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라는 두 글자가 나왔을 때 임유진과 강지혁의 몸이 동시에 움찔했다.임유진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누나’라는 소리에 조금 벙찐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당시의 강지혁은 그녀와 연인이 되어서도 가끔 둘만 있을 때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다.그에게는 그녀가 단지 ‘사랑하는 여자’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강지혁은 그녀를 누나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임유진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 손을 들어 가볍게 그의 앞머리를 위로 젖힌 후 그의 관자놀이를 주물러주었다.“혁아, 나 여기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편히 누워있어.”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 때문에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인 놀람으로 머리가 아픈 것까지 다 잊어버렸다.왜 그녀를 누나라고 부른 거지?또한 처음 부르는 호칭일 텐데 왜 이토록 몇백 번이나 불러봤던 것처럼 익숙하고 또 자연스럽게 입에서 뱉어지는 거지?“너...”강지혁이 뭔가 물으려는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머리 아플 때 자꾸 말하려고 하면 더 아플 거야. 이따 괜찮아지면 뭐든 대답해 줄 테니까 지금은 가만히 있어.”임유진이 그의 말을 끊고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리고 손 좀 풀어줘. 내가 마사지해줄게. 그러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서서히 눈을 감고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었다.임유진의 손목은 빨갛게 손자국이 나서야 드디어 그에게서 해방되었다.임유진은 분명히 그에게 잡힌 손목이 아플 텐데도 마치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적절히 힘을 조절해 가며 그가 아플 것 같은 곳을 세심하게 마사지해주었다.임유진의 몸은 마사지를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강지혁의 몸 가까이 기울어졌고 이에 강지혁은 마치 그녀의 숨결에 몸이 포근히 감싸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손길 때문인지 아니
여동생에게 안기면 이런 느낌인 건가?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양녀로 들어온 또 다른 여동생과 많이 달랐다. 소안나는 매번 그를 보면 잘 보이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멀리 떨어진 채 가까이 다가오는 걸 무서워했는데 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그의 손을 덥석 잡는 것도 모자라 엄마처럼 그를 꼭 끌어안아 주기까지 했다.강선율은 아까 임유진도 밀쳐내지 못하더니 이번에는 여동생의 포옹도 밀쳐내지 못하고 있었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이 꼭 끌어안은 채 감정을 나누는 모습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강선율이 워낙 과묵하고 애어른 같은 면이 있는 아이라 조금 걱정이 됐는데 수다쟁이에 애교쟁이인 딸이 먼저 가까이 다가가 주니 둘 사이에 밸런스가 맞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었다.게다가 강선율의 반응을 보면 현이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잠시 후, 의사인 박건태가 저택에 도착했다.서둘러 소파로 다가온 박건태는 임유진과 강지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강지혁의 몸 상태를 살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서서히 두 눈을 뜨며 말했다.“이제 괜찮아졌어. 아까처럼 아프지 않아.”박건태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전에는 한번 아프면 적어도 몇 시간은 아팠었으니까. 그런데 집사에게서 전화를 받고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고작 20분밖에 안 됐는데 전과 달리 정말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전혀 아픈 얼굴이 아니었다.‘증상이 전보다 괜찮아진 건가...?’“그래도 검사는 한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박건태의 노파심에 강지혁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2층으로 올라가 검사를 받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올라간 뒤 집사를 향해 물었다.“혁이 저러는 거 자주 있는 일이에요?”“그게... 사모님께서 곁에 없으신 뒤로 자주 두통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셨어요. 근 2년간은 그래도 전보다 아프다고 하신 빈도가 줄었는데 오늘 갑자기 또 두통이 도졌네요. 아마 사모님을 봬서 두통이 재발한 것 같아요.”집사가 자신의 추측을 얘기했다.그리고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
“네, 자극을 차단하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박건태가 말했다.사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그에게 약을 처방해 주려 했을 때도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그럼 약 처방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네?”박건태가 조금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약 처방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는 건...’“기억을 되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강지혁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더 심한 통증이 일 테고 그 통증으로 인해 회장님 몸이...”박건태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회장님,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강지혁의 기억은 일반 기억상실 환자들과 달리 기억을 되찾을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는 듯 마는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한번 보고 싶네. 기억을 회복할 때의 통증이 더 강한지 내 몸이 더 단단한지 말이야.”박건태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고 또 대단한 남자다. 즉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S 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분명히 4년 전에는 ‘그런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약 처방해.’라고 했으면서 말이다.‘갑자기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혹시... 아까 봤던 살아 돌아온 사모님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