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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정담
밤이 깃든 양심전, 용연향 향이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어린 내시는 비빈들의 명패를 갖고 와서 공손히 소문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명패를 뒤집으시지요!”

소문현은 명패가 담긴 상자로 손을 뻗으며 최근에 총애를 주었던 몇몇 귀인들의 명패 사이에서 오가다가 결국 영귀인의 명패로 손을 가져갔다.

뜨거웠던 그날 밤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이 후끈거렸다. 10년을 그리워했던 여인의 얼굴을 한 사람이 있는데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의 손이 영귀인의 명패에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이 내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폐하, 영귀인은 얼굴에 두드러기가 났는데 아직까지 원인을 찾지 못했으니 옥체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최근에는….”

소문현의 인상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두드러기가 가득 돋은 그 얼굴을 떠올리니 짜증이 치밀었다.

그는 무심한듯 손귀비의 명패를 뒤집었다.

최근 서북에 외적들이 침범하고 있는 상황이니 손귀비의 아버지 정국 대장군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다.

“기향궁으로 가자!”

“예!”

이 내관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내시 두 명이 재빨리 뒤를 따르는 사이, 이태복은 명패 상자를 힐끗 보더니 영귀인의 명패를 잡아서 던져버렸다.

“영귀인은 휴양 중이니 명패를 치우도록 해!”

상자를 들고 있던 내시 상희는 황급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최근 이 내관은 점점 선을 넘고 있었다. 황제가 명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비빈들의 명패를 치워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니 그 동안 후궁들에게서 받아먹은 금은보화도 상당했다.

한영의 총애는 하룻밤 사이에 피어난 안개꽃과도 같았다. 그리고 총애를 잃은 것도 한순간이었다.

다행히 온귀비는 최근 며칠 동안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무부에서 보내오는 땔감은 귀한 은상탄에서 일반 목탄으로 바뀌었다.

란심은 목탄을 들고 들어오며 울상을 지었다.

“마마, 상희 내관이 말을 전해왔는데 역시나 마마가 예상했던 대로 이 내관이 마마의 명패를 치워버렸다네요.”

한영은 붓글씨 연습에 집중하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수컷 구실도 못하는 개가 할 수 있는 짓이 그것밖에 더 있겠어? 차라리 잘됐어. 오히려 이태복이 도움이 될 때도 있네.”

그녀는 방금 쓴 작품을 들고 감상하며 말을 이었다.

“사내는 말이야, 너무 배불리 주면 안 돼. 원하는데 갖지 못할 때… 비로소 애간장이 타는 거지.”

란심은 목탄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불평을 토로했다.

“마마, 내무부 놈들은 권세만 따지는 놈들이에요. 마마께선 몸이 아프셔서 휴양 중인데 이런 연기도 많이 나는 목탄을 주다니요. 이게 고의가 아니면 뭐겠어요?”

한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글공부에 집중했다. 그녀는 입궁 당시 비천한 신분보다 더 힘들었던 것이 읽은 책이 별로 없어서 뭘 배우기가 힘들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배로 노력하고 연습해야 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궁궐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둬. 불평은 아무 소용없어. 만만하면 짓밟는 것이 궁궐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야.”

한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손에 묻은 먹물을 닦으며 물었다.

“내전에서는 어쩌고 있어?”

란심은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며칠 사이에 온귀비가 온갖 물건들을 부수고 난리도 아니었대요. 사사건건 홍이와 선희를 붙잡고 화풀이를 했고요. 홍이는 귀비의 손톱에 긁혀서 얼굴에 피까지 났어요.”

한영은 그 말을 듣고 냉소를 지었다.

그녀가 10년을 모신 사람인데 그 성격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인들에게 늘 욕과 폭력을 달고 살던 사람이었다. 그나마 심복으로 둔 한영도 이유 없이 귀뺨을 맞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 한영은 온귀비가 성격이 좀 고약해서 그렇지 속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내가 눈이 멀었지.’

“란심아, 가서 산나물 좀 캐자꾸나.”

란심이 웃으며 말했다.

“소인이 온실에서 일할 때 어화원 근처에 산나물이 많이 자란 것을 봤어요. 지금쯤이면 아마 새싹이 나고 있겠네요.”

한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란심과 함께 경화궁 편전을 나섰다. 온귀비가 거주하는 내전을 지나가는데 굳게 닫힌 문 안쪽에서 나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뒤돌아서 정문을 나갔다. 그런데 연못가의 관목림 속에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영이 란심에게 눈짓을 주자 란심은 다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그녀는 한 어린 나인을 데리고 나왔다.

“소인 홍이가 귀인 마마께 문안 드리옵니다! 마마의 기분을 잡치게 했다면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어린 나인은 한영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온몸을 떨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거라.”

한영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나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도 아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현재 온귀비의 신변에서 시중을 드는 홍이였다.

홍이는 두 손을 찬 바닥에 딱 붙인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살갗이 벗겨진 긴 흉터자국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쓰럽게 했다. 딱 봐도 온귀비가 얼굴을 망칠 작정으로 할퀸 것 같았다.

한때 한영은 신변의 나인들에게 너무 각박하게 대하지 말라고 귀띰해 주었다. 그때는 말을 듣나 싶었는데 한영이 옆에 없는 지금, 온희정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심하게 다쳤어?”

한영은 고개를 숙이고 안쓰러운 얼굴로 홍이의 얼굴을 보듬으며 말했다.

“상처가 다 아문다고 해도 흉이 남겠네.”

한영은 계속해서 물었다.

“어의한테 치료는 받았어? 네 주인은 귀비니까 어의를 부르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홍이는 입술을 깨물고 울먹이며 답했다.

“마마... 마마께서는 죽을 정도 아니라면서 부를 필요가 없다고 해서요.”

한영은 천천히 손을 내리고 한숨을 내쉰 뒤에 란심을 시켜 은화 주머니를 가져오게 해서 홍이에게 건넸다.

“너도 알다시피 그분은 날 극도로 미워하시니 그분의 사람인 너를 대놓고 도와줄 수는 없어. 이거 받고 가서 어의한테 진료라도 받아봐. 은화를 내놓으면 어떻게든 치료는 해줄 거야. 남은 돈은 어머니 병치료에 보태고”

“온귀비는 원래 가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야. 신변의 나인들은 박대하면서 양심전의 나인들과 내관들에게만 잘해주지.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그래도 네가 모시는 분이니 앞으로는 그분의 말을 잘 따르렴. 그래야 덜 맞아.”

말을 마친 한영은 란심과 함께 뒤돌아섰다.

하지만 란심이 소근거린 말은 그대로 홍이의 귀에 전해졌다.

“마마, 설마 저 아이를 동정하시는 건가요? 이번 한번은 구해줄 수 있어도 나중에 몇번이나 더 구해주겠어요? 온귀비 같은 주인을 만났으니 언젠가는 피 말라 죽을 겁니다.”

홍이는 손에 든 은화 주머니를 꽉 쥐고 증오에 찬 눈으로 내전이 있는 쪽을 노려보았다.

월초는 후궁들이 황후궁에 문안하러 오는 날이었다.

대제의 황후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한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사촌언니 덕분에 황제의 후궁이 되고 반년 후에 황후가 되었다.

황후는 몸이 허약한 탓에 줄곧 회임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아들 하나 보았는데 태어나자마자 요절했다고 한다.

그녀 역시 난산을 겪은 후에 몸이 완전히 망가져 다시는 회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일로 황후는 줄곧 우울감에 빠져 있다가 나중에는 불경 공부에만 몰두했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는 겉으로 보기에만 화목한 정도였다. 소문현은 월중과 중요한 명절 때만 황후궁으로 가서 간신히 황후의 체면을 살려주는 정도였다.

황후도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월초와 월말에만 후궁들의 문안을 받았고 그 외의 시간은 마치 도를 닦는 선인처럼 속세의 일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한영은 아침 일찍 일어나 문안 준비를 마쳤다. 란심은 연청색 바탕에 간간히 매화꽃만 수놓아진 치마를 가져오며 조심스레 물었다.

“마마, 이건 너무 소박해 보이지 않을까요?”

한영은 홍옥이 박힌 비녀를 간단히 틀어올린 머리에 꽂았다. 소박한 의복에 유난히 붉은색 홍옥이 돋보여 오히려 색다르게 눈부신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후 마마는 소박하신 분이야. 몸도 안 좋으셔서 늘 우울해하셨지. 내가 승은을 좀 입었다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가면 오히려 책잡힐 거고 우리한테 불리해져.”

잠시 후, 한영은 황후가 거주하는 봉의궁에 도착했다. 그녀는 일부러 일찍 와서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황후가 내전으로 나왔고 한영보다 늦게 도착한 후궁들은 약속한 것처럼 한영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한영은 독을 바른 것 같은 눈빛이 자신의 피부를 파고드는 것 같아 숨이 턱 막혔다.

황후 신변의 궁녀 추월이 밖으로 나와 그들을 안으로 맞았다.

한영은 맨 마지막에 사람들을 따라 들어갔다. 하나 같이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자리하고 있었다.

유독 상석에 앉은 황후만 소박한 복장에 조각상처럼 단정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항상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스무 살 초반의 여인이라기보다는 온갖 산전수전 다 겪은 노파처럼 보였다.

황후의 청춘은 3년 전 그 아이 때문에 망가진 것 같았다.

한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후궁의 아이들이 요절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황제와 황후의 사이는 눈에 띄게 멀어졌다. 한영은 배후에 뭔가 있다고 짐작했다.

물론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한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나서서 황후에게 예를 올렸다.

“신첩 한영, 황후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 만수무강하시옵소서!”

황후는 일어나라는 말 대신, 싸늘한 목소리로 한영에게 호통쳤다.

“참으로 요망한 아이로구나! 황후인 내게 문안을 오면서 면사포를 쓰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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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지금 총애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살 길을 찾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얘기를 홍이에게 한들, 알아들을 리 없었다.한영은 고집스럽고 과묵한 홍이가 예전의 자신을 너무 닮아서 안쓰러웠다.그래서 자신을 구원한답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홍아, 궁을 나가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문 앞까지 간 홍이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작은 소리로 답했다.“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영빈 마마.”말을 마친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한영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돌려 편전으로 돌아갔다.란심은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며 조용히 물었다.“마마, 홍이 걔가 또 뭐라고 했기에 기분이 이리도 저조하십니까?”“소인 지금 당장 가서 따져야겠어요. 마마가 걔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온귀비가 득세했다고 은인도 몰라본답니까?”“돌아와!”한영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거울 속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얼굴은 그녀마저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변해 있었다.“성주에게 말해서 뭐 좀 알아볼 게 있다고 전해.”“무슨 일인데요?”란심이 다급히 물었다.한영은 창문을 통해 내전 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작게 말했다.“홍이의 어머니에 대해 좀 알아봐.”“예.”란심은 밖으로 나가 성주를 찾았다.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부러운 눈을 하고 내전을 바라보는 금희의 모습이 보였다.란심은 미간을 확 찌푸렸고 소리를 듣고 뒤돌아선 금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란심 언니,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세요?”란심은 잠깐 스친 의심을 거두고 답했다.“마마의 심부름하러 가. 넌 주방에 가서 보신탕이 다 끓었는지 보고 오렴. 너무 오래 끓이면 맛없어.”“예, 지금 가요.”금희는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주방 쪽으로 갔다. 그녀는 질투심을 넘어 증오가 치솟았다.란심과 성주, 그리고 금희까지 셋은 모두 온실에서 궂은일을 하던 하등 궁인들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란심과 성주는 영빈의 눈에 들어 지금은 신변 시중을 들게 되었다.‘대체 내가

  • 궁녀의 역습   제24화

    “닥쳐!”온희정은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한영을 응시했다.2년 전 그 아이는 금기어였다.그 순간 한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예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추측이었다. ‘2년 전 그 아이의 죽음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온희정이 손귀비와 손을 잡은 이유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이지, 그 아이의 죽음을 영원히 덮어버리기 위한 것일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온희정은 죽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내기 싫어했다.‘사산… 사산이라….’한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온희정을 바라보았다.온희정은 그 눈빛이 사냥감을 쫓는 늑대의 눈빛처럼 느껴졌다.잠시 감정을 추스른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나를 배신한 비천한 시종이야. 난 절대 널 살려두지 않을 거야!”한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것 참 유감이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한영은 천천히 뒤로 물러선 후, 예를 행하고 밖으로 나갔다.안에서 물건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그 성격 못 고쳤네. 이 정도로 저리 화를 내다니.”그녀는 고개를 들고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춥고 텁텁한 겨울 날씨는 사람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들었다. 굳이 한 명이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라면 싸늘한 겨울날이 제격인 것 같았다.한영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나무상자를 들고 들어오는 홍이와 마주쳤다.홍이는 그녀를 알아보고 다급히 예를 행했다.한영은 그런 홍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홍아, 내 기억이 맞는다면 네 어머니가 남강의 노비 출신이었지?”홍이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한영은 계속해서 말했다.“남강에는 여인이 단기간에 용모나 체형을 바꿀 수 있는 비술이 있다지?”그러자 홍이가 바짝 긴장하더니 상자를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선제인 성조 황제는 한 궁녀에 의해 저주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

  • 궁녀의 역습   제23화

    젊은 황제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온희정의 턱을 잡았다.“너도 짐의 양심전에 지금 묵고 있지 않느냐?”소문현은 상공을 찬란하게 수놓은 불꽃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불꽃놀이는 참으로 오랜만이구나.”“폐하!”온희정은 다급히 황제를 불렀다. 어렵게 승은을 입었는데 열기가 이리도 빨리 식고 있으니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소문현은 옷가지를 걸치며 그녀에게 말했다.“짐은 영빈에게 가봐야겠다. 그 녀석 못하는 게 없어. 짐의 양심전을 불태우기 전에 가서 말려야겠으니 넌 이만 경화궁으로 돌아가거라.”온희정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이 내관은 온희정과 함께 양심전을 나섰다. 멀리서 소문현이 한영과 함께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장난치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온희정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네년은 곧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다음 날, 온희정이 다시 경화궁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후궁 전체에 퍼졌다.각 궁의 비빈들은 분분히 선물을 보내왔다. 왕황후는 친히 오지는 않았지만 사람 키만한 산호를 보내왔다.온귀비가 다시 경화궁의 주인이 되었으니 경화궁에 주거하는 비빈으로서 한영은 편전에만 숨어 있을 수 없었다.한영은 조용히 앉아 싸늘한 표정으로 손귀비와 온희정의 담화를 듣고 있었다.손귀비는 옆에서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는 한영을 힐끗 보고는 웃으며 온희정의 손을 잡았다.“돌아온 걸 축하하네. 아무리 다른 애가 총애를 받고 있었다 해도 한낱 폐하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지.”한영은 말없이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 손귀비는 침착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다.“영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한영은 웃으며 답했다.“귀비 마마든 아니면 다른 비빈들이든 저희는 모두 폐하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온귀비께서는 공들인 화접무로 폐하를 기쁘게 해드렸으니 저희 후궁들도 본보기로 삼아야지요.”손귀비는 굳은 표정으로 잡고 있던 온희정의 손을 놓았다.한영의 한마디로 손귀비에게

  • 궁녀의 역습   제22화

    양심전은 후끈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온희정은 소문현의 품에 안겨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러느냐, 희정아.”소문현은 온희정을 품에 안으며 물었다.온희정은 눈물을 닦고는 웃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기뻐서요. 폐하께서 신첩을 용서해 주시고 화를 풀어주셔서 너무 기뻐서요.”“신첩,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말을 마친 온희정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소문현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짐의 귀비는 그동안 철이 많이 든 모양이구나.”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맞춤하려다가 퍼렇게 부은 손가락을 보고 동작을 멈추었다.동상을 입은 가녀린 손가락에 그의 손길이 닿자 온희정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소문현이 당황하며 그녀에게 물었다.“이게 어찌 된 일이지?”온희정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폐하, 별일 아닙니다. 신첩은 동사서에서 추위에 좀 떨어도 괜찮습니다. 폐하만 신첩의 죄를 사하여 주시면 신첩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추위에 떨어?”소문현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동사서가 다른 비빈들이 사는 궁전보다는 못하더라도 냉궁은 아니었다. 냉궁이라 하더라도 후궁의 비빈들이 동상을 입을 정도로 보급이 형편없지는 않았다.“이 내관!”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 내관이 안으로 들어오자 소문현은 싸늘한 어조로 분부했다.“할 일도 제대로 안 하는 동사서의 쓸모없는 노비들을 모두 처형시켜!”“예!”지시를 받은 이 내관은 조용히 물러갔다.온희정의 눈빛에 통쾌함이 스쳤다. 그녀가 동사서로 간 이후로 권세만 따르는 궁인들은 모두 온희정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들은 그녀에게 먹다 남은 밥을 주는 것은 물론, 목탄도 최소한으로 보급했다.소문현은 안쓰러운 얼굴로 온희정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내일부터는 동사서로 돌아갈 필요 없어.”온희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소문현은 웃으며 농을 걸었다.“왜? 동사서에서 나와 짐의 곁에 있는 게 싫으냐?”온희정은 기죽은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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