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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hor: 정담
한영은 고개를 들고 손귀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옥귀인도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싫어? 너 전에 온귀비 궁에서 주인 발이나 닦아주는 시종이었잖아? 우리 귀비 마마의 존귀한 발을 핥으라고 하면 영광인 줄 알아야지!”

손귀비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한영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한영은 그녀 앞에서 언제든 발에 걷어차일 수 있는 강아지 신세가 된 것 같았다.

손귀비는 한영이 움직임이 없자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

그녀가 얼굴 두드러기 때문에 요 며칠 총애를 잃었으니 이 정도로 넘어가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날개가 채 돋치기 전에 죽여버렸을 것이다.

손귀비는 자세를 숙이고 한영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미천한 너 같은 비빈 따위, 내 오늘 여기서 네 목을 쳐도 폐하께선 날 벌하지 않을 거야.”

한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랬다. 손귀비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그녀를 쳐죽여도 소문현에게는 그저 선경을 닮은 귀인이 한 명 갔을 뿐이다.

그는 절대 품계가 낮은 비빈 때문에 대장군 가문과 척을 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개를 완전히 숙이면 평생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한영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마!”

란심이 울음을 터뜨리며 한영의 옷깃을 잡고 고개를 미친듯이 흔들었다.

한영은 그런 란심의 손을 밀쳤다. 오늘 어쨌거나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후궁에서 날개가 제대로 돋지 않은 여인은 살아 있는 것마저 사치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한영이 고개를 숙이자, 손귀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발을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한영은 그걸 보고 연신 뒷걸음질치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신발을 가리켰다.

“너 뭐 하자는 거지?”

손귀비는 순식간에 표정이 굳으며 싸늘한 눈초리로 한영을 노려보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정말 죽고 싶어?”

“아닙니다. 마마, 이걸 보세요.”

한영은 손귀비의 신발에 수놓인 꽃무늬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마, 이 신발은 문제가 있습니다.”

한영이 하도 급박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손귀비도 당황하여 고개를 숙이고 신발을 눈여겨보았다.

그녀의 옷과 신발은 전부 친정인 손씨 가문의 수놓이 장인이 직접 만들어 궁으로 보내온 것이었다. 부귀영화에 익숙해진 손귀비는 먹고 입는 방면에서 굉장히 사치를 부렸다.

그녀는 줄곧 아이를 보는 게 소원이었다. 회임에 좋다는 보약도 수도 없이 마셨고 평소에 쓰는 옷과 신발에 쓰이는 도안도 아이가 찾아오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것을 사용했다.

한영은 복을 기원하는 제비의 날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인 이 도안을 본 적 있습니다. 이건 좋은 의미가 아니에요. 진짜 회임을 기원하는 도안은 이렇게 그리는 게 아니에요. 여기 날개가 한쌍 더 달려 있잖아요. 대흉의 의미입니다!”

“마마의 신발에 어찌 이런 도안이 수놓아져 있는 걸까요? 설마 누군가가 앙심을 품고….”

한영은 다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손귀비는 앙칼진 목소리로 호통쳤지만 오늘은 더 이상 한영을 괴롭힐 심적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이를 갈며 싸늘히 말했다.

“흥, 오늘은 이만 넘어가겠지만 앞으로 조용히 처신하고 살아.”

“귀비 마마!”

한영에게 수모를 줄 좋은 기회가 날아가 버리자 조급해진 쪽은 옥귀인이었다.

하지만 손귀비의 싸늘한 눈총이 돌아오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손귀비는 다시 가마에 앉아 옥귀인을 데리고 급하게 현장을 떠났다.

한영은 멀어지는 손귀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물론 대흉의 도안이라는 것은 그녀가 지어낸 말이었다. 날개가 두 쌍이면 복이 두 배로 들어온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총애를 두고 경쟁할 마음은 없었거늘,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를 않네. 그렇다면 어쩌겠어.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그녀는 작은 소리로 란심에게 말했다.

“넌 이걸 들고 성주를 찾아가. 성주와 양심전에서 폐하의 시중을 드는 상희랑은 고향 친구니까 폐하께서 오늘 밤 어디 묵으실 건지 알아봐. 돈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란심은 얼굴에 화색을 띄며 다급히 말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회복하는 약도 달여드릴게요.”

란심도 오늘 일을 겪으며 주인이 몸을 사릴수록 괴롭힘이 심해질 거라는 것을 배웠다.

후궁에서 제왕의 총애가 없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한영은 고개를 저으며 란심에게 말했다.

“용모를 회복하는 약은 천천히 먹어도 돼.”

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미색으로 폐하의 마음을 잡아두는 것은 한계가 있어. 내가 원하는 것은 폐하의 진심이야.”

그녀는 란심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소문현은 요즘 거의 기향궁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손귀비의 기세는 날로 높아져서 황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황후는 그 때문에 병이 도지고 소문현은 부득이하게 황후를 챙길 수밖에 없었다.

이날 이른 아침, 그는 봉의궁으로 갔다. 어의에게 성심을 다해 황후를 치료하라고 당부한 후, 얼마 안 가 그는 바로 자리를 떴다.

그는 봉의궁의 쥐 죽은 듯 고요하고 침침한 분위기가 싫었다.

하지만 기향궁은 너무 시끄러워서 짜증이 났다.

이 내관과 함께 봉의궁을 나온 소문현은 그제야 숨을 조금 돌릴 수 있었다.

어젯밤 또 눈이 내려 봉의궁과 가까운 매화원이 풍경을 감상하기 딱 적당했다.

소문현은 기분 따라 매화원을 향해 걸었다. 수림에 들어서자마자 불꽃처럼 빨갛게 피어난 매화와 대지를 두텁게 덮은 흰눈이 조화를 이루어 절경이 펼쳐졌다.

소문현도 표정을 풀고 안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이때, 정자 쪽에서 청아한 비파 소리가 들려왔다.

애절한 감정을 답은 이별가였다. 소문현에게는 꽤 익숙한 곡이었는데 서로 사랑하는 소년과 소녀가 이루지 못할 사랑에 안타까워하는 감정을 담은 슬픈 곡이었다.

소문현의 표정은 순식간에 암담해졌다. 어린 나이에 자신을 떠나간 선경을 생각하니 가슴이 쓰렸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비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너무 급하게 걸어서 이 내관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수림을 지나자 중앙에 정자가 나왔다. 궁복을 입은 여인이 그를 등진 채로 비파를 연주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가녀린 몸집에 빨간 두루마리를 두른 그녀는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더욱 신비한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거기 누구냐?”

소문현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인은 사람이 올 줄 몰랐던 건지, 놀란 비명을 지르고는 비파를 챙겨 급급히 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소문현은 도망치는 그 뒷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내관이 숨을 헐떡이며 쫓아왔지만 소문현은 여인을 쫓아 수림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놓치고 말았다.

소문현의 뒤를 따르던 상희가 뭔가를 발견하고 허리를 굽혔다.

“폐하, 이것 좀 보세요.”

소문현이 상희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 보니 하얀 눈 위에 뭔가가 떨어져 있었다.

“가져와!”

상희는 재빨리 달려가서 향낭 하나를 주워들고 소문현의 옆으로 돌아왔다.

정교한 한쌍의 원앙이 수놓아진 향낭 위에는 작게 ‘영’자가 새겨져 있었다.

“영귀인이?”

소문현은 순간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선경을 꼭 닮은 얼굴을 한 그녀에게 총애를 주고 쉽게 버려둔 이후로 어쩐지 가장 중요한 사람을 저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던 그였다.

“경화궁으로 가자!”

이 내관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안 보이는 곳에서 표독한 눈초리로 상희를 쏘아보았다.

상희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조용히 이 내관의 뒤를 따랐다.

한편, 비파를 안고 경화궁으로 돌아온 한영의 신발은 푹 젖어 있었다.

황후궁 근처의 매화원에서 도박수를 둔 것은 그녀에게도 위험한 모험이었다.

처음에는 조용히 몸만 사리고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총애를 잃으니 돌아오는 건 후궁들의 무차별한 공격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몸을 사리지 않기로 했다.

죽더라도 발버둥치다 죽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란심은 호피 두루마리를 들고 방 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한영을 보자 바로 어깨에 걸쳐주었다.

한영은 너무 추워서 온몸을 떨고 있었다.

란심은 비파를 건네받은 후에 따뜻한 손난로를 한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마마, 일단 들어가서 생강차라도 마셔요. 폐하께서는….”

한영은 추위 때문에 하얗게 질린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실 거야. 일단 들어가자.”

“예!”

란심은 한영을 부축해서 경화궁 정문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홍이와 선희가 보였다.

한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가림막을 지나 상석에 앉아 있는 온희정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마치 명절이라도 되는 양 화려한 치장을 한 채,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한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 이게 누구야? 귀인들 발 닦아준다고 소문난 영귀인 아니야? 이 추운 날에 어딜 다녀오는 거니?”

한영은 독사를 닮은 온희정의 눈을 마주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못 참겠어서 작정하고 날 찾은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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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지금 총애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살 길을 찾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얘기를 홍이에게 한들, 알아들을 리 없었다.한영은 고집스럽고 과묵한 홍이가 예전의 자신을 너무 닮아서 안쓰러웠다.그래서 자신을 구원한답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홍아, 궁을 나가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문 앞까지 간 홍이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작은 소리로 답했다.“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영빈 마마.”말을 마친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한영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돌려 편전으로 돌아갔다.란심은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며 조용히 물었다.“마마, 홍이 걔가 또 뭐라고 했기에 기분이 이리도 저조하십니까?”“소인 지금 당장 가서 따져야겠어요. 마마가 걔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온귀비가 득세했다고 은인도 몰라본답니까?”“돌아와!”한영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거울 속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얼굴은 그녀마저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변해 있었다.“성주에게 말해서 뭐 좀 알아볼 게 있다고 전해.”“무슨 일인데요?”란심이 다급히 물었다.한영은 창문을 통해 내전 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작게 말했다.“홍이의 어머니에 대해 좀 알아봐.”“예.”란심은 밖으로 나가 성주를 찾았다.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부러운 눈을 하고 내전을 바라보는 금희의 모습이 보였다.란심은 미간을 확 찌푸렸고 소리를 듣고 뒤돌아선 금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란심 언니,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세요?”란심은 잠깐 스친 의심을 거두고 답했다.“마마의 심부름하러 가. 넌 주방에 가서 보신탕이 다 끓었는지 보고 오렴. 너무 오래 끓이면 맛없어.”“예, 지금 가요.”금희는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주방 쪽으로 갔다. 그녀는 질투심을 넘어 증오가 치솟았다.란심과 성주, 그리고 금희까지 셋은 모두 온실에서 궂은일을 하던 하등 궁인들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란심과 성주는 영빈의 눈에 들어 지금은 신변 시중을 들게 되었다.‘대체 내가

  • 궁녀의 역습   제24화

    “닥쳐!”온희정은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한영을 응시했다.2년 전 그 아이는 금기어였다.그 순간 한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예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추측이었다. ‘2년 전 그 아이의 죽음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온희정이 손귀비와 손을 잡은 이유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이지, 그 아이의 죽음을 영원히 덮어버리기 위한 것일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온희정은 죽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내기 싫어했다.‘사산… 사산이라….’한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온희정을 바라보았다.온희정은 그 눈빛이 사냥감을 쫓는 늑대의 눈빛처럼 느껴졌다.잠시 감정을 추스른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나를 배신한 비천한 시종이야. 난 절대 널 살려두지 않을 거야!”한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것 참 유감이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한영은 천천히 뒤로 물러선 후, 예를 행하고 밖으로 나갔다.안에서 물건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그 성격 못 고쳤네. 이 정도로 저리 화를 내다니.”그녀는 고개를 들고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춥고 텁텁한 겨울 날씨는 사람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들었다. 굳이 한 명이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라면 싸늘한 겨울날이 제격인 것 같았다.한영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나무상자를 들고 들어오는 홍이와 마주쳤다.홍이는 그녀를 알아보고 다급히 예를 행했다.한영은 그런 홍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홍아, 내 기억이 맞는다면 네 어머니가 남강의 노비 출신이었지?”홍이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한영은 계속해서 말했다.“남강에는 여인이 단기간에 용모나 체형을 바꿀 수 있는 비술이 있다지?”그러자 홍이가 바짝 긴장하더니 상자를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선제인 성조 황제는 한 궁녀에 의해 저주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

  • 궁녀의 역습   제23화

    젊은 황제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온희정의 턱을 잡았다.“너도 짐의 양심전에 지금 묵고 있지 않느냐?”소문현은 상공을 찬란하게 수놓은 불꽃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불꽃놀이는 참으로 오랜만이구나.”“폐하!”온희정은 다급히 황제를 불렀다. 어렵게 승은을 입었는데 열기가 이리도 빨리 식고 있으니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소문현은 옷가지를 걸치며 그녀에게 말했다.“짐은 영빈에게 가봐야겠다. 그 녀석 못하는 게 없어. 짐의 양심전을 불태우기 전에 가서 말려야겠으니 넌 이만 경화궁으로 돌아가거라.”온희정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이 내관은 온희정과 함께 양심전을 나섰다. 멀리서 소문현이 한영과 함께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장난치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온희정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네년은 곧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다음 날, 온희정이 다시 경화궁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후궁 전체에 퍼졌다.각 궁의 비빈들은 분분히 선물을 보내왔다. 왕황후는 친히 오지는 않았지만 사람 키만한 산호를 보내왔다.온귀비가 다시 경화궁의 주인이 되었으니 경화궁에 주거하는 비빈으로서 한영은 편전에만 숨어 있을 수 없었다.한영은 조용히 앉아 싸늘한 표정으로 손귀비와 온희정의 담화를 듣고 있었다.손귀비는 옆에서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는 한영을 힐끗 보고는 웃으며 온희정의 손을 잡았다.“돌아온 걸 축하하네. 아무리 다른 애가 총애를 받고 있었다 해도 한낱 폐하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지.”한영은 말없이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 손귀비는 침착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다.“영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한영은 웃으며 답했다.“귀비 마마든 아니면 다른 비빈들이든 저희는 모두 폐하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온귀비께서는 공들인 화접무로 폐하를 기쁘게 해드렸으니 저희 후궁들도 본보기로 삼아야지요.”손귀비는 굳은 표정으로 잡고 있던 온희정의 손을 놓았다.한영의 한마디로 손귀비에게

  • 궁녀의 역습   제22화

    양심전은 후끈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온희정은 소문현의 품에 안겨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러느냐, 희정아.”소문현은 온희정을 품에 안으며 물었다.온희정은 눈물을 닦고는 웃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기뻐서요. 폐하께서 신첩을 용서해 주시고 화를 풀어주셔서 너무 기뻐서요.”“신첩,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말을 마친 온희정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소문현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짐의 귀비는 그동안 철이 많이 든 모양이구나.”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맞춤하려다가 퍼렇게 부은 손가락을 보고 동작을 멈추었다.동상을 입은 가녀린 손가락에 그의 손길이 닿자 온희정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소문현이 당황하며 그녀에게 물었다.“이게 어찌 된 일이지?”온희정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폐하, 별일 아닙니다. 신첩은 동사서에서 추위에 좀 떨어도 괜찮습니다. 폐하만 신첩의 죄를 사하여 주시면 신첩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추위에 떨어?”소문현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동사서가 다른 비빈들이 사는 궁전보다는 못하더라도 냉궁은 아니었다. 냉궁이라 하더라도 후궁의 비빈들이 동상을 입을 정도로 보급이 형편없지는 않았다.“이 내관!”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 내관이 안으로 들어오자 소문현은 싸늘한 어조로 분부했다.“할 일도 제대로 안 하는 동사서의 쓸모없는 노비들을 모두 처형시켜!”“예!”지시를 받은 이 내관은 조용히 물러갔다.온희정의 눈빛에 통쾌함이 스쳤다. 그녀가 동사서로 간 이후로 권세만 따르는 궁인들은 모두 온희정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들은 그녀에게 먹다 남은 밥을 주는 것은 물론, 목탄도 최소한으로 보급했다.소문현은 안쓰러운 얼굴로 온희정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내일부터는 동사서로 돌아갈 필요 없어.”온희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소문현은 웃으며 농을 걸었다.“왜? 동사서에서 나와 짐의 곁에 있는 게 싫으냐?”온희정은 기죽은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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