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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Author: 유진
순간 임유진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북을 치기 시작했다.

‘맙소사,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됐…… 됐어. 얼른 밥 먹자. 식겠다.”

유진은 대뜸 손을 빼더니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며 머리를 파묻고 앞에 놓인 죽을 마구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눈에 드리운 웃음기도 더욱 짙어졌다.

“그럼 나는 어때? 난 좋아해?”

“당연하지.”

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에 지혁은 입꼬리를 곱게 말아 올리며 기분 좋은 듯 입을 열었다.

“나도 누나 좋아. 엄청.”

이렇게 그의 흥미를 자아내는 사람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

--

도시정비국의 며칠간의 시찰이 끝나자 민화영은 유진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유진아, 우리 이번 주 일요일에 고교 동창 모임 있는데 너도 꼭 참석해.”

‘고교 동창 모임?’

유진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유진의 상황으로 고교 동창 모임에 나간다면 아마 비웃음만 받을 게 뻔했다.

“아니야, 난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

“어떻게 그래. 고교 동창들 어렵게 모이는 자리인데. 그리고 네가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그래? 다 같이 참석하면 좋잖아.”

열성을 다해 설득하는 걸 보니 화영은 유진이 동창 모임에 꼭 나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학창 시절 잘 나가던 학급 공식 여신에 1등이던 유진이 이토록 초라하게 변한 걸 다른 동창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지 눈앞에 그려졌다. 그 상황만 생각하면 화영은 유진의 추한 모습을 하루빨리 동창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 주말도 출근해야 해. 너 설마 나한테 주말이 있다고 생각해?”

유진의 말에 화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그래도…….”

“나 쓰레기 버리러 갈 테니까 나중에 얘기해.”

유진은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유진은 바보가 아니다. 화영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유진은 환경위생과 계장으로부터 중요한 서류를 도시정비국 직원한테 전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주소는 S시의 한 유명한 회원제 클럽이었다.

그러한 클럽은 일반 환경미화원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유진이 클럽 입구에 도착하자 직원은 마치 유진이 올 것을 알았다는 듯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유진을 옆문으로 안내했다.

직원은 긴 복도를 지나 웬 룸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커다란 룸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유진이 아무 생각 없이 안으로 발을 딛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다들 와서 봐봐. 누가 왔는지!”

유진은 그제야 민화영과 조민혜, 그리고 익숙한 얼굴의 고교 동창들을 발견했다. 방금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화영이었다.

그제야 유진은 자기가 화영의 계략에 완전히 놀아났다는 걸 깨달았다. 화영도 도시정비국 사람이니 환경위생과 계장이 민화영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화영이 중요한 서류가 있으니 보내오라고 부탁하며 심부름할 직원을 지정하면 계장은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을 거다.

“거 봐. 내 말 맞지? 우리 반 공식 여신이었던 유진이 지금은 환경미화원으로 일한다고!”

옆에 있던 민혜가 씩 웃으며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유진이 입은 형광색 작업복은 검은 룸 안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이게 누구야? 우리 반 공식 여신에 1등만 하던 유진이 아니야? 3년 동안 감옥에서 고생했다더니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얘. 예전에 소민준이 널 그렇게 아껴줬잖아. 그런데 이렇게 길바닥에서 청소나 하고 있는 널 보고도 가만히 놔뒀어?”

소민준이라는 세 글자에 유진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 이름은 들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그때 유진을 비아냥거리던 목소리의 주인이 유진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이름은 신정민, S 시에서 꽤 잘나가는 가문의 자식인 데다 학창 시절 유진을 따라다니던 남자애들 중 한 명이다.

심지어 유진이 민준과 사귈 때 유진을 건드리려다가 민준한테 완전히 깨지고 난 뒤로 마음을 접었던 전적도 있다.

유진은 그를 무시한 채 화영에게로 다가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

“이거 네가 말했던 서류 맞지?”

화영은 서류를 건네받고는 싱긋 웃었다.

“번거로울 텐데 오게 해서 미안.”

가식적인 화영의 미소에 유진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룸을 나섰다. 하지만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정민이 갑자기 유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가 그렇게 급해? 동창끼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라도 좀 하다 가.”

정민은 말하면서 옆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유진의 입에 갖다 댔다.

“자, 마셔. 감방도 음주 운전으로 갔다 왔잖아. 설마 못 마신다는 소리는 안 하겠지?”

정민의 무례한 행동에 유진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홱 돌리며 두 손으로 힘껏 밀어냈다.

균형을 잃은 정민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은 정민의 몸에 쏟아져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정민은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망설임도 없이 손을 들어 유진의 뺨을 내리쳤다.

“네가 아직도 소민준 여친인 줄 알아? 길바닥에서 청소나 하고 있으면서 어디서 고상한 척이야? 까라면 까!”

뺨 한 대에 욕지거리도 부족했는지 정민은 와인 한 병을 들어 유진의 머리 위에 부어버렸다.

차가운 와인이 머리에서 떨어지면서 옷을 축축하게 적시는 바람에 유진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화영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임유진, 얼른 사과해. 사과하면 혹시 알아? 동창 간의 정을 봐서 용서해 줄지.”

‘사과?’

유진은 그 두 글자가 우습기만 했다. 분명 모욕을 당한 건 유진인데 오히려 사과를 요구하다니.

하지만 유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의연했다. 심지어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하고 또렷했다. 마치 아무리 우스운 꼴을 당해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유진의 그러한 모습은 오히려 정민의 화를 불러일으켰다.

“임유진, 너 설마 자기가 아직도 소민준 여자친구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사과 해. 이젠 너 대신 나서줄 사람도 없으니까!”

곧이어 “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유진의 상의는 그대로 찢어져 버렸다.

“아!”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놀란 유진은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주위에서 구경하던 동창 중 유진을 위해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년간의 감옥 생활로 햇빛을 거의 못 본 유진의 피부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하얗게 변했지만 그 위에는 적지 않은 흉터들이 나 있었다.

심지어 일부 상처들은 아직 딱지도 채 벗겨지지 않아 보기 무서웠다.

그 상처들은 모두 감옥에서 생긴 상처들이다.

애써 자기 몸을 가리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갑자기 손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민혜가 하이힐로 유진의 오른손 손등을 밟고 있었다.

“유진, 뭐가 그리 급해? 아직 신정민한테 사과도 안 했잖아. “

악랄한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내뱉은 말, 심지어 민혜의 눈빛은 마치 유진이 더 심한 꼴 당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실제로도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유진을 밟고 있던 발에 힘을 더 주었다.

손등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유진은 다시 감옥에 있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뼈가 부러질 정도로 폭행당하면서도 그때의 유진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모든 걸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유진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정민이 쥐고 있는 왼손을 빼내고 자기의 오른손을 밟고 있는 민혜의 말을 밀쳐내고는 전속력으로 룸에서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해! 무조건 여기서 탈출해야 해!’

유진은 찢어진 옷을 꽉 쥔 채 가슴을 가리며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갑자기 엄청난 힘이 유진을 미는 바람에 바닥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유진이 넘어진 순간 발 하나가 유진의 등을 밟았다.

‘아…… 아파…….’

등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몸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던 그때, 유진의 귓가에 정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 그러려면 그 전에 조사는 철저히 했어야지. 이 클럽 우리 집 지분도 들어 있거든…… 응?”

한참 동안 나불대던 정민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췄다.

이윽고 유진의 귓가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정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순간 유진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민준이었다.

예전에 유진의 하늘이 되어 줄 것처럼 사랑을 속삭이다가 민준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유진을 버린 남자.

유진의 몸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출소한 뒤 처음 민준과 만나는 자신의 모습이 이렇게 초라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뭐야? 너도 약혼녀랑 즐기러 왔어? 참 공교롭네, 여기 네 전 여친도 나랑 여기 즐기러 왔는데. 그런데 이게 내 심기를 자꾸 건드리지 뭐야? 설마 전여친이라고 편들어 줄 건 아니지?”

정민은 말하면서 유진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강제로 민준을 바라보게 했다.

그 때문에 그토록 익숙한 민준의 얼굴이 유진의 눈에 들어왔다.

유진이 조금만 다쳐도 마음 아파하며 속상해하던 남자의 눈에는 약간의 놀라움만 있을 뿐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몇 년 전, 다른 사람이 유진의 손을 망가트리려는 걸 동의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민준의 곁에는 진세령도 서 있었다. 세령의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순간 유진의 눈동자는 심하게 움츠러들었다. 순간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유진의 손톱을 뽑아버리고 손가락을 부러트리라고 명령하던 세령의 모습이 다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파…… 아파!’

유진의 몸은 더욱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민준과 세령, 두 사람은 유진에게 악몽 같은 존재다. 심지어 수많은 밤 두 사람에 관한 악몽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이 순간 유진의 앞에 서 있다.

“신정민, 네가 뭘 하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인데 내가 뭐 하러 상대해?”

민준은 말하면서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 유진의 마음은 욱신거렸다. 민준에 대한 마음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또다시 이런 말을 들으니 아픈 건 여전했다. 지난 몇 년간 잘못된 사람에게 마음을 바쳐왔던 자기가 마음 아파서.

‘뭘 기대하는 거야? 소민준이 날 구해주리라 기대하는 거야?’

유진은 마음속으로 자기를 비웃었다.

지금은 누구에게 기댈 게 아니라 자기만 믿어야 할 때다!

“그래? 그러면 내가 얘한테 뭘 하든 괜찮다는 거네?”

정민은 유진을 끌어당겨 옆에 있는 인공 연못으로 가더니 유진의 머리를 물 속으로 처박았다.

순간 차가운 물줄기가 유진의 입안과 코로 끊임없이 밀려 들어와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정민은 그때 유진 때문에 민준한테 맞았던 걸 보복하기라도 하듯이 한번 또 한 번 위로 올라오려는 그녀의 머리를 물 속에 밀어 넣었다.

“임유진, 널 누가 구하러 올지 어디 두고 보자고!”

“민준 씨, 얼른 가자. 강 대표 오래 기다리는 거 싫어해.”

민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유진의 귀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래.”

또다. 그놈의 “그래”. 세령이 유진의 손을 망가트릴 거라고 했을 때도 민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래”라는 답을 내놓았었다.

민준은 그렇게 가벼운 말투로 유진에게 지옥을 선사했다.

숨 막히는 느낌이 점점 강해지더니 점차 저항할 힘조차 없어졌다.

‘이대로 죽는가? 감옥에서도 죽지 않았는데, 이런 곳에서 죽게 되다니. 나 구해주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

한번 또 한 번 차가운 물 속에 머리가 파묻히며 “첨벙첨벙” 소리를 냈지만 다가와서 정민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축 늘어진 유진의 처참한 몰골을 흘겨본 세령은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입을 씩 말아 올리며 민준의 팔짱을 끼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이곳에는 유진을 구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아마 반죽음 상태를 면치 못할 거다.

하지만 그때.

“멈춰! 그 여자 여기로 데려와!”

갑자기 2층 계단에서 힘 있는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에 세령은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돌려 2층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존재감을 뽐내는 듯한 큰 키에 신이 빚어낸 듯 완벽한 이목구비,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 잔뜩 화난 듯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지혁이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지혁의 눈빛이 오롯이 유진을 향해 있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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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연신의 몸이 순간 움찔하며 떨렸다. 그리고 본능처럼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그때, 한지영의 눈물이 흘러내려 그의 입안에 스며들었다.희미한 짠맛이 번지자, 그의 모든 감각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다.예상치 못한, 깊고 강렬한 키스였다.그가 애써 쌓아온 모든 방어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마음과 몸이 그녀에게 완전히 휘말려 들어갔다.곧, 그의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앉았다.이제 그녀가 자신을 껴안고 입술을 맞추고 있어도, 더 이상 혈충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마치 처음 만났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 듯했다.그때 둘 사이에는 오직 달콤함만이 있었다.상처도, 배신도 없었다.그녀는 그의 전부였고, 그는 그녀의 전부였다.그 마음은 단 한 순간도 흔들림이 없었다...키스가 끝나자, 한지영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연신 씨... 아직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거죠? 아직도 나를 사랑하죠?”마치 꿈에서 확 깨어난 듯, 백연신은 눈을 번쩍 뜨고 그녀의 팔을 잡아 목에서 거칠게 떼어냈다.“뭐야... 키스 한 번 했다고 내가 너한테 마음이 있다고 단정하는 거야? 그럼 내가 다른 사람과 키스하면, 그 사람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생각할 거야?”그는 미친 듯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애써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지금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얼마나 허망한 거짓인지.한지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두 손은 헐렁한 옷자락을 꼭 움켜쥔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그리고 맑고 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작은 사슴처럼 순수하면서도 불쌍하고, 어찌할 바 모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백연신은 이를 악물며 시선을 돌렸다.“됐어. 난 이미 지쳤어. 더 이상 너와 얽히고 싶지 않아. 예전 일은 오해든 뭐든, 이제 다 지나간 일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마!”말을 내뱉자마자, 그는 황급히 계단을 올라갔다.거실에는 한지영만이 홀로 남아 그의 뒷모습을 넋을 잃은 듯 바라보고 있었다.한지영은 눈물을 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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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영, 너랑 나는 이미 오래전에 서로를 놓쳤어!”백연신이 차갑게 손을 거두었다.순간, 한지영은 손이 텅 빈 듯했고, 배에서 느꼈던 그 손길의 따스함도 사라졌다.놓쳤다...정말로, 그녀와 그는 이렇게 끝내 서로를 놓치고 만 걸까?“됐어. 만약 네가 계속 나를 만나러 오고, 할 말이 그거뿐이라면... 이제 더 이상 나를 찾을 필요 없어. 필요하면 내 비서에게 연락해.”백연신의 말에는 한 줌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비서에게...요?”한지영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양육비가 얼마가 필요하든, 혹은 원하는 돈이 있든, 비서에게 말하면 돼. 금액이 지나치지 않으면 문제없어. 그리고 네 뱃속 아이는, 낳든지 지우든지, 네 마음대로 해.”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담담했다.“난... 돈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한지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중요한가? 어쨌든...”백연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지영은 갑자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그의 목을 양손으로 감싸안았다.그리고 발끝으로 살짝 올라서, 입술로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갑작스러운 키스에 백연신은 온몸이 굳었다.본능적으로 그녀를 밀어내려고 손을 뻗었지만, 손이 닿는 순간 멈춰버렸다.지금 그녀는 평소의 그녀가 아니었다. 임신한 여인이었고, 그의 가벼운 힘만으로도 그녀와 배 속 아이에게 위험이 될 수 있었다.백연신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몸을 똑바로 세운 채 숨을 삼켰다.‘절대 감정에 휘둘리면 안 돼...’그는 마음속으로 계속 스스로에게 되뇌었다.한지영은 마치 그동안 쌓인 그리움과 후회, 모든 감정을 이 키스에 쏟아붓는 듯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은 끝내 굳게 닫혀 있었다.마치, 자신을 받아주고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하지만 한지영은 이렇게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정말,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았다.눈물이 다시금 그녀의 눈을 가득 채웠다.심장은 바닥으로 가라앉는 듯했고, 그녀는 그가 아직도 자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해 주길, 가능성이 남아 있길 바랐지만...

  • 길에서 주운 노숙자가 알고보니 유명그룹 대표님?!   제1934화

    한지영은 급히 달려가 백연신 앞에 섰다.코끝이 시큰거려 목소리가 떨렸다.“알아요... 그때 연신 씨가 날 지키려고 고은채의 조건을 받아들였다는 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날 떠난 거잖아요. 5년이 지난 뒤에도, 또다시 그 여자 손에 휘둘리면서도 나를 지켜줬잖아요. 게다가 그때는 연신 씨 몸에 혈충이 있었고... 그 때문에 나를 만질 때마다 고통스러웠던 거, 그리고 혈충을 없애려다 결국 고은채가 연신 씨 별장에 드나들게 된 거... 전부 다 알아요.”하지만 백연신은 무심한 얼굴로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떨림도, 흐느낌도, 후회도... 이제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그래? 다 알고 있었구나.”그가 내뱉은 건, 겨우 그 담담한 한마디뿐이었다.한지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그날 내가 별장에 갔던 건, 우리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고은채가 거기서 나오는 걸 보고... 난 당연히 오해했죠. 연신 씨가 그 여자랑 그런 관계인 줄만 알고... 혈충 때문이었다는 건 몰랐어요. 난...”“맞아, 넌 오해했지.”백연신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하지만 그렇게 쉽게 오해했다는 건, 결국 넌 날 믿지 않았다는 뜻 아니야?”그 말에 한지영은 숨이 턱 막혀왔다.백연신은 입꼬리가 차갑게 비틀리며 말을 이었다.“그런 네가 어떻게 감히 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눈빛을 더 깊이 가라앉혔다.“이제 와서? 네가 잘못 오해했다는 걸 알았으니 또다시 나한테 온 거야? 하지만 한지영, 착각하지 마. 네가 돌아오기만 하면 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예전처럼 바보같이 널 사랑할 거라 믿었어? 그 사랑은... 네가 병원에서 아이를 지우려던 그 순간, 완전히 끝났어.”“...!”한지영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와락 터져 나왔다.“아니에요... 난... 난 아이를 지우지 않았어요. 연신 씨, 정말이에요... 우리 아이, 지금도 내 뱃속에 있어요. 잘 자라고 있다고요. 내가 매일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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