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같이 가자.”임유진의 말에 차는 곧장 S시 공항을 향해 달렸다.공항에 도착하자, 임유진은 VIP 대기실에서 백연신을 마주했다.그는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 옆에는 묵직해 보이는 블랙 캐리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정말... S시를 떠나려는 건가요?”임유진은 헐떡이는 숨결 사이로 백연신에게 물었다.그의 위치를 알아낸 후, 강지혁과 함께 거의 전력 질주하다시피 달려온 참이었다.“내가 여기를 떠나면 안 됩니까?”백연신은 싸늘한 표정으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애초에 비즈니스 때문에 온 도시예요. 할 일 끝났으니 돌아가는 게 당연하죠.”“그럼... 지영이는요?”임유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지금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거, 알고 있기나 해요?”“그래서요?”백연신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지영이가 어떤 상태든,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 없어요.”“백연신 씨...!”임유진은 분노로 눈앞이 핑 돌았다.두 걸음을 성큼 내디딘 그녀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뺨을 내리쳤다.찰싹!날카로운 소리가 VIP실에 울려 퍼졌다.다행히 이곳은 독립된 공간이라 다른 사람의 시선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백연신은 싸늘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노려보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날 선 칼날 같았다.강지혁은 혹시나 백연신이 그녀에게 손 댈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임유진을 그의 뒤로 끌어당겼다.“백연신 씨, 만약 손찌검이라도 하시겠다면... 제가 상대 해드리죠.”지혁은 낮지만 묵직한 경고를 던졌다.백연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뺨을 가볍게 쓸었다.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했다. 마치 조금만 움직여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그때, 일촉즉발의 공기를 깨고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그래요. 제가 연신 씨 뺨을 때렸어요. 그런데 한 대로는 부족하네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억누른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당신이랑 지영이가 헤어지고 나서, 그 애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5년이
“안 물어봤어?”“지영이가 말을 안 하더라고. 그래서 더 묻지 않았어.”임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혁이, 네가 백연신 씨의 행방을 알아볼 수 있을까? 난 꼭 그 사람을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확인해야겠어.”강지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넌 참, 한지영 씨를 많이 신경 쓰는구나.”“지영이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야. 지영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테니까.”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을 살짝 기울여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빛엔 농담 하나 섞이지 않은 뜨거움과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그럼 나는? 넌 한지영 씨보다 날 더 신경 쓰는 거야, 아니면 덜한 거야?”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그의 눈동자에는 장난스러운 기색과 진심이 교차하다가, 이내 깊은 갈망으로 바뀌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임유진에게 한지영이 어떤 의미인지.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길 바라고 있었다.조금이라도 더. 단 하나의 마음이라도...그 욕심은 누구에게도 아닌, 오직 그녀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임유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야?”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지영이는 내 평생 친구고, 넌 내 남편이야. 비교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알아. 그런데도 이렇게 질투가 나. 내가 좀... 바보 같지?”강지혁은 쓸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안전벨트를 천천히 채워주었다.그 말에 임유진의 가슴 어딘가가 아릿하게 저며왔다.그가 손을 거두려는 순간, 임유진이 그 손을 붙잡았다.아직 다 회복되지 않은 손이었지만, 그녀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담아 그의 손을 꼭 쥐었다.“왜 그래?”강지혁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바보 아니야. 우리 혁이가 왜 바보야?”임유진은 조용히 눈을 맞추며 말했다.“그건... 날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잖아.”그녀의 눈동자엔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이
“지영아, 우리야 뭐, 이 나이에 사람들 말이 뭐가 무섭겠니? 우린 그냥... 네가 앞으로 후회 없이 잘 살아주길 바랄 뿐이야.”이해영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겠다는 선택... 그건 딸이 스스로 험난한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과 같았다.한지영의 콧등이 시큰해졌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긴 세월 동안 부모는 자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해왔다는걸.하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금 더 뼈아프게 다가왔다.한종훈은 무겁고 단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이 아이를 지켜내겠다는 거냐? 후회하지 않겠어? 애 키우는 건, 강아지랑 고양이 키우는 거랑은 다르다. 앞으로 네 인생... 생각보다 훨씬 고될 수도 있어.”한지영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이미 마음 정했어요. 후회 안 해요. 이 아이가... 제 뱃속에 있는 한, 저는 이 아이의 엄마니까...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그 말에 아버지는 미간을 지그시 좁히다가 곧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그래. 그렇다면 낳자. 우리 집이 뭐, 애 하나 못 키우겠냐? 아빠가 지켜줄게. 너도, 그 아이도...”그 말에 한지영은 울컥한 감정이 다시금 밀려와 눈물을 쏟고 있었다.“아이고, 얘야. 울지 마, 울지 마! 너 지금 울면 안 돼. 감정 흔들리면 태아도 힘들어진단다.”이해영은 다급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응... 안 울게요. 안 울게요.”한지영은 억지로 눈물을 멈추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그녀는 그저 뱃속의 이 작은 생명이 무사히 버텨주기를 간절히 바랐다.그 시각, 임유진이 숨을 헐떡이며 병실에 들어섰다. 한지영이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온 것이었다.그리고 그토록 오래 이어져 온 한지영과 백연신의 사이가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듣자, 임유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불과 이틀 전만 해도... 한지영은 백연신과 다시 시작할지도 모른다고 했었다.그런데, 어쩌다 모든 게
한지영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온 그녀의 부모는 산부인과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딸을 보고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왔다.그녀의 팔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얼굴도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무슨 일이야? 갑자기 입원은 또 왜? 혹시 뱃속 아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이해영이 다급하게 물었다.이곳은 시내에서도 가장 유명한 산부인과 전문병원이었다. 내로라하는 전문의들이 있는 곳이라 급한 상황이면 대개 여기로 온다.“입원해서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에... 길에서 교통사고가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아이 상태가 좀 안 좋아요.”한지영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뭐? 교통사고?!”그녀의 부모는 놀라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아침에 사고가 났는데, 지금 이 시간까지 연락도 안 하고 뭐 한 거니?!”벌써 오후 네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부모는 딸의 사고 경위를 재차 물으며 걱정했지만, 차가 가드를 들이박은 사고였고, 몸에 난 상처는 대부분 충격으로 인한 멍뿐이라는 설명에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아이는... 상태가 어때?”이해영이 조심스레 물었다.“그리 좋진 않아요. 지금 심장 박동이 많이 약해서... 유산될 위험이 크대요. 그래서 병원에 며칠 입원해서 안정 치료받으라고 했어요.”그녀는 조용히 대답하며 링거 맞고 있지 않은 손을 살며시 배 위에 얹었다.사실 오늘 백연신이 병실을 떠난 직후, 그녀는 의사에게 아이를 지우겠다며 수술을 요청했다.하지만 수술 동의서가 그녀의 손에 쥐어졌을 때... 펜을 드는 순간, 손끝이 떨리며 도저히 서명할 수 없었다.그저 눈물이 마구 쏟아졌고, 종이 위를 적셨다.결국 그녀는 서명하지 못하고 이곳, 산부인과 전문병원으로 병원을 옮겼다.그것이 아마 모성애인 듯하다. 이성은 분명 아이를 지우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감정은 말한다...“그래도... 이 생명을 내 손으로 끝낼 수는 없어.”이 아이가 스스로 그녀를 떠난다면 그건 받아들이겠지만, 그렇지 않고 아이가 하루라도
백연신은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몸이 휘청이며 비틀거렸다. 한 손으로 침대 끝을 짚지 않았다면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너한테는... 내가 그렇게까지도 믿지 못할 사람이었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떨리고 있었다. 눈빛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그의 눈빛은 고통이 되어, 마치 천둥처럼 쏟아져 내리며 한지영의 가슴을 거세게 쥐어짰다.이미 마음을 정하고 그와의 모든 인연을 끊기로 결심했건만... 그 눈빛만큼은 외면하기 힘들었다.‘신경 쓰지 마. 이건 착각일 뿐이야. 설령 나를 정말로 사랑했다고 해도... 그때뿐이야... 이걸로 됐어, 충분해. 더 이상 속을 순 없어!’“당신이 하는 말, 한 마디도 믿지 못하겠어.”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린 듯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백연신의 눈꺼풀이 천천히 떨렸다.그리고, 그는 차가운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스쳤다.“이렇게 우리 아이도 지워버리고, 나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되는 거... 정말 후회 안 해?”그 순간, 한지영은 입술마저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손끝이 닿은 자리마다 서늘함이 퍼져, 마치 흐르는 피조차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그래요. 후회 안 해요.”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응급실에서 진단을 받은 순간부터... 그리고, 뱃속의 아이도 마치 그녀의 결정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조용히 떠나려 하고 있었다. 태아의 심박수는 약했고, 의사도 말했다. 굳이 수술하지 않더라도 며칠 내로 유산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백연신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거두며 질끈 두 눈을 감았다.“좋아. 지영이 네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니... 나도 후회하지 않을게.”그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지만, 그 안엔 무언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숨어 있었다.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힘겨운 듯 천천히... 마치 온몸의 기운을 짜내듯 움직이고 있었다.그리고 다시 눈
한지영의 머릿속에는 문득, 오래전 그날의 대화가 떠올랐다.그녀는 그에게 장난스럽게 말했었다.“연신 씨, 우리 둘 다 칠십, 팔십이 되어도 이렇게... 키스할까? 그땐 너무 질려서 키스 같은 건 안 하게 되겠지?”그러면 그는 항상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하하하. 지겨울 리 없지. 지영아, 네가 나이 들어도, 내가 너랑 함께 눈 감고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난 계속 널 안고 키스하고 있을 거야.”그때 그 말은, 마치 평생을 함께하자는 약속 같았다.하지만... 그 미래는 결국 오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한지영은 그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게 이어갔다. 마치 그 입맞춤 속에 마지막 인사를 담듯이...‘이건 우리의 마지막 인사야... 우리의 끝...’그들의 애틋한 입맞춤이 끝나고, 백연신은 한지영을 천천히 놓으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쉰 듯한 애타는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지영아... 아직 나 사랑하는 거 맞지? 응? 내가... 이렇게 너랑 입 맞출 수 있는 날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다시는 안 올 줄 알았어...”5년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는 그녀를 단 한 번도 잊지 못했다. 이제야 비로소, 혈충의 저주도 사라진 지금... 그녀를 마음껏 안을 수 있게 되었는데...“지영아... 그때 내가 너를 떠났던 건... 백씨 가문을 되찾아야 너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야. 그리고...”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지영이 말을 가로챘다.“나를 지키는 방법이... 다른 여자를 선택하는 거라면, 난 그런 것 따위는 필요 없어요.”한지영의 단호함에 백연신은 몸이 점점 굳어져 가는 걸 느꼈다. 그녀의 맑고 반짝이는 눈빛에는 슬픔과 단단함이 배어있었다.“지영아... 만약 그때 내가 그랬던 게, 정말 네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하면... 그렇다면 날 용서해 줄 수 있어?”백연신의 목소리는 간절했고 눈빛은 애처로웠다.그러나... 그녀는 담담한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