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아, 나 지금... 네 앞에 있어. 나는 널 떠나려 했던 게 아니야...”임유진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이마에서는 땀방울들이 미친 듯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손은 풀릴 줄을 몰랐고 오히려 더 세게 그녀의 손을 옥죄기 시작했다.임유진은 고통을 최대한 참아보며 달래는 목소리로 강지혁을 계속해서 진정시켰다.“혁아, 네가 보고 있는 건... 과거의 기억일 뿐이야. 앞으로 절대 그럴 일 없어. 그러니까 눈 떠. 윽... 눈만 뜨면 모든 게 다 사라질 거야. 더 이상 널 아프지 않게 할 거야.”강지혁은 손을 덜덜 떨며 이를 꽉 깨물었다.“내 목소리 들려? 나 유진이야... 나 지금 네 곁에 있잖아... 앞으로도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제발 눈 좀 떠줘, 혁아.”그때 강지혁이 갑자기 손을 놓아주더니 이번에는 자기 머리를 꽉 끌어안고 관자놀이 쪽을 세게 누르기 시작했다.“아파... 머리가... 너무 아파.”강지혁은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며 몸이 제어가 안 되는지 방 안의 물건을 전부 다 바닥에 집어 던지며 난동을 부렸다.심지어 그것으로도 해소가 안 되는지 급기야 자기 머리를 벽에 부딪치려 했다.“안 돼!”임유진은 큰소리로 외치며 달려가 한 손으로 곧 부딪치려 하는 강지혁의 머리를 막았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혁은 그대로 임유진의 손바닥에 머리를 들이받았고 임유진은 차원이 다른 고통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제일 고통스러운 사람은 다름 아닌 강지혁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며 요셉을 향해 물었다.“선생님, 혁이 왜 이래요? 왜 자해하려고 하는 거예요?”“아무래도 자극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진정시켜야 합니다!”진정을 시켜야 한다고는 하지만 세 명 모두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그 사이 강지혁은 계속해서 벽을 향해 머리를 들이받았고 임유진은 그럴 때마다 또다시 손으로 막으며 그 충격을 흡수했다.한 번, 두 번, 세 번
임유진은 고민할 것도 없이 그쪽으로 뛰어갔고 고이준도 빠르게 따라붙었다.안쪽으로 가면 갈수록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꼭 통증이 너무 커 견딜 수 없는 한계치까지 다다른 목소리 같았다.임유진과 고이준이 방 앞에 도착했을 때 울부짖는 소리 외에 중년 남자의 목소리도 들렸다.“회장님, 진정하세요! 지금 보고 있는 장면들은 과거의 장면들로 지금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임유진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흰색 의자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고 그 옆에는 요셉 의사가 다급하게 말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강지혁은 아직 최면 중인 건지 눈을 뜨지 않는 상태였지만 상황이 꽤 심각해 보였다.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고 입술은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이윽고 피가 살갗을 뚫고 밖으로 흘러나왔다.“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최면으로 기억을 되찾는 영상이라면 많이 봤지만 그 어느 하나 강지혁처럼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즉, 뭐가 잘못되고 있다는 뜻이었다.“혹시 사모님? 여긴 어떻게...”요셉이 조금 놀라며 묻자 임유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당장 최면을 멈춰주세요! 혁이가 고통스러워하잖아요!”요셉은 그 말에 다시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안 됩니다. 지금 깨웠다가는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리게 될 겁니다! 지금은 회장님께서 스스로 진정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대체 누가 회장님께 최면을 걸어 기억을 봉인하게 만든 겁니까? 최면이라는 건 원래...”“안 돼!”그때 가만히 누워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몸을 크게 뒤틀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몸에 부착되어 있던 기기 선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고 의자도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옆으로 넘어가고 말았다.임유진은 바닥에 쓰러진 강지혁을 일으키기 위해 다가갔다가 강지혁의 손에 의해 바로 뿌리침을 당했고 그대로 옆에 있는 협탁에 허리를 부딪쳐버렸다.“윽!”고
경비원은 잠시 망설였지만 여전히 출입을 거부했다.“죄송합니다. 이대로 사모님을 들여보내면 저희는 회장님께 죽을지도 모릅니다.”“나중에 질책당할 게 겁나서 그러는 거면 내가 대신 해결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약속하죠. 그러니 비키세요.”하지만 임유진의 설득에도 경비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경비원을 억지로 떼어내 안으로 가려고 해도 커다란 대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시간은 1분, 2분 흘러가고 있고 임유진은 마음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재가 되어가고 있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혁이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문 열어. 지금 당장 이 문 열라고! 만약 혁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그때는 내가 당신들 가만 안 둬!”설득이 안 돼 협박까지 해보았지만 경비원들은 아예 고개를 돌리며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임유진은 고집스러운 그들의 태도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아까 이곳으로 오는 길에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아예 전원이 꺼져있는 상태였다.‘안 돼.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어!’임유진은 그 생각에 다시 차로 돌아갔다.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으로 말이다.“고 비서님, 차 키 줘요.”“네? 네.”고이준은 그녀가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른 채 일단은 키를 건네주었다.임유진은 운전석에 앉고는 심호흡을 한번 했다.운전을 안 한지 너무 오래됐던 터라 심장이 쿵쿵 뛰고 손이 덜덜 떨렸다. 기억을 잃은 5년 동안에도 그녀는 운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조수석에 앉아 핸들을 잠깐 만진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르고 두려움부터 앞섰으니까.그때는 기억을 잃었을 때라 그 두려움이 왜 생겼는지 몰랐지만 기억을 완전히 되찾고 보니 왜 두려움부터 느꼈는지 알게 되었다.진애령의 교통사고와 절벽 사건, 그 두 사건 모두 그녀에게 뿌리 깊은 공포를 심어줬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두려워도 어떻게든 별장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강지혁이 전처럼 두통으로 입술까지 물어뜯으며 괴로워할지도 모르니까.이대로 계속 멍청하게 기다리면 평생을
임유진이 요셉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기억을 잃었을 당시 꽤 많은 상담도 받아보고 직접 해외의 유명한 논문도 찾아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다만 요셉은 해외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 예약을 잡는 게 하늘의 별 따기 급으로 어려웠다. 게다가 그때는 현이도 키워야 했기에 모든 걸 다 제쳐두고 해외로 날아가 온전히 치료만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래서 계속 속으로만 치료를 받아야겠다 하고 생각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기억을 되찾는 일에 대해 완전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요셉의 사진을 강지혁의 책상 위에서 보게 될 줄이야.“설마...”임유진은 미간을 한번 찌푸리더니 서류를 활짝 펼쳤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요셉의 과거 이력이 가득 적혀있는 자료가 있었고 일주일 일정표까지 적혀있었다.일정에 따르면 요셉은 엊그제 S 시에 도착했다고 한다.“요셉이 S 시로 왔다고?!”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다가 무슨 생각 하나가 떠오른 듯 서류를 쥐고 있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고이준이 복잡하고도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임유진이 먼저 물었다.“요셉이 왜 여기로 와요? 설마 혁이 기억을 찾아주려고 온 거예요?”고이준은 그 말에 흠칫하다가 임유진의 손에 들린 서류를 보고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것 같아 모든 걸 다 얘기해주었다.“네... 사모님 말씀대로 회장님은 지금 요셉 선생과 함께 있습니다. 오늘 기억을 되찾는 최면을 받을 거라고 하셨어요.”임유진은 그 말에 심각한 얼굴로 고이준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래서 지금 두 사람은 어디 있죠?”“회장님 명의로 된...”임유진은 고이준이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그의 팔을 끌고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지금 당장 그곳으로 데려다줘요!”“네, 알겠습니다.”차 안.임유진은 운전석에 앉은 고이준을 보며 물었다.“그런데 왜 나한테는 얘기 안 했어요?”“사모님께서 아시면 걱정하신다고 함구하라고 하셨습니다.”사실 고이준은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지만 임유진
백연신이 한지영에게 헤어짐을 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고은채는 어느 날 어디서 구한 건지도 모를 작은 벌레 같은 것을 가지고 왔고 백연신이 방심한 틈을 타 그에게 벌레를 넣은 음료를 먹였다.이상한 느낌에 백연신이 바로 게워내 보려고 했지만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연신 씨 배속으로 들어간 그 벌레는 혈충이라고 몸에 기생하는 벌레예요. 연신 씨 벌레는 특별히 한지영 씨의 피를 섭취한 적이 있는 벌레죠. 혈충은 한번 마신 피의 냄새를 평생 기억해서 피의 주인이 가까이 다가오면 지금 기생해 살고 있는 숙주의 몸을 무척 고통스럽게 만들어요. 즉, 연신 씨가 한지영 그 여자와는 함께할 일은 영원히 없다는 뜻이죠.”고은채는 그때 악랄한 얼굴로 웃으며 이 말을 했었다.그녀의 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고 백연신은 한때 그 일로 깊은 절망감에 빠졌었다. 한지영을 해하려고 했던 인간들을 다 처리해도 결과적으로 그녀와 이어질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혈충은 평생 몸에 기생하는 것이 아닌 원하면 제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혈충을 처음 발견했던 마을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고 그에게 혈충에 관한 정보를 줬던 사람도 제거하는 건 기술자가 아니면 못한다고 말하며 난색을 보였다.그래서 백연신은 원래 짰던 계획을 살짝 틀어 고은채가 자기 입으로 혈충을 제거해주겠다는 말을 꺼내게 했다.한지영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몸속에 있는 벌레를 제거해야만 했다.아마 한지영은 모를 것이다. 그날 차 안에서 서로 살결이 맞닿았을 때 백연신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그녀의 포옹 한 번에 그는 바늘로 온몸이 쿡쿡 찔리는 것 같았고 그녀의 입맞춤 한 번에 그는 살이 다 깎이는 것 같았다. 세포 하나하나가 다 그녀 가까이에 가지 말라고, 그녀와 맞닿아있지 말라고 울부짖는 듯했다.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안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고통이 미친 듯이 몰려와도 닿아있는 것에 그는 기쁘기만 했다.아까도 마찬가지였다. 한지영을 품에 끌
한지영은 자신을 꼭 감싸는 그의 품이 너무 따뜻해 이대로 몸을 맡긴 채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당장 팔 풀어요. 아니면 때릴 거예요?!”한지영은 입술을 꽉 깨문채 협박성 말을 꺼냈다.이에 백연신은 피식 웃더니 쇄골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떼어내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때려.”한지영은 마음껏 때리라고 일부러 힘을 풀어 거리를 살짝 벌려주는 그의 행동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대로 손만 뻗으면 바로 뺨을 내리칠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손이 들리지 않았다.그때 그의 뺨을 때렸던 느낌이 여태 손바닥에 남아있기 때문인가?“지영아, 내가 지금처럼 널 이렇게 안고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통증을 이겨내야 하는지 알아?”백연신은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지워내고 조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한지영은 그 말에 그제야 그의 얼굴색이 안 좋다는 것을 눈치챘다. 심지어 그의 이마에는 땀이 한층 맺혀있기도 했다.“어디... 아픈 거예요?”한지영의 질문에 백연신은 대답이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괜찮아. 통증이 따라도 널 이렇게 안을 수 있다면 뭐든 괜찮아. 내가 제일 두려운 건 너랑 함께할 수 없는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윗몸을 천천히 일으키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정말 그랬다면 나한테 헤어지자는 얘기를 안 했겠죠. 백연신 씨, 당신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건 나랑 함께하지 못하는 것 따위가 아니에요.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 쥐고 있는 권력과 재부, 그걸 잃는 걸 가장 두려워했었어!”백연신도 어두운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한지영과 마찬가지로 조금 격앙된 말투로 얘기했다.“널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 왜 그걸 몰라!”백연신은 연인 관계가 단지 사랑으로만 돌아가고 세상도 사랑만 있으면 뭐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권력과 재부를 손에 넣는 것에 집착했고 한지영까지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남자가 되려고 노력했다.“날 지켜주기 위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