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화

Author: 서한월
이른 아침,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뜬 유하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마도 어젯밤, 눈 속에서 오랫동안 서 있어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터질 것 같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캐리어에서 옷을 꺼낸 순간, 빨간색 물건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갔다.

그건 다름 아닌 빨간 중절모를 쓴 주먹만 한 로봇이었다.

철제로 된 작은 로봇은 몸체가 통통했고, 포인트를 준 빨간 모자 외에 다른 부분은 온통 회색이었는데 어딘가 살짝 투박해 보였다.

이건 유하와 승현이 주고받은 사랑의 증표였다.

사실 유하와 승현은 간단히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심지어 지인들 앞에서 서약을 맺지도 않고 공식적으로 MB그룹에 갓 부임한 젊은 대표가 결혼했다는 소식만 발표했다. 신부가 누구인지는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 바닥에서 유하의 존재를 아는 건 승현의 친한 친구들뿐이다.

혼인신고를 한 날 밤, 자신을 좋아한 적이 있냐는 유하의 질문에 승현은 이 투박하기 그지없는 로봇을 던져주고는 말없이 떠나갔다.

나중에 유하 혼자 연구하다가 이 투박하기 짝이 없는 로봇 안에 AI 대화 프로그램이 들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프로그램에 등록한 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면 로봇은 음성으로 대답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 당시 이 로봇을 받고 유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도 그럴 게, 이건 IT와 AI에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는 승현이 직접 만든 것일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안에 있는 프로그램 역시 승현이 직접 유하를 위해 만든 것일 수 있었다.

유하는 몸을 쪼그린 채 로봇을 집어 들고 핸드폰을 꺼낸 뒤, 프로그램에 7년 전 신혼 날 밤과 똑같은 문자를 보냈다.

[나를 사랑해?]

빨간 중절모 로봇은 아무 감정 없는 딱딱한 기계음으로 신혼 날 밤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아니.]

유하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번졌다.

‘이것 봐. 7년 전에 이미 답을 들었으면서 7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현실을 깨닫다니.’

‘참, 애썼네. 나를 모욕하려고 특별히 로봇을 만들어 이런 프로그램까지 설치하다니. 이거 만드느라 신경깨나 썼겠어.’

대충 캐리어 위에 던져진 로봇은 어색하게 삐그덕댔다.

결혼을 떠올리며 유하는 오른쪽 중지를 매만졌다. 그 손에는 아주 평범한 다이아 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이제는 습관 되어 꼈는지도 잊을 뻔했다.

이 결혼반지 역시 승현이 대충 고른 것이다.

기억 속에 승현은 본가에 가거나 어머니를 만나는 상황이 아니면 반지를 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결혼은 처음부터 유하의 원맨쇼에 불과했다.

순간 ‘피식’하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아프던 머리가 갑자기 더 아파졌다. 유하는 얼른 반지를 빼 빨간 중절모 로봇 옆에 던졌다.

이 결혼에서 그녀가 얻은 건 고작 빨간 중절모 로봇과 싸구려 다이아몬드 반지뿐이다.

물론 나중에 만나 이혼 합의서에 사인할 때, 이것들은 모두 승현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

준서는 가사도우미 윤해월의 부름에 잠에서 깼다.

어젯밤 엄마가 안 계셔 이야기도 해주지 않고, 잠을 재우지도 않아 준서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다 보니 아침에 당연하다는 듯 늦게 일어났다.

“엄마는요? 씻고 싶어요.”

침대에서 겨우 일어난 준서는 잠이 채 가시지 않는 눈으로 물었다.

윤해월은 준서에게 옷을 갈아입혀 주며 말했다.

“도련님, 사모님은 출장 가셔서 오늘은 제가 준비 도와줄게요.”

“아, 네.”

그제야 정신이 든 준서는 살짝 실망했다.

‘예전에 엄마가 있을 때는 눈 뜨자마자 옷 입는 걸 도와주고 씻겨줬는데.’

‘이모님도 못하는 건 아니지만, 힘 조절을 못 해 너무 불편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준서의 모습에 윤해월이 대뜸 제안했다.

“사모님께 전화해서 언제 돌아오는지 묻는 건 어때요? 그러면 사모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준서는 자그마한 머리를 마구 저었다.

“싫어요. 안 할래요.”

‘이게 얼마나 어렵게 얻은 자유인데. 엄마가 언제 오든 상관할 바 아니야.’

‘차라리 늦게 왔으면 좋겠어. 엄마가 없는 하루하루가 자유니까.’

“제가 할게요.”

윤해월의 손을 물리친 준서는 서툰 동작으로 옷을 챙겨 입고 준비를 마친 뒤 아침 식사하러 아래층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준서뿐이었다.

오승현은 일을 해야 했기에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했다.

식사를 마친 뒤 준서는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게임을 하며 어렵게 얻은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오전 내내 혼자 놀다 보니 금방 지루해졌다.

‘연우 이모랑 놀고 싶어.’

‘하지만 어젯밤 아빠가 바쁘다며 회사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게임기를 안고 한참을 고민하던 준서는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빠가 연우 이모를 제일 좋아하니까.’

‘내가 이모한테 찾아가 놀겠다고 하면 아빠도 못 막을 거야.’

방법이 떠오르자마자 준서는 핸드폰을 들어 연우 이모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전화 건너편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준서는 환호성을 지르며 윤해월에게 옷을 갈아입혀달라고 하더니, 기사를 불러 곧장 아빠 회사로 향했다.

...

그 시각.

세한은행에서는 IT팀의 프론트 엔드 담당자, 백 엔드 담당자, UI 디자이너, 제품 담당 매니저 등 책임자들이 한데 모여 회의하고 있었다.

“쇼핑몰 웹페이지의 요구는 이게 다인가요? 확실해요?”

유하의 시선은 오롯이 벽에 투영된 PT를 향해 있었다. 그 위에는 있는 내용은 회사에서 새로 보내온 요구 사항과 UI 디자인 초안이었다.

제품 담당자와 UI 디자이너의 대답을 들은 유하는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우선 이렇게 하죠. 프런트엔드에서 작업을 분담하고, 퇴근 전까지 저에게 구체적인 일정표를 제출해 주세요.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문의해요.”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말을 마친 유하는 맨 먼저 회의실을 나가 곧장 IT팀 부장 사무실로 향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오전 내내 회의한 유하는 이제야 숨 돌릴 틈이 생겨 부장님께 준비해 둔 사직서를 제출했다.

워낙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다 능력이 출중한 유하를 부장은 극구 만류했다.

두 사람은 사무실에서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다가 유하가 같은 업계 다른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떠나는 게 아니라, 아예 업계를 바꾸기로 했다는 말에 부장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가는 건 괜찮은데 유하 씨 능력과 비슷한 사람을 찾아 인수인계 제대로 하고 가야 해요.”

“물론이죠.”

사직 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유하는 곧바로 인사팀에 실력 있는 프로그래머를 채용할 것을 요구했다. 회사를 떠나기 전에 면접을 봐 괜찮은 인재를 찾아야 했으니까.

이 모든 걸 끝내고 나서야 유하는 탕비실에 가 감기약을 먹었다.

어젯밤 추위를 탄 데다, 오늘 오전 내내 회의해서 그런지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입맛도 없었다.

감기약을 먹고 나니 유하는 그제야 조금 몸이 편해져 선 자리에서 한참 멍때렸다.

그러다가 핸드폰을 꺼내 고모할머니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이제 이혼도 하고 일도 그만두기로 한 데다 다시 디자인 업계로 돌아가기로 했으니, 이 소식을 고모할머니한테 말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유하는 왠지 마음속 두려움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몇 년 전의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남자 하나 때문에 재능을 낭비하겠다는 거야? 바보 같으니라고! 앞으로 다시는 나 볼 생각 하지 마. 난 너 같은 조카 딸 둔 적 없으니까.”

유하는 핸드폰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녀는 포기한 적 없다. 지금껏 디자인에 대한 열정이 식은 적도 없다. 다만 온전히 디자인에만 집중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고모할머니는 유하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 자체가 못마땅했다.

한참 동안 망설이던 끝에 유하는 끝내 전화하지 못했다. 그 대신 고모할머니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할머니, 저 돌아왔어요.]

내용을 적고 잠시 고민하던 유하는 문자 뒤에 ‘리아’라는 두 글자와 상운 로고가 그려진 이미지 한 장을 첨부했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핸드폰 위에 추천 뉴스가 연달아 떴다.

굵은 글로 적혀 있는 뉴스 제목은 유독 눈길을 사로잡았다.

[벤실베니아 대학교 경영대 박사 HK그룹 하연우 귀국]

[MB그룹 AI 분야 본격 진출]

[MB그룹 새 계열사 대표 하연우로 확정]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212화

    악몽에 시달린 밤.유하는 악몽에 시달리며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방 안의 불은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아침 일찍.유하는 눈 밑에 검은 그늘을 드리운 채 기운 빠진 걸음으로 1층에 내려왔다.마침 주방에서 나온 청산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남자의 시선이 유하의 창백한 얼굴과 희미한 다크서클에 머물렀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조금 더 자도 되는데.”청산은 방금 구운 아침 식탁을 차리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마침 식사 준비가 끝났어. 집에 감자가 없어서 네가 좋아하던 해시브라운은 못 했고, 대신 흑설탕 넣은 호떡을 만들었어.”유하는 눈을 크게 떴다.‘아직도 내 입맛을 기억하고 있었구나.’그녀는 늘 아침 식사로 달콤하고 쫀득한 튀김류를 좋아했다. 특히 기름지지 않고 담백한 해시브라운을 자주 찾곤 했다.생각해 보니 지난 7년 동안, 가족의 식탁은 언제나 승현과 준서의 입맛에 맞춰져 있었다.맵고 자극적인 음식 위주였고, 유하의 취향을 챙겨 준 건 박영심뿐이었다.‘그래... 나의 취향은 늘 뒷전이었지.’유하의 마음 한쪽이 묘하게 복잡해졌다.잠시 후 청산은 갓 만든 단팥 두유를 내놓았다. 앞치마를 벗고 커피와 샌드위치를 들고 유하 맞은편에 앉았다.둘은 마주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익숙한 풍경이 한순간, 유하를 몇 년 전으로 돌려놓았다.그때 청산은 유하보다 세 학번 위의 선배였다.고리대학교 컴퓨터공학부에서 이미 ‘천재’라 불리며 박사과정을 밟는 대학원생이었지만, 대학에 갓 입학한 유하는 그저 시골에서 도망치듯 올라온 어린 신입생에 불과했다.두 사람은 원래 전혀 만날 일이 없었다.하지만 우연한 사건으로 서로 알게 되었고, 이후 같은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주 마주쳤다.유하는 모르는 게 있으면 청산에게 물었고, 청산은 늘 성심껏 대답해 주었다.그러다 보니 프로젝트도 함께하게 되었고, 같이 식사하는 일도 잦아졌다.식탁 위에 마주 앉은 지금 이 순간은, 그 시절과 묘하게 오버랩되었다.‘아직 아무 일도 없던 때... 모든 게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211화

    청산은 쓴웃음을 지었다.“차마 널 마주할 용기를 못 냈어.”유하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가슴이 저릿하게 시려왔다.“사실은 내가 선배를 볼 자격이 없잖아요.”정작 피해야 할 쪽은 자신이 아닌가 싶었다.청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유하야, 다 지난 일이야.”유하가 여전히 망설이자, 청산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지금 상황이 너무 안 좋아. 조금 안정되면... 내가 널 해외로 보내 줄게. 괜찮지?”‘해외...’그 한마디에 유하의 마음이 순간 흔들렸다.‘지금 이대로 여기서는 견딜 수 없어.’‘오승현이 깨어날지조차 모르는데... 깨어난다 해도 어떻게 될지.’‘신분증이며 증명 서류도 다 빼앗겼어.』숨을 고르며 유하는 생각했다.‘내겐 도망칠 공간이 필요해. 이솔이 말했지...’‘청산 팀은 태씨 가문과도 협력 중이라고.’‘국가사업까지 맡을 실력이라면, 승현 쪽을 붙잡아 둘 수도 있을 거야.’‘그 틈에... 이혼하고 떠날 기회를 만들 수 있겠지.’“얼마나 걸릴까요?”“정확히는 몰라. 그래도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유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부탁할게요. 다만 챙겨야 할 게 있어요.”유하는 자신의 별장으로 들어갔다.소성란이 맡긴 디자인 작업.유하가 감금된 동안 멈춰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제 막 빠져나온 만큼 곧바로 손을 대야 했다. 국제 쇼까지는 채 석 달도 남지 않으니까.‘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시간이 없어.’케리어는 압류돼 밑그림도 손에 넣지 못했지만, 다행히 유하는 평소 클라우드에 작업물들의 백업을 해 두는 편이었다. 별장 안에 노트북과 장비, 재료들이 여전히 있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안으로 들어서자, 사방 가득한 그림과 도안, 샘플들이 유하의 눈에 들어왔다.청산은 잠시 둘러보다가 나직이 말했다.“좋아하는 건 여전하네.”그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유하가 이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유하는 엷게 웃으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곧장 2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210화

    승현의 친구들이 모여 유하를 헐뜯고 비난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연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묘하게 가벼웠다.그녀는 눈물을 닦아내며 세수를 핑계 삼아 계단 쪽으로 몸을 숨겼다.주위를 살피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얼굴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거칠게 문질러 지우고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뭐 하나 좀 알아봐 줘.”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7년 전, 고리대학교에서 오승현, 소유하, 임청산 이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소한 것까지 전부.”7년 전의 일 따위, 연우는 그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때는 단순히, 승현이 소유하와 갑작스레 결혼한 게 자신을 향한 보복이라고만 여겼으니까.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승현은 그 일을 아직도 붙들고 있어... 분명 뭔가 있어.’그 사실이 연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알아내야 했다. 7년 전, 자신이 해외에 있던 그 시절, 이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승현이 소유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나는 반드시 그 뿌리까지 도려내야 해.’연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과거든 현재든, 하연우와 오승현만이 집안도, 배경도, 능력도 서로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소유하 따위는 그저 남자에게 매달리는 것밖에 모르는,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그리고 임청산.그 역시 반드시 파악해야 했다.‘임청산이라는 남자, 반드시 내 쪽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찾아야 해.’연우는 이어서 차갑게 지시했다.“임청산. 그 사람에 관한 건 전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기록까지 빠짐없이.”소유하 같은 여자를 선택할 수 있는 남자라면, 자신이 못 가질 이유도 없었다.아니, 본래 연우가 손에 넣지 못하는 남자는 없었다....밤이 깊어졌다.검은 차량 여러 대가 줄지어 ‘대나무숲’ 주택단지로 들어섰다.연등 불빛을 따라 한 별장 앞에 차들이 멈췄다.유하는 차에서 내려 얼굴에 스치는 밤바람을 잠시 느꼈다.익숙한 풍경을 바라보자 마음이 아득해졌다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209화

    안에 있던 유하의 눈에서 눈물이 한순간 터져 흘러내렸다.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울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숨조차 삼켜가며 한참을 버텼다.그러다 금세 질식할 것처럼 가슴이 옥죄어 왔다.유하는 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청산은 반걸음 물러서며 흰색 코트를 문틈 사이로 내밀었다.유하는 잠시 손을 뻗었다가, 코트를 보자마자 움찔하며 손을 거두었다.“나 더러워요.”피와 물에 젖은 몸, 그 새하얀 옷을 망칠 것 같았다.“알아. 괜찮아.”남자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부드러웠다.그는 시선을 안으로 들이지 않은 채, 코트를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유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받아 들고, 조심스레 어깨에 걸쳤다. 몸을 감싼 천 아래로 겨우 숨을 고른 뒤, 문을 활짝 열었다.드디어 마주 선 두 사람.긴 침묵이 흘렀다.‘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오랜 시간, 처절하게 헤어진 끝의 재회.서로의 눈빛이 스친 순간, 유하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그때, 청산이 갑자기 한발 다가섰다.유하는 놀라 뒤로 물러섰으나, 눈앞의 남자는 몸을 낮춰 무릎을 굽혔다.“허리끈이 제대로 안 묶였네.”그는 서둘러 유하가 대충 묶은 매듭을 풀어내고, 단정하게 다시 묶어 주었다. 정갈하게 매듭을 고친 뒤에야 일어나 한 걸음 물러섰다.손을 내밀며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은 늘 그랬던 것처럼 온화했다.마치 시간 따윈 흐르지 않은 듯, 한 번도 헤어진 적 없던 사람처럼.“가자.”유하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결국 손끝을 그의 팔에 얹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침실을 나섰다.계단 아래로 이어진 복도를 지나며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왔지만, 누구도 막지 못했다.그때 맞은편에서 윤해월이 달려왔다.“사모님, 안 됩니다!”그가 손을 뻗기도 전에, 경호원이 먼저 유하를 막아섰다.윤해월은 눈앞에서 유하가 다른 남자와 함께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청산 일행이 자리를 뜨자, 윤해월은 곧장 태건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제는 윤해월이 감당할 수 없는 일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208화

    혼돈이 휩쓸고 지나간 뒤, 안방은 다시 고요해졌다.유하는 옷이 흐트러진 채 침대 위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한참 만에야 제정신을 되찾았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두 발에 힘주어 바닥을 딛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숨을 몇 차례 고른 뒤,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거울 속 유하의 얼굴과 몸 곳곳에 핏자국이 번져 있었고,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유하는 수도꼭지를 틀어 피 묻은 손을 물에 담갔다. 계속해서 문질렀지만 피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그러고 나서 욕실을 둘러보았다.곧 샤워기 아래로 다가가 아무렇게나 물을 틀었다.차가운지 뜨거운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대로 물줄기가 유하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그녀는 온몸을 씻어내리며 얼굴과 몸 곳곳을 거칠게 문질렀다.몸은 계속해서 떨렸고, 머릿속은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했다.‘내가 오승현을... 때렸어?’‘쓰러뜨렸다고? 피가 그렇게 많이... 내가... 사람을 죽인 거야?’‘나... 감옥 가는 건가?’이와 동시에 두려움이 소용돌이치며 가슴을 조여 왔다. 얼굴에 묻은 피는 이미 다 씻겨 내려갔지만 거울 속 유하는 여전히 온통 붉은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아. 없어지지 않아.’...승현을 실은 차는 병원 응급실 앞에 도착했다.들것에 실린 승현의 몸이 급히 안으로 옮겨졌다.오광진은 전화를 받고, 박영심에게는 알리지도 못한 채 황급히 병원으로 향했다.준서는 본가로 먼저 옮겨졌다.병원에 있는 승현은 당분간 태건이 책임지고 지켜야 했다.소식을 들은 연우와 하지철, 류정인도 병원으로 급히 달려왔다.승현의 지인들 역시 속속 모여들었다.혼란이 커지던 그때, 그린힐 저택 앞에 낯선 차량 행렬이 들어섰다.검은색 고급 차 여러 대가 멈춰 섰고, 그중 한 대에서 하얗고 긴 재킷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내렸다.은테 안경 너머로 맑고 단정한 인상이 드러났다.경호원들이 길을 열었다.남자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207화

    바닥에 흩어진 유하의 증명 서류들이 이미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억눌러 온 분노가 폭발하듯, 승현은 유하의 목덜미를 거칠게 물어뜯었다. 그리고 피가 맺히고 번지며 선명한 붉은 자국이 남았다.승현은 유하의 허리를 감싸 안아 침대 위로 내던졌다.간신히 숨을 돌린 유하는 거칠게 기침을 하며 숨을 들이마셨다.‘살아야 해... 제발...’승현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스친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훑었다. 다른 한 손은 천천히 양복 단추를 풀어 내려갔다.그가 몸을 숙이며 귀가에 낮고 쉰 목소리를 흘렸다.“여보, 우리... 아이 하나 더 갖자.”승현의 말은 망치가 되어 유하의 머리를 후려쳤다. 유하는 단번에 각성했다.방금 겨우 되찾은 숨도 잊은 채,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남자의 힘은 벽 같았고, 유하의 발버둥은 무의미했다. 유하가 걸친 옷가지들이 허망하게 흩어지며, 차가운 피부 위로 뜨거운 체온이 밀려왔다.‘안 돼... 제발, 안 돼...’유하는 밀쳐내려 했지만, 손끝이 허공을 헤매다 무언가 단단한 것에 닿았다.바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떨리는 손이 그것을 휘둘렀다.쾅!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방안을 뒤덮었다.그리고 모든 것이 멎었다.뜨거운 액체가 위로 떨어졌다.유하의 눈가를 적신 눈물에 붉은 핏방울이 섞였다.유하는 넋이 나간 듯 자신 위에 엎드린 남자를 바라보았다.승현의 머리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려, 마치 피눈물처럼 뺨 위에 떨어졌다.그는 이마를 짚더니, 피 묻은 손끝을 바라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낮고 서늘한 남자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다음 순간, 유하의 창백한 입술이 다시 거칠게 짓눌렸고, 피가 입안 가득 번지며 철 냄새와 함께 광기 어린 집착이 스며들었다.‘숨... 못 쉬겠어... 무서워...’유하는 제어할 수 없는 떨림에 휩싸였다.잠시 후, 승현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피에 젖은 입술 끝이 천천히 올라갔다.“소유하, 넌 평생 날 잊지 못할 거야.”그 말을 끝으로 남자의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