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윤은 옆으로 밀려나 그대로 멍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조차 잠시 알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준서는 재윤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쳤다.“나한테 형이라고 해!”재윤은 비록 반응이 느렸지만, 그래도 말은 알아들을 줄 알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외삼촌이 내가 형이라고 했는데...”준서는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는 절대 못 넘어가겠다는 듯, 재윤 코앞에 손가락을 들이대며 씩씩댔다.“너 키도 나보다 작잖아! 무슨 형이야! 형이라고 안 부르면 나 절대 안 놀아줄 거야!”재윤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싫어하는 게 느껴져... 그래도, 그래도 같이 놀고 싶어.’재윤은 준서에게서 왠지 모르게 유하의 향기를 느꼈다. 그래서 더더욱 가까이하고 싶었다.형과 동생의 개념이 애초에 분명하지 않았던 재윤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형...”“형아.”순간 준서의 기분이 확 풀렸다. 입가가 슬쩍 올라가더니, 다시 호기심이 번졌다.“너, 나랑 진짜 놀고 싶어?”재윤은 고개를 꾸벅 끄덕였다.그 눈빛에 마음이 으쓱해진 준서는 고개를 높이 치켜들었다. 예쁜 얼굴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좋아. 근데 나랑 놀고 싶으면 내 말 잘 들어야 해. 내가 시키는 건 뭐든 해야 해.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동생이라고 하지 마. 내가 형이야!”그 순간, 준서는 아버지의 냉정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살짝 망설이더니 덧붙였다.“어른들 앞에서는 형이라고 안 불러도 돼. 대신 오늘 있었던 일 절대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안 그러면 다시는 안 놀아줄 거야.”재윤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준서의 손을 잡으려 했다.‘엄마랑 있을 땐 늘 이렇게 했는데...’하지만 준서는 그 손을 탁 치며 뿌리쳤다.“만지지 마!”재윤은 또다시 얼어붙었다. 왜 화를 내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몸을 움츠린 채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그 모습을 본 준서는 이상하게 기분이 상쾌했다.‘이렇게
옆에서 지켜보던 남진은 괜히 마음이 쓰였다.‘언제 저 꼬마가 나한테 저렇게 다정했던 적이 있었나?’‘팔은 안으로 굽는다던데, 얘는 대놓고 밖으로만 굽네.’...한빛초등학교 교문 앞.남진은 차를 세우고 내려서 재윤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멀리서 눈에 띄는 두 사람이 보였다. 승현과 연우였다.그들 앞에는 준서가 서 있었고, 셋이 함께 나온 게 분명했다.남진은 잠시 얼굴을 굳히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재윤과 함께 다가가 멀찍이서 인사를 건넸다.연우는 뜻밖의 사람을 본 듯 반가워하며 시선을 재윤에게로 돌렸다.그녀는 손을 뻗으며 말했다.“이 아이가 재윤이지? 참 귀엽네.”하지만 손길이 닿기도 전에 재윤이 몸을 홱 피했다.허공에 멈춘 연우의 손이 애매하게 공중에 걸려 있었다.남진도 난처해져서 서둘러 변명했다.“오해하지 마. 얘가 워낙 낯을 많이 가려서 그래.”연우는 이내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괜찮아. 조용하면서도 귀엽네.”배씨 집안 얘기는 연우도 조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구체적인 건 몰라도, 재윤이 집 안에만 갇혀 지냈다는 소문 정도는 알고 있었다.겉모습은 멀쩡해 보이는데 밖에 잘 안 나왔다면, 아마 마음이 아픈 거겠지. 굳이 이런 아이한테 서운할 건 없었다.연우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재윤이 이제 여덟 살이지? 준서보다 한 살 많네. 형이라고 해도 되겠다.”그는 옆에 선 준서의 손을 잡아끌었다.“준서야, 인사해. 이쪽은 재윤 형이야.”준서는 남진 뒤에 꼭 붙어 있는 재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형이라는 말이 전혀 내키지 않았다.‘뭐야, 나보다 키도 작은데? 형이라니, 웃기고 있네.’재윤은 외삼촌 등 뒤에 꼭 붙어 있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준서를 바라봤다. 눈빛엔 호기심이 가득했고, 괜히 호감까지 느껴졌다.‘왠지... 준서한테서 엄마 냄새가 난다.’그 기분 좋은 친근함 때문인지, 재윤은 결국 남진 뒤에서 한 발 나와 준서 쪽으로 가까이 갔다.남진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밀
밤은 이미 깊었고, 사람들은 충분히 놀다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그날 술자리 호스트였던 남진은 클럽 입구에서 일행들을 차에 태워 보내고 있었다.이제 남은 사람은 몇 사람뿐이었다.남진은 연우가 승현의 차에 오르는 걸 보고는, 참지 못하고 승현을 한쪽으로 끌어냈다.“솔직히 말해. 지금 하연우한테 진짜 어떤 생각 하고 있는 거냐?”재벌 2세 무리 안에서 연우는 원래 다들 어릴 때부터 함께 어울리던 사이였다.게다가 연우는 어려서부터 뭐든 잘 해내는 애였기에, 자연스레 무리의 중심에 서곤 했다.승현은 고개를 살짝 돌려 남진을 바라봤다.달빛 아래 남자의 눈빛엔 술기운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차갑게 맑아 있었고, 목소리마저 담담했다.“너랑 무슨 상관이야?”남진은 울컥했다.“같은 친구 사이에 어떻게 상관이 없냐?”“연우랑 나도 어릴 때부터 알아 온 사인데, 내가 좀 걱정하면 안 돼?”그는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야, 네가 진짜 연우한테 마음 있으면 먼저 결혼부터 정리해. 양쪽 다 깔끔하게 정리해야지. 이도 저도 아니게 끌고 가면 결국 누가 힘들겠냐? 마지막에 머리 아픈 건 너라고.”승현의 눈매가 서늘하게 번졌다.“내 일에 참견하지 마. 너나 네 집안 문제부터 제대로 챙겨.”남진은 피식 웃었다가, 곧 씁쓸해졌다.“아니, 좋게 얘기하는데 꼭 친구 마음에 대못을 박아야 속이 시원해?”배씨 집안 꼴이 개판이라는 건 누구보다 남진 본인이 잘 알았다.몇십 년 된 구질구질한 일들, 지겹도록 따라다니는 소문들. 모를 리 없었다.‘알면서도 이렇게 들먹이니까 더 열 받네.’결국 남진은 주먹으로 승현 어깨를 쿵 치고 말았다. 오래된 친구 사이였으니, 진심으로 화낸 건 아니었다. 치고 나서도 결국 속마음을 꺼냈다.“나는 진짜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너도 알잖아. 우리 집 꼴. 우리 아버지 바람피우다 집안이 어떻게 됐는지. 어머니는 해외로 나가 버려서 십 년 넘게 얼굴도 못 보고, 우리 누나 사고 났을 때도 남처럼 굴었다. 집안은 산산
승환이 연등을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누나, 저 이렇게 뚱뚱하지 않아요!”유하는 웃으며 몸을 쏙 피했다.“수정해 달라고? 그런 건 없어.”둘은 한동안 티격태격 장난을 치다가, 여기저기 흩어진 펜과 도면을 정리했다. 그날 밤, 승환은 아예 환자 침상 밑 간병인 침대에 드러누워 금세 잠들었다.며칠 뒤면 개강이었다.승환의 지도교수는 과학기술원 수학과의 석학 교수로, 수학계에서도 손꼽히는 원로였다.기대와 기준이 워낙 높아 학기가 시작되면 사적인 시간은 거의 사라질 것이다.그래서였을까... 승환은 남은 며칠을 붙잡듯, 일부러 병실에 남아 유하 곁을 지켰다....그날 밤, 배남진은 자기 프라이빗 클럽의 룸에서 오래된 친구들을 불러 간단한 자리를 마련했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발신자는 재윤이었다.늘 말수가 적고 연락도 드문 아이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남진은 반사적으로 화면을 열었다.연등 사진 한 장.연등의 연꽃잎마다 작은 동물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짧은 문구가 함께 붙어 있었다.[엄마가 그려줬어요. 이거 진짜 좋아요.]‘소유하가... 이런 솜씨도 있었나?’남진은 잠깐 놀라다가, 무심코 옆자리를 흘끗 봤다. 승현이 있었다.가슴 어딘가가 이유 없이 뜨끔했다.남진은 재윤이 유하를 엄마라 부른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특히 승현에게는 더더욱.승현이 유하를 얼마나 못 견뎌 하는지 뻔히 알았고, 쓸데없이 감정을 건드려 좋을 게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숨겼다.‘그런데...’시선이 다시 미끄러져, 승현 반대편에 앉은 연우에게 멎었다.둘이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 남진의 미간이 무의식적으로 찌푸려졌다.남진이 유하를 미워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즉, 승현에게 약을 먹여 임신시키고, 그걸로 결혼까지 몰아부쳤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정해진 승현과 연우의 약속까지 망쳤다.남진과 연우, 둘은 말하자면 같은 편이었고, 함께 자라 온 식구였다.외인과 식구를 저울질
공휴일 아침.유하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준서였다.최근 준서가 전화를 거는 빈도가 부쩍 잦아졌다.‘이상하네. 지난번에 화내는 걸 보면, 최소 몇 달은 연락 없을 줄 알았는데...’예상 밖이었다.[엄마... 내일 개학이에요. 엄마가... 학교에 데려다줄 수 있어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준서의 목소리는 축 가라앉아 있었다.유하는 순간 멈칫했다.“아프니? 목소리가 왜 그래?”잠시 머뭇거리던 준서가 대답했다.[응... 몸도 안 좋고...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유하는 침묵에 잠겼다. 잠시 후 낮게 말했다.“아프다니, 아빠는 뭐 하고? 제대로 안 챙겨 주는 거야? 전화 아빠한테 바꿔 줘. 내가 직접 얘기할게.”...오씨 저택.준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바라봤다.다리를 넓게 벌린 채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는 남자.“아빠, 엄마가 바꿔 달래요.”승현은 준서를 흘겨본 뒤, 핸드폰을 가로챘다.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걸렸다.“여보, 몸은 좀 괜찮아졌어?”[대체 뭐 하자는 거야!]유하는 일말의 인사도 없이 쏘아붙였다.승현은 태연히 대답했다.“육아는 부부의 공동 책임이잖아. 아들이 엄마 손잡고 학교 가고 싶다는데,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야?”남자의 웃음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이가 어떤 상황이든, 부모로서 곁에 있어 주는 건 기본이지.’‘그건 맞아...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재판이 머지않았다. 승현이 이렇게 자꾸 다정한 척 나오는 게 그녀는 오히려 불안했다.‘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이미 하연우한테 마음 다 줬으면서, 왜 날 여전히 붙잡고 있는 거지?’‘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서?’[나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야. 병원 냄새 나는 사람이 아이 옆에 가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당신이 아버지잖아. 직접 학교에 데려다줘. 난 나아서 괜찮아지면 그때 아이 옆에 있을게.]유하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재판이 끝나기 전까진 그 어떤 틈도 보여선 안 됐다.
유하는 남진의 부탁을 단칼에 잘랐다.그렇다고 완전히 모른 척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남진을 따로 불러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제가 전문가는 아니라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 자폐 증상이 있는지 의심스러워요.”“배남진 씨가 보호자니까, 꼭 시간을 내서 같이 있어 주세요. 가끔은 심리 상담도 받아보게 하고요.”“아동기 심리 문제는 가볍게 볼 게 아닙니다. 빨리 잡아야 커서도 덜 힘들어요.”남진의 가슴이 먹먹해졌다.‘내가 그걸 몰라서 안 한 게 아니야.’사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재윤을 심리 상담에 데려갔다.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이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자신마저 죽을 뻔했던 그날 이후, 재윤은 극심한 충격 속에 일부 기억을 잃었다. 사건 당시의 정황은 전혀 떠올리지 못했지만, 그 상처는 마음속에 깊게 남아 있었다.말수는 점점 줄어들고, 대부분의 사람을 거부했다.게다가 나이를 조금 더 먹은 뒤엔, 엄마를 찾아 집을 뛰쳐나가는 버릇까지 생겼다. 그 때문에 납치까지 당했으니...‘그래도 다행인 건, 아직 나를 거부하지는 않는다는 거지.’남진은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자신만으론 부족했다. 재윤은 여전히 틈만 나면 엄마를 찾았다.그래서 더더욱, 남진은 유하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재윤은 유하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달라졌다.엄마라고 착각하는 것은 문제였지만, 그 외엔 너무도 정상적이었다.적어도 이제는 함부로 집을 뛰쳐나가지 않았다. 웬만한 상담사보다 효과가 확실했다.‘어떻게든 소유하가 조금만 더 곁에 있어 준다면...’남진은 후회가 몰려왔다.‘내가 왜 그때 그렇게 소유하를 몰아붙였을까?’‘이제 와서 부탁 하나 하는 것도 이렇게 어렵게 됐잖아.’그는 머릿속을 쥐어짜며 방법을 궁리했다. 그때, 유하가 핸드폰을 들고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발신자는 유하의 시아버지, 오광진이었다.전화를 받은 유하에게, 오광진은 주말에 본가로 와서 식사하자고 했다.시아버지가 말하길, 시어머니가 유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지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