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에게는 저택에서 들었던 얘기들이 지금도 여전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꼭 청천벽력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하고 난도질당한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하지만 그녀는 홑몸이 아니고 배 속의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이기에 마음대로 아파할 수도 없었다.임유진은 휴대폰을 들고 메일함으로 들어갔다.강현수가 보낸 메일... 이걸 강현수에게 보낸 사람은 강문철이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강문철이 임종 직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럼... 우리 내기할까? 아가씨가 정말... 지혁이를 사랑하는지...”강문철은 아마 그때 그녀가 모든 진실을 알고도 강지혁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물론 눈을 감기 직전까지 끝끝내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대신 진실을 알릴 선택권을 강현수에게 넘겨주었다.하지만 저택에서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다고 했던 강현수의 말을 떠올려보면 어쩌면 그녀는 영원히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을지 모른다. 강현수까지 입을 닫게 되면 그녀에게 진실을 얘기해줄 사람은 영원히 없을 테니까.만약 강현수가 오늘 강지혁에게 그 진실을 늘어놓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는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대신 자신을 해한 게 누군지, 자신의 인생을 망가트린 사람이 누군지, 왜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해야만 했는지 평생 모르고 살게 됐을 것이다.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현명한 건지 아니면 모든 걸 다 깨닫고 사는 게 현명한 건지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누구도 줄 수 없다.사람마다 다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까.하지만 임유진은 평생 고통받더라도 아무것도 모르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강현수가 보낸 메일로 들어가 내용을 훑어보았다.자료에는 당시 사건의 모든 파일과 진세령이 진범이라는 증거들이 아주 세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진애령의 사고는 진세령이 꾸민 일이 맞고 허재명은 그저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에 불과했다. 그리고 진기태는 사고가 있고 난 뒤 곧바로 모든 걸 알고 있는 허재명을 해외로 보내
강지혁은 그 사건의 진상이 그런 방식으로 임유진에게 들킬 줄도 몰랐고 그로 인해 임유진이 하마터면 아이를 잃게 될 줄도 몰랐다.만약 임유진이나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으면 아마 그는 평생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강지혁은 병상 옆으로 다가가 달빛을 빌어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살짝 부어있었고 볼은 여전히 창백했다.임유진은 잠을 자는 와중에도 아이들을 지키려는 듯 두 손을 복부에 딱 붙이고 있었다.그녀가 얼마나 아이들을 생각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하긴 이렇게도 필사적이니 목숨을 걸고 세 명 모두 지키려고 했겠지.“미안해... 유진아, 내가 잘못했어...”강지혁의 목소리는 싹 잠겨있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유약했다.“그때 일은 변명할 것도 없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눈앞의 이익 때문에 너를 사지로 몰아갔어... 그때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망가지는 걸 그대로 지켜만 봤어... 정말 미안해...”당시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이해관계의 일환일 뿐이었다.사실 진씨 가문에서는 진범이 누군지 그에게 말을 해준 적은 없다. 그저 강지혁이 자료를 조사하다가 진세령이 진범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뿐이다.하지만 진세령이 범인인 걸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애초에 진애령에게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진씨 가문의 일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으니까.강지혁에게 있어 그 사건은 그저 약혼녀가 죽은 사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약혼녀라는 건 어차피 다시 찾으면 그만일 테니까.당시 그에게는 그런 사사로운 사건보다는 회사를 더 크게 만드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익 관계를 최우선으로 뒀다.하지만 임유진을 사랑하게 된 지금 당시의 생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그의 방관으로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됐고 물리적인 고통도 받았다.미안하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그녀가 받은 상처를 보상해줄 수는 없었다.강지혁은 두 손을 들어
임유진은 탁유미의 말을 곱씹으며 쓰게 웃었다.차라리 이 모든 게 다 오해라면 얼마나 좋을까.강지혁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애령을 죽인 게 그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아무런 거래도 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날 밤, 임유진이 잠든 후 강지혁은 평소처럼 조심스럽게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매일 밤 같은 시간, 그는 이때야 비로소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아마 임유진은 모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또 소중한지.오늘도 강지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임유진의 볼을 매만졌다.하지만 그녀의 볼과 손바닥이 닿으려는 순간 임유진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임유진과 두 눈이 마주친 강지혁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손을 거두어들이고 뒷걸음질 치더니 병실을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임유진은 아직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아무리 그가 종일 병실 밖을 지켜도 그녀는 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고 퇴원이 예정돼 있던 날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원 기간을 연장하겠다고 했으니까.아마 집으로 돌아가면 그와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될 테니 그게 싫어서일 것이다.강지혁이 서둘러 병실 문을 열어젖히려던 그때 임유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잠깐만.”강지혁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그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혹시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에 헛걸 들은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그래서 그녀의 말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고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강지혁, 나랑 얘기 좀 해.”임유진이 말했다.탁유미의 말대로 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든 얘기를 해봐야만 한다.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임유진은 그를 ‘혁이’가 아닌 ‘강지혁’으로 불렀다. 서로 마음을 확인한 뒤에는 항상 다정하게 애칭으로 불러줬는데 지금은 마치 낯선 이를 부르듯 딱딱하게 불렀다.“그래.”강지혁은 천천히 돌아
“아니. 진세령은 처음부터 유진이 널 살인범으로 몰아가려고 했어...”강지혁이 말했다.“진세령은 당시 소민준의 여자친구였던 널 눈엣가시로 여겼으니까. 그래서 진애령을 제거하는 차에 너까지...”임유진은 순간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 들었다.진세령은 처음부터 자신의 계획안에 그녀를 넣었다.임유진은 우연히 살인범으로 몰린 것이 아니라 진세령의 철저한 계획 속에 살인범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억울함을 가득 안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임유진은 눈을 질끈 감고는 이불을 말아쥔 손에 힘을 가했다.진실이란 늘 그렇듯 이렇게 잔혹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더 잔혹한 진실이 아직 하나 더 남았다.임유진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꽉 깨물다 한참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네가 날 도와 사건을 뒤집어 준 건 단지 내가 진실을 파헤치지 않았으면 해서였어. 그래서 일부러 빠르게 허재명을 내 눈앞에 대령해 허재명이 말한 게 모두 진실이라고 내가 생각하게끔 만든 거야. 맞아?”강지혁은 살짝 휘청거리더니 천천히 임유진 곁으로 다가갔다.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임유진의 손아귀 힘은 점점 더 세졌다.강지혁은 병상 가까이 다가오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미안해... 그때는 그게 네 억울함도 풀어주고 사건을 빨리 종결시킬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어...”그는 그녀에게 미안해라는 말을 이렇게도 많이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강지혁은 요 며칠 입만 열었다 하면 미안해라는 말을 입가에 달고 살았고 그건 그녀가 깨어있을 때도 그러했고 그녀가 깊이 잘 때도 그러했다.“왜 날 속였어?”임유진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차라리 사건을 뒤집어주겠다는 말이나 하지 말지. 왜 날 속였어? 왜 내가 허재명이 진범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어? 왜 진세령을 감싸줬어?! 대답해!”그녀의 추궁은 마치 차가운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댔다.“미안해... 미안해...”강지혁은 고개를 살짝 든 채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준다며. 네가 그때 그랬잖아... 내가 울면, 이경빈처럼 펑펑 울면 용서 준다고 했잖아. 유진아, 나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 평생 울면서 사죄할게. 진심으로 내가 한 짓을 뉘우칠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 한 번만 용서해줘...”강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뜨거운 눈물을 아래로 쏟아냈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프게 욱신거리고 또 그로 인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강지혁의 눈물을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강지혁의 눈물은 그의 볼을 타고 내려와 이내 임유진의 손을 뜨겁게 데웠다.임유진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한쪽 손을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막상 그의 눈물 젖은 볼과 닿으려는 순간 일전 느꼈던 울렁거림이 밀려왔다.그녀는 서둘러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강지혁을 밀친 다음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변기를 붙잡고 미친 듯이 토하기 시작했다.입덧 시기가 지난 후 한 번도 속이 울렁거리거나 토하고 싶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참지 못할 정도로 위가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유진아! 너 괜찮아?!”강지혁은 임유진이 토하는 모습에 순간 긴장감이 극도로 치솟아 얼른 화장실로 달려와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하지만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임유진의 상태는 더 심해졌고 토도 더 세게 하기 시작했다.“나한테... 나한테 손대지 마.”임유진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강지혁의 팔을 잡아 멀리 뿌리쳤다.그렇게 10초 정도 지났을까, 역시 강지혁의 손길이 문제였던지 임유진은 천천히 토를 멈추고 진정하기 시작했다.임유진은 티슈로 입가를 정리한 후 창백해진 얼굴을 들어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는 강지혁을 향한 배신감과 원망의 감정이 들어있었다.임유진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그녀가 뭔가를 얘기하려던 그때, 강지혁은 마치 본능적으로 뭔가를 알아차린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안 돼... 말하지 마!’하지만 그의 간절한
의사와 간호사가 나간 후 임유진은 너무 가깝지도 않고 또 너무 멀지도 않은 곳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는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지금의 그는 꼭 두려움과 절망에 잠식되어 버린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 드디어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아이들을 출산하고 나면 따로 나가서 살고 싶어.”강지혁은 그 말에 고개를 홱 들더니 초조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집을 나가겠다고...?”“응.”임유진이 답했다.“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고 또 어떤 얼굴로 너를 봐야 하는지를 모르겠어. 그러니까 내가 나가는 게 나한테도 너한테도 좋을 거야.”사실 임유진도 변명거리라면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었다.그녀가 감옥으로 들어가게 됐을 때 강지혁은 아직 그녀와 알게 되기도 전이었기에 그에게 있어 그녀는 그저 어찌 되든 상관없는 사람이었다든지 또는 강지혁은 원래부터 성정이 냉랭하고 조금은 잔인한 사람이라 동정심 같은 건 없었다든지 또 강지혁은 그저 방관자일 뿐 실질적으로 진세령의 죄를 덮는 데 참여한 건 아니라던지... 변명거리라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하지만 그 무엇하나 그녀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못했다.임유진은 어릴 때부터 죄를 단죄하는 것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변호사라는 직업을 꿈꿨다. 그녀는 정의에 예민한 사람이었고 늘 법을 자신의 무기로 싸워왔다.그런데 하필이면 그녀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억울하게 당하는 걸 가만히 지켜만 봤다.지옥 같던 3년의 옥살이는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놨을 만큼의 큰 사건이었다. 그 일로 인해 상처받았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거의 평생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치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납득할 수 없어! 너한테도 좋고 나한테도 좋을 거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강지혁이 빠르게 다가와 병상 바로 옆에 서며 말했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고 했다. 하
강지혁은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나는 것만큼은 허락할 수 없었다.임유진이 강씨 저택에 돌아가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건지, 아니면 그를 싫어하는 건지는 잘 모르지만 뭐가 됐든 그는 그녀를 자신의 감시망 안에서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 순간부터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으니까.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그녀의 대답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병실을 나가버렸다.그리고 잠시 후 요 며칠 그녀를 돌봐줬던 간호사가 들어와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대표님께서 더는 병실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시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를 불러주세요.”임유진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천천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그리고 두 손을 복부에 살포시 올려놓으며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아이를 무사히 출산하려면 감정의 기복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하지만 그렇게 눈을 감은지 10분 정도나 지났지만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점점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과거의 고통 같은 건 전부 다 깨끗이 지워버리고 강지혁이 그녀의 고통에 일조한 것을 마치 몰랐던 일인 것처럼 세뇌하며 살아야 하나? 그러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까?그때 문득 그녀의 머릿속으로 일전 강지혁이 했던 만약 조금만 더 일찍 그녀를 만났으면 그런 고통은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떠올랐다.그때는 그저 연인의 과거를 안타까워하는 말인 줄 알았다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완전히 다른 의도로 한 말이었다.아마 강지혁은 조금 더 일찍 그녀를 만났으면, 조금 더 일찍 그녀를 사랑했으면 그녀가 그런 고통을 겪도록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고 온 힘을 다해 그런 일이 없게 그녀를 지켜줬을 것이다.왜, 왜 그와 그녀는 이렇게도 늦게서야 서로를 만나게 된 걸까? 왜 그녀가 감옥에 가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걸까?임유진의 닫힌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와 이내 그녀의 베개를
임유진이 저택에만 있던 며칠간, 밖에서는 한차례 폭풍이 일었다.진씨 가문의 자금원은 완전히 끊겼고 그로 인해 은행 대출조차 갚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은행은 당연하게도 법원에 진씨 가문의 산업들을 동결할 것에 대한 신청서를 제출했다.물론 진씨 가문의 재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산업이 막힌 그다음 날 진세령은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진세령은 진작 은퇴를 했지만 아직도 그녀를 지지하고 있는 팬들은 존재했다. 그날 진세령은 팬 미팅을 위해 아침부터 샵으로 가 정성스럽게 꾸미고 억대의 목걸이까지 착용했다.또한 단지 팬들과 근황 얘기나 하는 자리인데도 굳이 기자들까지 불렀다.사실 그녀는 팬 미팅 자리를 빌려 기사를 타 진씨 가문에 경제적인 위기 같은 건 없다고 알릴 참이었다. 하지만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경찰들이 와 그녀를 체포했다.진세령은 한순간에 자기 팬들과 기자들 앞에서 경찰에 의해 수갑이 채워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게다가 경찰은 수갑을 채울 때 그녀를 살인 용의자로 체포한다는 얘기까지 했었다.그 때문에 팬들은 너도나도 상황 파악이 안 된 얼굴로 벙쪄 있기만 했다.살인 용의자라니, 그들의 영원한 여신인 진세령이 살인 용의자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물론 당황한 건 진세령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경찰이 하필 팬 미팅하는 날 오래된 일로 들이닥칠 줄은 몰랐으니까.이로써 진씨 가문의 몰락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더 이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이미지를 회복할 수 없어졌다.그녀가 잡혀간 후 기자들에 의해 진세령이 살인 용의자라는 얘기는 일파만파 전해졌고 인터넷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스캔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네티즌들은 살인 용의자라는 말에 3년 전 진애령의 교통사고 사건을 수면으로 끄집어내며 진세령은 그 사건의 용의자로 잡혀간 것이라고 추측했다.그리고 그 추측에 인터넷은 또다시 들끓었다.그도 그럴 것이 당시 진애령이 차 사고로 죽었을 때 진세령이 통곡하며 속상해했던 사진과 기사가 아직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