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서 있던 정가연이 친절한 척 얼른 앞장서서 입을 열었다.“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겸이는 아직 어리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겸이가 하씨 가문에 있는 동안 저랑 승찬이가 책임지고 잘 돌볼게요!”지금 이 정가연의 태도를 보면 예전에 그들이 겸이를 어떻게 대했는지 완전히 잊은 듯했다.그도 그럴 것이, 하씨 가문 입장에선 겸이가 이 집에 오래 머무는 게 당연히 이득이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강씨 가문과의 인연을 만들 기회를 노릴 수 있으니까.그때, 분식집 쪽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한지영이 다가오더니 정가연의 가식적인 말에 코웃음을 쳤다.“예전에 그 어린애를 그렇게 다치게 해놓고도 지금 이런 말 할 수 있다는 게, 참 대단하시네요.”그 말에 정가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리고 한지영은 이내 몸을 낮춰 겸이 눈높이에 맞춰 앉았다.“겸아, 네 엄마가 널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아? 지금 이렇게 학교 앞에서 누나 기다릴 수 있는 것도, 네 엄마가 목숨 걸고 널 구했기 때문이야.”겸이는 작고 예쁜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지영은 예전에도 이 아이와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어서 겸이가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성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세상에서 널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너희 엄마야, 그건 꼭 기억해야 돼.”한지영이 조용히 말했다.그런데 그 순간, 예상을 깨는 겸이의 대답이 불쑥 들려왔다.“세상에서 가장 많이 나를 사랑 해주는 사람은 누나예요!”“응?”한지영은 그 말에 당황한 듯,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겸아,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한다’라는 게 어떤 감정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나를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누나예요. 나도 누나를 가장 많이 사랑해요!”겸이는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이 녀석 참...”한지영은 겸이의 고집스러움에 혀를 찼다.‘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가장 많이 사랑한다’라는 감정이 뭔지 얼마나 안다고!’그때, 임유진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겸아,
“조금 이따 사람 시켜서 여기 정리하라고 할게.”강지혁이 조용히 말했다.“응...”임유진은 빨간 얼굴빛을 한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을 정성스럽게 씻겨준 뒤, 산뜻한 병원복으로 갈아입혀 주었다.“아, 맞다. 소영훈 선생님 말로는 이틀 뒤면 퇴원해도 된대. 그때 되면... 겸이부터 먼저 보고 싶어.”임유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겸이는 이미 퇴원했지만, 끝까지 강씨 저택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씨 가문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이유는 오직 하유은이 하씨 가문 저택에 있기 때문이었다.임유진은 겸이가 자신들과 더 멀어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강지혁과 상의해 당분간은 겸이가 하씨 가문에서 지내도록 두기로 했다.하씨 가문 쪽에서는 두말없이 겸이를 잘 돌보겠다며 선뜻 허락했지만, 임유진은 그들이 결국 강씨 가문과의 인연을 바라고 허락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강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혹시 네가 겸이를 강씨 저택으로 데려오고 싶으면 내가 방법을 좀 생각해 볼게.”그에게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수고를 들여야 할 뿐이었다.“일단 이렇게 하는 거로 하자. 서두를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 이미 겸이를 오 년이나 기다렸는걸. 조금 더 기다린다고 해서 문제 안 돼. 겸이가 정말 우리를 받아들일 때 데려오면 되잖아.” 임유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래, 네 말대로 하자.”강지혁은 순순히 받아들였다.임유진이 퇴원하는 날, 한지영은 병원까지 가면 오히려 임유진이 더 정신없어질까 봐, 그리고 어차피 임유진이 겸이를 보러 간다고 하니 곧바로 탁유미가 운영하는 분식집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그렇게 하교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한지영은 겸이의 작은 실루엣이 교문 쪽으로 향하는 걸 보았다. 겸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학교 정문 앞에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누나가 나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오늘은 겸이 혼자가 아니었다. 하만수와 정가연, 그러니까 하유은의 부모가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경호원처럼
“내가 점점 더 의지하게 되면... 나중에 짐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럴 거 아니지?”임유진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강지혁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답했다.“유진아, 넌 절대 내 인생에 짐이 아니야. 넌 내 전부야.”그 말에 임유진의 심장이 순간 쿵 하고 울렸다.이 남자는... 지금도 변함없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5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왜? 물 마시고 싶어? 아니면 화장실?”강지혁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고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아니, 그게 아니라...”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수줍게 말했다.“그냥, 갑자기 너를... 만지고 싶어서.”지금 그녀는 손에서 붕대는 풀었지만, 수술 부위는 매일 흉터 연고를 발라야 했고 손가락 움직임도 아직 자유롭지 않았다.그래서 하루에 몇 번씩 저주파 자극기로 손 신경을 자극하는 재활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어디를 만지고 싶은데? 얼굴?”강지혁은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살며시 들어 자기 뺨에 가져다 댔다.차가운 그의 피부와 따뜻한 그녀의 손끝이 맞닿았다. 그러고는 마치 그 온기를 더 느끼고 싶다는 듯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임유진은 항상 그에게 따뜻함을 주는 존재였다.정작 더 의지하고 있는 쪽은... 강지혁, 자신이었다.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끌어 아래로 내리며 턱선과 목덜미, 쇄골을 지나 자신의 가슴 위치에 가져갔다.그리고 한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며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이끌어 자기 심장 위에 가져다 댔다.순간, 임유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비록 지금 손가락은 거의 움직이지 못했지만,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의 체온과 심장박동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져 왔다.“나는 온전히 네 사람이야. 네가 원한다면 어디든 만져도 돼.”그의 속삭임은 낮고 부드러웠지만 위태로울 만큼 유혹적이었다
그 순간, 한지영은 마치 마음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혼란을 느꼈다.콘서트가 끝나고, 백연신이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동안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그가 했던 말과 그가 불렀던 노래로 가득했다.‘백연신 같은 사람이 노래를 배우다니... 정말 나 때문에 그런 걸까?’“지영아, 너 임신한 건 연우진한텐 말하면서, 너희 부모님한텐 왜 말 못 하는 거야?”백연신의 낮은 중저음 목소리가 차 안의 정적을 깼다.“아!”한지영은 정신이 번쩍 들며 대답했다.“그건요, 연신 씨한테 얘기했던 것처럼, 연우진 씨한텐 그냥... 괜히 나 때문에 감정 낭비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설명해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백연신은 묵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연우진한텐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면서, 정작 나한텐 뭐 하나 제대로 얘기해주는 게 없네.”그 말에 한지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연신 씨... 저는 오직 아이 때문에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 그런 건 원하지 않아요. 결혼이 그런 식으로 결정되는 거라면, 차라리 저... 유미 언니처럼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그리고... 이 아이를 낳을지 말지도, 아직은 모르겠어요.”한 번 아이를 낳으면 그녀와 백연신은 앞으로도 계속 얽히게 될 것이다.그 아이는 평생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존재가 되겠지만, 동시에...자신이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존재였다.백연신의 눈빛이 점점 더 깊어졌다.“그러니까 너는 결국...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믿지 못하는 거네?”“믿어요.”한지영은 조용히 말했다.“하지만... 언젠가 또 연신 씨와 사업적으로 충돌이 생기게 되면, 결국 버려지는 건 저일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문을 열고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아, 그리고 그 택배들... 사람 보내서 가져가세요. 저 그런 거 필요 없어요.”백연신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비록 그런 행동이 그의 통증을 더 악화시켰지만, 백연신은 끝까지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그녀는 몰랐다. 그 말 한마디가 그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그리고 백연신을 고통 속에서도 계속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는걸...“지영아,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나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줘.”백연신이 낮게 속삭였다.몸속에 남은 혈충이 완전히 사라지면, 그때 그녀에게 모든 걸 솔직히 말할 생각이었다....한지영은 결국 GB의 콘서트를 보게 됐다. 다만 수많은 팬들과 북적이는 일반 관객석이 아니라 특별 VIP 전용 룸에서였다.넓은 유리창 너머로 무대 전경이 한눈에 보였고, 동시에 다양한 각도에서 무대를 비추는 여러 화면도 함께 있어, 말 그대로 무대를 360도로 관상할 수 있었다.한지영은 새삼 돈의 위력을 실감하며 감탄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백연신이 물었다.“그런 건 아닌데... 뭔가 좀 이상해요. 콘서트는 다 같이 소리 지르고, 미친 듯이 환호하는 맛이 있어야 재밌는 거잖아요.”한지영이 말했다.“나는 그냥 네가 GB 콘서트 보고 싶다고 한 게, 그 다섯 남자들 보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보기만 하면 된 거 아니었어?”백연신이 다정하게 물었다.한지영은 갑자기 연이은 기침을 하더니 말을 얼버무렸다.“아니 그게... 잘생긴 남자 얼굴만 보는 건 아니거든요.”“그럼 뭘 보는데?”백연신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몸매요!’한지영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달랐다.“실력이요. 노래도 잘하고 퍼포먼스도 멋지잖아요.”“그래?”백연신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무대에서 잔잔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이번 곡은 예전 명곡 중 하나였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발라드였다.GB 다섯 멤버는 무대 중심과 네 끝에 나뉘어 서서 이 노래를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그런데 그 순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백연신이 조용히 그 노래를 따라
“그래? 그런데 왜 밖에 있어? 안 들어가 보고.”백연신이 되물었다.한지영은 그를 짧게 흘겨보며 말했다.“임신했는데요... 콘서트장 얼마나 시끄럽고 정신없는지 연신 씨도 알잖아요. 그 안에 들어갔다가 혹시라도 누가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예전에도 그는 함께 콘서트를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정도는 알 텐데 말이다.백연신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지영아... 그럼 혹시 아기 다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야?”“나...”한지영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그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아까 연우진 씨는 네가 임신했는데 내가 책임 안 지려고 한다고 생각하더라.”“그건 오해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그녀는 급히 해명했다.백연신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영아, 네가 내가 책임지길 바란다면... 나, 책임질게.”그의 눈빛을 마주친 순간, 한지영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의 시선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고 빨려 들어갈 것처럼 강렬했다.“그래서, 책임졌으면 좋겠어? 나, 그렇게 해줄까?”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유혹적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싶어질 만큼 따뜻한 말투였다.‘하지만 안 돼!’그녀가 원했던 건, 그런 의미의 ‘책임’이 아니었다.한지영은 고개를 저었다.그 순간, 주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백연신의 눈빛엔 눈에 띌 정도로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그럼... 이제 나랑 결혼하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 부모님한테 혼나는 게 낫고, 아기가 혼외자 태어나게 되어도 나랑은 엮이기 싫다는 거야?”한지영은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그녀에게 한 발 더 다가서며 조용히 물었다.“지영아, 너 나 그 정도로 미워해?”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마음이 더 흔들릴 것 같아서...혼란스러운 감정을 애써 억누르기 위해 그녀는 그저 외면하는 것을 선택했다.잠시 침묵하던 백연신은 문득 물었다.“그럼, 만약 내가 어느 날 죽으면... 넌 슬퍼할 거야? 살아 있는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