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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05 09:33:26
모두가 퇴근한 늦은 밤 11시에도 한도오토링크 사장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공서린 과장이 넘기고 간 보고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혁은 넥타이를 풀어 헤친 채, 붉은 펜으로 난도질 된 서류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눈이 뻑뻑했다.

머릿속에는 딜러들의 이름과 자금의 흐름,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뒤엉켜 돌아다녔다.

그때.

띠리릭, 띠리릭, 척.

대표실 문이 벌컥 열렸다.

“꼴 봐라. 한도그룹 회장님 되기 전에 과로사부터 하겠네.”

정민우였다.

국내 굴지의 로펌 소속 변호사이자, 수혁의 대학 동기.

수혁은 고개도 들지 않고 서류를 넘기며 대꾸했다.

“남의 사무실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변호사라는 놈은 주거 침입 죄도 모르냐?”

“애초에 비밀번호를 알려 주지를 말든가.”

민우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비닐봉지에서 캔커피와 샌드위치를 꺼냈다.

“먹고 해. 빈속에 담배만 피우지 말고.”

수혁은 그제야 펜을 놓고 다가왔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청구할 자문료라도 생겼냐?”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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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90화.

    차가운 냉기가 도는 서울 구치소 특별 면회실.수의를 입은 강민재가 신경질적으로 다리를 떨며 앉아 있었다. 덜컹, 철문이 열리고 말끔한 정장을 입은 강태환 변호사가 걸어 들어왔다.강태환은 맞은편에 앉아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놓았다. 표정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상황이 안 좋습니다, 의원님. 아니, 강민재 씨.”강태환의 조롱 섞인 호칭에도 강민재는 반박할 기력조차 없었다.“당에서는 이미 당신을 제명했고, 차윤호마저 구속됐습니다. 여론은 최악입니다. 어르신께서 전하랍니다.”강태환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우발적인 단독 행동으로 흙탕물 튀긴 건 봐줄테니, 더 이상의 오물이 묻지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그것은 타협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다.입 닥치고 얌전히 감옥에서 썩어라.내 이름이 나오는 순간, 네 목숨도 장담 못한다.강민재는 그 서늘한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하지만 코너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강민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흐흐…… 꼬리를 자르시겠다?”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핏발 선 눈동자 안에는, 잃을 것이 없는 자 특유의 섬뜩한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변호사님. 똑똑히 전해요, 예? 토씨하나 빠뜨리지 말고.”강민재는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테이블 위로 올리며 몸을 바짝 숙였다.“나한테 통화 녹취 기록들이 전부 저장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내가 풀면 안되는 것들이 몇 개 있더라.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게 뭔지.”강태환의 평온했던 미간이 처음으로 찌푸려졌다.“그리고 당신, 당장 방법 찾아. 어떻게든 이 시궁창에서 꺼내라고―!”강민재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나 여기서 못 나가면―.”그는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다 같이 죽는 거야. 알아?”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차가운 면회실.버려진 사냥개의 마지막 이빨이, 주인의 목줄을 향해 가장 치명적인 독을 품고 덤벼들고 있었다.***수혁과 서린이 각자 사무실로 들어가 업무를 시작하고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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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87화.

    다음 날 아침.공대현은 책상 위에 놓인 대국민 담화문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몇 번이나 수정된 원고였다.대통령으로서는 비난받을지 몰라도, 아버지로서는 다시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제 딸 공지안은 살아 있습니다.]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같은 시각, 한도전자.며칠 만에 출근한 서린은 밀려 있던 결재 서류를 처리하고 각 부서의 보고를 받았다.수혁 역시 오전부터 쉴 틈 없이 일정을 소화했다.평범한 하루가 다시 시작된 듯했지만, 두 사람 모두 시계를 자주 확인했다.오늘 오후, 공지안이라는 이름이 세상으로 돌아온다.점심을 먹자마자 수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퇴근하시게요?”“응. 이런 날 퇴근 시간까지 버티고 있으면 내가 미친놈이지.”서린이 작게 웃었다.두 사람은 평소보다 일찍 회사를 나섰다.관저에서도 윤 여사와 도윤이 담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윤 여사는 몇 번이나 TV를 켰다가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엄마, 아직 한참 남았어요.”“알아. 그냥 마음이 그래서 그래.”도윤도 웃고 있었지만 자꾸만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죽었다고 믿었던 딸.죽었다고 믿었던 누나.오늘, 그 이름이 온 국민 앞에서 다시 살아 돌아온다.가족에게는 그 어떤 정치적인 의미보다 그것이 중요했다.오후 3시.수백 개의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김기출 검사가 단상 위에 섰다.“검찰은 오늘 오전, 강민재 전 의원을 특경법상 배임, 국가 핵심 기술 유출, 그리고 특수 감금 및 납치 혐의로 구속 기소했습니다.”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빗발쳤다.“검찰은 이미 피의자의 범행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를 충분히 확보했습니다.”김기출 검사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렸다.“또한, 본 사건이 단독 범행이 아니라는 정황 역시 다수 확인된 상태입니다.”순간 기자석이 술렁였다.“배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검찰은 현재 관련자 전원을 대상으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습니다.”김기출 검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86화.

    서재에 있던 서린이 그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잘 쉬었어?”“네. 지금 가야 하는거죠? 겉옷만 걸치고 나올게요.”“천천히 해. 아직 시간 여유있어.”서린이 코트를 입고 나오자, 수혁이 손을 잡았다.“가자.”잠시 후, 두 사람은 관저에 도착하고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어서 와요, 차 대표!”윤정희 여사가 가장 먼저 환한 얼굴로 수혁을 맞이했다.공대현 대통령도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온화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다.“매형,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요.”도윤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원탁에 차려진 식사는 화려한 연회식이 아니라, 정갈하고 따뜻한 가정식이었다.다섯 사람이 둘러 앉자, 윤 여사가 젓가락을 들어 수혁의 밥그릇 위에 큼지막한 갈비찜 한 조각을 올려주었다.“많이 들어요, 차 대표. 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잘 먹겠습니다.”“엄마, 나도 그 갈비찜 맛있어요.”“이 녀석이. 넌 손이 없어?”“손은 매형도 있는데요?”“뭐―?”하하하.식탁에서는 가벼운 농담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서린은 말없이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엄마와 아버지, 도윤이.그리고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수혁.한때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했던 자리였다.죽은 사람이 되어 멀리서 그리워하기만 했던 가족과, 이제는 한 식탁에 앉아 웃고 있었다.서린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그대로 두었다.“차 대표 나 좀 보지.”식사를 마친 뒤, 공대현 대통령이 수혁을 따로 불렀다.두 사람은 서재에서 마주 앉았다.잠시 차를 한 모금 마신 공대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제 여론은 완전히 뒤집혔으니, 남은 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일뿐이겠지.”“예. 다만 강민재보다 그 뒤에 있는 그가 누구인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직 증거가 없을 뿐입니다.”공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네. 곧 꼬리가 잡힐 거야.”잠시 말을 멈춘 공대현이 낮게 덧붙였다.“그리고 그 양반은 분명 그 꼬리를 자르려고 하겠지.”공대현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85화.

    아침 햇살이 하얀 이불 위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수혁은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지만, 자신의 팔을 베고 곤이 잠든 여자의 얼굴만 계속 보고 있었다.손을 뻗어 서린의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손 끝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에 어젯밤의 뜨거웠던 기억이 났다.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졌다.하지만 곧, 서린이 도로 한 복판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쯧―왜 위험하게 도로에서 그러고 있었어. 내가 조금만 늦게 브레이크를 밟았으면 어쩌려고.수혁은 그 때의 긴박했던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잡히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듯 도로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여자. 그 절박함이 아직도 수혁의 심장 깊숙이 박혀 있었다.수혁은 다시 팔을 뻗어 서린의 몸을 당겨 안았다.“으음...”서린이 작게 뒤척이며 천천히 눈을 떴다.눈 앞에는 맨살의 가슴팍만 보였다. 고개를 젖혀 수혁의 얼굴을 보았다.초점이 맞춰지자 수혁과 시선이 얽혔다.“... 일어났어요?”잠긴 목소리로 묻는 지안의 입술에, 수혁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응. 일어났지.”“근데 왜 이러고 있어요? 얼른 씻어야 하지 않아요?”“네 얼굴 보느라고.”“피― 그게 뭐에요. 지금 얼굴 별로 안이뻐요.”서린이가 얼굴을 붉히며 수혁의 품에 더 깊이 안겨들었다.“왜― 보여줘. 더 봐야 돼. 내가 이 얼굴을 못봐서 미치는 줄 알았거든.”“대표님...”서린이 얼굴을 들어서 수혁과 눈을 마주쳤다.“너 그렇게 되고, 찾아 헤매는데...”문득문득 그때 일이 떠오르고는 한다.“네 얼굴이 기억이 안났어.”잠들면 네가 나타나 울었어.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면 네가 없는 거야.“아주 그냥 돌아버리겠더라고.”캄캄한 날들이 이어졌던 아득한 시간들이.“...아.”“그래서 더 자주보고 더 많이 봐야돼.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수혁의 다정한 투정에 서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수혁은 서린의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더 깊숙이 안았다.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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