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열은 주방에서 밥을 먹지 않는다. 동안 이곳에서는 여자의 지위가 아주 낮았다. 집안에서 홀대받는 여자는 식탁에 함께 앉을 자격조차 없어 늘 부엌이나 사람 없는 구석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이래서 안열은 강성이 좋았고 장선명 옆에 있는 게 좋았던 이유다.그동안 비록 장선명의 부하로 지냈지만 그의 곁을 벗어나 있을 때만큼은 밥 먹는 자유만큼은 보장됐다. 돈만 있으면 언제든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가 음식이 남든 말든 원하는 대로 시켜 먹을 수 있었다.하지만 동안은 달랐다. 여자는 혼자 밖에 나갈 수도 없었고 특히 공공장소에 나가려면 반드시 집안 남자의 동행이 있어야 했다. 식당마저도 남자석, 가족석과 철저히 분리된 여자석이 따로 있었다. 뿌리까지 뻗은 불평등함이 사람을 숨 막히게 짓눌렀다.지금 김이숙이 안열을 불러 세워 앉으라 하는 것도 따뜻한 배려가 아니라 분명 안열을 꾸짖기 위해서라는 걸 안열은 너무도 잘 알았다.안열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무슨 일이 있으면 여기서 말씀하세요.”“내 말이 이제 네게 안 먹히는 거야?”김이숙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웠다. 안열은 고개를 돌려 김이숙을 바라보았다.명령조가 가득한 어투와 시선은 그 어디에도 어머니의 온기는 없었다. 그 순간 안열은 문득 안이연이 살아 있을 때 어머니의 시선이 얼마나 따뜻하고 부드러웠는지를 떠올렸다. 안열은 자신도 똑같은 딸인데 왜 이렇게까지 차별이 심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친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고 살기도 했다. 특히 밖에서 지내는 동안 안열은 외부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점차 집안에 대한 집착을 끊고 어머니의 차별 또한 애써 잊으며 지냈다.하지만 지금 돌아와보니...이런 어머니를 보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르던 억압이 다시 몰려왔다.결국 안열은 숨을 고르며 김이숙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안열이 앉는 순간 원래 어둡던 김이숙의 얼굴이 더 싸늘해졌다. 그리고 매섭게 꾸짖었다.“누가 거기 앉으라 했어? 당장 일어나!”안열은 듣고 숨이 멈췄다.
이런 사람은 차라리 멀리하는 게 좋다. 나태현은 숨을 급히 몰아쉬었다.“그래서 고은지가 정말 살아 있는 거야? 어디에 있어?”짝!고은영은 화가 나서 손을 날려 나태현의 얼굴을 쳤다.“내가 모른다고 했잖아! 그리고 재 집에서 나가! 나가지 않으면...”‘내가 뭐?’고은영은 화가 나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나태현은 분노로 가득한 고은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빛 속에 한 줄기 위험이 스쳤다. 나태현의 얼굴은 따갑고 아팠다.고은영은 더 이상 나태현을 보고 싶지 않아 경비에게 말했다.“나 대표님을 모시고 나가 주세요!”경비는 눈치채고 말했다.“나 대표님, 나가시죠!”목소리는 차갑고 엄격했다.나태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은영을 바라보았다.하지만 평소 겁이 많은 고은영은 그 시선을 그대로 마주하며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나태현은 눈빛을 가라앉히고 결국 서늘한 기운을 품은 채 나갔다. 비록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원하는 답을 얻었다.고은영과 배준우 두 사람만 남았다. 고은영은 재빨리 약상자를 가져와 배준우의 상처를 소독했다.나태현은 정말 손이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나태현 얼굴의 상처를 보니 배준우도 만만치 않게 때렸음을 알 수 있었다.“나태현이 왜 이렇게 빨리 의심하죠? 혹시 장선명한테 들었어요?”고은영이 불만을 터뜨렸다.“장선명은 아니야. 장선명은 안 알려 줄 거야.” 장선명이 알았다면 훨씬 소식을 꼭꼭 숨겨 나태현이 알 리 없을 것이다.장선명이 나씨 가문의 사람에 대한 혐오가 어느 정도인지 배준우는 잘 알고 있었다. 고은영은 툴툴거렸다.“나씨 가문의 사람들은 진짜 싫어요.”싫어하는 정도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배준우는 고은영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린빌 집을 다시 찾는 방법을 생각해 봐.”“네.”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일부러 소란을 피워야만 나태현의 의심을 피할 수 있다면 그냥 소란을 피우면 되지 뭐. 어차피 직접 나설 필요도 없잖아.’강성은 이미 나태현의 의심 때
휴게실 안.진청아가 고은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원래는 도시락을 다 가져왔으니 고은영이 식사하려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들어온 뒤로 고은영은 계속 문 위에 몸을 기댄 채 있었다.“이 문이 방음이 되는데 들리세요?”“어렴풋이 들려.”배준우 나태현의 목소리는 들리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뭐가 들렸어요?”“그만! 좀 더 들어볼게.”배준우와 나태현이 할 수 있는 건 아마도 고은지에 대한 일뿐일 것이다.배준우가 어젯밤 자신처럼 참지 못하고 실토할까 봐 고은영은 걱정되었다. 하지만 절대 나태현에게 고은지가 동안에 있다는 걸 알려서는 안 된다. 만약 나태현이 안다면 고은지의 생활이 또다시 힘들어지기 때문이다.고은영은 나태현이 고은지를 찾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나태현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태현은 사람을 어떻게 관심하는지도 모르고 이런 남자에게 휘둘린다면 삶이 절망적일 것이라는 걸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은영은 놀라 목이 굳었다.“무, 무슨 일이에요?”“싸, 싸우는 것 같아!”“으악! 설, 설마요.”진청아는 깜짝 놀라 급히 고은영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고 조심스럽게 문을 조금 열었다. 문틈으로 살펴보니 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진, 진짜 싸우고 있어요.”진청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밖을 바라보았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비실에 신고했다.나태현은 정말로 무례했다. 강성이라고 다 자기 가문의 것으로 생각하고 이곳까지 와서 폭력을 쓰다니 참으로 어의 없다.고은영은 바깥 상황을 보더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본능적으로 휴게실에서 꽃병을 집어 들고 뛰어나가려 했지만 진청아가 막았다.“뭐, 뭐 하시려는 거예요?”“죽여버릴 거야. 감히 내 남편을 쳐!”고은영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도대체 누가 나태현에게 이런 권리를 준 거야? 볼수록 점점 나태웅과 똑같이 보여. 진짜 짜증 나!’진청아는 입술을 떨었다. 고은영의 몸이 지금 아주 소중
배준우는 나태현의 시선에 약간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나태현은 곧장 말했다.“고은영 찾으러 왔어.”배준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차갑게 나태현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에요?”“물어볼 게 몇 가지 있어.” “은영이가 형이 온 걸 알고 있지만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배준우는 냉랭하게 말하자 나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만나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면 두려워 못 만나는 거야?”“뭐라고요? 은영이가 형을 두려워한다고요? 왜 형을 두려워하죠?”“단지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이야.” 나태현의 말투는 단호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배준우는 나태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태현의 관찰력은 정말 예리하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나태현을 의심하게 했는지 배준우는 알 수 없었다. 배준우도 이 소식은 어젯밤에야 알게 되었는데 점심도 되기 전에 이미 나태현은 눈치챘다.“무엇을 물어보고 싶어요? 내가 대신 답해줄 게요.”“그러니까 정말로 날 못 보는 거야?”배준우는 숨을 깊게 들이켜고 나태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전례 없이 날카로웠다.“고은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하!”이 한마디에 배준우는 냉소를 터뜨렸다.“고은지가 어디 있다고요?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고은지가 살아 있어!”배준우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나태현은 날카롭게 끊었다.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형이 살아 있다고 믿으면 그렇게 믿어요. 하지만 어디 있는지는 몰라요.”“나 고은영을 만날 거야!”“소란 피우는 게 취미예요?”나태현은 할 말을 잃었다.“전에는 그냥 나태웅만 이런 줄 알았는데 왜 형도 이렇게 변했어요?”“나는 단지 내가 원하는 정보를 원할 뿐이야!”나태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확고했다. 배준우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나태현은 태도가 특히 강경했다. 오늘 여기 온 목적은 오직 고은지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다. 오는 길에 고은영이 분명 고은지의 소식을 알고 있다고 나태현은 확신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린빌 때문에 갑자기 조용해지지
점심때가 되자 남 아저씨 쪽에서 점심을 배달해 왔다.고은영이 임신한 이후 배준우는 식사에 신경을 써 거의 고은영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식사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는 주방에서 정성껏 준비한 것이었다. 고은영은 음식을 보더니 식욕이 생겼다. 고은지의 소식이 전해진 후 그녀의 기분이 한결 나아져 입맛이 돌아왔다. 배준우는 그런 고은영을 보며 말했다.“배고프지?”배준우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배고파요.”“오랜만이네. 그동안 배고픈 줄도 몰랐잖아.”요즘 고은영은 거의 뭐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다. 매번 식사할 때마다 마치 의무처럼 먹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분이 좋아져 무엇을 먹어도 맛있다.배준우는 고은지의 소식을 더는 묻지 않았다.진청아가 도시락을 준비해 놓자 민초희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배 대표님, 나태현 대표님께서 오셨어요.”고은영과 배준우는 침묵했다.나태현 세 글자를 듣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고은영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배준우가 나태현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묻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배준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담담하게 말했다.“나랑 나태현은 거의 연락이 없어.”“그래요?” 고은영이 눈살을 찌푸렸다.“날 못 믿어?”“그럼 왜 여기에 왔어요?”“어젯밤 네가 내게 말한 후부터 우리 함께 있었잖아.”고은영은 할 말을 잃었다.‘맞아. 그럼 나태현은 왜 온 걸까? 혹시 지영이가?’고은영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배준우는 어두운 얼굴로 민초희에게 말했다.“들여보내.”민초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나는 보고 싶지 않아요.”예전에는 화가 나서 나태현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나태현을 보면 실수할까 봐 보고 싶지 않았다.배준우는 안지영을 안심시키듯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만나지 않으면 오히려 나태현의 의심을 더 불러일으켜.”고은영은 할 말을 잃었다.‘맞아. 그러면...’“기억해. 나태현에게 좋은 얼굴 보이지 말고 그냥 그린빌에서 나가
안지영은 어찌 됐든 강성 사람이다. 세상이 뒤집혀도 안지영은 여전히 강성에 있다. 그런데 안열은 동안 출신이고 지금도 동안에 있으니 나태범은 손쓸 도리가 없었다. 정 집사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예전부터 나태범은 안지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집에 불을 질러버릴 정도로 안지영을 싫어했다.양지호가 나태현의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회장님께서 억지로 들이닥치셔서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어요.”나태현은 그저 담담히 짧게 대답했고 양지호를 탓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양지호는 대답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고은지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나태현의 정서는 다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나태현은 싸늘한 얼굴로 앞에 놓인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고은영 쪽은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고은영은 경찰에 신고하고 열쇠를 바꾸겠다며 난리를 피웠었다. 배준우의 곁에 있을 땐 나약해 보여 마치 조금만 큰소리를 쳐도 울어버릴 것처럼 보였지만 저리도 거세게 들이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고은영 이야기가 나오자 양지호의 얼굴빛이 조금은 누그러졌다.“오늘은 스카이빌 쪽에서 아무 소식이 없어요.”“아무 소식도 없어?”“예. 고은영 씨는 거기에 가지도 않았고 수리공을 불러 열쇠를 바꾼 흔적도 없어요.”나태현은 그 말을 듣더니 미간을 좁혔다.‘정말 아무 소동도 없는 건가? 전에 내가 이사 가지 않는다고 몰아붙이더니 이젠 가만히 있는다고?’“그렇게 조용해졌단 말이야?”나태현은 놀란 듯 양지호를 보았다. 양지호는 침묵했다.‘조용해진 걸까? 전에 고은영의 태도를 보면 도무지 잠잠해질 것 같지 않았는데 지금은...’“아마 완전히 조용해진 것 같네요.”양지호는 확신 없는 말투로 답했다. 하지만 고은영의 움직임만 보면 확실히 난동을 멈춘 것 같았다. 나태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았다.‘고은영이 정말 조용해진 걸까? 이렇게 오래 조용히 있으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배준우 씨께서 분명 고은영 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