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진짜!”임유진이 터질 것 같은 빨간 얼굴을 한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볼에 찰싹 붙은 것이 오늘따라 더더욱 예뻐 보였다.강지혁은 단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빨개진 게,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게 전부 다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기쁜 것을 넘어 희열마저 느꼈다.강지혁은 그녀가 더욱더 그에게 끌리기를 원하고 더욱더 그로 인해 심장이 떨리기를 원하며 그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몸까지 강력하게 원하기를 바라고 있다.그래야만 그는 그녀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것 같았다.임유진은 알까?강지혁이 그녀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강지혁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사실 그는 임유진과 다시 시작하기로 한 뒤에도 여전히 마음 한편에 불안과 초조함을 품고 있었다.임유진이 그 언젠가 다시 전처럼 그를 사랑할 수 있는지, 노력 때문이 아닌 정말 그를 사랑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날이 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유진아, 사랑해.”강지혁은 마음속 제일 깊은 곳에 묻어뒀던 자기 마음을 그녀에게 꺼냈다....다음날.임유진은 잠에서 깬 후 어젯밤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금세 얼굴을 붉혔다.어제저녁, 강지혁의 ‘사랑해’라는 한마디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술을 맞췄고 그대로 사랑까지 나눴다.임유진은 어제 지나칠 정도로 그녀를 유혹하는 강지혁 때문에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조선 시대 때 여자한테 미쳐서 정세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왕을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네.’임유진은 새삼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섭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누군가에게 미쳐버리면 그때부터는 이성적인 사고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니까.하지만 강지혁과는 사이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더 좋았다. 전과 같은 분위기도 조금씩 감도는 것 같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지며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보이지 않는 벽도 서서히 허물어가는 것 같았으니까.이제야 정말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
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 쪽이 탁유미 쪽보다 훨씬 더 좋은 육아 환경을 가지고 있으니까.“어떻게 안 될까요?”임유진이 물었다.그녀는 탁유미가 이대로 윤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하면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힌 듯 괴로웠다.이런 감정이 드는 건 아마 탁유미를 돕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크게는 같이 억울하게 누명 쓴 입장에서 나오는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탁유미 씨가 당시 억울하게 누명 썼다는 게 증명이 되면 승률이 지금보다는 높아질 수도 있는데 말이죠...”변호사의 말에 임유진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제가 방법을 생각해볼게요.”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공수진의 유산 수술을 집도했던 주치의를 찾는 것뿐이었다.공수진이 퇴원하고 탁유미가 감옥에 들어간 후 그 의사가 얼마 안 가 바로 병원을 그만뒀으니까.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행보가 아닐 수 없었다.퇴근 후 임유진은 데리러 온 강지혁의 차에 올라탄 후 바로 그에게 부탁했다.“혁아, 너 사람 한 명 찾아줄 수 있어?”“누구?”“당시 공수진의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그 말에 강지혁이 미간을 꿈틀거렸다.“탁유미 씨가 누명을 썼다는 걸 증명하려고?”“응.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바로 그 의사야. 나는 공수진이 애초에 임신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또 혹은... 그 아이가 이경빈의 아이가 아니거나.”이 두 가지 가정 중 하나라도 맞다면 그때는 공수진이 다른 목적으로 계단에서 굴렀다는 걸 손쉽게 증명할 수 있다.그런데 만약 두 가지 가정 모두 아니라면, 공수진이 정말 이경빈의 아이를 임신한 게 맞다면 그때는 탁유미와 임유진 두 사람 모두 지게 된다.하지만 지금은 뭐가 됐든 가능성이 있는 쪽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만약 공수진이 정말 이경빈의 아이를 임신한 게 맞으면?”아니나 다를까 강지혁이 그녀가 우려하고 있는 부분을 정확히 찔러왔다.“나는 지금 언니가 공수진의 계략에 말려든 게 틀림없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어. 당시 언니가 임신했다는
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분석하다가 그제야 강지혁이 자기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왜... 왜 그렇게 봐?”“네가 너무 예뻐서.”임유진의 질문에 강지혁이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그 말에 임유진은 또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강지혁이 이렇게 달콤한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그녀는 정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예쁜 건 자기가 더 예쁘면서!’“크흠. 참, 백연신 씨 쪽은 어떻게 됐어?”임유진은 헛기침을 한번 하며 화제를 돌렸다.이틀 뒤에 한지영은 두 번째 수술에 들어가게 된다. 의사는 수술이 잘 끝나면 한지영이 머지않아 금방 의식을 되찾을 거라고 했다.그런데 만약 의식을 찾은 뒤에 백연신이 옆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한지영은 분명히 엄청 슬퍼할 것이다.“아직.”강지혁이 고개를 저었다.“백씨 일가에서는 현재 백연신 씨가 실종됐다는 뉴스 외에 다른 소식은 일절 입에 올리지 않고 있어. 회사와 가문 일은 현재 백연신 씨의 ‘어머니’가 맡고 있고 백연신 씨의 사람들은 권리를 다 박탈당했어.”그 말에 임유진의 얼굴에 걱정이 일었다.“백연신 씨 설마...”“죽지는 않았을 거야. 만약 죽었으면 그 여자가 진작 공표했겠지. 아무런 방해물 없이 자기 친아들들에게 가문을 물려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급급하게 백연신 씨의 수족들을 쳐내고 있다는 건 백연신 씨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 미리 대비하고 있다는 뜻이지.”임유진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뭐가 됐든 살아있으면 그것으로 됐다.이틀 후.한지영의 수술 당일, 임유진은 수술실 밖에서 한지영의 부모와 함께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몇 시간의 수술이 끝난 후 문이 열리고 의사에게서 수술이 순조롭게 끝났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세 사람 모두 한시름 놓았다.“유진아, 정말 고마워.”“정말 고마워.”한씨 부부는 지난번 임유진에게 사과한 뒤로 틈만 나면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제 딸을 구해준 은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어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아니 그게 아니라... 너 방금 우리 엄마한테 어머니라고 한 거야?”임유진이 조금 벙찐 얼굴로 물었다.“결혼했으니 당연한 호칭이잖아. 왜, 어머니 말고 장모님이라고 부를까? 아니면 어머님?”강지혁이 되물었다.어머니든 장모님이든 아니면 어머님이든 호칭만 따지면 전혀 문제 될 건 없었다.다만 임유진은 줄곧 강지혁에게 있어 ‘어머니’라는 호칭은 조심스러운 호칭이라고 생각했었다.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상처만 주고 떠나버렸으니까.강지혁은 많이 놀란듯한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허리를 숙여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그 여자한테 버림받은 뒤로 ‘어머니’라는 단어에는 분노만 느꼈었어. 누군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건 당연히 생각해본 적 없고. 그런데 유진이 네 덕에 ‘어머니’라는 단어가 얼마나 따뜻한 단어인지 알게 됐어.”강지혁은 천천히 눈을 감은 채 임유진의 어깨에 기대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는 속마음을 꺼냈다.“네가 이토록 그리워하고 있는 걸 보면 네 어머니도 분명히 너처럼 좋은 엄마셨겠지. 나는 네 어머니한테 감사해. 너를 낳아줘서, 너를 이 세상에 데려와 줘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만약 너의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나는 널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도 영영 느끼지 못했겠지.”임유진은 지금 마치 그의 숨결 속에 포근하게 감싸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오늘따라 유독 더 그와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강지혁이 자신의 상처를 입 밖으로 먼저 내뱉은 건 지금이 처음이다.“내가 네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른 건 단지 우리가 결혼해서가 아니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어머니니까, 너를 태어나게 하고 나한테도 살아갈 의미를 느끼게 해준 분이니까, 그래서 어머니라고 부른 거야.”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유진아, 너는 내가 살아가는 의미야.”임유진은 순간 코가 찡해 나고 가슴은 뜨거워지는 것을 넘어 벅차올랐다.그녀는 눈앞에 있는 이
순간 강지혁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 긴장을 너무 많이 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많이 기대한 것인지 그는 지금 몸 전체가 다 떨렸다.“날 사랑한다고? 정말...?”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입안에서 흘러나왔다.“응. 난 이런 거로 거짓말 안 해. 혁아, 나는 널 사랑하고 있어. 널 전처럼 사랑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널 다시 사랑하는 것과 시간의 흐름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어.”대단히 큰일을 겪은 것도 아니고 그럴 만한 특별한 계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그저 원래부터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임유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마음을 깨달았다.전에 강현수 앞에서 얘기했을 때보다 더 확실하게 깨달았다.강지혁은 다시 한번 임유진을 꽉 끌어안았다.“분명히 날 사랑한다고 했어. 네가 네 입으로 말한 거야. 절대 못 물러.”“응, 무를 생각 없어.”임유진은 조금 울먹거리는 듯한 강지혁의 목소리에 그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혁아, 너 울어?”강지혁은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더 깊게 얼굴을 파묻었다.임유진은 어깨가 젖어가는 걸 느끼며 그를 더 꼭 끌어안았다....묘원 입구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이준은 임유진과 함께 묘원에서 걸어 나오는 강지혁의 얼굴을 보고는 보면 안 될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깜빡거렸다.강지혁의 눈가가 빨개진 것도 모자라 살짝 부은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반면 임유진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상당히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고이준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두 사람이 꼭 애먼 여자애를 울린 다 큰 남정네와 그런 남정네에게 괴롭힘을 당해 눈물을 흘린 여자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만 성별이 바뀌었을 뿐.‘그런데... 대표님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그래서 울기도 하고? 아니, 애초에 대표님이 울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잖아! 대표님이 울기는 왜 울어. 분명히 모래 같은 게 눈에 들어가서 그걸 빼려다 눈물이 나온 게 틀림없어!’고이준이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
강지혁은 한참이나 임유진의 손길을 느낀 뒤에야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제 가자.”그러고는 아직도 벙쪄 있는 고이준을 힐끔 노려보았다.이에 고이준은 움찔하더니 바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강지혁의 반응으로 보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게 틀림없었다.‘난 이제 죽었다...’차에 올라타고 이제 막 시동을 걸려는 그때 고이준의 휴대폰이 울렸다.고이준은 바로 전화를 받고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얘기를 듣더니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뒤를 돌아 강지혁에게 보고했다.“백연신 씨가 나타났습니다.”“네?!”그 말에 먼저 반응한 건 임유진이었다.“어디 있대요, 지금?”“재원시에 있는 고씨 가문에 있다고 합니다. 비밀스럽게 나타난 거라 경찰 측도 백씨 가문도 아직 모르는 것 같고요.”고이준의 말에 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고씨 가문?“고유정 씨 집안 말인가요?”임유진이 물었다.그녀는 전에 고유정이 백연신의 약혼녀라고 한지영을 찾아갔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그 뒤에 한지영이 하마터면 크게 사고 날 뻔한 것도 모두 고유정의 짓이었고 말이다.백연신이 백씨 가문으로 급히 돌아간 건 고유정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유정 씨는 고씨 가문의 양녀입니다. 그리고 고씨 가문은 현재 친딸을 찾았고요. 백연신 씨는 그 집 친딸인 고은채 씨와 함께 고씨 가문으로 돌아갔습니다.”그 말에 임유진이 멈칫했다.백연신이 왜 고은채와 함께 있는 거지?왜 경찰에 연락하지 않고 고씨 가문을 찾아간 거지?“백연신 씨와 연락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임유진의 말에 고이준이 고개를 저었다.“재원시는 저희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지역이 아니라서 백연신 씨와 컨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그 말에 임유진이 입술을 깨물었다.백연신이 왜 고씨 가문 사람과 함께 있는 거지?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그만 생각해. 최소한 백연신 씨가 살아있다는 건 확인했잖아. 고씨 가문과 엮인 이유는 천천히 알아보면 돼.”임유진은 그 말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네 말대로 너는 내... 남편이고 아이들 아빠잖아.”“만약 내가 아이들 아빠가 아니었으면? 그래도 내 생각을 했을까?”강지혁이 되물었다.마치 아이들에게도 질투를 느끼는 듯한 그를 보며 임유진은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당연히 하지!”임유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녀는 강지혁을 사랑하고 있고, 강지혁을 사랑하고 있기에 아이들이 더욱더 사랑스럽게 느껴진 것이다.임유진은 한 손을 들어 또다시 부드럽게 강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내가 유미 언니랑 지영이 일에 열성인 건 두 사람이 지금 내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야. 두 사람 모두 나한테 많은 도움을 줬으니까 나도 갚고 싶어. 특히 지영이한테는 더 그렇고. 만약 지영이가 없었으면 나는 너랑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아마 차가운 감옥 안에서 희망도 뭣도 없이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강지혁은 그녀의 눈빛에서 뭔가 읽은 듯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한지영이 너한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친구인지 잘 알고 있어. 그래서 한지영 일이라면 네가 어떻게든 돕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네 마음속에 한지영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어쩌면 나보다 더 클지도 모르지.”그 말에 임유진이 웃었다.“너랑 지영이를 어떻게 비교해. 애초에 두 사람을 대하는 내 감정이 다른데.”“굳이 비교하자면?”강지혁의 질문에 임유진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두 사람 모두 내가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사실 그도 알고 있다. 임유진이 의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고 언제나 잘해주는 것의 두 배를 갚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당시 한지영은 임유진을 위해 자기 앞날을 포기했고 3년이나 옆을 지켜주며 임유진이 절망에 빠지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강지혁은 오히려 한지영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3년을 그가 아닌 누군가가 메꿔주었다는 것에.또한 그런 한지영과
임유진은 음식이 입에 잘 맞는지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하지만 식사가 거의 끝날 때쯤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강지혁에게 토하고 오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서둘러 룸을 빠져나가 화장실로 달려갔다.룸 밖을 지키던 여경호원은 자연스럽게 그런 임유진의 뒤를 따라갔다.강지혁은 임유진이 화장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휴대폰을 꺼내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있는 고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까 차에서 못했던 말, 지금 해봐.”고이준은 그 말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사실 아까 고이준은 차 안에 임유진이 있어 전부 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꾹 닫았다. 그런데 그 짧은 찰나의 망설임을 강지혁이 눈치를 챈 것이다.“보고에 따르면 백연신 씨와 고은채 씨가 함께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연인 같아 보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고씨 가문에서 비밀리에 뭔가를 준비하는 것 같다고도 했고요. 아마 백연신 씨를 도와 권력을 다시 빼앗으려는 것 같습니다.”그 말에 강지혁은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일단 이 얘기는 유진이한테 계속 비밀로 해.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내면 그때 내가 다시 얘기할 거야. 그러니까 백연신과 고은채가 어떤 사이인지 정확하게 알아봐.”“네, 알겠습니다.”한편, 임유진은 토하고 나니 그제야 속이 조금 편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사실 입덧은 3개월째에 들어서면 그만 멎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녀는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료도 찾아보고 의사에게도 물어보니 입덧은 임산부의 체질에 따라 다르며 어떤 임산부들은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계속 입덧을 한다고 했다.입덧하게 되면 먹었던 것들을 다 토하게 되기에 아이에게 충분한 영양소를 전해주기 위해서는 많이 먹는 것밖에 없었다.임유진은 그 생각에 쓰게 웃으며 아직 전혀 임산부 같지 않은 평탄한 자기 복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더 많이 먹도록 할게.”그녀는 세면대에서 간단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