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것은 최근에 녹음한 오디오 파일인 듯했는데 그 내용은 일기와 다름없었다.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파일에 담겨있는 건 양지원의 개인적인 심정이었다.그러다 기소정과 김혜은이 호텔에 찾아온 그날, 수상한 점이 드러났다.“김혜은 씨가 오늘 호텔에 왔다. 김혜은 씨를 다시 보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주체가 안 될 뻔했다. 선희 언니가 예전에 얼마나 잘해줬었는데... 사람들이 시골 출신 졸부라고 무시할 때 선희 언니는 김혜은 씨에게 예절 교사도 붙여주고,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릴 수 있게 김혜은 씨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었다. 대표님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선희 언니가 가장 먼저 찾아간 게 바로 김혜은 씨였는데 김혜은 씨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두 사람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돈까지 챙겨서 도망쳤다.”돈을 챙겨서 도망쳤다는 말에 강하율은 의아해졌다.“무슨 돈을 말하는 걸까요?”배윤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양지원 씨는 과거의 일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네.”그 이후로 양지원은 더 깊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강하율은 자그마한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녹음 파일이 곧 끝날까 봐 불안해했다. 그런데 거의 끝나갈 무렵, 갑자기 쾅 소리가 들려왔다.“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대체 뭐 때문이야?”그건 강하율 어머니의 목소리였다.그러나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내가 잘 못 해줬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그래? 왜 나를 함정에 빠뜨린 거야?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굴복할 것 같아? 이 함정이 완벽할 거라고 착각하지 마. 네 존재 자체가 허점이니까. 언젠가 사람들은 진실을 알게 될 거야.”탁.그 말이 끝이었다.강하율은 복잡한 심경으로 녹음기를 손에 꽉 쥐었다.“저희 엄마는 분명 증거를 찾았을 거예요. 그래서 살해당한 거겠죠. 그리고 저는 그 이후로 다른 사람 말에 속아서 그 비서의 가족들을 조사했어요. 사실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는데 말이에요.”강하율은 그동안 시간을 허비했다는 사실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윤호는 그런 강하율을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오늘 아침에 양 총괄님이랑 통화했는데, 그러고 나서 오후에 바로 사고가 났어요. 설마... 이것도 나 때문에 일어난 걸까요?”강하율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자책감이 그녀를 덮쳤다.“자책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움직여. 그게 훨씬 생산적이니까.”“저 양 총괄님 집 주소 알아요. 어쩌면... 거기에 뭔가 있을지도 몰라요.”말을 마친 강하율은 배윤호를 데리고 양지원의 집으로 향했다.하지만 건물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또 다른 경찰 무리가 보였다.그녀가 걸음을 재촉하며 다가갔다.“무슨 일이죠?”곁에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대답했다.“도둑이 들었대요. 이따가 관리사무소 가서 따져야지 원. 관리비를 그렇게나 많이 내는데 도둑놈이 쉽게 드나들어서 되겠냐고요.”강하율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혹시 1201호인가요?”“어머, 아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았대?”아주머니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강하율은 사람들을 헤치고 배윤호와 함께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경찰이 양지원에게 연락을 시도하는 듯 보이자, 강하율이 성큼성큼 다가갔다.“실례합니다. 양지원 씨가 지금 입원 중이라 제가 대신 물건을 좀 챙기러 왔어요.”말을 마치고는 신분증을 건네주었다.경찰은 신원을 확인한 뒤 병원 측에 양지원의 상태에 관해 물었고, 현재 의식 불명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나서야 강하율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여기 와보신 적 있어요? 저희도 지금은 뭐가 없어졌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어서요.”“네. 귀중품은 대부분 금고 안에 있을 거예요.”강하율이 구석의 장식장을 가리켰다.경찰이 다가가 겉에 걸려 있던 그림을 치우자 금고는 이미 통째로 사라진 상태였다.“없어진 물건이 뭔지 알 것 같군요. 실례지만 금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강하율은 뜯겨 나간 벽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보통 도둑이라면 조용히 움직이기 마련인데, 소음이 날 걸
배윤호가 갑자기 다가오자, 무거운 숨결이 느껴졌다.“그건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강하율은 금세 꼬리를 내리더니 똑바로 앉고 창밖을 내다보았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며 미묘한 분위기를 깨뜨렸다.강하율은 번호를 확인하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총괄님?”그러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네,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다급하게 배윤호를 바라보았다.“양지원 총괄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셨대요. 지금 병원에서 응급 수술 중이라는데, 아침에 저랑 통화한 기록이 있어서 경찰이 연락이 왔네요.”“경찰이? 가해 차량 운전자는?”배윤호가 핵심을 찔렀다.“도망쳤대요.”강하율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배윤호가 그녀를 안심시키며 말했다.“일단 병원부터 가자.”이동하는 내내 그는 전문가들에게 연락해 병원으로 모이도록 조치했다.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그들 역시 수술실로 막 들어간 참이었다.강하율을 보자 경찰이 다가왔다.“강하율 씨?”“네, 접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강하율이 다급하게 물었다.“호텔 쪽으로 가던 모양인데, 대형 트럭에 들이받혀 길가로 전복됐어요. 가해 차량 운전자는 겁이 났는지 도망쳤어요. 사고 지점에서 3km 떨어진 곳에서 해당 트럭을 발견했고, 확인 결과 폐차 직전의 노후 차량이었어요.”“폐차요...?”그녀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경찰이 설명을 덧붙였다.“시골에서는 차 상태가 어떻든 굴러가기만 하면 그냥 모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을 쳤으니 배상하는 것보다 차를 버리고 튀는 게 낫다고 판단했겠죠. 너무 걱정 마세요. 저희가 계속 조사 중이니까.”강하율은 이게 절대 단순한 우연일 리 없다고 확신했다.이때, 배윤호가 끼어들었다.“CCTV에 찍힌 건 없어요?”“보통 그런 노후 차량 모는 사람들은 감시카메라 사각지대를 기가 막히게 피해서 다녀요. 이 트럭도 마찬가지고.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CCTV에 코빼기도 안 비쳤어요.”“그럼 운전자의 행방도 전혀 모른다는 건
정다인의 얼굴을 보자니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배윤제는 어쩔 수 없이 놓아주기로 했다.“정말로 날 속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해?”“그게 무슨 말이죠?”정다인이 목을 감싸 쥐며 물었다.“네 뱃속에 있는 애, 아빠가 도대체 누구야?”“당연히 윤제 씨...”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정다인은 살기등등한 배윤제의 눈빛을 마주쳤다.“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살려주세요.”배윤제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정다인은 연신 기침을 내뱉으며 겁에 질린 채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이미 들통 난 이상 아예 막 나가기로 결심했다.“맞아요. 윤제 씨 아이 아니에요. 근데 지금 세상 사람들이 다 윤제 씨가 아빠인 줄 알잖아요. 내가 바람피웠다고, 딴 남자 애 가졌다고 광고라도 할 거예요? 윤제 씨 자존심에 그 망신을 견딜 수 있겠어요?”“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제대로 협력이나 하죠? 어차피 당신도 마음속에 품은 그 여자 지키려는 심산이잖아요. 나랑 결혼해요. 그러다 나중에 적당한 구실 만들어서 조용히 갈라서요. 지난 몇 년 동안 당신 수발든 값이라고 치죠. 우리 둘 다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질색이잖아요? 윤제 씨는 대외적인 평판도 챙기고, 덤으로 배 대표님까지 상대할 수 있을 텐데.”정다인은 당당하게 말을 내뱉으면서도 속으로는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배윤제가 얼마나 집요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만약 그가 마음속에 품은 여자를 위해 배윤호를 끌어내릴 기회마저 포기하겠다고 나온다면 더 이상 승산이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배윤제의 지독한 이기심을 과소평가했다.배윤제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닦았다.“방금 네가 한 말, 토씨 하나라도 어기면 가만 안 둬.”그 말을 듣자 정다인은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좋아요, 그렇게 하죠.”...강하율이 떠나려던 참에 마침 조윤서와 마주쳤다.다만 그녀는 화장실 쪽이 아니라 명혜숙의 방에서 걸어오는 중이었다.“이모가 왜 거기서...?”“아, 어머님이 갑자기 부르셔서 좀 다
그 후로 모든 사람이 정다인에게 매달린 덕분에 강하율은 오히려 편안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밥을 먹고 나서 자리를 뜨려는데, 조윤서가 그녀의 손을 붙잡더니 같이 산책하러 가자고 했다.“하율아, 솔직히 말해서 다인이가 임신했다는데도 내 마음은 영 편치가 않구나. 난 여전히 네가 제일 좋은데 말이다. 하지만... 애가 무슨 죄가 있겠니.”“이모, 저랑 윤제 오빠 어차피 이루어질 운명이 아니에요. 하지만 전 앞으로도 이모를 엄마처럼 모시고 효도할 거예요.”강하율이 살갑게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조윤서가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하율아, 네가 이렇게 곁에 있어 주니 참 좋네. 걱정 마. 내 마음속에선 다인이 걔는 너랑 비교도 안 되니까.”강하율은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그저 미소만 지었다.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는 정다인의 귀에 고스란히 흘러 들어갔다.정다인은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강하율을 노려보았다.‘두고 봐!’잠시 후, 조윤서가 화장실에 간 사이 강하율은 정원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정다인이 나타났다.“정말 대단한 수단이네. 윤제 씨가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이젠 사모님 옆에 붙어서 이간질이야? 안타깝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윤제 씨 짝은 나야. 넌... 평생 음지에나 머물 팔자고.”강하율은 반박하려다 멈칫했다. 정다인이 임산부라는 사실, 그것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점이 머릿속을 스쳤다.이런 여자와는 아예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강하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정다인 씨 말이 다 맞으니까, 그 잘난 흥 깨지 않을게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곧이어 자리를 뜨려 했으나 정다인이 덥석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누구 맘대로? 내가 가라고 했어?”강하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아니나 다를까 정다인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누군가 밀치기라도 한 듯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당황한 강하율이 급히 손을 뻗었지만, 그녀보다 한발 빠른 사람이 있었다.바로 배윤제였다.정다인을 부축해 세운 그는
가정부가 한창 회포를 푸는 강하율과 조윤서 사이에 끼어들었다.“이모, 어서 갑시다.”강하율이 말했다.조윤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와 함께 1층으로 향했다.주방에서 마침 정다인과 명혜숙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조윤서가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강하율을 바라보았다.“하율아, 난 정말 네가 참 좋다. 꼭 우리 며느리로 삼고 싶었어. 나 몰래 윤제랑 만났었지? 둘 다 서로 마음 못 접은 거 내 눈엔 훤히 보여. 윤제도 지금 자리가 자리인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거야.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 난 진작부터 너를 친자식처럼 생각했어.”조윤서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며 강하율이 환하게 웃었다.“이모는 저한테 늘 가장 소중한 가족인걸요. 걱정 마세요, 윤제 오빠한테 서운해할 일은 없을 거예요.”그런 인간 말종에게 화를 내는 자체가 아까웠다.사실 마주치는 것조차 넌더리가 났지만 조윤서를 위해서라면 앞으로 사이좋은 척 연기라도 할 생각이었다.조윤서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주방으로 들어섰다.명혜숙은 강하율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얜 왜 부른 거니?”조윤서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님, 하율이는 제가 오라고 했어요. 그래도 저희가 수년 동안 키운 아이인데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서요.”명혜숙은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정다인이 일어나 강하율을 거들고 나섰다.“할머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도 강하율 씨랑 구면이고 하니까 그냥 친구가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온 셈 치죠, 뭐.”강하율이 멈칫했다.할머니? 게다가 우리 집이라니?오늘따라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닌 정다인이었다.생각 외로 명혜숙은 순순히 수긍하며 손을 내저었다.“내가 다인이 체면을 봐서 참으마. 다들 앉거라.”강하율은 남의 집에서 굳이 언쟁하고 싶지 않아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오늘 모인 이들은 대부분 배씨 가문 식구들이었고, 그중에는 강하율조차 처음 보는 얼굴이 여럿 섞여 있었다.나중에 정다인이 삼촌이니, 외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