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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서한월
늦은 저녁, 다크문 칵테일 바.

어두운 파란색의 바 안 한구석에 예쁘장한 여자 두 명이 마주 앉아 있다.

그 중 똑 단발한 여자가 갑자기 표정을 팍 구기며 분노했다.

“오승현은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대놓고 너 엿 먹이는 거 아니야?”

강이솔은 화 난 표정으로 손에 든 핸드폰을 유하의 얼굴 가까이에 갖다 댔다. 핸드폰 화면에는 다름 아닌 유하가 낮에 봤던 기사들이었다.

“하연우랑 오승현이 예전에 무슨 사이였는데!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데다 약혼까지 했던 거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 있어? 이미 결혼도 한 사람이 하연우를 자기 회사로 부르는 건 무슨 심보래?”

“심지어 계열사 대표? 이 인간은 네가 아예 안중에도 없잖아. 이게 너 엿 먹으라는 거 아니면 뭔데?”

이솔은 생각할수록 열 받았다.

다만 당사자인 유하는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개의치 않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이 나한테 엿 먹인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상관할 거 없어.”

승현을 좋아하고 결혼한 순간부터 유하는 이 바닥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녀 뒤에서 손가락질했는지 모른다.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사람들은 심지어 그녀를 얼굴만 반반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운 좋게 하늘의 달을 땄다고 혀를 놀려댔다.

결혼 후 냉대와 무시를 당하는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승현이 유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더욱 확신했다. 그 뒤로는 만날 때마다 경멸과 비아냥이 끊이질 않았다.

만약 그 모든 걸 마음에 담아 두고 신경 썼다면 유하는 몇 번이고 앓아누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기사를 본 순간, 무뎌진 줄로만 알았던 가슴이 또 쿡쿡 찔려 왔다.

승현의 아내로서, 그와 더 가까워지려고 IT를 공부하고, 기술을 연마하고, 들뜬 마음으로 MB 그룹에 이력서까지 제출했던 유하였다.

그 결과 돌아온 건 MB그룹에서 시작한 업계에서의 매장, 승현의 무시와 경멸이었다.

그런데 하연우는 귀국하자마자 MB그룹 계열사 대표 자리까지 차지했다. 이제 남은 거라곤 잘 닦은 탄탄대로를 걷기만 하면 된다.

참 달라도 너무 다른 대우다.

‘사랑하는 상대와 사랑하지 않는 상대를 대하는 게 이렇게 차이가 있다니까.’

“됐어. 오늘은 내 이혼 얘기만 하자. 오승현 얘기는 꺼내지도 마.”

유하는 웃으며 이솔을 위로했다.

이솔은 유하가 대학 때 알게 된 절친인데, 로스쿨을 나와 이제는 법률 업계에 종사한 지 벌써 7년이다.

실력 있고 잘나가는 변호사라 이 업계에서 ‘강이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록 이혼소송은 거의 맡지 않지만, 유하는 이혼하기로 결심한 순간 가장 먼저 이솔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친한 사람이다 보니 결혼생활에서 있었던 자질구레한 것까지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아무런 감정 변화도 없는 유하의 표정에 이솔은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개자식 얘기는 하지 말자.”

이를 악물며 욕지거리를 내뱉은 이솔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에서 혼전 계약서를 꺼냈다.

곧이어 그걸 유하 앞에 놓더니 합의서에 있는 몇 가지 조항을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어제 보내준 자료 읽어 봤어. 그 개자식이 혼전 계약서에 손을 썼더라고. 만약 네가 오승현과 이혼하면 일전 한 푼 못 받고 맨몸으로 나가야 한다고 적혀 있어.”

이솔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분노가 가득했다.

유하는 예상했던 결과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았던 승현은 혼전 계약서를 작성했었다. 때문에 MB그룹을 자산을 명확히 혼전 재산으로 분류한 탓에 유하는 조금도 득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럼 보상은?”

유하는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하는 한 번도 승현한테서 뭔가 득을 볼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다만 그동안 이 집을 위해 헌신하고, 7년 동안 불평불만 없이 아들과 남편을 위해 살아온 세월은 보상받고 싶었다.

이건 그녀가 응당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어려워. 우선 혼전 계약서가 이렇게 버젓이 있고, 너도 일을 하고 있잖아. 오승현이 직장에서 너와 거리를 두었으니...”

말을 끝맺지 않아도 유하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럼 남자 쪽이 바람피워서 유책 배우자가 되면 어때?”

유하의 질문에 이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확한 증거만 있으면 시도해 볼 수는 있어.”

아쉽게도 유하는 증거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맨몸으로 나가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냉대와 무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기에 이혼은 무조건 해야 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이혼에 관한 얘기를 한참 하다가 밤 10시쯤이 다 되어서야 칵테일바를 나섰다.

문 앞에 도착한 순간, 유하는 발을 멈칫했다.

“왜 그래?”

이솔이 뒤에서 따라 나왔다.

“오승현의 차야.”

유하의 손가락은 길 건너편에 있는 검은색 롤스로이스 팬텀을 가리켰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차는 번호마저 99999였다.

이건 너무 익숙한 번호다.

두 사람이 마침 승현의 차가 왜 여기 있나 의아해하던 찰나, 차 뒷좌석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복숭아색 짧은 패딩을 입은 예쁜 여자가 내렸다.

긴 밤 갈색 웨이브 머리를 풀어 헤친 여자의 눈은 예쁜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얀 뺨은 추운 날씨 때문에 발그스름해졌고, 걸음걸이는 살짝 비틀거렸으며 패딩은 지퍼가 열린 채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유하와 이솔 모두 그 여자를 알고 있다. 하연우, 승현의 소꿉친구이자 첫사랑.

‘이렇게 딱 마주칠 줄 몰랐어.’

한편, 연우는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느낀 이쪽으로 돌아보더니, 그 사람이 유하라는 걸 발견하고는 립스틱 색이 번진 입술을 허둥지둥 손으로 막았다.

곧이어 승현도 뒷좌석에서 내렸다.

슬림한 양복 차림의 승현은 앞섶이 모두 풀려 있었다. 그 안쪽에 입은 흰색 셔츠 역시 단추가 몇 개 풀려 있었고 넥라인에 빨간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었다. 게다가 입술은 뭘 세게 문질렀는지 피가 날 듯 빨갰고,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유하는 승현과 7년 동안 부부로 지내면서 서로 사랑한 적은 없지만 잠자리를 가진 적은 있다.

승현은 지금 성욕을 느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차에서 뭘 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첫사랑이 돌아오니 차 안인데도 참을 수 없었나?’

‘나랑은 1년 동안 잠자리 한 번도 한 적 없으면서.’

‘두 사람은 언제부터였지?’

‘대체 몇 년 동안 나를 속인 거야?’

유하는 얼굴이 창백해서 칵테일 바 입구 안쪽에 기댔다. 그 때문인지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승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비틀거리는 연우를 부축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대화를 나눴다.

두 머리는 어찌나 가까이 붙었는지 아주 다정해 보였다.

“헐! 저것들이 길가에서...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이솔은 먼저 폭발했다. 친구가 배신당한 데다 현장까지 목격했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당장이라도 가서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유하는 얼른 이솔을 당기며 침착하게 말했다.

“일 크게 만들지 마. 내가 증거로 사진을 찍어뒀어.”

이솔은 변호사다. 길가에서 사람을 폭행하면 커리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폭력을 쓸 필요는 더더욱 없다.

‘내가 사진 찍어서 증거 다 남겼는데 뭐.’

이솔은 잠시 흠칫하더니 놀란 얼굴을 했다.

“너 사진 찍을 여유도 있어?”

뭐라고 더 말하려던 찰나, 이솔은 자신을 잡은 유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느꼈다. 그 순간 이솔은 마음 약해졌다. 무엇보다 친구가 너무 안쓰러웠고, 이 상황이 화가 났다.

그 시각, 연우와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던 승현은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리더니 언짢은 듯 미간을 팍 구겼다.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지? 출장했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빨리 돌아왔다고?’

이유야 뭐가 됐든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미행하고 사진까지 몰래 찍는 건 승현의 인내심을 건드렸다.

‘말 참 안 들어.’

승현은 유하가 자기를 몰래 미행하고 도촬했다고 생각해 언짢은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반쯤 열린 운전석 창문을 두드리며 덤덤하게 명령했다.

“가서 처리해.”

승현은 직접 나서기도 귀찮았다.

“네.”

운전석에 앉은 젊은 남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답하더니 차에서 내려 유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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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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