박은 어부들 것이니 강제로 빼앗지 않을 것이다.그의 말에 선장은 솔직하게 말했다.“우리는 고래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해요. 이제 나와서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손해가 엄청납니다.”그들은 염구준이 무섭지만 돈을 벌지 못해 가족들이 굶는 것이 더 무서웠다.“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아요. 얼마를 원하세요? 육지에 도착하면 내가 줄게요.”염구준에게 있어 돈으로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100만 달러.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선장은 믿지 않는지 거액의 가격을 부르면서 떠보았다.듣기에 높은 가격이지만 따져보면 수리비용, 연료, 인건비 등등 모두 제외하면 얼마 남지 않으니 합리적인 가격이었다.“이걸로 담보할게요. 어차피 당신네 선박에 있으니까 도망치지 않아요.”염구준은 상대방이 걱정하는 걸 알아차리고 딸에게 선물하려고 주은 주먹
이튿날, 미지의 바다에서 향유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고, 등에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그 사람은 바로 염구준이었다.사방에 온통 푸른 바다라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지금은 고래가 바닷가로 데려가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고래야, 잘 부탁한다.”“우웅!”둘은 서로의 말을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수시로 교류했다.염구준이 눈을 감고 운기조식하다가 배고프면 심해의 눈물로 에너지를 보충했다.신기한 것은 한 방울만 먹어도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뿌우우우웅!그때 멀리서 선박 소리가 들렸다. 염구준은 눈을 번쩍 뜨고 소리를 질렀다.“저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목소리에 기운을 담았더니 쩌렁쩌렁한 소리를 지를 때마다 수면이 음파에 진동하는 것 같았다.어디선가 나타난 선박에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슥!그런데 선박에 다가간 순간, 상대방이 고래를 잡는 쇠고랑을 발사하는 것이었다.염구준은 재빨리 검기로 밧줄을 잘라버렸다.선박은 그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향유고래를 잡으러 온 것이었다.생각하지 않아도 고래의 용연향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스스슥!선박에 있는 사람들은 고장난 줄 알고 이번에 작살을 던졌지만 역시 염구준에게 잘려서 바다 밑으로 들어갔다.상대방과 가까워지자, 염구준은 그들의 선박에 번쩍 뛰어올라 엄숙하게 경고했다.“멈춰. 아니면 무력으로 대응할 거야.”선원들은 대부분 기운이 없는 평범한 어부였다.그들은 염구준이 먼 곳에서부터 뛰어올라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는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여기서는 고래를 잡는 걸 허락해요.”한참 뒤, 선장은 국제 감독기관에서 온 줄 알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이 고래는 내 친구예요. 어떻게 할지 잘 알겠죠?”염구준은 선장을 노려보며 차갑게 되물었다.“알았어요. 이 사람 말을 못 들었어? 당장 작살을 내려놔!”선장은 상대방이 보통이 아니란 걸 눈치챘는지 바로 선원들에게 지시했다.그러자 당황한 선원들은 정신을 차리고 지시대로 작살을 내려놓았다.염구
감히 그의 전우나 다름없는 고래를 잡아먹으려고 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만약 향유고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심해 밑에서 죽었을 것이다.“염 선생님, 안 돼요!”당황한 노신기 일행이 다급히 나서서 말렸지만 염구준은 듣지 않았다.그는 요트를 타고 서해충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러 공격했다.“당장 토해!”염구준은 두 손으로 검을 들고 번쩍 뛰더니 위에서 서해충을 자르려고 했다.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고래를 살려낼 것이다.“하악!”뿔난 서해충이 나지막하게 울부짖더니 커다란 입을 벌이고 염구준을 통째로 삼키고는 물속으로 들어갔다.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심지어 천기문의 고위층들도 진정할 수 없었다.“염 선생님!”“안 되겠어. 모든 음성탐지기를 던져!”노신기는 당황한 마음에 맞서 싸우려고 명을 내렸다.유동심연의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이번에 오면서 대량의 음성탐지기를 챙겼었다.그러나 워낙 위력이 강한 무기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염 선생님, 제발 잘 버텨줘요.’촤아악!이제 막 음성탐지기를 내려놓고 가동하려고 할 때 눈앞에서 거센 물보라가 솟구치는 것이었다.해저 지진으로 거센 파도가 밀려오면서 일으킨 쓰나미였다.“다들 선실로 들어가!”위급한 상황에서 노신기는 어쩔 수 없이 먼저 가문을 지켜야 했다.선박 세 척은 쓰나미에 밀려 먼 곳까지 흘러갔다.한편, 바다 밑은 난리도 아니었다.서해충 체내에 들어간 염구준은 선사 시대의 바다 생물과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그가 공격할 때마다 서해충은 심한 고통을 느꼈는지 커다란 몸집을 꿈틀거렸다.실은 서해충이 삼킨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도망칠까 봐 염구준이 스스로 잡혀 먹힌 것이었다.한참 공격하면서 돌진했더니 드디어 향유고래가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구자검법! 검일참공!”그는 기운을 폭증시켜 강력한 살술로 서해충의 몸에 길이가 10미터되는 상처를 냈다.잘린 부위에서 바닷물이 역류하여 들어올 때, 염구
동물의 감각은 때론 인간보다 훨씬 뛰어났다.특히 바다에서 자란 생물이라면, 웬만한 레이더보다도 훨씬 빨리 감지할 수 있었다.쿠쿵!혹시라도 싸울 수 있기 때문에 다들 몸에서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아래쪽에서 뭔가 빠르게 올라오고 있어.”염구준은 날카로운 눈으로 바다밑을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 검은 점 하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아직 수면까지 오지도 않았는데, 그 그림자는 이미 성체 향유고래와 맞먹는 크기였다.‘설마, 진짜 서해충이 있는 건가?’“목표가 공격 범위에 진입했습니다. 모든 작살 준비 완료했습니다.”대원들은 지시가 떨어지고 나서 3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내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쏴!”노신기는 참을성 없이 바로 명령을 내렸다.‘망했다!’염구준은 말리려고 했지만 결국 말리지 못했다.물속의 거대한 생물체는 어선보다도 커서 자칫하다간 오히려 배가 끌려갈 수도 있었다.슥! 슥! 슥!고래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세 척의 어선에서 수십 발의 대형 작살이 물밑의 검은 그림자를 향해 발사되었다.타겟의 몸집이 컸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살이 정확하게 꽂힐 수 있었다.“끌어 올려!”노신기는 고래 잡이를 할 때 쓰던 방식을 운용하며 숙련하게 명령을 내렸으나 기계를 최대치로 올려도 타겟을 끌어오리지 못했다.이에 조타실에서 다급하게 소식을 전했다.“큰일입니다. 어선이 저것에 의해 유동심연 쪽 소용돌이로 끌려가고 있어요!”배는 엄청난 속도로 끌려갔다. 배 자체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속도였다.“밧줄을 끊어!”염구준은 노신기의 무전기를 낚아채고 지휘권을 넘겨받았다.“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꽉 감겨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조타실에서 절박한 답변이 돌아왔다.현대식 어선은 전부 인공지능 시스템이라 이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우웅!염구준은 결국 검기를 날렸고, 날카로운 검광이 연달아 번쩍이며, 단숨에 밧줄들을 잘라냈다.이에 배가 거대한 관성에 휘청이며 흔들렸고, 균
오늘 만약 염구준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전부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빨리 항행하라고 하세요. 뭔가 이상합니다.”염구준의 갑작스러운 말에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졌다. “네, 말하고 오겠습니다!”그러나 눈치가 생긴 사람들은 염구준의 뜻을 알지 못해도 그대로만 하면 된다는 걸 알고 있어 곧바로 달려갔다.그들은 염구준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염구준은 흡족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면을 바라보며 물었다.“스텔라성의 성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십니까?”이번에 스텔라성의 성주는 두 개의 판을 짰는데, 하나는 겉면으로 보이는 부성주 베르였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숨어있던 노대영이었다. 다른 걸 다 따지고 나서 판을 짠 것만 본다면 정말 훌륭한 계획이었다.그랬기에 염구준은 그를 중시했다.노신기와 아타는 미간을 찌푸리고 서로를 바라본 뒤, 늙은 아타가 입을 열었다. “성주의 이름은 노세입니다. 압도적인 실력의 소유자로, 진 적이 없습니다.”“하지만 지난 20년간, 외부에서는 그의 모습을 본 이가 없습니다. 폐관 중이라는 소문도 있고, 이미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지요.”“그의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라, 저희도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이야기를 들은 염구준은, 오히려 흥분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흐음, 전부 사실이라면 꽤 괜찮은 상대가 되겠군요.”방금, 막 육체의 극한을 돌파한 염구준은 적당한 시험 상대가 필요했다.‘대단해.’주변 고위 간부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염구준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다만 약간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스텔라성 성주 같은 괴물은, 대부분 기겁하며 피하려 하는데, 정면 승부를 기대한다니까 말이다.“그나저나 염 선생님, 전에 올라오실 때, 인원이 적던데, 혹시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노신기는 다른 걸 얘기하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아, 이거 아십니까?”그의 손에는 투명한 비닐에 담긴 작은 물방울이 들려 있었는데, 외부에는 진기가 감돌았다.‘어라?’조금 더
이 독에 중독된 무인은 일시적으로 기운이 흩어지고, 단전이 봉쇄되어, 꼼짝없이 폐인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만약 과다 복용할 경우,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이런 희귀한 독약은 스텔라성 성주가 준 거겠지?”염구준이 흥미롭게 물었다.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진짜 산기봉단을 보았고, 게다가 그 양이 상당했기 때문에 꽤나 관심이 갔다.“맞아. 얼른 저 녀석을 잡아!”노대영은 승리자처럼 손을 휘저으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그는 희귀한 독약인 산기봉단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에휴.”아타 등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염구준마저 당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이제 구세주가 사라졌으니, 최악의 경우 전부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가서 두들겨 패! 나 아까 진짜 쫄아서 오줌 쌀 뻔했단 말이야!”몇몇이 소리치며 달려들었고, 염구준을 한껏 때려서 화풀이를 하려 했다.반보천인급 고수를 때릴 기회는 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우웅. 그러나 그 순간, 검광이 번쩍이더니 달려들던 사람들 전부가 쓰러졌다. 그들의 목에는 옅은 혈흔이 있었는데, 상처는 아주 작았지만 모두 목숨을 잃었다.“이 독이 아무리 강해도, 나를 상대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염구준은 조용히 진기를 운용하며, 체내에 남아 있던 독기를 모두 없애버렸다.육신이 이미 반보천인의 극한의 경지에 다다른 탓에 약물 저항성도 엄청나게 강해져 그는 산기봉단 같은 독약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너... 이건 말도 안 돼!”노대영은 절규하듯 외쳤다.희망이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자, 정신이 붕괴되기 직전이었다.곧 있으면 승리할 수 있었는데, 이젠 그게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는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스텔라성 성주랑 뭘 꾸민 거지?”염구준은 서두르지 않고 물었다.해독제 같은 건 이제 관심 없었다. 상대가 정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난 진작 그분의 문하로 들어갔어. 언젠가는 그분이 내 복수를 도와줄 거다!”“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데,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
염구준은 주머니를 집어 들어 곁에 있던 그레이에게 휙 던져주며 분부했다.“먼저 기운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독제를 나눠줘.”“네.”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노대영을 흉악하게 노려보았다.반보천인으로서 이런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게 조금 창피해서였다.노대영은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흘러가는 걸 감지하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할 말이 있습니다.”“해.”염구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단 한 마디만 툭 내뱉었다.그레이와 다른 이들이 힘을 회복하고 나면, 그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기에 곧 죽을 이의 유언쯤은 들어줄 수 있었다.노대영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얼른 말을 이었다.“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원수에게 복수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그래.”염구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딱히 다른 변수가 없다면, 이 말을 부정할 이유가 없어서였다.‘어라?’이에 주변 사람들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말투로만 보면, 염구준이 노대영의 편을 들어주려는 것 같아서였다.그러나 방금 전에는 또 그들을 구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염구준이 무슨 생각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노대영은 염구준의 마음을 돌린 줄 알고 속으로 기뻐하며 바로 말을 이었다.“이 도리를 알고 계시니, 그럼 행동에 옮겨도 되겠죠.”노대영은 혹여나 다른 변수가 있을까 두려워 단검을 꽉 쥐고 중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노신기에게 달려들었다.그레이 등이 조금 있다가 어떻게 나올지는 크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복수를 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말이다.쾅!하지만 달려가자마자 염구준의 발에 얼굴을 맞아서 옆으로 나가떨어졌다.그의 코와 입에서는 순식간에 피가 줄줄 흘렀다.“날 가지고 노는 거냐, 염구준!”“허, 내가 나설지 안 나설지 짐작이 안 됐나봐?”염구준은 비웃으며 말했다.그는 노대영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지만 상대방의 행위를 몹시 혐오했다.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대놓고 복수하는 건 괜찮지만, 그 아비가 악행을 일삼던 사람이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방식에,
그러나 몸속에 독이 퍼진 탓에 기운을 끌어올릴 수가 없어 모두 답답하게 속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노대영이 혓바닥을 자르려고 할 때,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대영 문주님, 염구준인 것 같습니다!”이름을 듣자마자, 노대영의 얼굴에서 희열이 싹 사라지고, 이내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기습에 성공한 후 바로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고래를 타고 쫓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염구준 한 사람만으로 충분히 그들을 몰살할 수 있었다.“어서 고래잡이 작살이랑 그물 그리고 멀리에서 공격할 수 있는 무기들을 준비해.”노대영의 가슴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급속히 퍼져갔다.허겁지겁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겨우 쇳조각 몇 개로 염구준을 막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휙휙!염구준은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작살, 그물, 조명탄 따위를 보며 입꼬리를 비웃듯이 끌어올렸다.아직 사격거리에도 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공격을 했기 때문이었다.‘적지 않게 겁을 먹었나 보네.’그는 생각했다. 역시나 첫 번째 공격은 전부 허탕이었다.염구준은 거대한 향유고래를 타고 빠르게 이동했고, 이윽고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됐다.커다란 작살 하나가 고래의 머리를 향해 곧장 날아들었는데, 맞으면 죽지 않더라고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게 뻔했다.우웅!염구준은 검기 한 줄기를 내보내 날아오던 작살을 두 동강 낸 뒤, 작살에 묶인 쇠사슬 위로 몸을 던져, 빠르게 어선으로 돌진했다.풍덩!향유고래는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속으로 잠수했다.노대영은 염구준이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걸 보자마자 다급히 소리쳤다.“어서, 어서 배에 못 올라오게 사슬을 끊어!”그도 자신이 염구준과 맞서봤자, 단 한 줌의 승산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구자검법, 검일참공!”염구준은 배 위 인원들의 움직임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강한 검술을 발동해 검기를 날렸다.제대로 검기를 축적하진 못했기에, 완벽하게 완성된 검일참공은 아니었고, 약간의 반동
파악!곧이어 물기둥이 하늘로 솟구치며 거대한 향유고래가 염구준과 멀지 않는 곳에 떨어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마치 떠나기 아쉬워하는 듯했다.촤악!염구준은 몸을 날려 향유고래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뒤, 세 척의 어선 쪽으로 진기를 날려 물보라 일게 했다.이에 향유고래는 곧장 방향을 틀고, 어선을 향해 빠르게 헤엄치기 시작했다.말이 통하지 않아 이런 방식으로 밖에 교류할 수 없었지만 별로 큰 문제는 없었다.그 시각, 1호 어선은 다른 어선보다 조금 더 시끌벅적했다.노대영은 배의 지휘권을 장악한 뒤, 끝까지 저항한 소수만을 제거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포로로 붙잡아두었다.물론 그가 자비로워서가 아니었다.그저 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어떻게 복수하는지 지켜보게 하기 위해서였다.“대영 문주님, 준비 완료됐습니다. 언제든 시작 가능합니다.”노대영에게 붙은 아첨꾼 하나가 다가와 공손하게 말했다. 이번에 출정한 천기문 문도 중 절반 이상이 이미 노대영 편이었다.쿵!노대영은 부도 갑옷을 입은 채로 웃으면서 팔을 휘둘러 노신기를 바닥에 내던졌다.“악독한 놈. 네가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난 오늘 아버지의 복수를 할 거다.”며칠 전에 대의를 위해서라면 혈연관계는 얼마든지 끊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그저 노신기를 안심시키기 위함에 불과했다. 그의 가슴 속에 맺힌 복수심은 한순간도 식지 않았었다.“하아...”노신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창백한 얼굴엔 깊은 후회가 서려 있었다.‘그때 불쌍해 보인다고 해서 검은 머리 짐승을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그는 생각했다. “모든 일은 내가 벌인 거니까 찢어죽이든, 뭘하든 나한테만 해.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 건드리지 말고.”지금 이런 상황에 이른 이상, 그는 더 도리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전에 이미 노대영에게 그의 출신을 말해주며 그의 아버지가 눈 깜빡하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는 변태 악마라고 말해주었으나 그는 전혀 듣지 않았기 때문에 말해봤자 쓸모가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스승과 제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