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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서한월
이른 아침,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뜬 유하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마도 어젯밤, 눈 속에서 오랫동안 서 있어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터질 것 같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캐리어에서 옷을 꺼낸 순간, 빨간색 물건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갔다.

그건 다름 아닌 빨간 중절모를 쓴 주먹만 한 로봇이었다.

철제로 된 작은 로봇은 몸체가 통통했고, 포인트를 준 빨간 모자 외에 다른 부분은 온통 회색이었는데 어딘가 살짝 투박해 보였다.

이건 유하와 승현이 주고받은 사랑의 증표였다.

사실 유하와 승현은 간단히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심지어 지인들 앞에서 서약을 맺지도 않고 공식적으로 MB그룹에 갓 부임한 젊은 대표가 결혼했다는 소식만 발표했다. 신부가 누구인지는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 바닥에서 유하의 존재를 아는 건 승현의 친한 친구들뿐이다.

혼인신고를 한 날 밤, 자신을 좋아한 적이 있냐는 유하의 질문에 승현은 이 투박하기 그지없는 로봇을 던져주고는 말없이 떠나갔다.

나중에 유하 혼자 연구하다가 이 투박하기 짝이 없는 로봇 안에 AI 대화 프로그램이 들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프로그램에 등록한 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면 로봇은 음성으로 대답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 당시 이 로봇을 받고 유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도 그럴 게, 이건 IT와 AI에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는 승현이 직접 만든 것일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안에 있는 프로그램 역시 승현이 직접 유하를 위해 만든 것일 수 있었다.

유하는 몸을 쪼그린 채 로봇을 집어 들고 핸드폰을 꺼낸 뒤, 프로그램에 7년 전 신혼 날 밤과 똑같은 문자를 보냈다.

[나를 사랑해?]

빨간 중절모 로봇은 아무 감정 없는 딱딱한 기계음으로 신혼 날 밤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아니.]

유하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번졌다.

‘이것 봐. 7년 전에 이미 답을 들었으면서 7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현실을 깨닫다니.’

‘참, 애썼네. 나를 모욕하려고 특별히 로봇을 만들어 이런 프로그램까지 설치하다니. 이거 만드느라 신경깨나 썼겠어.’

대충 캐리어 위에 던져진 로봇은 어색하게 삐그덕댔다.

결혼을 떠올리며 유하는 오른쪽 중지를 매만졌다. 그 손에는 아주 평범한 다이아 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이제는 습관 되어 꼈는지도 잊을 뻔했다.

이 결혼반지 역시 승현이 대충 고른 것이다.

기억 속에 승현은 본가에 가거나 어머니를 만나는 상황이 아니면 반지를 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결혼은 처음부터 유하의 원맨쇼에 불과했다.

순간 ‘피식’하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아프던 머리가 갑자기 더 아파졌다. 유하는 얼른 반지를 빼 빨간 중절모 로봇 옆에 던졌다.

이 결혼에서 그녀가 얻은 건 고작 빨간 중절모 로봇과 싸구려 다이아몬드 반지뿐이다.

물론 나중에 만나 이혼 합의서에 사인할 때, 이것들은 모두 승현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

준서는 가사도우미 윤해월의 부름에 잠에서 깼다.

어젯밤 엄마가 안 계셔 이야기도 해주지 않고, 잠을 재우지도 않아 준서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다 보니 아침에 당연하다는 듯 늦게 일어났다.

“엄마는요? 씻고 싶어요.”

침대에서 겨우 일어난 준서는 잠이 채 가시지 않는 눈으로 물었다.

윤해월은 준서에게 옷을 갈아입혀 주며 말했다.

“도련님, 사모님은 출장 가셔서 오늘은 제가 준비 도와줄게요.”

“아, 네.”

그제야 정신이 든 준서는 살짝 실망했다.

‘예전에 엄마가 있을 때는 눈 뜨자마자 옷 입는 걸 도와주고 씻겨줬는데.’

‘이모님도 못하는 건 아니지만, 힘 조절을 못 해 너무 불편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준서의 모습에 윤해월이 대뜸 제안했다.

“사모님께 전화해서 언제 돌아오는지 묻는 건 어때요? 그러면 사모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준서는 자그마한 머리를 마구 저었다.

“싫어요. 안 할래요.”

‘이게 얼마나 어렵게 얻은 자유인데. 엄마가 언제 오든 상관할 바 아니야.’

‘차라리 늦게 왔으면 좋겠어. 엄마가 없는 하루하루가 자유니까.’

“제가 할게요.”

윤해월의 손을 물리친 준서는 서툰 동작으로 옷을 챙겨 입고 준비를 마친 뒤 아침 식사하러 아래층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준서뿐이었다.

오승현은 일을 해야 했기에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했다.

식사를 마친 뒤 준서는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게임을 하며 어렵게 얻은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오전 내내 혼자 놀다 보니 금방 지루해졌다.

‘연우 이모랑 놀고 싶어.’

‘하지만 어젯밤 아빠가 바쁘다며 회사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게임기를 안고 한참을 고민하던 준서는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빠가 연우 이모를 제일 좋아하니까.’

‘내가 이모한테 찾아가 놀겠다고 하면 아빠도 못 막을 거야.’

방법이 떠오르자마자 준서는 핸드폰을 들어 연우 이모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전화 건너편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준서는 환호성을 지르며 윤해월에게 옷을 갈아입혀달라고 하더니, 기사를 불러 곧장 아빠 회사로 향했다.

...

그 시각.

세한은행에서는 IT팀의 프론트 엔드 담당자, 백 엔드 담당자, UI 디자이너, 제품 담당 매니저 등 책임자들이 한데 모여 회의하고 있었다.

“쇼핑몰 웹페이지의 요구는 이게 다인가요? 확실해요?”

유하의 시선은 오롯이 벽에 투영된 PT를 향해 있었다. 그 위에는 있는 내용은 회사에서 새로 보내온 요구 사항과 UI 디자인 초안이었다.

제품 담당자와 UI 디자이너의 대답을 들은 유하는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우선 이렇게 하죠. 프런트엔드에서 작업을 분담하고, 퇴근 전까지 저에게 구체적인 일정표를 제출해 주세요.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문의해요.”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말을 마친 유하는 맨 먼저 회의실을 나가 곧장 IT팀 부장 사무실로 향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오전 내내 회의한 유하는 이제야 숨 돌릴 틈이 생겨 부장님께 준비해 둔 사직서를 제출했다.

워낙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다 능력이 출중한 유하를 부장은 극구 만류했다.

두 사람은 사무실에서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다가 유하가 같은 업계 다른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떠나는 게 아니라, 아예 업계를 바꾸기로 했다는 말에 부장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가는 건 괜찮은데 유하 씨 능력과 비슷한 사람을 찾아 인수인계 제대로 하고 가야 해요.”

“물론이죠.”

사직 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유하는 곧바로 인사팀에 실력 있는 프로그래머를 채용할 것을 요구했다. 회사를 떠나기 전에 면접을 봐 괜찮은 인재를 찾아야 했으니까.

이 모든 걸 끝내고 나서야 유하는 탕비실에 가 감기약을 먹었다.

어젯밤 추위를 탄 데다, 오늘 오전 내내 회의해서 그런지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입맛도 없었다.

감기약을 먹고 나니 유하는 그제야 조금 몸이 편해져 선 자리에서 한참 멍때렸다.

그러다가 핸드폰을 꺼내 고모할머니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이제 이혼도 하고 일도 그만두기로 한 데다 다시 디자인 업계로 돌아가기로 했으니, 이 소식을 고모할머니한테 말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유하는 왠지 마음속 두려움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몇 년 전의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남자 하나 때문에 재능을 낭비하겠다는 거야? 바보 같으니라고! 앞으로 다시는 나 볼 생각 하지 마. 난 너 같은 조카 딸 둔 적 없으니까.”

유하는 핸드폰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녀는 포기한 적 없다. 지금껏 디자인에 대한 열정이 식은 적도 없다. 다만 온전히 디자인에만 집중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고모할머니는 유하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 자체가 못마땅했다.

한참 동안 망설이던 끝에 유하는 끝내 전화하지 못했다. 그 대신 고모할머니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할머니, 저 돌아왔어요.]

내용을 적고 잠시 고민하던 유하는 문자 뒤에 ‘리아’라는 두 글자와 상운 로고가 그려진 이미지 한 장을 첨부했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핸드폰 위에 추천 뉴스가 연달아 떴다.

굵은 글로 적혀 있는 뉴스 제목은 유독 눈길을 사로잡았다.

[벤실베니아 대학교 경영대 박사 HK그룹 하연우 귀국]

[MB그룹 AI 분야 본격 진출]

[MB그룹 새 계열사 대표 하연우로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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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4화

    MB그룹 하나만으로도 벅찼지만, 유하가 하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이제는 소성란에게 지도를 받으며 Splendid의 경영권까지 천천히 넘겨받고 있었다.압박감은 컸다.하루하루가 버텨내는 일의 연속이었다.그래도 다행이었다.유하는 혼자가 아니었다....전화가 연결됐다.그 순간, 차가웠던 유하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목소리도 한결 낮고 온화했다.“고모할머니, 저 도착했습니다.”[그래.]짧은 대답.소성란의 어조는 그리 좋지 않았다.[언제 돌아올 거야?]소성란은 여전히 오씨 가문을 싫어했다.그리고 그 가문과 유하가 엮이는 것도 못마땅했다.유하가 그런 소성란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만약 승현이 죽지 않았다면, 아무리 거액의 유산이라도 소성란은 유하가 그것을 물려받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소성란은 그에 버금가는 재산과 지위를 유하에게 직접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승현이 남긴 유산은 오히려 ‘짐’이었다.적어도 소성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그녀는 아직도 유하가 겪었던 고통을 잊지 못했다.하지만 승현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일이 끝나자 소성란은 더 이상 유하의 선택을 막지 않았다.‘사람이 죽으면, 남는 건 추억뿐이지.’“금방이에요. 예전처럼, 일주일쯤이면 돌아갈 것 같아요.”유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소성란의 마음속 상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MB그룹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그저 빠르게 돌아가겠다고만 했다.짧게 안부를 전한 뒤, 통화를 끊었다....차는 어느새 나무들이 우거진 구역으로 들어섰다.붉은 벽돌 빛 6층짜리 건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중앙엔 유리 외벽이 반짝이는 본관 빌딩이 서 있었다.이 일대 전부가 MB그룹 본사였다.주변의 6층 건물들은 각 부서를 위한 별관들이었고, 용도에 따라 세분되어 있었다.1년 전만 해도 이곳은 유하에게 낯선 공간이었다.하지만 이제는 너무도 익숙했다.차에서 내린 유하는 자연스럽게 본관 안으로 들어섰다.대표이사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손가락을 대자 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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