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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화 달갑지 않은 사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7 01:23:57

아침부터 마을에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밤새 얼어붙었던 길 위로 햇빛이 비치면서 눈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고, 처마 끝에 매달려 있던 고드름에서는 투명한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세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바구니를 들었다.

오늘도 약초를 손질해야 했다.

마른 잎을 골라내고, 상태가 좋지 않은 약초는

따로 빼놓은 뒤 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세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린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들기도 전에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마.” 세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골목 끝에서 한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허리에는 붓과 먹을 넣은 작은 도구가 매달려 있었고, 한 손에는 두꺼운 서책이 들려 있었다.

서휘였다. 세린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서휘는 세린을 발견하자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역시 여기 있었네.”

“왜 왔어?” 첫마디부터 차가웠다.

서휘는 잠시 멈췄다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부터 그렇게 하냐?”

“반갑지 않으니까.” “너는 정말 한결같다.”

“너도.” 세린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서휘를 바라봤다.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지?” 서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기억하지.” “그럼 왜 또 왔어?”

“보고 싶어서.” “나는 보고 싶지 않았어.”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휘는 세린의 말을 듣고도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너는 정말 나한테 마음이 없구나.”

“응.” “조금도?” “없어.”

“언제부터?” “그걸 왜 물어봐?”

“알고 싶어서.”

세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서휘야.” “응.”

“나는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하지 않아.” 서휘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하지만 내가 싫다고 했는데 계속

찾아오는 건 싫어.” “나는 네가 언젠가는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해.”

“안 바꿔.”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잖아.”

“내 마음은 내가 알아.” 세린은 단호했다.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

서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데 익숙했다.

말 한마디를 하면 사람들이 웃어주었고, 자신이

다가가면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처음 세린을 만났을 때도 당연히

자신에게 호감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린은 달랐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잘생겼다는 말을 들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왜 자신에게만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다가갔다.

한 번 거절당하면 다시 찾아갔고, 또 거절당하면

다음에는 조금 다르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존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정말로 세린이 좋아졌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세린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게 싫다고.” “왜?”

“왜냐하면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나는—” “그만.”

세린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끊겼다.

서휘가 입을 다물었다.

세린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여 줘.”

그 순간 서휘의 표정이 흔들렸다.

하지만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린이 고개를 돌렸다.

진안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진안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서휘 역시 진안을 바라봤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휘가 먼저 물었다.

“당신이 진안입니까?”

진안은 짧게 대답했다. “그렇소.”

“세린과 같이 있는 것 같던데.”

진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휘가 다시 말했다.

“두 분은 무슨 사이입니까?”

“서휘.” 세린이 그의 말을 막았다.

“그걸 왜 물어봐?”

“나는 네가 걱정돼서 그래.”

“걱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잖아.”

“그게 네가 상관할 일이야?”

서휘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네가 걱정되니까.”

“내가 싫다고 했잖아.”

세린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왜 자꾸 네 생각만 해?”

서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안은 두 사람의 대화를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짧게 말했다.

“그만하시오.”

서휘가 진안을 바라봤다.

“무슨 뜻입니까?”

“싫다 하지 않았소.”

그 말에 서휘의 표정이 굳었다.

진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세린은 잠시 진안을 바라봤다.

말은 몇 마디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짧은 말이 자신을

대신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휘는 진안과 세린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다 세린에게 말했다. “정말 싫어?”

“응.” “나를?” “응.”

“조금도 좋아하지 않아?”

세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응.” 서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나는 네가 좋아.”

세린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렸다.

서휘는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몇 걸음 떨어진 뒤,

그는 다시 뒤를 돌아봤다.

세린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서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이 골목 너머로 사라진 뒤에야

세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힘들다.”

진안이 그녀를 바라봤다.

세린은 머리를 살짝 숙였다.

“미안해요.” “왜.”

“괜히 이런 일에 휘말리게 했잖아요.”

진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대 잘못이 아니오.”

세린이 고개를 들었다.

진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린은 작게 웃었다.

“진안은 정말 말이 적네요.”

진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할 말이 없소.”

세린은 그 대답을 듣고 피식 웃었다.

“알겠어요.”

그녀는 다시 바구니를 들었다.

아침 햇살이 눈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서휘가 서 있던 자리에는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세린은 그 자국을 잠시 바라봤다가 고개를 돌렸다.

앞에는 진안이 있었다.

말없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세린은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서휘가 이번 한 번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진안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서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새로운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것은 단순한 질투인지, 자존심인지,

아니면 자신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인지,

아직 누구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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