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이 일로 화내는 거라면 그럴 가치 없어요. 이런 상황은 예전부터 익숙해졌어요.”바로 그런 익숙함이 강연찬을 더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는 무심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다.“많이 힘들었겠다.”“이미 지난 일이에요.”남설아는 그의 손을 살짝 피하며 웃어 보였다.예전의 남설아가 고통스러웠던 건 배서준을 좋아했던 것도 있고 사랑하는 나은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은이도 세상에 없고 배서준에 대한 감정도 이미 바닥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이제부터 고통받을 사람은 썩어빠진 그들뿐일 것이다.그렇게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남설아를 보며 강연찬은 마음이 아파하며 말했다.“그럼 푹 쉬어. 나 먼저 갈게.”“잠시만요. 이따가 나랑 같이 가요. 남도일 씨 보러 가고 싶어요.”남설아는 서둘러 밥을 마저 먹고 반짝이는 눈으로 강연찬을 바라보았다. 원래 가려고 했던 일이었지만 이것저것 겹쳐 미뤄졌던 참이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조용히 다녀오기 좋은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것이다.강연찬은 그 말을 듣자마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안 돼. 너 지금 몸 상태로는 함부로 나돌면 안 돼. 의사도 분명히 말했잖아. 침대에서 내려오면 안 된다고.”“좀 통증이 느껴지는 것뿐이에요.”남설아는 덤덤하게 웃었다.“피부에 난 상처일 뿐이잖아요. 죽을병 아니잖아요.”이젠 남설아도 더는 예전의 연약한 소녀가 아니었다. 죽지 않을 고통은 그냥 견디면 그만이었다.“남 팀장님은 나중에 가는 게 어때요?”천기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설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남설아의 태도는 단호했다.“내 성격 알잖아요. 지금 데리고 가든지, 아니면 나 혼자 몰래 가든지 둘 중 하나야.”천기준은 이렇게 고집 센 남설아는 처음이었다.그는 배서준 곁에서 오래 일하면서 남설아를 그저 감정 없는 완벽한 로봇처럼 생각하고 있었고 한 번도 그녀에게서 이렇게 뚜렷한 개성과 고집을 느낀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남설아는 완
남설아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바로 눈앞에 있는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이 각도에서 보면 사실 강연찬의 얼굴은 배서준과 거의 똑같았다. 예전에 배서준을 처음 봤을 때, 첫눈에 바로 빠져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나 닮은 그 얼굴에 그 누가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까?그녀의 손길을 느낀 강연찬은 천천히 걷고 있던 발걸음을 더 조심스럽게 옮겼다.“아파?”“네, 아파요.”남설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그녀의 등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아팠고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건 가슴 한가운데였다.그러더니 갑자기 강연찬의 품속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저 이 소중하고도 드물게 찾아온 평온을 잠시나마 느끼고 싶었다.한편, 천기준은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자기가 어찌해야 할지 잠시 판단이 서지 않았다.조금 고민하다가 결국 자리에 앉아 배서준이 시킨 도시락을 하나하나 씹어먹었다. 그리고 다 먹은 뒤 천천히 회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오전 내내, 배서준은 정신이 딴 데 팔려있었다. 서유라와 점심을 먹는 중에도 음식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유라는 예민한 성격이라 그런 그의 변화를 바로 눈치챘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서준아, 무슨 일이야? 혹시 프로젝트 때문에 그래?”“아니.”배서준은 시선을 옮기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의 차가운 반응에 서유라는 씁쓸했다.요즘 들어 배서준이 자신에게 건네는 말투가 항상 이렇게 냉담하고 무심했다. 이런 변화는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서유라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작게 말했다.“다 내 잘못이야. 내가 괜히 입을 놀린 바람에 네가 설아 씨랑 싸우게 됐잖아. 설아 씨 지금 어떤지 모르겠지만 서준아, 이번에는 네가 좀 심했어. 한 번쯤은 보러 가야 해.”배서준은
서유라는 말하다가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배서준의 품에 기대더니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물고기가 물에 의지하듯 절대 배서준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했다.원래 배서준은 그녀의 이런 행동에 조금 짜증이 났지만 이처럼 애처로운 서유라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살짝 누그러들었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난 너 안 떠나.”“서준아, 너... 이혼할 거야?”서유라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지금 배서준이 가장 생각하기 싫은 문제였다. 그런데 서유라가 그렇게 직접 묻자, 배서준은 괜히 짜증이 올라왔다.“그 여자가 배건 그룹 지분을 쥐고 있어. 내가 회사 재산 빼돌린 증거도 갖고 있고.지금 이혼하는 건 같이 망하자는 거잖아?”“난 그냥 물어본 건데. 왜... 왜 그렇게 화를 내?”서유라는 그의 반응에 놀랐는지 몸이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배서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서유라가 우울증이 있다는 걸 떠올리며 급히 진정시키려 애썼다.“아니야, 내가 화낸 게 아니야. 그냥 답답해서 그래. 난 누가 날 옥죄는 거 싫어하잖아.”서유라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그때 천기준이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배서준의 품에서 물러나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천기준은 배서준의 책상 앞까지 와서 깨끗이 씻은 도시락통을 내려놓았다.“대표님, 남 팀장님께서 일에는 지장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마시랍니다.”“그리고 또 뭐라고 했어?”배서준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도시락통을 내려다봤다.그가 궁금한 건 일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은 단지 그녀가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알고 싶어질 뿐이었다. 배서준의 표정을 본 천기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따로 하신 말씀은 없었습니다.”“나한테 전할 말도 없었어?”배서준은 점점 조급해졌다. 자기가 정성껏 도시락까지 챙겨줬는데 그녀가 아무 반응도 없는 게 말이 안 됐
아이처럼 굴고 있는 남설아를 보며 강연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웃으며 말했다.“누가 몰래 너를 욕하겠어?”“난 오빠라고 의심 중이거든요.”남설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오빠가 마음속으로 나 욕하고 있었던 거 맞죠?”“너를 욕할 거면 난 몰래 안 해. 그냥 대놓고 하지. 그것도 아주 호되게 말이야.”강연찬은 큰 눈을 굴리며 퉁명스럽게 말한 뒤 차 속도를 높였다.남도일을 다시 마주했을 때 남설아의 마음은 복잡했다.하지만 남도일이 남설아를 다시 본 순간, 그의 눈에는 오직 증오만이 담겨 있었다.“이 망할 계집애, 네가 감히 여길 와? 내가 어떤 꼴이 됐는지 봐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 엄마가 알면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도일은 입을 열자마자 죽은 엄마 이야기를 들먹였다.사실 그는 항상 그랬다.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그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늘 엄마를 핑계로 삼았다.그 때문에 남설아는 늘 물러나야 했고 늘 그에게 져줘야 했다.그 결과 그는 점점 더 선을 넘었고 결국엔 그녀를 팔아넘기기까지 했다.정말 비열하고도 끔찍한 인간이었다.“남도일 씨, 우리 사이에 이제 혈연 따윈 없어요. 나는 당신 같은 외삼촌 안 둡니다. 우리 엄마가 지금 당신을 본다면 누굴 탓할까요? 당신을 혼내고 날 안쓰러워하지 않겠어요?”남설아는 처음으로 이렇게 단호하게 자신의 외삼촌에게 말했다.그녀의 눈빛은 차분했다. 이제 그를 바라보는 눈에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듯한 낯선 느낌만이 담겨 있었다.그런 그녀를 보자 남도일은 한순간에 상황을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이 아이는 더 이상 자기 뜻대로 휘둘릴 수 있는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그는 남설아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설아야, 착한 우리 조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다 미안해. 그래도 난 네 외삼촌이야. 이 세상에 네 피붙이는 나밖에 없잖아. 날 외면하면 안돼. 제발 이러지 마.”“당신이 내 유일한 가족이라는 걸 기
이 수년 동안, 남설아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도대체 왜 자신이 배서준의 침대에서 깨어났는지 왜 그렇게 얼렁뚱땅 배서준과 나은이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말이다.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배서준은 늘 이 일을 이유로 남설아를 음흉한 여자라 여기며 경멸해왔고 그 감정은 자연스레 나은에게까지 이어졌다. 이 모든 건 결국 이 사람 때문이다. 바로 자기 외삼촌 때문이었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한 거냐고요! 나는 당신 조카예요! 당신의 조카딸이라고요!”남설아는 눈을 부릅뜨고 유리창에 손을 떼지도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억울했다.그녀가 수년간 받아온 모든 고통, 그리고 나은이 받아온 상처들, 이 모든 게 다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이게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젊을 때 괜찮은 사람 만나서 시집가야지, 아니면 뭐 할 건데! 설아야, 나는 네 외삼촌이야. 내가 널 해칠 리가 없잖니. 배서준이 뭐가 어때서. 너도 좀 잘 보이려고 애썼어야지.”지금의 남도일은 논리 따위는 아예 저 멀리 던져버린 모습이었다. 이미 구치소에 갇힌 몸이라 뭐든 다 떠벌리고 있었다. 할 말, 안 할 말 다 쏟아내는 중이었다.그가 전혀 반성의 기색 없이 지껄이는 모습을 보자 남설아는 이 사람에게 더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부터 당신과 나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당신은 더 이상 내 외삼촌이 아니에요. 그럴 자격 없어요.”남설아는 눈물을 거칠게 훔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 그녀가 정말로 가버리려 하자 남도일은 얼굴을 붉어지며 소리쳤다.“네가 내가 있어서 미움받는 줄 알아? 배서준은 애초에 다 알고 있었어. 그 사람은 그냥 널 싫어하는 거야. 네가 보기 싫으니까 그런 거라고.”‘배서준이 알고 있었다고?’그렇다면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모른 척했고 남설아도, 나은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끔찍했던 과거가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도 다
“그럼 복수하러 가자.”강연찬은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남설아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언제나 네 편이야.”그의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한 남설아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복수하러 가요. 그 인간들, 절대 용서 못 해요.”“이게 바로 내가 알던 남설아지. 넌 원래 약한 아이가 아니야. 그 사람들은 널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착각한 거야.”강연찬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위로하고 응원했다. 그의 조용하고 따뜻한 위로에 남설아는 서서히 진정되었다.그녀는 분명 감당하지 않아도 될 수많은 악의를 견뎌왔지만, 세상이 모두 악한 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아직 누군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오빠, 우리 가요.”“그래.”하지만 몸을 움직인 대가가 컸다. 남설아의 등에 있던 상처가 더 악화하였고 병원에 돌아왔을 때 의사는 상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계속 움직이면 등은 그냥 완전히 망가지는 거예요. 아니, 어린 아가씨가 왜 이렇게 자기 몸을 함부로 다뤄요?”“다시는 안 그럴게요, 정말이에요.”남설아는 머쓱하게 웃으며 사과했다. 이번엔 정말 그녀의 잘못이 맞았다.그녀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의사는 더는 뭐라 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경각심을 주려고 일부러 치료를 거칠게 했다.남설아는 비명을 지르며 강연찬의 팔을 꽉 잡았다. 통증 때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선생님, 살살 좀 해 주세요. 너무 아파하네요.”강연찬은 너무 안쓰러워 함께 울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의사는 두 사람을 보더니 손놀림이 더 세졌다.결국 남설아는 눈물을 참으며 끝까지 버텨냈고 스스로 하나의 결심을 내렸다.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의사 말 잘 들을 것이다. 아니면 그 뒤에 이어질 고통은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배씨 가문, 본가.배서준의 어머니는 집 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믿을 수 없
“어머님, 진정하세요.”서유라는 윤화진의 허리를 단단히 안으며 가까스로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넌 비켜!”윤화진은 서유라를 거칠게 밀쳐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네가 우리 아들 유혹한 그 요망한 년이란 거 모를 줄 알아? 우리 집안 꼴이 지금 뭐가 됐는지 봐! 인제 와서 착한 척은 집어치워. 염치도 없구나!”“이게 웬 난리예요?”배서준이 성큼성큼 걸어와 모두 사이에 몸을 막아섰다. 모자를 쓴 중년 사내는 옷깃을 정리하며 배서준을 매섭게 바라봤다.“당신이 배건 그룹의 대표죠? 이름 있는 사람이라더니, 가족은 왜 이렇게 교양이 없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타인의 부동산을 불법 점유 중이라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일주일 안에 이 집에서 나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법적으로 대응하겠습니다.”‘뭐라고?’배서준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여긴 배씨 가문의 본가였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 집에서 자라왔다. 그런데 무단 점유라니.“경찰이 오해한 거 같은데요? 여긴 우리 집입니다.”배서준은 눈썹을 세게 찌푸리며 이게 누가 장난을 친 건지 의심했다. 하지만 경찰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증거를 꺼내 들었다.“부동산 등기부입니다. 이 집의 정식 소유주는 남설아 씨로 등록돼 있어요. 이 정도면 이해가 되셨겠죠?”그제야 배서준은 문득 생각났다.할아버지 유언장에서 이 집은 이미 남설아에게 넘긴 상태였다. 하지만 그동안 남설아는 한 번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은 거야?’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러니까 지금 남설아가 경찰에 신고했다는 겁니까?”“그렇습니다. 일주일 안에 반드시 퇴거하십시오.”경찰은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돈 많은 사람이라고 고상할 줄 알았는데, 다 거기서 거기네. 아주 막무가내야.’“서준아, 설아 씨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너무 심한 거 아니야?”“배서준! 이게 네가 그렇게 감싸던 아내야? 지금 이 상황 어떻게 할 건데?”서유라와 윤화진은 거의 동시에 외쳤다.서유라의 목소리
윤화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세상에서 제일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소리 내 비웃었다.“아버지가 있다는 걸 기억하긴 하네.”“됐어요. 지금 당장 집 문제부터 처리하러 갈게요.”배서준은 더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사방이 불바다란 말이 자기 인생을 이렇게 정확하게 설명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흐느끼고 있는 서유라를 바라보며 죄책감과 무력감에 잠겼다.“괜찮아?”“괜찮아. 사실 어머님 말씀도 틀린 건 없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서준아, 나 진짜 설아 씨한테 널 돌려주고 싶어. 근데 어떡해, 난 정말 그게 안 돼. 널 사랑해. 너 없으면 안 돼. 정말 너 없이 살아야 한다면 난 죽을지도 몰라.”서유라는 절박하게 배서준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그 눈빛 속엔 거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과 의존이 가득했다.그리고 배서준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이런 병적인 의존과 소유욕이었다. 이런 감정만이 자신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해줬기 때문이다.그는 서유라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넌 날 절대 잃지 않아, 바보야.”“서준아, 나 무서워.”서유라는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애교를 부렸다.그녀도 사실 마음속으로 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설마 남설아가 진짜 저렇게까지 뒤집을 줄은 몰랐다. 가문 전체를 본가에서 내쫓다니, 생각보다 너무 대담했다.배서준은 곧 서유라를 데리고 남설아의 병실로 향했다.강연찬은 회사에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병실 안에는 남설아 혼자였다. 그녀는 배서준이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유라까지 같이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보아하니 유라 씨한테는 정말 정이 깊으신가 봐요. 이런 상황까지 와서도 굳이 함께 오다니요?”남설아는 손을 꼭 잡은 채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서준 씨, 애초에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나랑 결혼했어요? 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 왜 지우라고 말하지 않았죠? 결혼하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서유라는 싸움에서 진 사람처럼 기가 죽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배서준의 이미지도 사람들 눈에 한순간에 추락했고 그는 무척이나 난처하고 부끄러웠다.그는 점점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만약 그때 남설아와 이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초라해지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연회가 끝난 뒤 배서준과 서유라는 함께 차에 올랐다.“서준아, 미안해.”서유라는 고개를 숙인 채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오늘 내가 괜히 설아 씨한테 차를 우리라고 제안했어. 설아 씨가 그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너 잘못 아니야.”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남설아가 괜히 잘난 척을 한 거지.”그는 서유라가 마음 아파하는 게 안쓰러워 모든 잘못을 남설아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그래도 난 아직도 미안해.”서유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내가 너를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게 했잖아.”“바보야, 네 탓이라고 한 적 없어.”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응.”서유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배서준의 품에 안겼다.하지만 배서준의 마음은 딴 데로 향하고 있었다.그는 과거의 남설아를 떠올리고 있었다.한때 그녀는 단지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매일 자신과 아이만 바라보며 살아가던 그녀가 도대체 언제 다도를 배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다도 실력이 이 정도라니, 서 회장 부부가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지금 저 여자가 내가 알던 남설아가 맞는 건가?’그는 마음속 깊이 혼란스러웠다.남설아는 분명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이 쉽게 이해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서유라는 배서준의 시선이 자꾸만 허공으로 향하는 걸 느끼고는 그가 또다시 남설아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그녀의 마음속에 위험 신호가 울렸다. 그녀는 반드시 이 둘의 접촉을 막아야만 했다.‘남설아, 가만 안 둬. 네가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서유라는 속으로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그녀의
“서 회장님, 사모님, 과찬이세요.”남설아가 겸손하게 말했다.“그냥 가볍게 내린 것뿐이에요.”“남 대표 너무 겸손하시네.”서기찬이 말했다.“이건 아무렇게나 내려서 나올 맛이 아니야. 확실히 기본기와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그러게요, 설아 씨.”차혜미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차 내리는 솜씨가 정말 대단해요. 제가 제자로 들어가고 싶어질 지경이에요.”“사모님, 또 농담하시네요.”남설아가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이런 사소한 재주가 어찌 사모님의 눈에 찰 수 있겠어요?”“설아 씨가 너무 겸손하신 거예요.”차혜미는 찻잔을 바라보며 더욱 남설아에게 호감을 드러냈다.“차를 이렇게 잘 내리시는 걸 보니 정말 감탄밖에 안 나와요.”“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남설아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유라는 마음속에 질투심이 더욱 불타올랐다.남설아가 이렇게까지 다도에 능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자신이 의도한 모욕은커녕 오히려 남설아는 그 자리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칭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서유라는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설아 씨의 다도 실력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듣기로 다도도 여러 유파가 있다고 하던데 설아 씨는 어느 쪽이야?”그녀는 남설아의 다도를 비하하려는 의도로 체계 없는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암시하고자 했다.“특정 유파를 따로 배우진 않았어.”남설아는 침착하게 말했다.“그저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내 느낌에 따라 우려내는 것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시 비웃듯 말했다.“그럼 설아 씨만의 파가 생긴 거네? 대단해.”그녀는 남설아만의 파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남설아의 다도가 비전문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유라 씨, 또 농담하네.”남설아는 작게 웃으며 조롱이 섞인 말투로 답했다.“나는 그냥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일 뿐이야. 감히 한 유파라니.”“남 대표님 너무 겸손하세요.”차혜미가 곧장 나섰다. 그녀는 서유라의 말에 담긴 악의를 알아차리고
“고마워.”남설아가 말했다.“설아 씨, 예전에 서준이 곁에 있을 때도 이렇게 늘 꾸미고 다녔어?”서유라가 불쑥 물었다. 말투에는 살짝 떠보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남설아가 한때 배서준의 곁에 있었던 시절을 언급하며 남설아의 과거를 상기하려 했다.남설아는 서유라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유라 씨, 농담이 지나치네. 그때의 나는 그저 서준 씨의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했을 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소 우쭐한 말투로 말했다.“나는 설아 씨가 차를 따라주고 시중드는 데 능한 줄 알았어. 내조를 하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잖아?”그녀는 차를 따라주고 시중든다는 것을 일부러 강조해서 말하며 남설아를 모욕하려 했다.“유라 씨 말이 맞아. 내조를 하는 데는 정말 정성이 필요해.”남설아는 차분하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사업을 하는 데 더 능한 편이야.”“그래?”서유라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오늘 설아 씨가 잘해야겠네. 여기 모인 분들 다 업계 내로라하는 분들이니까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겠어.”“걱정해줘서 고마워, 유라 씨.”남설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빈정거림이 담긴 말투로 답했다.“하지만 나는 유라 씨를 실망하게 할 일은 없을 거야.”“그래야지.”서유라는 속으로 비웃으며 남설아가 뭘 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는 듯 말했다.“설아 씨, 차 따르는 데 능하다니까 오늘 여기서 차 한 번 내려보지?”서유라가 제안했다.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묻어 있었다.“여기 좋은 차도 있고 멋진 다기 세트도 있어. 설아 씨의 손재주로는 딱 어울릴 것 같네.”그녀는 손재주라는 말을 다시금 강조하여 말하며 남설아를 하찮은 시중 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려 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그런 의도를 바로 눈치챘음에도 전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도전을 받아들였다.“좋아, 유라 씨가 이렇게 운치 있는 제안을 하니 한 번 해볼게.”남설아는 여유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다만 한 가
연회장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손님들은 잔을 부딪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수정 샹들리에는 부드러운 빛을 뿜어내며 연회장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남설아와 강연찬이 연회장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뒤 춤을 추기 시작했다.강연찬은 부드럽게 남설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녀를 이끌며 연회장에서 빙그르르 돌았다.남설아의 스텝은 가볍고 우아했으며 마치 나비가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그녀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드레스 자락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거리며 활짝 핀 제비꽃처럼 보였다.두 사람의 호흡은 놀라울 만큼 잘 맞았고 모든 동작에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그들의 춤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었고 단숨에 연회장의 중심이 되었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배서준은 남설아의 모습을 눈을 떼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강연찬의 품에서 행복한 미소를 띠며 춤을 추는 남설아를 바라보며 설명하기 힘든 질투와 상실감에 사로잡혔다.“서준아, 뭘 그렇게 보고 있어?”서유라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오며 배서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그녀는 배서준의 달라진 표정을 눈치채고 불쾌함을 느꼈다.“아무것도 아니야.”배서준은 정신을 차리고 감정을 감추려 애썼다.“서준아, 혹시 아직도 남설아 생각하고 있는 거야?”서유라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말투에는 질투심이 스며 있었다.“아니야.”배서준은 날카롭게 부인했다.“서준아,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서유라는 약간 서운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네 마음속에 아직 그 여자가 있는 거 알아.”“유라야,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마.”배서준의 말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터무니없는 소리 아니야.”서유라는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며 말했다.“서준아, 혹시 후회하는 거야? 나랑 있는 거 후회해?”“유라야, 그런 거 아니야.”배서준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들며 말했다.“후회하는 건 아니야. 그냥... 머릿속이 좀 복잡해.”그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무척 심란했다.“서준
“나는 그냥 여자는 가정에 더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유라는 약간 우쭐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결국 남편 뒷바라지하고 아이 잘 키우는 게 여자의 본분이잖아.”“유라 씨 생각은 꽤 보수적이네.”남설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그래? 그럼 설아 씨는 여자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보는 거야?”서유라는 다소 공격적인 어조로 물었다.“여자는 자립심을 가지고 자기 일과 꿈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남설아는 단호하게 말했다.“남자에게 의지하거나 남자의 부속품이 되어서는 안 되지.”“설아 씨 생각 참 특이하네.”서유라는 차가운 비웃음을 지었다.“근데 나는 여자가 너무 강한 것도 별로라고 생각하거든.”“강한 게 나쁘고 약한 건 좋은 건가?”남설아가 되물었다.“유라 씨는 자신이 어떤 쪽이라고 생각해?”“나는...”서유라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만해, 유라야. 그만 말해.”배서준이 더는 보고 있을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거고 우리는 그걸 존중해야 해.”“서준아, 나는 그냥...”서유라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배서준이 말을 잘랐다.“됐어, 그만하자.”배서준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우리 저쪽 가보자.”서유라는 배서준이 화가 난 걸 눈치채고 입을 닫았다.그녀는 남설아를 노려보듯 쏘아보더니 배서준을 따라 자리를 떴다.남설아는 그런 서유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서 회장 부부와의 대화에 집중했다.“서 회장님, 사모님, 제가 하나 제안해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혹시 들어보실 의향 있으신가요?”남설아가 말했다.“오? 무슨 제안인가요?”서기찬이 흥미롭게 물었다.“저는 두 분과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습니다.”남설아는 차분하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그 프로젝트는...”그녀는 자세하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고 서 회장 부부는 그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남 대표님의 아이디
남설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배서준과 서유라를 한번 훑고 지나갔다.“정말 우연이네.”“배 대표님, 요즘 회사는 잘 돌아가시죠?”강연찬이 배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럭저럭요.”배서준은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다행이네요.”강연찬은 짧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주변 공기가 어색해졌다.“자, 다 같이 한잔하시죠.”서기찬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앞으로의 좋은 협력을 위해!”“건배!”사람들은 일제히 잔을 들어 마셨다.파티는 계속 이어졌고 남설아와 강연찬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많은 이들이 다가와 인사를 나누고 함께 협력할 기회를 엿보려 했다.배서준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서준아, 무슨 생각해?”서유라의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깨뜨렸다.“아무것도 아니야.”배서준은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웃었다.“우리 저쪽도 좀 둘러보자.”“응.”서유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배서준이 도망가기라도 하는 듯 배서준의 팔을 꼭 끼고 있었다.두 사람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녔지만 끝내 이 열기 속에 어울리지는 못했다.배서준은 이미 마음이 떠 있었고 시선은 자꾸만 남설아 쪽으로 향했다.반면 서유라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주변의 시선과 부러움을 즐기며 자부심에 젖어 있었다.남설아는 능숙하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뛰어난 사교 능력과 비즈니스 감각을 드러냈고 강연찬은 항상 그녀 곁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서유라는 그런 광경을 보며 더욱 만족스러워했다.배서준의 팔을 끼고 있는 자신이 마치 이 파티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하지만 차혜미가 자신에게는 형식적인 인사만 건네고 남설아에게는 유난히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불쾌한 기분이 들고 질투심이 일었다.“사모님, 남설아 씨랑 오래 알고 지내셨어요?”서유라는 조심스레 떠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네, 설아 씨와는 좀 됐죠.”차혜미는 예의를 갖춰 대답했지만 더 이상 깊이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설
차 안으로 돌아온 서유라는 여전히 드레스를 고른 기쁨에 들떠 있었다.“서준아, 우리 이번 파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커플이 되지 않을까?”그녀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그럴 거야.”배서준이 대답했지만, 말투에는 영혼이 없었다.“다행이네.”서유라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서준아, 네가 이렇게 같이 와줘서 정말 좋아.”그녀는 배서준의 어깨에 기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배서준은 말없이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계속 남설아의 모습이 떠올랐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파티 당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행사장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분위기 또한 고급스럽고 활기찼다.남설아와 강연찬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에서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남설아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단정하면서도 기품 있는 자태를 뽐냈고 강연찬은 깔끔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여유롭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두 사람은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끌었고 자연스럽게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남 대표님, 강 대표님, 파티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서 회장 부부가 반갑게 맞이했다.“서 회장님, 사모님, 축하드립니다.”남설아가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남 대표님께서 참석해 주시다니 저희가 정말 영광이에요.”서 회장의 부인인 차혜미가 남설아의 손을 잡으며 따뜻하게 말했다.“별말씀을요, 사모님.”남설아가 정중하게 답했다.“이분이 바로 강 대표님이시죠?”서기찬이 강연찬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 회장님.”남설아가 소개했다.“저의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좋은 친구인 강연찬 대표님이에요.”“강 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서기찬이 손을 내밀었다.“반갑습니다, 서 회장님.”강연찬은 예의를 갖춰 악수했다.“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자리를 미리 준비해두었어요.”서기찬이 손짓했다.“감사합니다.”남설아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세 사람은 함께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조금 떨어진 곳에 배서준과 서유라도 행사장
배서준은 서유라가 들뜬 모습으로 웃고 있는 걸 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괜히 불편하고 답답했다.그는 말없이 남성복 코너로 가서 대충 눈에 들어오는 정장을 집어 들었다.“손님, 정말 안목이 좋으시네요. 이건 저희 매장에서 가장 최근에 들어온 신상이에요. 이탈리아산 원단으로 수제 재단된 제품이라 고객님 체형에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점원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배서준은 아무 말 없이 검은색 정장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정장을 갈아입고 거울을 바라본 그는 문득 거울 속 자기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저 사람이 정말 내가 맞아?’한때 야망으로 가득하고 세상을 거머쥘 듯 당당했던 배서준은 이제는 서유라의 기대와 기준에 맞춰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보였다.“서준아, 다 입었어?”서유라가 탈의실 밖에서 재촉했다.“응.”배서준은 문을 열고 나왔다.“와, 서준아, 너 이 정장 입으니까 진짜 멋있다.”서유라는 마치 영화 속 배우를 보는 듯 눈에 감탄이 가득했다.“진짜 영화배우 같아.”배서준은 가볍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유라가 이런 말들을 듣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이걸로 할게.”배서준은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매장 입구 쪽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남설아와 강연찬이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눈이 마주친 순간,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배서준의 시선은 남설아에게 고정되었고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남설아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드레스는 그녀의 몸매를 자연스럽게 살려주었고 살짝 올려 묶은 머리 사이로 드러난 목선과 쇄골은 고급스러움을 더했다.그녀는 마치 한 송이 활짝 핀 제비꽃 같았다. 요란하지 않지만, 눈에 띄는 아름다움이었다.배서준의 가슴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그녀의 당당함과 여유는 서유라가 따라올 수 없는 것이었다.“강 대표님과 설아 씨도 드레스 고르러
“그날 같이 가자.”“응.”강연찬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배서준 역시 서 회장 부부가 주최하는 파티의 초대장을 받았다.그는 원래 서유라와 함께 참석해 둘의 관계와 입지를 보여줄 생각이었다.“유라야, 서 회장 부부가 비즈니스 파티를 연대. 우리 둘 다 초대했어.”배서준은 초대장을 들고 서유라에게 말했다.“같이 갈래?”“당연히 가야지.”서유라는 웃으며 말했다.“이런 기회에 좋은 인맥도 많이 만들 수 있잖아.”“그래.”배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같이 가자.”“응.”서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서준아. 넌 정말 다정해.”서유라는 배서준의 품에 기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배서준은 남설아도 그 파티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속에 복잡한 감정이 피어올랐다.“뭐? 남설아도 간다고?”배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네, 대표님.”천기준이 답했다.“서 회장 부부가 남 대표님도 초대했답니다.”배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표정이 어두워졌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남설아가 강연찬과 함께 파티에 나타나는 모습을 상상하자 괜히 기분이 불편해졌다.“서준아, 무슨 일 있어?”서유라는 그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물었다.“아니야.”배서준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남설아가 올 줄은 몰랐어.”“오면 어때.”서유라가 말했다.“우리가 남설아를 무서워할 이유는 없잖아.”“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야.”배서준이 대답했다.“그냥...”그는 어떻게 얘기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그저 가슴이 무척 답답했다.“됐어, 너무 신경 쓰지 마.”서유라가 달래듯 말했다.“우리 둘이 함께 가서 보여주자. 우리가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그래, 그게 좋겠다.”배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유라야, 네가 있어서 정말 든든해.”서유라는 배서준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먼저 제안했다.“서준아, 이런 자리에는 내가 같이 가야지.”그녀는 부드럽게 말하며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네 연인이니까 함께 이겨내야 할 책임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