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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가져간 나의 계절
그녀가 가져간 나의 계절
Author: 새김결

제1화

Author: 새김결
심혜민은 밝고 붙임성이 좋았다. 어디서든 분위기를 환하게 만드는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반대로 말수가 적고 조용한 심가영은 사람들 사이에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다.

박경언이 심혜민을 처음 본 날부터 심가영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따라붙었다.

그때마다 심가영은 스스로를 달랬다.

‘10년을 함께했는데. 그럴 리 없어.’

하지만 현실은 그 믿음을 잔인하게 깨뜨렸다.

박경언은 계단에서 떨어진 심가영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상 곁을 지키면서, 수액 때문에 손이 차가워질까 봐 간호사에게 온찜질 팩까지 부탁해 손을 따뜻하게 해 줬다.

“그 키스는 그냥 실수였어.”

박경언은 그렇게 말했다.

“혜민을 너로 착각했어. 예전의 너처럼 젊고 밝고 잘 웃는 모습이 겹쳐 보였던 것뿐이야.”

“가영아, 넌 너무 강하고 혼자서 뭐든 해내려고 하잖아. 나한테 기대지도 않고. 가끔은 내가 너한테 필요 없는 사람 같아.”

“그런 일은 다시는 없을 거야. 혜민도 네 동생이고 아직 어리잖아. 이번 한 번만 너무 몰아붙이지 않으면 안 될까?”

심가영은 눈을 내리깔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이런 말까지 하는 건, 내가 심혜민을 집에서 내보낼까 봐 그러는 거지?”

박경언의 말문이 막혔다. 박경언은 심가영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가영아, 지금 화난 거 알아. 괜찮아. 네 화가 풀릴 때까지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

잡힌 손을 뺀 심가영은 몸을 돌리면서 박경언에게 등을 보였다.

그리고 뒤에서 박경언의 한숨이 들렸다. 꼭 철없는 아이를 달래다 지친 사람처럼 들렸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심혜민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오빠, 나 집에 혼자 있으니까 너무 무서워. 와서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언니를 일부러 민 건 아니야. 언니가 오빠를 때리는 걸 보니까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

[나중에 진정하고 생각해 봤는데, 진짜 그렇게 세게 민 것도 아니거든. 언니가 왜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는지 나도 모르겠어.]

박경언은 낮은 목소리로 심혜민을 몇 마디 달랜 뒤 심가영에게 말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어. 금방 다녀올게.”

박경언은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그 이후 심가영이 퇴원하는 날까지 박경언은 병원에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다리 부상도 다 낫지 않았지만 심가영은 퇴원을 택했다.

다른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는 것이 더 싫었다.

며칠 동안 찾아오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 하나 다르지 않았다.

모두 심가영에게 심혜민을 용서하라고 했다.

심혜민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친구도, 직장 동료도 심가영을 바라보는 눈에는 짙은 비난이 담겨 있었다.

“혜민이는 아직도 어린애잖아. 혜민이 엄마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그 화를 애한테 풀면 안 되지.”

“혜민이한테 남은 가족은 언니인 너 하나뿐이야. 너까지 혜민을 미워하면 진짜 세상에 혼자 남는 거라고.”

가장 친한 친구 주유림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것을 듣자, 심가영은 가슴이 싸늘해졌다.

원망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심혜민을 홀대한 적도 없었다. 심혜민이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학비와 준비 비용을 마련해서 고등학생 때 해외로 보내 줬다.

사람들은 한 가지 사실을 너무 쉽게 잊고 있었다. 두 자매의 아버지 심종근은 심가영이 세 살도 되기 전에 심혜민의 어머니와 집을 나갔고, 가지고 있던 재산까지 모두 챙겨 떠났다.

심가영과 어머니에게 남겨진 것은 숨이 막힐 만큼 큰 빚뿐이었다.

심가영의 어머니는 남편을 향한 원망을 딸에게 돌렸다. 악착같이 일해 심가영을 먹여 살리면서도 틈만 나면 심가영을 몰아세웠다.

심가영은 이를 악물고 공부해 이름 있는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뒤 대기업에 취직했다. 박경언을 만나서 삶이 겨우 제자리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그 무렵 심씨 집안 친척들이 심혜민을 데리고 심가영을 찾아왔다.

“종근이랑 재혼한 아내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 이제 이 아이 혼자 남았어.”

“쟤는 이제 겨우 13살이야. 법원에서 미성년후견인을 정해야 하는데, 가까운 성년 친족이 너뿐이잖아. 적어도 성인이 될 때까지 네가 맡아 주는 게 맞지 않겠니?”

심종근은 아버지라는 인간이면서도 그 긴 세월 동안 전화 한 통, 생활비 한 번 보낸 적이 없었다.

결국 법원 절차를 거쳐 가까운 성년 친족인 심가영이 심혜민의 미성년후견인이 됐다. 자신과 어머니의 삶을 무너뜨린 두 사람이 남긴 아이를 이제 심가영이 책임져야 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심가영은 심혜민을 집으로 데려왔다.

심가영도 겨우 20살이 넘었다. 그런데 13살 동생을 엄마처럼 돌봐야 했다.

업무가 너무 몰리는 날이면 심혜민을 회사에 데려갈 수밖에 없을 때도 있었다.

심종근과 심혜민의 어머니에게는 심혜민이 유일한 딸이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심혜민은 밝고 거리낌 없는 성격이었다.

처음에는 심혜민을 불편해하던 심가영의 친구와 동료들도 차츰 심혜민을 좋아하게 됐다.

“네 동생이 너보다 훨씬 붙임성이 있다.”

심가영은 주변에서 그런 말을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었다.

이제는 10년을 사랑한 사람마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심가영 님... 일어나 보세요...”

흐릿한 의식 사이로 누군가 다정하게 심가영의 이름을 불렀다.

심가영의 생각이 끊어졌다. 눈을 떠 보니 이미 치료가 끝나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간호사가 머리에 붙어 있던 장비를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당분간 기억력이 떨어질 수 있어요. 치료 뒤에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이니까 생활 리듬 잘 지키시고 충분히 쉬세요.”

“다음 예약 날짜도 잊지 마시고요.”

심가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간호사의 말을 휴대하던 수첩에 빠짐없이 적었다.

마취하 전기경련치료가 반복될수록 기억에서 빠져나가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은 전부 수첩에 기록해 두었다.

과거를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기억은 짙은 안개 너머에 있었다. 마치 남의 일을 지켜보듯 차분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수첩의 주의사항 앞쪽에는 붉은색 굵은 글씨로 적어 둔 문장들이 있었다.

[첫째. 심혜민의 주민등록 주소를 옮겨 세대를 분리한다.]

[둘째. 박경언과 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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