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어 천기준이 사무실 문을 두드리더니 안으로 들어섰다. 남설아의 책상 앞까지 걸어간 그는 차분히 남설아의 지시를 기다렸다.“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대표님?”남설아는 천기준에게 더 가까이 오라는 눈짓을 하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남설아랑 배서준 근황 좀 알아봐 줘요. 특히 서유라. 요즘 뭘 하고 다니는지, 누굴 만나는지도 전부 알아봐 주세요.”잠시 뜸을 들이던 남설아가 다시 입을 열어 한 마디 덧붙였다.“그리고 서도현 실종 사건에 대해서도 계속 추적해주세요. 새로 알아낸 거 있으면 바로 보고해주시고요.”천기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바뀌었다. 남설아의 뜻을 단번에 파악해낸 그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진행하죠.”그대로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간 천기준은 곧바로 남설아의 지시를 실행에 옮겼다.병실 안, 서유라는 조심스럽게 배서준의 이불 끝을 정리해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서준아, 오늘은 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하지만 공허한 배서준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영혼 없이 대답했다.“그럭저럭.”그의 차가운 목소리에서는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전과 바뀌어버린 배서준의 태도에 서유라는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애써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더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요즘엔 푹 쉬어둬야 한다고 그러셨어. 내가 사과 깎아줄게.”말을 마친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사과와 과도를 집어 들더니 정성스럽게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배서준은 복잡한 눈빛으로 분주한 서유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서유라는 사과를 깎으면서도 조심스레 배서준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예전처럼 다정하고 따뜻했던 분위기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서준아,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건 아니지? 나도 내가 말 함부로 한 거 알아. 너랑 남설아 사이를 의심해서는 안 됐었는데...”그녀는 더욱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을
“좋아요.” 남설아는 칭찬을 건넸다.“천 비서님, 비서님의 가치를 이미 확인했어요. 앞으로 배건 그룹의 일은 계속 비서님이 맡아요. 저는 비서님을 믿고 있으니까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천기준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감격하여 곧장 다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남 대표님.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남설아는 천기준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 눈빛 속에는 무언가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천기준의 충성심과 능력 덕분에 그녀는 앞으로의 계획에 한층 더 확신하게 되었다.그때, 송우민이 조급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급하게 남설아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설아!”그는 평소의 예의를 차릴 틈도 없이 눈에 띄게 초조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남설아는 고개를 들어 약간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고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민아, 무슨 일이야?”그녀의 어조는 차분했고 얼굴에는 옅은 미소까지 떠올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했다.송우민은 그녀가 그렇게 태연하게 행동하는 모습에 오히려 더 마음이 아팠다.그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비서 말로는... 너랑 강연찬이...”말을 고르던 그는 결국 직접적인 표현을 택했다.“두 사람 사이에 좀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남설아의 미소는 조금 옅어졌지만, 여전히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런 셈이지.”그녀는 가볍게 말하며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근데 괜찮아. 오히려 집중해서 일할 수 있게 됐으니까.”그녀는 산처럼 쌓인 서류를 가리켰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지금은 배건 그룹도 내 손에 들어왔으니까 처리할 일이 많아졌지.”송우민은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할수록 더 마음이 아팠다.남설아가 저렇게 태연할수록 그녀가 마음속에 얼마나 큰 상처를 숨기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더 이상 감정에 관해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 곁에 조용히 다가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리 일이 바빠도 몸은 좀 챙겨야지.”그는 남설아의 다
회의실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쥐 죽은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임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도 다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남설아의 눈빛은 차가운 얼음처럼 회의실의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 훑어내렸다.모두 고개를 숙인 채 숨죽였고 반대하는 말 한마디조차 더 이상 꺼내지 못했다.남설아는 그런 모습을 보며 만족스레 시선을 거두고는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이의가 없다면 내가 말한 대로 진행하도록 하죠.”“회의는 이것으로 마칩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자리에 남겨진 임원들은 분노조차 감히 드러내지 못한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대표 사무실, 천기준은 두꺼운 서류뭉치를 들고 와서 남설아에게 보고하고 있었다.배건 그룹의 운영 전반에 대한 세세한 사항을 빠짐없이 정리해 보고하고 있었고 재무제표부터 인사이동, 마케팅 전략까지 모두 꼼꼼하게 짚었다.남설아는 진지하게 경청하며 중간중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천기준은 그에 막힘없이 명확한 답변을 내놓았다.보고가 한참을 이어졌고 천기준은 입이 바싹 마를 정도로 길게 설명한 끝에 마무리했다.남설아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다소 의아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천기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천 비서님, 오늘 보고한 내용은 전부 배건 그룹 관련이네요. 이설 그룹 쪽 보고는 왜 빠졌죠?”이에 천기준은 솔직하게 웃으며 살짝 아부하는 말투로 대답했다.“남 대표님은 이설 그룹의 대표이시잖아요. 이설 그룹 사정은 저보다 대표님께서 더 잘 아실 테니까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그리고 남 대표님께서 예전에 저에게 200억을 투자하셨고 그 이후에도 저를 곁에 두신 이유는 단순히 이설 그룹을 맡기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남설아는 흥미롭게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계속 말하라는 손짓을 했다.천기준은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배건 그룹은 오래된 조직이라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복잡합니다. 외부인이 짧은 시간 안에 그 구조를 파악하긴 어렵죠.”그는 자신감 있는 어
서유라는 더 이상 눈물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감싼 채 억울하게 울음을 터뜨렸다.배서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짜증스러운 기색을 스쳤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형식적인 위로의 말을 건넸다.“그만 울어. 엄마 성격 알잖아, 괜히 신경 쓰지 마.”서유라는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배서준을 올려다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배서준, 아주머니는 정말 나를 싫어하는 거야? 평생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실 생각인 거야?”배서준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고 사실 서유라에 대한 윤화진의 거부감은 뿌리 깊은 것이었기에 그의 침묵은 그 자체로 대답이었다.“너무 생각하지 마.” 배서준은 건성으로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서유라는 그의 대답에 눈빛이 점점 흐려졌다. 그녀는 배서준이 진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의 말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위로일 뿐이었다.배서준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복잡하고 깊은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작지만 분명한 감탄과 회한이 담긴 목소리였다.“지금의 설아는 정말 많이 달라졌어...”밤이 깊어가고 병원 복도는 조용했다.서유라는 혼자 차가운 대기용 의자에 앉아 홀로 남은 그림자처럼 외로워 보였다.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도현아...”그 목소리는 깊은 그리움과 무력함으로 떨리고 있었다.“누나는... 누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도현아, 넌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서유라의 속삭임은 점점 작아졌고 결국 넓은 복도 속으로 사라졌다.남겨진 건 끝없는 고요함과 외로움뿐이었다.배건 그룹, 고위층 회의실.분위기는 무겁고 침묵이 감돌았다.모든 임원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새롭게 선임된 이사장 남설아의 발언을 기다리고 있었다.남설아는 검은색 정장 차림에 정제된 메이크업, 날카로운 눈빛과 강한 카리스마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회의장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차갑고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강연찬은 침통한 표정으로 천기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뒤 공터를 떠났다.천기준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가 자신도 차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한편, 병원 병실 안.배서준의 안색은 며칠 전보다 눈에 띄게 좋아졌고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서유라는 침대 곁에 앉아 정성스럽게 그를 간호하며 과일을 깎고 작게 잘라 이쑤시개에 꽂아 배서준의 입가에 가져갔다.배서준은 무심하게 입을 벌려 받아먹었지만, 시선은 허공을 떠돌며 서유라의 정성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소파에 앉아 있던 윤화진은 그런 모습을 차갑게 지켜보다가 비꼬는 듯한 말투로 서유라에게 말했다.“유라야, 너 참 수고가 많다? 온종일 여기 붙어 있으니, 누가 보면 너 서준이 엄마인 줄 알겠어.”서유라는 그 말에 얼굴이 잠시 굳었지만, 곧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억지로 평정을 유지했다.“아주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서준 씨가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아서요. 제가 돌보는 게 당연하잖아요.”윤화진은 코웃음을 치며 더 날카롭게 말했다.“당연해? 너 진짜 자기가 부잣집 며느리인 줄 아는구나? 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아무리 들러붙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어떤 사람은 애초에 우리 집 문턱조차 못 넘는다고.”서유라의 미소는 서서히 굳어졌고 눈빛에는 상처받은 흔적이 어렸다.하지만 곧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과일을 계속 깎았고 낮고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 제가 미움받는 거 알아요. 그래도 제 마음은 진심이에요. 서준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걸로 충분해요.”“충분해?” 윤화진은 마치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들은 듯 콧방귀를 뀌며 소리를 높였다.“충분하면 왜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달라붙어? 왜 온갖 비열한 수를 써가며 우리 서준이랑 결혼하려고 해?”서유라의 눈가가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맺혔다.그녀는 억울한 듯 배서준을 바라보며 울먹였다.“서준아, 봤지? 아주머니가 또 나를 오해하고 있어. 나는 정말 그런 거 아니야...”계속 창밖을
천기준은 지친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남설아의 아파트 건물을 나섰다.며칠째 계속된 남설아의 상태는 정말 심각했다. 일에만 몰두한 채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이러다가는 몸이 먼저 무너질 게 뻔했다.그때, 어둠 속에서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천 비서님.”천기준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가로등 불빛 아래 그는 강연찬을 알아보았다.강연찬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야윈 모습에 피곤이 가득한 얼굴, 충혈된 눈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강 대표님.”천기준은 다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남설아와 강연찬 사이의 일이 터진 뒤, 그 사이에서 그는 처지가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강연찬은 급히 걸음을 옮기며 다급하게 물었다.“천 비서님, 설아는... 설아는 괜찮은 거예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그의 목소리는 쉬었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그 안에는 뼈아픈 후회와 걱정이 가득했다.천기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강 대표님, 남 대표님 상태가 정말 좋지 않습니다. 방 안에 틀어박혀서 일만 하고 있어요. 밥도 안 드시고, 잠도 안 주무시고요.”그 말을 들은 강연찬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설아가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고 있다고요? 도대체 얼마나 된 거예요?”“어제 점심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그 상태입니다. 누구 말도 안 듣고요. 솔직히 이러다 건강이 무너질까 걱정입니다.”천기준은 있는 그대로를 전했다.강연찬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그녀가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몰아붙일 정도로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는 현실이 가슴 깊숙이 아프게 파고들었다.그는 두 주먹을 꽉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설아가 나를 그렇게까지 미워하는 거예요? 날 보는 것조차 싫을 정도로요?”잠시 침묵이 흘렀고 천기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강 대표님, 남 대표님 이번엔 정말 크게 상처받으셨어요. 자존심이 아주 강한 분인데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면... 그 누구라도 견디기 힘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