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에 질린 그녀를 보던 배준우는 열심히 표정 관리를 했다.허락받은 고은영은 재빨리 휴게실로 도망갔다.그녀가 자리를 비운 잠깐 사이에 휴게실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었다.휴게실을 정리하는 일이 그녀의 임무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책임질 필요 없어 보였다.매일 배준우와 함께 출근하는 그녀는 너무 한가했다.사무실.사무실에 들어선 배윤은 소파로 다가가 거만하게 앉았다. 그 모습은 엄숙한 표정의 배준우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대체 무슨 일이야?”배준우가 차갑게 물었다.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배윤은 불량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매우 닮아 있는 그들이었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진지하고 차분한 배준우와는 달리 배윤은 거만하고 거칠었다.손에 든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던 배윤이 물었다.“진짜 끝까지 해보려는 거예요?”배준우는 앞에 놓인 물 한 컵 들이켰다.“내가 아니고 오히려 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그렇다면 형에게 협박당한 거겠죠.”오늘 량천옥은 배 씨 저택에서 한바탕 난리 쳤었다. 그것은 배항준이 고심 끝에 천의를 여전히 배준우에게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죽어도 동의할 수 없었던 량천옥은 결국 수면제를 삼켰다.그녀는 그야말로 궁지에 몰린 것이었다.배준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네가 이렇게 못난 모습인 걸 알게 된다면 아마 그 사람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할 거야.”순간 배윤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그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보았다.“형, 한 번만 봐줘요.”배윤이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배준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는 배윤보다 8살 위였고 고은영은 배윤과 비슷한 또래였다.량천옥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동생인 배윤에게는 그 어떠한 악감정도 없었다.1달 전만 해도 배윤을 원망하지 않았던 배준우지만 지금은...순간 나태웅이 조사했던 자료가 뇌리에 스쳤다. 배준우는 입가에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천의에서 사라진다면 그렇게 해줄게.”순진한 얼굴 뒤에는 악마의 사악한 얼굴이
전과 완전히 다른 배준우의 모습에 배윤은 당황하고 말았다.그도 배준우가 자신의 어머니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실 그도 마찬가지였다.그가 형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풀리던 것들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배윤은 배준우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무언가를 보아내려 했다.하지만 그의 눈은 너무 깊어 도저히 가늠이 가지 않았다.결국, 배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형이 천의로 돌아오면 그 사람을 정말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예요. 그러니 형, 한 번만 봐주세요.”배윤도 량천옥을 어머니가 아닌 ‘그 사람’으로 칭하고 있었다.수년 동안 강성에서 량천옥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아마 어렸을 때부터 량천옥의 행동이 굴욕적이라 느꼈던 배윤에게는 아직까지도 마음의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하여 지금까지도 량천옥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더군다나 량천옥은 지금 천의를 잃을 수 없었다. 잃게 된다면 그의 빚은...!배윤의 눈이 다시 차갑게 변했다....결국 배윤도 돌아갔다.사무실로 들어선 나태웅은 음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배준우를 보았다.“천의에 관한 일 때문에 대표님을 찾은 겁니까?”“천의 말고 그를 귀국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전에 배준우와 량천옥이 심하게 다툴때에도 눈 가리고 아웅 하던 배윤이었다.그러던 그가 이번에 돌아온 것을 보니 천의가 그에게도 중요한 것 같았다.“그는 그동안 대표님을 속이고 있었어요.”나태웅이 말했다. “아니, 그는 나를 속이지 않았어.”나태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준우가 반박했다.나태웅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속이지 않았다고? 배준우는 동생을 싫어했지만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그도 천의를 손에 넣으려는 거야.”“네.”배윤에게는 지금 천의밖에 남지 않았다.량천옥이 천의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에게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나이 든 배항준에게는 이미 아무런 힘이 없었다.
나태웅이 나가고 배준우는 휴게실로 향했는데, 고은영은 목도리를 뜨고 있었다.지금은 손놀림이 예전처럼 어리숙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전보다 훨씬 빨라진 것 같았다.배준우가 들어오자 고은영은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뜨개질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진짜 모르는 사람이에요.”배준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아직도 그걸 말하고 있는 거야?“모르면 모르는 것이지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야?”“어쨌든 민감한 신분을 가진 분이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배준우가 무서웠다.조금 전 로비에서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잡아 먹을 기세였기 때문이다.듣고 있던 배준우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를 품에 안은 그는 사슴처럼 순진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입맞춤을 했다.부드럽게 그녀를 탐하는 그의 모습은 아까와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읍!”고은영이 신음을 터뜨렸다.그녀의 입술은 배준우 때문에 따끔거렸다.그녀의 신음에 배준우는 살며시 그녀를 놓아주었다. 빨개진 그녀의 입술을 살짝 만지던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그렇게니 무서워?”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무서워요. 진짜 너무 무서워요...!”“바보야, 난 너의 남편인데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 있어?”남편이라는 두 글자에 더욱 힘을 주며 말하는 배준우에 고은영은 마음이 무거웠다.“하지만 우리는 결국...”“그만!”뭔가 말하려는 그녀를 배준우가 제지했고, 고은영은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그와의 긴 시간 동안 고은영도 어떤 말들은 아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특히 그들의 가짜 결혼은 회사에 비밀로 해야 했다. 여기저기 다니며 떠벌이면 그녀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지금 반복적으로 그녀에게!“그럼 매일 밤 일어나는 일에 대해는 책임지실 건가요?”“뭐?”“그러니깐 당신이...”고은영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고, 얼굴도 이미 붉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배준우보다 8살이 어렸기에 아주 성숙하고 노련
서류를 든 진청아가 사무실 밖에서 문을 여러 번 두드렸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히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결국 몸을 돌렸다....고은영이 자리를 떠나고 량일은 카페에 오랫동안 앉아있다가 넋을 잃은 모습으로 카페를 걸어 나갔다.동영그룹에서 걸어 나오는 배윤을 보자 그녀의 심장이 떨려왔다.“윤아!”그리고 배윤에게로 걸어갔다.그녀의 목소리에 배윤도 량일을 발견했다. 침울한 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할머니.”배윤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량일을 부르자 량일이 물었다. “준우를 만나러 온 거야? 다음에는 혼자 오지 마.”그녀는 단호했다. 요즘 그들은 매우 불쾌한 일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량천옥이 물러서지 않으려 하는 것도 배윤을 위해서이기도 했다.배준우는 비록 전에 배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되찾으려는 배준우의 태도에 어느 정도 경계해야 했다.“네, 형 만나러 온 거예요.”배윤이 ‘형’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량일의 마음이 복잡했다.“형이라고 생각하는 너를 그 애는 동생이라고 생각해?”그녀는 거침없었다.이것은 그녀와 량천옥이 배윤에게 주입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했다.배항준의 기분이 어떻든, 배준우에 대해서 그녀들은 항상 이런 태도였다.하지만 배윤은 그녀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배준우와 가까이 지냈다. 그러는 배윤이 그녀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래도 내 형인데 할머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얘는...”량일이 노했다.배준우를 선택한 고은영 때문에 이미 머리가 아픈 상태인데 배윤도 이 모양이다.하늘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들이 보복당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량일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집에는 들른 거야?”“아직이요.”배윤이 고개를 저었고, 량일은 아주 불만스러웠다.“집에도 들르지 않고 준우를 만나러 왔단 거야?”배윤의 이런 무심한 행동이 그녀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공항이 동영그룹과 가깝잖아요.”대충 둘러대고 있는 배윤의 변명에 넘
“이미 한두 번 만난 게 아니지 않아요? 그 여자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같던데요?”듣고 있던 량일은 깜짝 놀랐다.“네가 어떻게 여러 번 만났단 것을 알고 있는 거야?”그녀는 아주 예민한 사람이어서 조금만 이상함을 느끼면 바로 짚고 넘어가야 했다.“형이 그 여자를 빌미로 아버지를 협박하고 있으니, 어머니와 할머니도 이렇게 서두르는 거 아니에요?”배윤의 물음에 량일은 숨이 탁 막혀왔다.급한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은... 이미 아주 난처해진 상황이였다.고은영에 관한 일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빨리 처리해야 한다....배씨 가문.배윤과 량일이 막 저택에 도착했을 때 량천옥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시선을 주고받은 둘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진짜 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예요?”량천옥은 배항준을 잡고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었다.그런 그녀때무에 배항준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당신이 먼저 천의를 준우에게 넘기라고 내가 말했잖아.”“먼저 넘기고 그다음은요? 그다음엔 진짜 다시 돌이킬 수 있나요? 당신의 아들이 어떤 자식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량천옥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배항준이 그녀를 보는 눈빛도 매서웠다. 하지만 이런 그의 모습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 왜 넘기라고 하는 거예요? 넘기고 나면 윤이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요!”량천옥은 어이가 없어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그동안 야금야금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는 배준우 때문에 그녀는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장항 프로젝트가 시작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배항준은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고 장항 프로젝트만 손에 넣으면 배준우가 잠잠해질 것이라고 믿었다.그런데 잠잠해졌는가?지금은 천의에까지 손을 뻗고 있다.“어쨌든 준우와 그 여자는 결혼하면 안 돼!”지금 배항준은 고은영에 대해 점점 더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결혼을 결사 반대하고 있었다.“
배윤과 량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배윤이 돌아온 것을 본 배항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배윤이 끼어들면 상황만 더 복잡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내가 돌아온 것이 정말 반갑지 않은가 봐요?”소파에 앉은 배윤이 배항준을 바라보며 말했다.배항준은 이마에 손을 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배항준을 지켜보던 량일은 무언가 말하려다 망설였다가 결국 한마디 했다.“난 올라가서 천옥이를 살펴보겠네.”배항준 앞에서는 발언권이 없는 자신이라는 것은 량일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하여 매번 배항준과 량천옥이 싸울 때면 량일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필경 배항준의 신분과 지위는 그녀가 훈계를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기도 했다.그녀가 많이 간섭할수록 량천옥만 힘들게 될 것이다....위층.량천옥은 담배를 피고 있었다. 원래는 담배를 피지 않았던 그녀이지만 너무 심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량일이 방에 들어섰을 때 방안에는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만 피워.”“설마.. 나를 통제하려는 건가요?”량천옥의 분노가 다시 치솟았다.량일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본 적 없는 반항심이 어려있었다.그녀의 반항을 처음 겪는 량일이다.량일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나도 이제 나이가 45예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 혹은 담배를 몇 대 피는 것까지 어머니의 동의를 거쳐야 하나요?”반항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량천옥은 곧 폭발할 듯 으르렁거렸다.지난 세월 동안 그녀의 생활은 모두 량일이 계획하고 있었다. 매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두 량일이 결정했다.량천옥은 그렇게 그녀의 지휘대로 걸어갔는데도 량일이 원 하는 대로 살지 못했다.량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량천옥을 바라보았다.“내가 너무 많이 간섭한다고 탓하는 거야?”“오랫동안 어머니 말을 따랐고 그 결과,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보세요. 나는 곧 모든 것을 잃게 생겼다고요.”량천옥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이것이 량
혹시 배항준이 배윤을 만나면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까?어쨌든 지금은 배항준과 맞서는 것이 그녀들에게는 좋을 것이 없었다.금방 배항준과 한바탕 싸웠던 것을 떠올린 그녀는 그제야 모친의 의도를 파악했다.그렇게 그녀는 마음을 다스리며 한숨을 내쉬었다.“배윤을 본 그이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약해지길 바래야겠어요.”천의에 대한 그녀의 노력은 모두 배윤을 위한 것이란 것을 배항준도 알고 있다.그러니 배윤을 봐서라도 천의를 배준우에게 넘기라고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그 순간만큼은 량천옥도, 량일도, 모두 배항준이 배윤때문에 생각을 바꾸길 바랬다....동영그룹.거의 퇴근할 무렵 배준우는 고은영더러 퇴근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때, 뜻밖의 손님이 불쑥 찾아왔고, 그것은 바로 진승연이었다.그가 진씨 가문을 상대하고부터는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쳐들어왔다.“고은영, 이 망할 년! 넌 보복당할 거야! 반드시 보복당할 거라고!”지난 며칠 동안 진승연은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노빈과의 결혼은 연기되었다. 그것은 결혼 당일 그녀가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 때문에 부득이하게 결혼식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이렇게 큰 소란을 피웠는데도 그저 결혼식을 연기하는 것뿐이었다.그녀는 완전히 미칠 것 같았다...!하지만 북성에서 저지른 일들이 그녀에게 파국을 가져올 줄 몰랐다.고은영은 미쳐버린 그녀를 바라보다 배준우에게 시선을 돌렸다.표정이 어두워진 배준우는 진청아를 보며 말했다.“경비 불러!”“이미 불렀습니다.”진청아는 정중하게 대답했다.방금 회사로 들어선 진승연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 진청아는 서둘러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이제 곧 경비원들이 올라올 것이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우리의 우정이 진짜 이것밖에 안 됐던 거예요? 어떻게 노빈, 그 멍청이랑 결혼하라고 해요? 어떻게 이러냐고요! 미월언니에게도 너무 한 거
표정이 좋지 않았던 배준우는 진승연의 말에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씩씩거리는 진승연을 바라보던 배준우가 입을 열었다.“그러고 보니 당신 진씨 가문에 자비를 너무 베푼 것 같아.”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곧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한창 속 시원해하던 이미월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그녀는 배준우가 화를 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잘 알고 있었다.그녀를 내쫓는 것은 물론 외숙모도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돌릴 것이다.“승연아, 이제 그만하고 당장 은영 씨에게 사과해!”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지금 당장 어머니에게 갈 수 없었던 그녀는 외삼촌 집에 머물지 못하더라도 아직은 외삼촌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하여 고은영을 무척 짓밟고 싶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진승연은 완전히 미친 상태였다.“무슨 사과?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데요?”그녀는 격렬하게 반항했다.“승연아!”“당장 끌어내!”이 혼란스러운 광경에 배준우가 경비를 불렀다.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그의 말에 경비원들은 즉시 이미월과 진승연을 잡아끌었다.그 거친 행동은 두 사람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배준우의 잔인한 태도에 이미월은 경비원의 팔을 잡고 애원했다.“아니야!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거야!”그는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가?이미월은 고은영을 쏘아보았다.그녀를 향한 증오심이 끊임없이 커졌다.그러다 뭐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외쳤다.“나, 임신했어!”그녀의 한마디에 현장의 공기는 순간 얼어붙었고, 주위가 급격하게 조용해졌다.이미월을 잡고 있던 경비원은 뜨거운 감자를 움켜쥔 듯한 느낌을 받았다.그는 그저 벙진 채로 배준우를 바라볼 뿐이었다.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 속에서 이미월의 눈은 배준우를 향하고 있었다.“남성의 그날 밤, 당신 곁에 있었던 사람은 나였어. 난 일찍 귀국했거든.”배준우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옆에 있던 고은영의 심장이 곤두박질쳤다.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그 미남계에 안지영은 결국 어느샌가 넘어가고 말았다.장선명은 안열한테 안지영이 좋아하는 디저트를 가져오라고 했다. 안열은 그제야 두 사람이 사무실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장선명은 다른 일로 바빠서 먼저 자리를 떠났다.안열은 디저트를 들고 오면서 안지영의 눈치를 보았다.“왜요?”“선명 도련님이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죠?”“잘못을 저질러놓고 나한테 무슨 짓을 한다면 그건 짐승이죠!”안지영이 씩씩대면서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안열은 입가를 씰룩이면서 얘기했다.“하지만 선명 도련님은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닌데요.”장선명과 오랜 시간 함께 일하면서 장선명이 잘못을 사과하는 건 본 적이 없다.장선명이 잘못을 했다고 해도 그건 없었던 일로 될 테니까 말이다.“...”안지영은 안열의 말을 듣고 눈썹을 꿈틀거렸다.‘그럼 아까 한 말도 거짓말이었나?’안열이 안지영 앞으로 와서 안지영 목에 난 키스 마크를 발견했다.안지영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왜 갑자기...”“도련님이 이런 방식으로 사과한 겁니까?”“네?”“격렬하네요. 이렇게 안 대표님을 입막음하다니...”“...”안지영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무거워졌다.아무리 둔감하다고 해도 안열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안지영은 얼른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본인의 모습을 확인했다.목에 난 키스 마크들을 본 안지영은 그대로 숨을 들이켰다.“이...”하마터면 욕설을 뱉을 뻔할 정도였다.이 상태로 밖으로 나간다면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정도다.‘왜 하필 이런 집착남을 만나게 된 거지...’“좀... 과하긴 하죠?”안열은 안지영이 장선명 때문에 화가 나서 안열에게 화풀이할까 봐 약간 걱정이 되었다.오후 세 시가 되었는데 이제야 나오다니.두 사람이 얼마나 오랜 시간 붙어있었는지, 얼마나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안지영은 단단히 화가 나서 케이크를 크게 한입 떠먹었다.안열은 장선명이 제대로 해명하지 않아 안지영의 화가 덜 풀린 것인
“나태웅이 두려워하는 게 뭐 있어요!”안지영이 화를 내면서 얘기했다.나태웅은 장선명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안지영에게 있어서 나태웅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게다가 나태웅이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게 사람 맞나 싶을 정도였다.“나태웅은 극단적인 거지 멍청한 건 아니야.”나태웅은 본인에게 유리하고 불리한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안지영 앞에 나타난 걸 떠올리면... 장선명은 그런 나태웅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그래도 이 사진들은 다 사실이죠.”“네가 이 사진 때문에 화를 내는 건 기쁜 일이지만 너한테 제대로 얘기해야 할 게 있어.”거기까지 얘기한 장선명이 말을 끊었다.안지영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뭐요?”장선명과 결혼 준비를 하면서 안지영은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소문 속의 장선명은 냉철하고 칼같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안지영 앞의 장선명은 항상 웃는 얼굴로 자상하게 안지영을 대해주었다.그래서 안지영은 장선명이 도대체 왜 본인과 결혼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비즈니스 때문에 시작한 부부 연기인데 말이다!사실 처음부터 안지영은 장선명이 왜 본인을 도와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나태웅이 가져온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장선명은 안지영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코끝으로 안지영의 코끝을 가볍게 눌렀다.“그 사람이 살아있다고 해도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그 말을 들은 안지영은 심장이 순간 멎는 것 같았다.“정, 정말이에요?”‘잘못 들은 건가? 그 사람이 선명 씨한테 엄청 중요한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현재의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그 사람을 이미 다 잊었으니까 너랑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장선명은 진지한 말투로 얘기했다. 안지영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장선명을 쳐다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얘기했다.“그렇게 많은 여자들이랑...”“나랑 그 사람들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안열이 전에 얘기해줬을 텐데.”“그래도 남자들
“얘기해 봐. 어떻게 해야 화를 풀 거야.”“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걸 정도였다면서요! 내가 화를 안 내고 배겨요?”안지영이 차갑게 얘기했다.“...”장선명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면서 물었다.“내가 누구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는 거야? 나는 왜 모르겠지.”“이...”안지영은 인정하지 않는 장선명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화가 났다.“정말 화가 난 거야?”“당연하죠. 난 대용품이 되고 싶지 않다고요!”장선명은 화가 난 안지영을 보면서 본인이 왜 안지영에게 빠진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안지영은 느낀 것을 그대로 얘기하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가식적으로 돌려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래서 장선명은 그런 안지영이 좋았다.“누가 그래, 네가 대용품이라고. 나태웅이 그래?”장선명이 안지영의 두 볼을 가볍게 꼬집으면서 얘기했다.그 말투는 마치 딸을 대하는 아버지처럼 부드러웠다.안지영은 장선명을 힐긋 보더니 얘기했다.“수많은 사진이 증명하고 있잖아요.”그 사진만으로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그 사진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절대 나태웅을 믿지 마. 응?”“흥.”“아직도 화가 난 거야? 제발 내 말 좀 들어줘.”“안 들을래요!”안지영은 아예 고개를 홱 돌렸다.안지영은 너무나도 솔직하고 가감 없는, 상대방에게 본인이 왜 화가 났는지 잘 알려주는 사람이었다.장선명은 화가 나 등을 돌린 안지영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원래는 좀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반응을 보니 그만해야 할 것 같았다.“알았어. 설명할게.”한숨 자고 일어났지만 여전히 이 일로 화를 내는 걸 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안지영은 장선명의 말을 듣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니요. 됐어요. 설명하지 마요.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진실이 두려워서 듣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장선명은 웃으면서 얘기했다.“왜? 내가 널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그 말에 안지영은 또 참지 못하고 장선명을 가볍게 때렸다.오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
안지영은 오후 두 시에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하지만 안열은 사무실에서 안지영을 발견하지 못했다.‘설마 내가 한눈판 사이에 두 분이 나간 건가?’1시 30분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안열은 급한 마음에 얼른 안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를 받은 건 장선명이었다.“무슨 일이야.”그 말에서 안열은 이미 장선명의 짜증을 읽어냈다.안열은 약간 놀랐다.“선, 선명 도련님? 30분 뒤 안 대표님이 참석하셔야 하는 중요한 회의가 있습니다. 지금 안 대표님은 어디에...”휴게실에 있는 장선명은 고개를 숙이고 품에서 자고 있는 안지영을 쳐다보았다.오전에 너무 과했던 탓일까, 안지영은 계속 쭉 자고 있었다.“그냥 회의를 취소해.”“네? 그건...”“무슨 문제라도 있어?”“아, 아니요. 오늘 회의는 부승호도 참석하는 회의라... 알잖습니까.”부승호는 바로 하늘 그룹을 배신한 사람이다. 그러니 이번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장선명은 바로 알 수 있었다.장선명이 차가운 눈빛으로 얘기했다.“부승호한테 얘기해. 오늘 저녁 날 만나러 오라고.”“직접 나서서 안 대표님을 대신하실 생각입니까?”안열이 놀라서 물었다.예전에는 안지영이 성장할 수 있게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던가.그래서 안열과 장선명 다 안지영의 뒤에서 묵묵히 안지영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동안 안지영은 많은 일을 혼자서 해결했다.부승호와 마주하는 것도 안지영에게 있어서는 그동안의 실력을 검증할 가장 좋은 기회다.“무슨 문제라도 있어?”그 말에 안열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아닙니다!”안열은 여전히 장선명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장선명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안열은 얼른 눈치껏 전화를 끊었다. 장선명은 전화가 끊긴 것을 확인하고 바로 폰을 꺼버렸다.안지영은 이미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장선명은 안지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지금 몇 시예요?”“피곤하면 그냥 자.”장선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안지영은 눈
테이블에는 다른 사진이 더욱 많았다.나태웅은 정말 이를 갈고 해외로 간 것이 틀림없었다.이것까지 다 알아내다니...이건 장선명의 가장 어두운 과거이자 다시는 들추고 싶지 않은 일들이다.하지만 그 일들이 지금은 나태웅 때문에 다시 밝혀지게 되었다.그동안 장선명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마주할 수 없었던 과거들이었지만, 안지영이 건네준 사진을 보면서 장선명은 어느새 그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내려놓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지금 와서 과거의 일을 돌이켜보니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그 여자가 누구인지 얘기하라고요!”안지영이 화가 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러면서 장선명의 품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하지만 장선명은 여전히 안지영을 꾹 잡고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그리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안지영의 앞에서 사진을 바로 불태워버렸다.“뭐, 뭐 하는 거예요!”안지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장선명은 불에 탄 사진을 그대로 재떨이 속으로 던져버렸다.담배를 피우는 장선명을 위해 안열이 준비해 둔 재떨이였다.안지영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 그동안은 쓸모가 없었지만 지금은 아주 유용했다.테이블 위의 사진은 다 재떨이 안으로 들어가 활활 타올랐다.안지영은 멍해서 물었다.“그렇게 변명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변명? 이건 다 지나간 일일 뿐이야.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다 잊었고. 뭐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생각도 안 나네.”“...잊었다고요?”안지영은 믿을 수 없었다.안열이 그러지 않았던가.장선명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다고.사진 속의 여자들이 모두 비슷하게 생긴 걸 보면 장선명은 정말 그 여자를 아주 사랑한 것 같았다.그런데 그걸 잊다니.안지영은 믿을 수 없었다.그런 안지영의 모습을 본 장선명은 환하게 웃으면서 안지영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또 입술을 맞췄다.“읍... 아니, 읍...”‘미남계를 쓰겠다는 거야?’안지영은 약간 화가 났다. 원래 이런 건 그냥 두면 찝찝한 편이다. 사실을 알지 못하면 마음에 걸리니까 말이다.
사무실에 들어간 장선명은 안지영이 그를 등지고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이미 뒷모습에서부터 안지영의 화난 모습이 보였다.앞으로 다가가 의자를 돌린 장선명이 두 손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잡았다.그리고 웃는 눈으로 안지영을 바라보았다.안지영이 화가 나서 씩씩 대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더욱 환하게 웃었다.하지만 안지영은 그런 장선명을 보면서 더욱 화가 났다.“웃겨요?”“질투하는 거야?”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안지영은 장선명의 말을 듣고 약간 놀랐다.“화 안 났어요. 난 화를 잘 안 내는 사람이에요.”“그래?”“...”질투냐고?안지영은 질투가 뭔지 몰랐다.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가 다른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속이 좋지 않았다.생각에 잠겨있을 때 갑자기 안지영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장선명이 안지영을 번쩍 안아 들고 의자에 앉은 것이었다.장선명은 웃음기 가득한 시선으로 안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안지영은 놀라서 허둥대면서 얘기했다.“이거 놔요!”하지만 장선명은 움직이는 안지영을 놔주지 않고 그대로 입술을 가져갔다.안지영이 버둥댈수록 장선명은 더욱 깊게 안지영의 입술을 머금었다.안지영은 그런 장선명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결국 안지영이 숨을 쉬지 못하자 장선명이 안지영을 풀어주었다.안지영이 손을 들어 장선명의 뺨을 치려고 할 때, 장선명이 안지영의 손목을 잡고 웃으면서 물었다.“화났어?”“흥.”안지영은 화가 났다.그것도 단단히 화가 났다.안지영은 장선명이 점심 전에 도착한 것이 분명 그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안열이 알려줬을 테니까 말이다.그런데 와서 아무 해명도 하지 않고 입술부터 들이미니, 너무 미웠다.장선명은 그런 안지영을 보면서 짜증스러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오히려 속 편히 웃으면서 안지영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마지막에는 한숨까지 푹 내쉬었다.“그렇게 화가 난 거야?”말을 마치고는 안지영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안지영은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다.“오자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안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안열을 바라봤다. 안열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어휴, 됐어요. 더 얘기해 봤자 짜증만 나요.”더 말했다간 정말 참지 못하고 화를 낼 것 같았다.나태웅에 대해 할 욕은 이틀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였다.“...”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안지영은 뾰로통해진 채로 안열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안열은 휙 돌아서 사무실을 나갔다.지금 안열의 머릿속에는 나태웅에 대한 욕뿐이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감히 또 안지영을 찾아오다니.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온 건지......사무실에 홀로 남겨진 안지영은 아까 안열이 한 말을 떠올렸다.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평소에는 똑 부러지고 영리한 안지영이지만, 이번만큼은 안열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뻔뻔하다는 뜻이라면... 나태웅은 원래부터 그렇게 뻔뻔했다.하지만 이번은...안열은 복잡한 생각에 머리를 휙 털었다.그리고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장선명에게 전화를 걸었다.원래는 장선면은 점심쯤에 안지영을 데리러 올 예정이었지만, 안지영의 전화를 받고 바로 달려왔다.안지영의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장선명은 안열이 자리에 앉아 아이스팩을 발 위에 올려놓은 것을 발견했다.“다리는 왜 그래?”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안열은 깜짝 놀라 손에 쥔 아이스팩을 떨어뜨릴 뻔했다.장선명을 보자, 안열은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읏...!”하지만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묻는 장선명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안열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들었다.안열은 고개를 숙였다. 차마 나태웅 때문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해 그저 둘러댔다.“그냥... 실수로 넘어진 거예요.” “어떻게 넘어졌길래 거기만 그렇게 다치는 거야?” 장선명의 시선은 예리했다.보통 넘어진다면 무릎이 먼저 다치기 마련인데 안열은 무릎은 멀쩡하
나태웅은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태웅이 가져온 정보 때문에 안지영은 더욱 속이 복잡해졌다.안열은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약 좀 바르고 올게요.”그 말에 안지영은 생각이 끊겨버렸다.정신을 차린 안지영은 안열의 발등이 부어올랐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선명이 사랑하는 사람...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안열은 본 안지영은 결국 또 나태웅에게 화가 났다.“왜 이렇게 된 거예요. 정말 나태웅을 못 이기는 거예요?”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맞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밖에서 싸우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안열은 아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제가 만약 나태웅과 싸워서 이길 수 있었다면 진작 죽여버렸을 겁니다.”“...”진작 죽여버린다니.그 ‘진작’은 과연 언제일까?다시 생각해도 나태웅은 정말 독설만 퍼붓는 사람이었다. 안열을 볼 때마다 개라고 욕하니까 말이다.그래도 전에 동영 그룹에서 출근할 때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안지영은 우물쭈물하면서 안열에게 물었다.“두 사람, 전에도 안 좋은 사이였어요?”안열과 나태웅이 만날 때마다 안열은 대수롭지 않아 했고 나태웅은 화를 냈었다.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그렇게 물으면서 안지영이 구급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처리해 주었다.안열이 거의 소리를 지르면서 얘기했다.“앗... 아파요... 아파...”“...”안열은 평소에 고통에도 끄떡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파하는 것을 보니 나태웅이 얼마나 아프게 때린 것인지 알 수 있었다.“제가 무슨 원한이 있겠어요! 한 것도 없는데...”“...”“굳이 꼽자면... 안 대표님 일로 원한이 있는 거죠.”“나요?”“네. 저는 안 대표님이 선명 도련님과 결혼하기를 바랐으니까요. 아마도 그것 때문에 저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요?”안열을 말을 들은 안지영은 약간 마음이 복잡했지만 또 본인의 선택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안열은 장선명의 부하로
“난 대체 누구의 대용품이었어요?”안지영이 바로 물었다.안열은 장선명과 오랜 시간 함께 했으니 사진 속의 사람이 누구인지 다 알 것이다. 그러니 장선명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것이다.안열은 안지영의 말을 듣고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그건...”“두 사람은 왜 헤어진 거예요?”안지영이 또 물었다.“...”안열을 그 어느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안열은 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안지영이 얼마나 칼 같은 사람인지, 안열은 잘 알았다.물론 안지영과 장성명의 사이가 안지영 때문에 시작한 것이라고 하지만 장선명에게 설레지 않았다면 안지영은 장선명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안열은 결국 또 속으로 나태웅을 욕했다.“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선명 도련님이 안 대표님과 결혼하려는 건 안 대표님을 사랑해서지, 다른 사람의 대용품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니까요.”“사진 속의 여자들과 아직도 연락해요?”“절대 아닙니다. 제가 맹세할게요!”안열이 진지하게 얘기했다. 안지영이 괜히 장선명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안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열을 쳐다보았다. 안열은 그런 눈빛을 마주하고 약간 긴장했다.“진짜예요. 사진 속의 여자들과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선명 도련님이 얼마나 칼 같은 분인지 잘 알잖아요.”“하긴, 안열 씨는 선명 씨 사람이니까 그편을 들겠죠.”“아니요, 전 안 대표님 편입니다. 같은 여자로서요.”“나도 그 어떤 여자의 대용품이었겠죠.”“그건 다른 거죠! 그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까요. 나태웅이 왜 갑자기 이 일을 들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사람까지 들먹일 줄은 몰랐어요!”안열은 정말 나태웅을 죽여버리고 싶었다.요즘 나씨 가문에 생긴 일을 보면 나씨 가문 사람들은 다 하나같이 쓰레기였다.“죽었다고요?”안지영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안열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다들 모르는 일이잖아요!”안지영이 놀라서 얘기했다.장씨 가문 남자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냉정하다는 소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