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라는 병원에서 며칠 더 머물렀고 그 며칠 동안 배서준은 거의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 곁을 지켰다.그 모습에 서유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역시 이 계략은 언제 써도 효과 만점이다.하지만 그녀도 단순히 아픈 척만 해서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배서준이 완전히 자기에게 빠지도록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이날도 배서준은 평소처럼 병상 옆에 앉아 사과를 정성스레 깎고 있었다.서유라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나 계속 민폐만 끼치는 거 같아. 회사 일은 괜찮아?”“괜찮아, 신경 쓰지 마.”배서준은 깎은 사과를 서유라에게 건네며 말했다.“회사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몸이나 잘 추슬러.”“하지만...”서유라는 말을 맺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왜? 무슨 일 있어?”배서준은 다정하게 물었다.“그냥 내가 이렇게 아프기만 해서 너한테 짐이 되는 건 아닐까 해서.”서유라는 눈을 내리깔며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 널 짐처럼 느낄 리가 있겠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회사 상황이 안 좋다는 말도 들리고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그런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회사의 일은 나 혼자 감당 못 해서 그런 거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날 위로하려는 거라면 그런 말 안 해도 돼.”서유라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알아. 결국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까지...”“유라야, 그건 진짜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회사 일은 내가 잘 정리할 테니까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응.”서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뻐했다.역시나 배서준은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에 가장 약했다.불쌍한 척, 약한 척, 조금만 애교를 부리면 뭐든 들어줄 것이다.“난 처리할 일
전화를 끊자마자 남설아는 기쁨에 겨워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이 좋은 소식을 곧바로 강연찬에게 알렸다.“오빠, 서강 그룹이 우리랑 협력하기로 했어!”남설아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해냈어!”“정말이야?”강연찬도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 잘 됐다. 난 처음부터 네가 잘 해낼 거라 믿었어.”“이건 다 오빠 덕분이야.”남설아는 진심으로 말했다.“오빠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순조롭진 않았을 거야.”“나한테 그럴 필요 없어.”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이건 우리 둘이 함께 이뤄낸 성과잖아.”“응!”남설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서강 그룹이라는 큰 파트너를 얻었으니 오늘은 제대로 축하해야겠어.”“좋아.”강연찬이 말했다.“어떻게 축하하고 싶어?”“오빠가 정해줘.”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난 오빠를 믿어.”“그럼 내가 준비할게.”강연찬이 말했다.“분명 마음에 들 거야.”“응, 기다릴게.”남설아가 환하게 웃었다.그날 저녁, 강연찬은 직접 요리를 해 한 상 가득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또한, ‘협력 성사 축하’라는 문구가 적힌 케이크도 샀다.“와 너무 푸짐하다.”남설아는 차려진 음식을 보고 감탄했다.“오빠, 진짜 대단해.”“맛있게만 먹어주면 돼.”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얼른 먹어봐.”“응.”남설아는 젓가락을 들고 한입 먹어보았다.“맛있어. 오빠, 요리 실력 엄청나게 늘었네.”“맛있다니 다행이다.”강연찬이 말했다.“앞으로 자주 해줄게.”“좋아.”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는 매일 맛있는 거 먹겠네.”두 사람은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분위기는 무척 따뜻하고 편안했다.“이번 일도 오빠가 곁에서 도와준 덕분이야.”남설아는 기쁜 얼굴로 잔을 들며 말했다.“오빠가 함께해줘서 나도 버틸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오빠.”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오빠가 있어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설아야, 넌 원래부터 훌륭한 사람이야. 난 단지 옆에서 조금 도왔을 뿐이야
식탁 위에서 남설아는 정신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식사 예절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서둘러 먹는 모습이었다.마치 무언가 급하게 가야 할 일이 있는 듯했다.강연찬은 그녀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설아야, 좀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그는 말하며 조심스럽게 물 한 잔을 따라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오빠, 괜찮아.”남설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며 계속해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서강 그룹 사모님이랑 쇼핑 약속이 있어서 빨리 먹고 가야 해.”“쇼핑?”강연찬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눈치였다.“너랑 사모님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어?”“회사 일 때문이지.”남설아는 밥을 삼킨 뒤 설명했다.“서강 그룹이 우리 쪽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여. 이런 기회는 꼭 붙잡아야 하잖아.”“그렇구나.”강연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마음에 덧붙였다.“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안전도 챙기고.”“응, 알겠어.”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 음식을 다 삼킨 후 그녀는 먼저 제안했다.“쇼핑 끝나면 오빠가 데리러 와줄래?”“응, 당연하지.”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강연찬은 기분이 좋아졌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빠는 천천히 먹어. 과일 좀 준비해올게.”남설아는 차혜미와 시내 중심에 있는 대형 쇼핑몰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그녀는 쇼핑몰 입구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췄다.차 문이 열리고 차혜미가 차에서 내렸다.“사모님, 오셨어요.”남설아는 서둘러 다가가며 밝고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설아 씨, 오래 기다리셨죠?”차혜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아니에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남설아가 대답했다.“그럼 들어가 볼까요?”“네.”두 사람은 웃으며 함께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고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었다.차혜미는 비록 연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전혀 거들먹거리는
“유라 씨였군요.”차혜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투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서준 씨도 같이 왔네요.”“사모님, 안녕하세요.”배서준도 서유라 뒤를 따라 인사를 건넸다.“유라 씨,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졌나요?”차혜미는 의례적인 말투로 물었다.“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서유라는 웃으며 대답했고 그 얼굴에는 자신감이 엿보였다.이번 기회에 차혜미 앞에서 이미지를 조금 회복해보려는 속셈이었다.그녀는 차혜미가 들고 있던 가방을 보며 곧장 칭찬을 시작했다.“사모님, 정말 안목이 좋으세요. 저 가방은 이번 시즌 신상인데 저도 얼마 전에 소개 영상 봤거든요.”서유라는 자연스럽게 자신도 그 가방에 관심이 있다는 듯 말하며 호감을 얻어보려 했다.하지만 차혜미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려 남설아를 향해 말했다.“설아 씨, 이 가방은 설아 씨가 추천해준 거잖아요. 어때요, 괜찮죠?”“네, 사모님께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남설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그렇죠, 나도 마음에 들어요.”차혜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이걸로 하죠.”그녀는 점원에게 말했다. “이 가방 포장해주세요.”“네, 사모님.”점원은 공손하게 대답했다.서유라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그녀를 무시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사람들이 많은 매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그녀는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욕감과 질투심이 동시에 끓어올랐다.서유라는 남설아를 향해 노골적으로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지금이라도 당장 남설아를 물어뜯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배서준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남설아를 편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자신들과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그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서유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차혜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여전히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유라 씨, 아직 몸도 다 회복 안 됐을 텐데 무리하지 마세요.
“남설아 씨, 모르셨어요? 아이의 병은 유전성 골암이에요. 남은 시간이 길면 두 달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설아 씨 어머님도 이 병으로 돌아가셨죠. 제 생각엔 설아 씨도 정밀 검사를 받으시는 게 좋겠네요...”남설아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싶었다.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고 몸이 멈출 수 없이 떨려왔다.“엄마, 왜 그래요?” 배나은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남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제가 사과할까요?”남설아는 병상 위 배나은의 깡마른 얼굴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자신의 전부인 아이의 남은 시간이 겨우 두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부모도 가족도 없었고 결혼 생활은 허울뿐이었다. 나은이는 그녀가 살아갈 유일한 이유였다.남설아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엄마는 슬프지 않아. 너무 행복해. 나은이가 곧 나을 테니까.”배나은의 눈이 빛났다. “정말이요? 너무 좋아요. 아빠는... 오늘 저 보러 올까요?”맑고 까만 눈에 살짝 기대가 스쳤지만 아이는 금세 고개를 떨궜다. 또 실망할까 봐 기대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 말은 남설아의 가슴을 더 무겁게 짓눌러 고통스럽게 했다.남설아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말했다. “올 거야. 엄마가 약속해. 오늘 아빠가 나은이 만나러 꼭 올 거야.”“정말이에요...?” 아이의 목소리는 불안했고 확신이 없이 되물었다. 남설아는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나은이를 낳아준 엄마인 자신이 나은이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네 살짜리 아이는 어른들 사이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평범한 가족의 온기와 아주 조금의 아버지 사랑을 바랐을 뿐이다.그런데 아이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었다.“나은아, 엄마가 약속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꼭 아빠 데려올게. 생일 축하해.” 남설아는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배나은은 환하게 웃었다.남설아는
배서준은 서유라의 손을 바라보며 점점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그럼 딱 한 달이야. 남설아,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마. 네가 다른 속셈이라도 품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남설아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좋아요. 당신이 나은이랑 함께 있어 주기만 한다면, 전 뭐든지 협조할게요. 아버지로서, 최소한 생일 선물은 챙겨야 하지 않나요?”배나은은 남설아의 품에 안겨 있었고 차는 천천히 배 씨 저택을 향해 달렸다.“엄마, 아빠 정말 오는 거예요...?”배나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눈에 비친 간절함은 숨길 수 없었다.남설아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당연하지.”배나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럼 엄마, 아빠한테 제가 아픈 거 말하지 마요. 아빠가 속상해할까 봐요.”그 말을 들은 순간 남설아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는 조용히 아이의 잔머리를 쓰다듬었다.“알았어. 엄마가 약속할게.”배나은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남설아는 이해했다는 듯 손가락을 걸었다.“엄마가 우리 나은이랑 손가락을 걸고 약속할게.”배나은은 해맑게 웃었지만, 남설아의 시야는 점차 흐릿해졌다.그녀의 아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와 혈연으로 이어진 소중한 존재가 곧 떠날 것이다.아이가 떠나기 전에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행복한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었다.배 씨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는 두 사람의 짐을 받았다.“대표님은 안에 계시는가요?”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안에 계십니다.”그 말을 듣고 남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 후, 배서준이 이 집에 머문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은이가 아빠를 본 건, 대부분 TV 화면 속에서였다.남설아는 배나은의 손을 잡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멀리 소파에 앉아 있는 배서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배나은의 눈빛이 반짝였다. 남설아는 살며시 아이의 손을 놓으며 어깨를 두드렸다.“얼른 아빠한테 가.”배나은은 조심스럽게 아빠에게 다가갔다.
나은이는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를 정말 좋아하니까요. 아빠가 나은이를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엄마를 조금 더 좋아해 줄 수는 없나요? 앞으로 엄마한테 좀 더 잘해주실 수 있나요...?”아이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고 가벼웠다. 크고 또렷한 눈망울이 배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배서준의 눈빛이 흔들렸다.‘역시.’그는 남설아의 의도가 순수하게 아이 때문일 리 없다고 예상했었다.“그 말 네 엄마가 시킨 거야?”배서준의 목소리는 차갑고 그 속엔 냉기가 섞여 있었다.“아니에요!” 배나은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배서준은 쉽게 믿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배나은은 자신이 아빠를 화나게 한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사실 아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인어공주처럼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말이다. 엄마는 병이 나았다고 했지만, 나은이는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분명 심각하게 아팠다.그런데도 아이는 만약 자신이 거품이 되어 바다로 돌아가야 한다면 그 후에도 엄마가 사랑받기를 바랐다.배나은은 일어나 푹신한 카펫을 밟으며 작은 책장으로 갔다. 그리고 오래된 가죽 노트 하나를 꺼내 배서준에게 건넸다.“아빠, 엄마가 아빠를 정말 좋아해요. 여기 안에 그게 다 적혀 있어요.”배서준은 멈칫하며 나은이의 간절한 눈빛을 바라봤다. 그는 마지못해 그 오래된 노트를 받았다.“꼭 읽어보세요.” 나은은 해맑게 웃었다.배서준은 남설아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굳이 글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트를 펼칠 마음이 없었다.그저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그날 밤, 남설아가 따뜻한 우유를 가지고 오는 동안, 나은은 곧장 잠이 들었다.남설아는 조심스럽게 배서준을 방 밖으로 이끌었다. 문을 닫고 멀리 떨어지자 그녀가 말했다.“내일 아침에 직접 나은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세요. 손님방은 안 쓰셔도 돼요. 제가 잘 테니까요.”배서준은 그 말을 듣고 냉소를 지었다.“왜? 또 밤에 내
이 피드는 그녀를 차단하는 걸 잊은 게 분명했다.그녀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그 어떤 감정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어제 보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오늘은 서유라의 손에 쥐어진 걸 보니 그 빠른 처리 속도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그럴 만도 했다. 어차피 서유라는 배서준이 마음속에 가장 아끼는 사람이니까.남설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막 휴대폰을 끄려던 찰나,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설아야, 나 열흘 후에 귀국해.]프로필 사진은 새까맸고 이니셜 ‘kyc'가 적혀있었다..오랫동안 연락처 목록에 잠들어 있던 사람, 계산해보면 둘이 연락하지 않은 지도 벌써 6년이 흘렀다.남설아는 가라앉은 숨을 내쉬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후 4시 20분, 배서준은 무거운 회의에서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장우진의 알림이 없었더라면 배나은을 데리러 가야 한다는 걸 잊을 뻔했다.곧장 차량에 올라타 유치원으로 향했다.배서준은 피곤한 이마를 문지르며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빨리 가.”운전기사는 그 눈빛을 보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배서준은 아이를 데려다 남설아에게 맡긴 후 서유라의 집으로 갈 계획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침묵을 깨고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선명하게 ‘서유라'라는 세 글자가 떠 있었다.배서준은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유라는 울먹이며 말했다.“서준아, 짱아가 너무 아파. 지금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는데, 의사 선생님이 이번엔 정말 힘들 수 있다고...”짱아는 서유라가 키우는 강아지로 한때 배서준이 생일 선물로 준 아이였다.둘이 헤어진 뒤로도 짱아는 줄곧 서유라의 곁을 지키며 그녀가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데 큰 위안이 되어줬다.서유라에게 짱아는 둘 사이의 아이 같은 존재였다.배서준의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목소리는 평온했다.“걱정하지 마. 이따가 금방 갈게.”“아니야... 지금 빨리 와줘...”서유라의 목소리는 이미 완전히 무너져 있
“유라 씨였군요.”차혜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투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서준 씨도 같이 왔네요.”“사모님, 안녕하세요.”배서준도 서유라 뒤를 따라 인사를 건넸다.“유라 씨,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졌나요?”차혜미는 의례적인 말투로 물었다.“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서유라는 웃으며 대답했고 그 얼굴에는 자신감이 엿보였다.이번 기회에 차혜미 앞에서 이미지를 조금 회복해보려는 속셈이었다.그녀는 차혜미가 들고 있던 가방을 보며 곧장 칭찬을 시작했다.“사모님, 정말 안목이 좋으세요. 저 가방은 이번 시즌 신상인데 저도 얼마 전에 소개 영상 봤거든요.”서유라는 자연스럽게 자신도 그 가방에 관심이 있다는 듯 말하며 호감을 얻어보려 했다.하지만 차혜미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려 남설아를 향해 말했다.“설아 씨, 이 가방은 설아 씨가 추천해준 거잖아요. 어때요, 괜찮죠?”“네, 사모님께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남설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그렇죠, 나도 마음에 들어요.”차혜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이걸로 하죠.”그녀는 점원에게 말했다. “이 가방 포장해주세요.”“네, 사모님.”점원은 공손하게 대답했다.서유라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그녀를 무시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사람들이 많은 매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그녀는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욕감과 질투심이 동시에 끓어올랐다.서유라는 남설아를 향해 노골적으로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지금이라도 당장 남설아를 물어뜯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배서준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남설아를 편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자신들과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그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서유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차혜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여전히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유라 씨, 아직 몸도 다 회복 안 됐을 텐데 무리하지 마세요.
식탁 위에서 남설아는 정신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식사 예절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서둘러 먹는 모습이었다.마치 무언가 급하게 가야 할 일이 있는 듯했다.강연찬은 그녀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설아야, 좀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그는 말하며 조심스럽게 물 한 잔을 따라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오빠, 괜찮아.”남설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며 계속해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서강 그룹 사모님이랑 쇼핑 약속이 있어서 빨리 먹고 가야 해.”“쇼핑?”강연찬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눈치였다.“너랑 사모님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어?”“회사 일 때문이지.”남설아는 밥을 삼킨 뒤 설명했다.“서강 그룹이 우리 쪽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여. 이런 기회는 꼭 붙잡아야 하잖아.”“그렇구나.”강연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마음에 덧붙였다.“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안전도 챙기고.”“응, 알겠어.”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 음식을 다 삼킨 후 그녀는 먼저 제안했다.“쇼핑 끝나면 오빠가 데리러 와줄래?”“응, 당연하지.”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강연찬은 기분이 좋아졌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빠는 천천히 먹어. 과일 좀 준비해올게.”남설아는 차혜미와 시내 중심에 있는 대형 쇼핑몰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그녀는 쇼핑몰 입구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췄다.차 문이 열리고 차혜미가 차에서 내렸다.“사모님, 오셨어요.”남설아는 서둘러 다가가며 밝고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설아 씨, 오래 기다리셨죠?”차혜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아니에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남설아가 대답했다.“그럼 들어가 볼까요?”“네.”두 사람은 웃으며 함께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고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었다.차혜미는 비록 연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전혀 거들먹거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남설아는 기쁨에 겨워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이 좋은 소식을 곧바로 강연찬에게 알렸다.“오빠, 서강 그룹이 우리랑 협력하기로 했어!”남설아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해냈어!”“정말이야?”강연찬도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 잘 됐다. 난 처음부터 네가 잘 해낼 거라 믿었어.”“이건 다 오빠 덕분이야.”남설아는 진심으로 말했다.“오빠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순조롭진 않았을 거야.”“나한테 그럴 필요 없어.”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이건 우리 둘이 함께 이뤄낸 성과잖아.”“응!”남설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서강 그룹이라는 큰 파트너를 얻었으니 오늘은 제대로 축하해야겠어.”“좋아.”강연찬이 말했다.“어떻게 축하하고 싶어?”“오빠가 정해줘.”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난 오빠를 믿어.”“그럼 내가 준비할게.”강연찬이 말했다.“분명 마음에 들 거야.”“응, 기다릴게.”남설아가 환하게 웃었다.그날 저녁, 강연찬은 직접 요리를 해 한 상 가득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또한, ‘협력 성사 축하’라는 문구가 적힌 케이크도 샀다.“와 너무 푸짐하다.”남설아는 차려진 음식을 보고 감탄했다.“오빠, 진짜 대단해.”“맛있게만 먹어주면 돼.”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얼른 먹어봐.”“응.”남설아는 젓가락을 들고 한입 먹어보았다.“맛있어. 오빠, 요리 실력 엄청나게 늘었네.”“맛있다니 다행이다.”강연찬이 말했다.“앞으로 자주 해줄게.”“좋아.”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는 매일 맛있는 거 먹겠네.”두 사람은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분위기는 무척 따뜻하고 편안했다.“이번 일도 오빠가 곁에서 도와준 덕분이야.”남설아는 기쁜 얼굴로 잔을 들며 말했다.“오빠가 함께해줘서 나도 버틸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오빠.”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오빠가 있어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설아야, 넌 원래부터 훌륭한 사람이야. 난 단지 옆에서 조금 도왔을 뿐이야
서유라는 병원에서 며칠 더 머물렀고 그 며칠 동안 배서준은 거의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 곁을 지켰다.그 모습에 서유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역시 이 계략은 언제 써도 효과 만점이다.하지만 그녀도 단순히 아픈 척만 해서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배서준이 완전히 자기에게 빠지도록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이날도 배서준은 평소처럼 병상 옆에 앉아 사과를 정성스레 깎고 있었다.서유라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나 계속 민폐만 끼치는 거 같아. 회사 일은 괜찮아?”“괜찮아, 신경 쓰지 마.”배서준은 깎은 사과를 서유라에게 건네며 말했다.“회사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몸이나 잘 추슬러.”“하지만...”서유라는 말을 맺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왜? 무슨 일 있어?”배서준은 다정하게 물었다.“그냥 내가 이렇게 아프기만 해서 너한테 짐이 되는 건 아닐까 해서.”서유라는 눈을 내리깔며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 널 짐처럼 느낄 리가 있겠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회사 상황이 안 좋다는 말도 들리고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그런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회사의 일은 나 혼자 감당 못 해서 그런 거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날 위로하려는 거라면 그런 말 안 해도 돼.”서유라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알아. 결국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까지...”“유라야, 그건 진짜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회사 일은 내가 잘 정리할 테니까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응.”서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뻐했다.역시나 배서준은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에 가장 약했다.불쌍한 척, 약한 척, 조금만 애교를 부리면 뭐든 들어줄 것이다.“난 처리할 일
“설아는 잘못한 게 없어요. 배 대표님이 뭔데 이렇게 몰아붙이는 거죠?”강연찬이 단호하게 말했다.“이건 나랑 남설아 사이의 일이에요. 강 대표님이 끼어들 일은 아닙니다.”배서준은 냉랭하게 응수했다.“지금 설아는 내 파트너이자 내 친구입니다.”강연찬의 말투는 확고했다.“배 대표님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설아를 몰아붙이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몰아붙인다고요?”배서준은 비웃으며 말했다.“내가 언제 남설아를 몰아붙였다는 겁니까?”“아닌가요?”강연찬이 되물었다.“됐어, 오빠. 그만해.”남설아가 나섰다.“나는 괜찮아. 이런 사람들과는 굳이 말 섞을 필요 없어.”남설아의 말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그래도 나 지켜줘서 고마워, 오빠.”“우리가 그런 말 할 사이야?”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너만 괜찮으면 됐어.”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송우민은 조용히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그는 배서준이 아직 남설아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눈치챘고 그 점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배서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그런 그가 남설아에게 밀린다는 사실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만약 남설아가 아직도 배서준을 좋아한다고 믿게 만든다면 그는 분명 어떻게든 다시 붙잡으려고 할 것이다.그러면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연회가 끝난 후, 배서준과 서유라는 차로 돌아왔다.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서준아, 나 너무 쓸모없는 사람이지?”서유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계속 너한테 민폐만 끼치고, 나 너한테는 짐 같은 존재지?”“바보야, 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이 다정하게 달랬다.“넌 짐이 아니라 내 소중한 사람이야.”“하지만 난 자꾸 널 힘들게 하고 화나게 하잖아.”서유라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나 진짜 무능한 사람 같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울지 마, 유라야. 울지 마.”배서준은 그녀를 안으며 애틋하게 말
배서준은 고개를 홱 돌려 남설아를 노려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거기서 뭐 해? 빨리 의사부터 부르러 가야 할 거 아냐!”남설아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서유라의 연기는 참으로 어설펐다.이렇게 진부한 수법으로 배서준을 속이려 들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굳이 그녀를 들춰내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배서준은 이미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믿고 있었고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밖에 안 들릴 것이다.“알겠어요, 의사 부를게요.”남설아는 담담히 대답하고 돌아섰다.그녀는 한쪽 구석으로 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끊은 뒤, 입가에는 비웃는 듯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서유라, 이번에는 네가 망가질 차례야. 기다려 봐.’연회장 안은 서유라의 모습으로 인해 술렁이기 시작했다.여러 사람이 몰려와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며 물었다.“유라 씨, 괜찮아요?”“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배 대표님, 유라 씨 빨리 병원으로 모셔야겠어요.”사람들이 각자 떠들어대며 현장은 점점 어수선해졌다.배서준은 서유라를 품에 안고 초조함에 휩싸였다.그는 서유라가 왜 갑자기 아픈 건지 몰랐지만 속으로는 분명 남설아가 무슨 말을 해서 그녀를 자극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그렇게 생각하자 남설아에 대한 미움은 더욱 깊어졌다.“비켜주세요. 다들 좀 비켜줘요.”배서준은 크게 외쳤고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실려 있었다.“유라가 쉬어야 하니까 제발 좀 그만들 하세요.”사람들은 그의 기세에 눌려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길을 비켜주었다.배서준은 서유라를 안은 채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그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내내 그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 있었고 운전대를 쥔 손에는 핏줄이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조수석에 기댄 서유라는 슬며시 배서준의 표정을 살폈다.그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는 의기양양했다.예상대로였다. 자신이 아픈 척
서유라는 싸움에서 진 사람처럼 기가 죽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배서준의 이미지도 사람들 눈에 한순간에 추락했고 그는 무척이나 난처하고 부끄러웠다.그는 점점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만약 그때 남설아와 이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초라해지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연회가 끝난 뒤 배서준과 서유라는 함께 차에 올랐다.“서준아, 미안해.”서유라는 고개를 숙인 채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오늘 내가 괜히 설아 씨한테 차를 우리라고 제안했어. 설아 씨가 그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너 잘못 아니야.”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남설아가 괜히 잘난 척을 한 거지.”그는 서유라가 마음 아파하는 게 안쓰러워 모든 잘못을 남설아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그래도 난 아직도 미안해.”서유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내가 너를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게 했잖아.”“바보야, 네 탓이라고 한 적 없어.”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응.”서유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배서준의 품에 안겼다.하지만 배서준의 마음은 딴 데로 향하고 있었다.그는 과거의 남설아를 떠올리고 있었다.한때 그녀는 단지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매일 자신과 아이만 바라보며 살아가던 그녀가 도대체 언제 다도를 배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다도 실력이 이 정도라니, 서 회장 부부가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지금 저 여자가 내가 알던 남설아가 맞는 건가?’그는 마음속 깊이 혼란스러웠다.남설아는 분명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이 쉽게 이해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서유라는 배서준의 시선이 자꾸만 허공으로 향하는 걸 느끼고는 그가 또다시 남설아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그녀의 마음속에 위험 신호가 울렸다. 그녀는 반드시 이 둘의 접촉을 막아야만 했다.‘남설아, 가만 안 둬. 네가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서유라는 속으로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그녀의
“서 회장님, 사모님, 과찬이세요.”남설아가 겸손하게 말했다.“그냥 가볍게 내린 것뿐이에요.”“남 대표 너무 겸손하시네.”서기찬이 말했다.“이건 아무렇게나 내려서 나올 맛이 아니야. 확실히 기본기와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그러게요, 설아 씨.”차혜미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차 내리는 솜씨가 정말 대단해요. 제가 제자로 들어가고 싶어질 지경이에요.”“사모님, 또 농담하시네요.”남설아가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이런 사소한 재주가 어찌 사모님의 눈에 찰 수 있겠어요?”“설아 씨가 너무 겸손하신 거예요.”차혜미는 찻잔을 바라보며 더욱 남설아에게 호감을 드러냈다.“차를 이렇게 잘 내리시는 걸 보니 정말 감탄밖에 안 나와요.”“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남설아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유라는 마음속에 질투심이 더욱 불타올랐다.남설아가 이렇게까지 다도에 능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자신이 의도한 모욕은커녕 오히려 남설아는 그 자리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칭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서유라는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설아 씨의 다도 실력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듣기로 다도도 여러 유파가 있다고 하던데 설아 씨는 어느 쪽이야?”그녀는 남설아의 다도를 비하하려는 의도로 체계 없는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암시하고자 했다.“특정 유파를 따로 배우진 않았어.”남설아는 침착하게 말했다.“그저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내 느낌에 따라 우려내는 것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시 비웃듯 말했다.“그럼 설아 씨만의 파가 생긴 거네? 대단해.”그녀는 남설아만의 파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남설아의 다도가 비전문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유라 씨, 또 농담하네.”남설아는 작게 웃으며 조롱이 섞인 말투로 답했다.“나는 그냥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일 뿐이야. 감히 한 유파라니.”“남 대표님 너무 겸손하세요.”차혜미가 곧장 나섰다. 그녀는 서유라의 말에 담긴 악의를 알아차리고
“고마워.”남설아가 말했다.“설아 씨, 예전에 서준이 곁에 있을 때도 이렇게 늘 꾸미고 다녔어?”서유라가 불쑥 물었다. 말투에는 살짝 떠보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남설아가 한때 배서준의 곁에 있었던 시절을 언급하며 남설아의 과거를 상기하려 했다.남설아는 서유라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유라 씨, 농담이 지나치네. 그때의 나는 그저 서준 씨의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했을 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소 우쭐한 말투로 말했다.“나는 설아 씨가 차를 따라주고 시중드는 데 능한 줄 알았어. 내조를 하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잖아?”그녀는 차를 따라주고 시중든다는 것을 일부러 강조해서 말하며 남설아를 모욕하려 했다.“유라 씨 말이 맞아. 내조를 하는 데는 정말 정성이 필요해.”남설아는 차분하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사업을 하는 데 더 능한 편이야.”“그래?”서유라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오늘 설아 씨가 잘해야겠네. 여기 모인 분들 다 업계 내로라하는 분들이니까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겠어.”“걱정해줘서 고마워, 유라 씨.”남설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빈정거림이 담긴 말투로 답했다.“하지만 나는 유라 씨를 실망하게 할 일은 없을 거야.”“그래야지.”서유라는 속으로 비웃으며 남설아가 뭘 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는 듯 말했다.“설아 씨, 차 따르는 데 능하다니까 오늘 여기서 차 한 번 내려보지?”서유라가 제안했다.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묻어 있었다.“여기 좋은 차도 있고 멋진 다기 세트도 있어. 설아 씨의 손재주로는 딱 어울릴 것 같네.”그녀는 손재주라는 말을 다시금 강조하여 말하며 남설아를 하찮은 시중 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려 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그런 의도를 바로 눈치챘음에도 전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도전을 받아들였다.“좋아, 유라 씨가 이렇게 운치 있는 제안을 하니 한 번 해볼게.”남설아는 여유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다만 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