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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서한월
이런 사소한 일로 길거리에서 다투고 싶지 않았던 유하는 사진을 찍자마자 이솔을 끌고 반대편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 순간 유하는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칵테일바를 나서자마자 누군가 두 사람 앞을 막아섰다.

둘을 막아선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의 젊은 남자였다.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양복 덕에 남자의 키는 더욱 훤칠해 보였다.

상대는 유하도 아는 사람이다.

나태건, 승현의 비서. 어릴 때부터 MB그룹 지원을 받고 자라 고등학교 시절 능력을 인정받아 승현의 옆에서 일하게 된 충신 같은 존재다. 승현이 가장 믿는 사람이기도 하고.

태건은 누구에게나 가식 없는 모습인 데다, 오직 승현의 명령만 따라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유하 마음속 태건의 인상은 좋지 않다.

승현의 조금 전 표정을 비추어 볼 때, 태건이 여기까지 온 건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유하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사모님, 핸드폰 이리 주세요.”

태건은 무뚝뚝한 얼굴로 유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핸드폰을 내놓을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승현 쪽을 바라봤다.

승현은 고개를 숙인 채 연우에게 꼭 붙어 다정하게 뭔가 얘기하느라 유하 쪽은 보지도 않았다.

승현의 얼굴에 저토록 다정한 미소가 걸린 모습을 유하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더 이상 그 모습을 보기 싫어 유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무표정한 태건과 눈을 마주했다.

“내가 안 주면 어떻게 되는데요?”

“저를 난감하게 하지 마세요, 사모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태건은 마치 프로그램이 입력된 로봇처럼 감정 없는 말만 내뱉었다.

“사모님도 난감한 상황 만들지 마세요.”

그 말은 다름 아닌 위협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이솔은 유하 앞에 막아서서 버럭 화냈다.

“안 주면 길가에서 대놓고 빼앗기라도 하려고? 그렇게 법을 무시해도 돼?”

그때 태건이 대뜸 무덤덤한 표정으로 알고 있는 정보를 읊었다.

“강은솔, 정식으로 변호사가 된 건 6년 5개월 하고 18일. 민사소송과 상업 분쟁, 특허법 관련 소송, 기업의 법률 자문을 주로 하고 있고, 현재 소속되어 있는 곳은 국내 1위인 한성로펌...”

잠깐 뜸 들이던 태건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주 공교롭게도 MB그룹과 한성로펌이 협력 관계거든요. 강이솔 씨, 한성로펌은 자리 메꿀 우수한 변호사가 많을 텐데요.”

이솔은 얼굴이 창백해져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만약 오늘 일에 끼어들면 일자리를 잃을 각오는 해야 한다. MB그룹이 힘만 쓰면 이솔이 한성에서 잘리는 건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현재 협박당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절친이다.

“이솔아, 진정해.”

유하는 호흡을 가다듬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이윽고 위로 섞인 다정한 미소를 짓더니 이솔을 차가 있는 쪽으로 밀었다.

“넌 차에 가서 기다려. 상황 수습하고 찾으러 갈게. 걱정하지 마.”

친구가 저 때문에 일자리를 잃으면 유하는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게 될 거다.

하지만 이솔 역시 유하를 혼자 두고 가기에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승현 앞에서 그의 아내인 유하한테 협박한다는 건, 이게 바로 승현의 태도라는 뜻이다.

‘인정머리 없긴.’

‘이런 상황에 어떻게 유하 혼자 두고 가? 상대가 협박하다가 갑자기 폭력이라도 쓰면 어떡해?’

그때, 태건이 손을 들어 이솔을 막았다.

“강이솔 씨도 가면 안 됩니다. 강이솔 씨 핸드폰도 검사해 봐야 하거든요.”

유하는 끝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

“이게 이솔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내가 직접 그 사람이랑 얘기할게요!”

말을 마치자마자 유하는 서로 웃으며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태건은 미간을 구기더니 손을 들어 유하의 앞길을 막았다. 유하의 어깨높이에 멈춘 손은 유하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었다.

‘예의 있는 척하긴, 가식적이야.’

유하는 말 없이 냉소를 흘렸다. 몸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고, 상대를 밀어 봐도 상대는 꿈쩍하지도 않는데 오히려 본인이 밀려난 것도 모자라 어깨에 통증마저 느껴졌다.

“말씀드렸잖아요. 난감한 일 만들지 말라고요.”

태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러면 정말 재미없습니다.”

그 말에 이솔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옷 벗는 한이 있어도 친구가 괴롭힘당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

이솔이 태건에게 달려들어 가방을 휘두르려던 찰나, 유하가 그녀를 힘껏 잡아끌었다.

“유하야! 잡지 마. 이 인간들이 세력을 믿고 사람 함부로 괴롭히잖아. 내가 오늘 저 자식 머리통 무조건 박살 낸다. 대놓고 바람피울 때는 언제고, 사진 좀 찍었다고 발작하기는! 개자식!”

유하는 어깨가 아파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이솔을 놓칠세라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진정해. 건너편 좀 봐 봐.”

이솔은 그제야 흠칫하더니 길 건너편을 바라봤다.

언제 나타났는지 건너편에는 검은색 차 4, 5대가 세워져 있었다. 반쯤 내려간 차창 안으로 차가운 표정을 한 거무칙칙한 경호원들이 기세등등하게 이쪽을 노려봤다.

상대가 누구 때문에 왔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태건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사모님은 현명한 분이시잖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거예요.”

이솔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너희 부부 아니야? 어떻게...”

‘부부가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원수면 몰라도.’

이솔은 자기 친구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얘가 대체 어떻게 지내 왔던 거야?’

유하는 오늘 일을 절대 쉽게 넘어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내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협박당하고 있는 걸 보면서도 승현은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인 연우와 환한 얼굴로 웃고 떠들었다. 손을 꼭 맞잡은 채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만 보면, 모르는 사람은 아마 둘을 금실 좋은 부부로 생각할 거다.

더욱이 유하를 협박하는 사람은 남편인 승현이 직접 보냈다.

‘웃겨 정말.’

심장이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 아파 왔다.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떴을 때 유하의 눈동자는 어느새 평온해졌다.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렸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유하는 태건을 바라봤다.

“나 비서님, 내 핸드폰에 있는 사진은 지워도 돼요. 하지만 이솔은 사진 찍지 않았어요.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고요.”

“그건 봐야 알죠.”

태건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절대 안 돼요.”

유하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차라리 승현 씨와 행인들 앞에서 나를 때려죽여요. 안 그러면 내 친구 핸드폰에 손댈 생각도 하지 마요.”

비록 밤 10시가 넘는 시간이었지만, 이 골목은 유명한 칵테일 바와 맛집이 몰려 있는 곳이라 행인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벌써 이쪽을 흘끔거리며 사진을 찍어댔다. 물론 그 사람은 차에서 내린 양복 차림의 경호원에게 바로 끌려갔지만 말이다.

오늘 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절대 새어 나갈 일이 없다. 하지만 심각한 일이 벌어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걸 알고 있는 태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승현이 유하를 싫어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MB그룹 사모님인데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건 이미 극한으로 몰렸다는 뜻이다.

유하는 칵테일 바 앞에 있는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일은 내 친구와 상관없어요. 내 친구가 사진 찍었는지 안 찍었는지 못 믿겠으면 CCTV로 확인해요.”

태건은 의외로 강하게 나오는 유하를 빤히 보다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잠시 뒤 핸드폰을 꺼내 제시지를 작성했다.

답장은 바로 왔다.

그제야 태건은 안색이 조금 누그러지더니 유하의 핸드폰을 받아서 들었다.

승현과 연우가 차에서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과 수상한 모습으로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말끔히 삭제한 태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확인한 뒤에야 그곳을 떠났다.

멀리서 태건의 보고를 들은 승현은 유하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연우를 끌고 유명한 맛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승현의 팔짱을 낀 채 안으로 들어가던 연우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유하 쪽을 바라보며 복숭앗빛으로 물든 두 눈을 반짝였다. 이윽고 다른 손으로 립스틱이 번진 입술을 슬쩍 가린 채 입꼬리를 올렸다.

“저것들이!”

이솔은 화가 치밀어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다만 유하는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연우의 도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검은 핸드폰 액정에 코드를 입력했다.

그 순간 핸드폰 화면에 갑자기 투명한 잠금 아이콘이 나타났고, 그 아이콘을 클릭하자 녹색 코드들이 휘리릭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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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4화

    MB그룹 하나만으로도 벅찼지만, 유하가 하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이제는 소성란에게 지도를 받으며 Splendid의 경영권까지 천천히 넘겨받고 있었다.압박감은 컸다.하루하루가 버텨내는 일의 연속이었다.그래도 다행이었다.유하는 혼자가 아니었다....전화가 연결됐다.그 순간, 차가웠던 유하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목소리도 한결 낮고 온화했다.“고모할머니, 저 도착했습니다.”[그래.]짧은 대답.소성란의 어조는 그리 좋지 않았다.[언제 돌아올 거야?]소성란은 여전히 오씨 가문을 싫어했다.그리고 그 가문과 유하가 엮이는 것도 못마땅했다.유하가 그런 소성란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만약 승현이 죽지 않았다면, 아무리 거액의 유산이라도 소성란은 유하가 그것을 물려받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소성란은 그에 버금가는 재산과 지위를 유하에게 직접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승현이 남긴 유산은 오히려 ‘짐’이었다.적어도 소성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그녀는 아직도 유하가 겪었던 고통을 잊지 못했다.하지만 승현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일이 끝나자 소성란은 더 이상 유하의 선택을 막지 않았다.‘사람이 죽으면, 남는 건 추억뿐이지.’“금방이에요. 예전처럼, 일주일쯤이면 돌아갈 것 같아요.”유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소성란의 마음속 상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MB그룹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그저 빠르게 돌아가겠다고만 했다.짧게 안부를 전한 뒤, 통화를 끊었다....차는 어느새 나무들이 우거진 구역으로 들어섰다.붉은 벽돌 빛 6층짜리 건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중앙엔 유리 외벽이 반짝이는 본관 빌딩이 서 있었다.이 일대 전부가 MB그룹 본사였다.주변의 6층 건물들은 각 부서를 위한 별관들이었고, 용도에 따라 세분되어 있었다.1년 전만 해도 이곳은 유하에게 낯선 공간이었다.하지만 이제는 너무도 익숙했다.차에서 내린 유하는 자연스럽게 본관 안으로 들어섰다.대표이사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손가락을 대자 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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