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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Author: 새김결
“누구세요?”

문틈으로 낯선 젊은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박경언을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박경언은 멈칫한 뒤 한 걸음 물러서서 호수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맞는 집이었다.

가슴속에서 커지는 불안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전에 여기 살던 분은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여자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답했다.

“아, 이전 집주인 말씀하시는 거죠?”

“집을 저희한테 팔고 떠났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다른 도시에서 살아 보겠다고만 했어요.”

박경언이 애써 외면해 온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됐다.

“혹시 어디로 간다고는 말을 안 했습니까?”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박경언을 보면서 속으로는 곱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전에 심가영과 집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어딘가 마음고생이 심해 보였다.

집을 정리하다가 심가영과 눈앞의 남자가 함께 찍힌 사진도 한 장 발견했다.

누가 봐도 헤어진 사이 같았다.

심가영이 크게 상처받았다는 것도 어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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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가 가져간 나의 계절   제24화

    박경언이 고개를 들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에는 마지막 희망이 남아 있었다.두 사람은 여관의 작은 마당에 놓인 차가운 돌의자에 앉았다.심가영은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박경언 씨, 저는 너무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잊기 위해 마취하 전기경련치료를 받았어요.”“수첩에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해요. 하지만 저한테는 전생의 다른 사람이 겪은 이야기처럼 느껴져요.” “박경언 씨가 말하는 사랑도 느껴지지 않고, 미움도 느껴지지 않아요.”심가영은 멀리 ‘별빛고원’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불빛을 바라봤다. 목소리는 부드러워졌지만 뜻은 더 단단했다.“저는 지금 행복해요. 진우성 씨는 저한테 잘해 주고, 이곳의 생활은 저를 편안하고 충만하게 해 줘요. 제가 원하는 건 이게 전부예요.”“그러니까... 이제 저를 놓아주세요.”심가영은 고개를 돌려 맑은 눈으로 박경언을 바라봤다.“일부러 기억을 깨우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과거를 다시 떠올리면 그때의 고통도 같이 돌아올 거예요. 박경언 씨는 정말 제가 그렇게 되길 바라세요?”박경언은 온몸을 얻어맞은 것처럼 굳어졌다.‘나는 정말 가영이 과거의 고통을 기억해 내길 바라는 건가?’자신의 배신과 심혜민의 계략, 병원에서 홀로 버텨야 했던 날들, 자신이 직접 동의해 버린 끔찍한 전기 자극 치료까지 전부 떠올리게 하고 싶은가.아니었다. 그렇게까지 이기적일 수는 없었다.이제서야 심가영의 눈에는 빛이 났고, 얼굴에는 마음에서 우러난 미소가 있었다.그런 심가영을 자기 손으로 다시 지옥 같은 기억 속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박경언의 가슴을 거대한 슬픔과 뒤늦은 깨달음이 덮었다.처음부터 잘못이었다.심가영만 찾으면 사과하고 만회해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심가영에게 진짜 해방은 자신을 포함한 과거를 완전히 잊는 일이었다.박경언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축 처지면서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고집과 힘도 전부 빠져나갔다.한참 뒤 지친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 그녀가 가져간 나의 계절   제23화

    심가영은 맑은 눈으로 박경언을 바라봤다. 그 안에는 분명한 거리감이 있었다.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차분한 말투가 박경언에게는 잔인할 만큼 낯설었다.“선생님,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저는 선생님을 모릅니다.”심가영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덧붙였다.“여기가 제 집이에요. 저는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겁니다.”‘선생님’이라는 낯선 호칭이 차가운 바늘처럼 박경언의 가슴에 박혔다.심가영은 자신을 모른다고 했다. 이곳이 자기 집이라고도 했다.절망과 공포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박경언은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며 찾아다닌 끝에 겨우 심가영을 만났다. 그런데 돌아온 말은 너무도 가벼운 ‘모릅니다’라는 이 한 마디였다.진우성은 손을 뻗어 심가영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면서 박경언에게 분명히 말했다.“숙박하러 오신 게 아니라면 제 손님들과... 제 약혼녀를 더는 불편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약혼녀...’박경언의 몸이 크게 흔들리면서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심가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연기하는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했지만, 심가영은 진우성 쪽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기댔다. 완전한 신뢰와 의지가 담긴 행동이었다.힘겹게 찾아왔지만 박경언의 자리는 이미 없었다.심가영은 깨끗하고 완전하게 잊은 뒤였다.설요시 가을의 차가운 공기가 칼날처럼 박경언의 가슴속을 베었다. 어렵게 평온을 되찾은 작은 산간 마을에도 낯선 파문이 번졌다. 그렇다. 이제 마지막 결말이다:박경언은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별빛고원’ 근처의 작은 여관에 방을 잡고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버텼다. 심가영이 정말 자신을 잊었다는 것, 둘이 함께한 10년까지 잊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박경언은 두 사람의 과거를 ‘증명’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시도했다.핸드폰에 소중히 간직해 온 사진을 꺼내 한 장씩 심가영에게 보여 줬다. 함께 여행했던 사진, 생일을 축하하던 사진, 박경언이 소원을 빌었던 사찰 앞에서 서로를 안고 찍은 사진도 있었다. 사진 속 심가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박경언에게 기

  • 그녀가 가져간 나의 계절   제22화

    심가영과 진우성의 관계는 설요시의 봄처럼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얼었던 땅이 풀리고 새싹이 올라오듯 억지스럽지 않고 따뜻했다.거창한 고백은 없었다. 노을이 지는 어느 저녁, 두 사람은 새로 정비한 트레킹 코스를 함께 점검하고 돌아오다가 진우성이 자연스럽게 심가영의 손을 잡았다. 심가영은 잠시 걸음을 늦췄다가, 이내 힘을 빼고 진우성의 손을 마주 잡았다.마주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대신했다.그 뒤의 나날은 달콤하고 평온했다.둘은 함께 펜션을 운영하고 관광 코스를 계획하며 여러 지역에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았다.한가한 날이면 진우성이 오토바이에 심가영을 태우고 초원 깊숙한 곳까지 가서 들꽃이 핀 풍경을 보여 줬다.심가영이 책상에 앉아 일할 때는 좋아하는 유자차를 말없이 옆에 놓아주기도 했다.심가영이 웃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여유와 행복이 얼굴 전체에 부드러운 빛처럼 번졌다.안개에 가려진 듯했던 과거는 거의 잊혀 갔다. 수첩은 상자 맨 아래에 들어간 채 먼지가 쌓였다. 설요시와 별빛고원, 진우성이 심가영에게는 지금의 전부이자 현실의 행복이었다.그날 오후가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가을비가 한 차례 지나간 뒤 하늘은 씻어 낸 듯 맑았다.심가영은 마당 정자 아래에서 장기 투숙객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곧 시작될 유성우 시즌 행사를 소개하고 있었다.진우성은 안쪽 사무 공간에서 장부를 확인하고 있었다.문에 달린 종이 맑게 울리면서 펜션의 나무문이 열렸다.빛을 등진 채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크고 훤칠한 체구에, 작은 마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값비싼 코트를 입고 있었다. 지친 기색과 가라앉은 분위기가 몸에 깊이 배어 있었다.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심가영은 낯선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주변의 공기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남자의 눈은 깊고 복잡했다. 믿을 수 없다는 충격, 잃은 것을 되찾았다는 벅찬 기쁨, 바닥을 알 수 없는 고통과 후회로 한꺼번에 흔들렸다.‘

  • 그녀가 가져간 나의 계절   제21화

    갑자기 손님과 관심이 크게 늘자, 심가영과 진우성은 전보다 더 긴밀하게 움직여야 했다.서비스를 어떻게 보완할지, 취재 요청에 어떻게 대응할지, 펜션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 늘어난 수요를 어떻게 받아낼지 함께 논의했다.매일 가까이 지내는 동안, 심가영은 진우성이 자신에게 품은 마음을 점점 더 숨기지 못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느꼈다.진우성은 심가영의 위가 좋지 않다는 걸 기억하고, 아침마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말없이 챙겨 줬다.심가영이 밤늦게 자료를 정리할 때면, 눈이 덜 피로한 스탠드와 잘라 둔 과일을 조용히 책상 한쪽에 놓고 갔다.투숙객들이 ‘사장님이랑 사모님 진짜 잘 어울려요’라면서 장난을 치면, 귓볼까지 붉어지면서도 부정하지 못하고 슬쩍 심가영의 반응을 살폈다.진우성의 마음은 복잡하지 않았다. 꾸밈없이 따뜻했고 매일의 작은 배려로 오래 이어졌다.한때 얼어붙었던 심가영의 마음도 설요시의 맑은 햇빛과 눈 녹은 물, 진우성의 서툴지만 진심 어린 다정함 속에서 조금씩 풀렸다.아침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진우성을 보는 일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함께 손발을 맞춰 일을 끝낸 뒤, 눈을 마주치면서 웃을 때면 가슴 한쪽이 은은하게 달아올랐다.심가영은 더는 그 마음을 피하지 않았다. 천천히 대답해 보기로 했다.진우성이 우유를 건네면 부드럽게 ‘고마워요’라고 말했다.진우성이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면 괜찮다며 웃어 보이기도 했다.가끔은 외할머니에게 들었던 설요시의 옛이야기나 어린 시절 추억을 먼저 꺼내 진우성에게 들려줬다.진우성도 심가영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남자의 눈빛은 날이 갈수록 밝아졌고, 일할 때도 전보다 더 힘이 넘쳤다.펜션과 마을을 찾는 사람이 크게 늘자 지방 행정기관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설요시장이 담당자들과 함께 직접 펜션을 방문해서 현장을 둘러봤고, ‘별빛고원’이 지역 관광과 상권을 함께 살린 사례라며 높이 평가했다.심가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대도시에서 쌓은 프로젝트 관리와 기획 경험에, 그동안 직접 익힌

  • 그녀가 가져간 나의 계절   제20화

    전환점은 늦가을에 찾아왔다.그해 설요시 일대에는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규모 유성우가 예보됐다.맑은 밤하늘을 수많은 별똥별이 길게 가르며 쏟아졌고, 어두운 산자락 위 풍경은 꿈처럼 아름다웠다.심가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곧 ‘별빛고원에서 만나는 유성우’를 주제로 홍보 문구와 영상을 만들었고, 예전에 함께 일했던 여행 크리에이터들에게 연락했다. ‘별빛고원’ 펜션을 유성우와 별을 보기 좋은 숙소로 알리기 시작했다.‘별빛고원에서 침대에 누워 별똥별을 만나 보세요!’라는 문구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단번에 끌었다.원래 한산했던 마을로 유성우를 보려는 여행객이 몰려들었다.미리 준비를 끝낸 ‘별빛고원’은 매일 만실이었고, 예약은 두 달 뒤까지 꽉 찼다.진우성은 하루 종일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바빴고, 심가영도 프런트 응대부터 행사 기획까지 안팎을 뛰어다녔다. 사람이 모자라는 날에는 주방에 들어가서 간단한 음식까지 직접 만들었다.몸은 바빴지만 심가영의 볼에는 건강한 혈색이 돌았고 눈빛은 밝게 빛났다. 자신의 능력이 필요한 곳을 찾았다는 충만함이 표정에 드러났다.성수기가 지나고 정산해 보니, 그 분기 이익은 펜션을 연 뒤 지금까지 벌었던 금액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컸다.어느 저녁, 진우성은 심가영을 마당으로 불렀다. 자작나무는 잎을 모두 떨군 뒤였고 굵은 가지가 달빛 아래 힘차게 뻗어 있었다.진우성은 두툼한 봉투 하나를 심가영에게 건넸다.“가영 씨, 이번 분기 성과급이에요.”진우성의 목소리에는 시원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진짜로 가영 씨가 아니었으면 이 펜션, 올겨울도 못 넘겼을 겁니다. 고마워요.”심가영은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었다.고개를 들어 드문드문 밝게 빛나는 별을 바라봤다.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 낸 보상이 손바닥에 실린 무게로 전해지자, 입가에 편안하고 진짜 같은 미소가 번졌다.“저도 고마워요, 저한테 이 일을 맡겨 줬잖아요.”이곳에서 심가영은 누군가의 약혼녀도, 누군가의 언니도 아니었다. 그저 심가영일 뿐

  • 그녀가 가져간 나의 계절   제19화

    설요시의 하늘은 심가영이 지금껏 본 적이 없을 만큼 맑고 높았다.공기에는 소나무 잎의 서늘한 향과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매연과 콘크리트 냄새가 가득한 대도시와는 전혀 달랐다.심가영은 작은 마을 끝자락에 있는 오래된 단독주택을 빌렸다. 조그만 마당에는 수령이 수십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자작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아침마다 새소리에 눈을 떴고, 창을 열면 짙푸른 산 능선이 멀리 펼쳐졌다.마을 사람들처럼 장에 가서 싱싱한 채소를 사고 직접 밥을 해 먹었다. 가끔은 이웃 아주머니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거나, 겨울에 쓸 두툼한 이불을 손질하기도 했다.수첩은 가끔 꺼내 봤지만 ‘박경언’과 ‘심혜민’에 관한 지난 이야기는 남의 인생을 읽는 것처럼 낯설었다. 마음속에도 큰 파문이 일지 않았다.마취하 전기경련치료는 부드러운 지우개처럼 날카롭던 기억의 모서리를 흐리게 만들고 옅은 자국만 남겨 놓았다.심가영은 지금의 고요한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누군가를 위해 계속 희생할 필요도, 버림받을까 불안해할 이유도, 비교와 원망 속에서 살아갈 필요도 없었다.설요시의 맑은 산과 물에 씻긴 것처럼 마음이 한결 넓고 편안해졌다.가슴속에서는 자주 또렷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심가영, 지금이 네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날들이야.’...마을은 크지 않았고 생활의 속도도 느렸다. 심가영이 가지고 온 돈은 적지 않았지만 평생 저축만 쓰면서 살 수는 없었다. 이곳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수입도 얻을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돌이 깔린 골목길을 천천히 걷다가 ‘별빛고원’이라는 이름의 펜션을 발견했다.위치는 훌륭했다. 넓은 초원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었고 멀리 눈 덮인 설산도 보였다. 하지만 손님은 거의 없었고 간판도 낡아 있었다.심가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프런트 뒤에서는 굵은 니트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손가락은 생각에 잠긴 듯 책상을 일정하게 두드렸다.27, 8살쯤으로 보였다. 짙은 눈매와 단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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