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아!”강지혁의 외침과 함께 임유진은 피로감이 온몸을 덮치는 것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러나 기절했음에도 그녀의 두 팔은 여전히 강지혁을 꼭 안은 채로 있었다.“회장님...”고이준이 얼떨떨한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완전히 깨셨습니까? 두통은... 괜찮습니까?”“괜찮아.”강지혁은 조심스럽게 임유진의 팔을 떼어내며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완전히 정신 차렸어.”그때 요셉이 진정제 주사를 들고 강지혁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지금은 두통도 가라앉고 괜찮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아플 수 있으니 진정제를 맞고 제대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면은 실패한 듯 보이지만 다음번에는 분명히...”“다음은 없어.”강지혁의 말에 요셉은 물론이고 고이준도 깜짝 놀랐다.“회장님, 그게 무슨...”고이준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기억을 되찾는 걸 그만두시겠다는 말씀입니까?”강지혁은 조금 어두운 눈빛으로 품 안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답했다.“그래, 이제 필요 없어졌어.”‘모든 기억을 다 되찾았으니까...’강지혁은 엄청난 고통을 대가로 드디어 나머지 기억까지 전부 다 되찾아냈다.두 시간 후.감옥에 수감 중이던 김재호는 수중에 있는 쪽지를 읽어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어르신, 만약 어르신께서 살아계셨다면 어느 쪽을 택했을까요? 도련님과 임유진 씨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뒀을까요, 아니면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만들었을까요? 도련님께서 정말 기억을 회복한 거라면 이제부터 재미있어지겠네요...”...임유진은 어두운 바닷속을 유영이다 누군가가 자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느낌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유진아... 유진아... 제발 눈 좀 떠...”‘이건... 혁이 목소리인데?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아직도 아픈 건가? 혹시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한 건가?!’임유진은 그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눈을 떠보니 가장 먼저 은은한 불빛이 보이고 곧바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지혁은 갑갑한 느낌에 본능적으로 두 손을 들어 임유진의 등을 세게 때렸다.퍽퍽!가볍게 때리는 것도 아니고 주먹으로 세게 내리친 탓에 임유진은 뼈가 다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헉...!”임유진은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이대로 손을 놓아버리면 강지혁은 또다시 머리를 벽에 박으려 할 것이고 그러면 그때는 정말 큰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지금은 요셉이 진정제를 놓을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만 했다.“사모님, 제가 회장님을 안고 있을게요!”고이준이 힘겹게 일어서며 말했다. 강지혁은 체격이 꽤 큰 편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아담한 임유진이 그 주먹을 다 받아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만약 이 상황이 계속되면 임유진이 먼저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난 괜찮아요... 아직 버틸 수 있으니까 고 비서님은 요셉 선생을 도와주세요.”임유진의 입에서 다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퍽!그때 또 한 번의 주먹이 그녀의 등에 내리꽂혔다.임유진은 입안에 감도는 피비린내를 감지할 틈도 없이 그대로 피를 쏟아내 버렸다.“사모님!”고이준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역시 여자의 몸으로 남자의 주먹을 받아내는 건 무리였다.“혁아... 윽, 무서워하지 마. 나 네 옆에 있어.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면 선생님이 진정제를 놔주실 거야. 그러면 하나도 안 아플 거야...”임유진은 피까지 토했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걱정밖에 하지 않았다. 꼭 자기 몸 같은 건 어찌 돼도 상관없는 사람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몸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슬슬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눈앞은 흐려지는 건 물론이고 이제는 정신마저 아득해지기 시작했다.‘안 돼...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안 돼... 내가 없으면 혁이를 막아줄 사람이 없어져...’임유진은 옆으로 쏠리려는 머리를 애써 고정하며 눈을 똑바로 뜬 채 품 안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의 두 눈은 여전히 감겨있는 상태였고 아직도 고통스러운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었다.임유진은 피가 흥건한
“혁아, 나 지금... 네 앞에 있어. 나는 널 떠나려 했던 게 아니야...”임유진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이마에서는 땀방울들이 미친 듯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손은 풀릴 줄을 몰랐고 오히려 더 세게 그녀의 손을 옥죄기 시작했다.임유진은 고통을 최대한 참아보며 달래는 목소리로 강지혁을 계속해서 진정시켰다.“혁아, 네가 보고 있는 건... 과거의 기억일 뿐이야. 앞으로 절대 그럴 일 없어. 그러니까 눈 떠. 윽... 눈만 뜨면 모든 게 다 사라질 거야. 더 이상 널 아프지 않게 할 거야.”강지혁은 손을 덜덜 떨며 이를 꽉 깨물었다.“내 목소리 들려? 나 유진이야... 나 지금 네 곁에 있잖아... 앞으로도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제발 눈 좀 떠줘, 혁아.”그때 강지혁이 갑자기 손을 놓아주더니 이번에는 자기 머리를 꽉 끌어안고 관자놀이 쪽을 세게 누르기 시작했다.“아파... 머리가... 너무 아파.”강지혁은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며 몸이 제어가 안 되는지 방 안의 물건을 전부 다 바닥에 집어 던지며 난동을 부렸다.심지어 그것으로도 해소가 안 되는지 급기야 자기 머리를 벽에 부딪치려 했다.“안 돼!”임유진은 큰소리로 외치며 달려가 한 손으로 곧 부딪치려 하는 강지혁의 머리를 막았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혁은 그대로 임유진의 손바닥에 머리를 들이받았고 임유진은 차원이 다른 고통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제일 고통스러운 사람은 다름 아닌 강지혁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며 요셉을 향해 물었다.“선생님, 혁이 왜 이래요? 왜 자해하려고 하는 거예요?”“아무래도 자극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진정시켜야 합니다!”진정을 시켜야 한다고는 하지만 세 명 모두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그 사이 강지혁은 계속해서 벽을 향해 머리를 들이받았고 임유진은 그럴 때마다 또다시 손으로 막으며 그 충격을 흡수했다.한 번, 두 번, 세 번
임유진은 고민할 것도 없이 그쪽으로 뛰어갔고 고이준도 빠르게 따라붙었다.안쪽으로 가면 갈수록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꼭 통증이 너무 커 견딜 수 없는 한계치까지 다다른 목소리 같았다.임유진과 고이준이 방 앞에 도착했을 때 울부짖는 소리 외에 중년 남자의 목소리도 들렸다.“회장님, 진정하세요! 지금 보고 있는 장면들은 과거의 장면들로 지금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임유진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흰색 의자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고 그 옆에는 요셉 의사가 다급하게 말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강지혁은 아직 최면 중인 건지 눈을 뜨지 않는 상태였지만 상황이 꽤 심각해 보였다.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고 입술은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이윽고 피가 살갗을 뚫고 밖으로 흘러나왔다.“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최면으로 기억을 되찾는 영상이라면 많이 봤지만 그 어느 하나 강지혁처럼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즉, 뭐가 잘못되고 있다는 뜻이었다.“혹시 사모님? 여긴 어떻게...”요셉이 조금 놀라며 묻자 임유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당장 최면을 멈춰주세요! 혁이가 고통스러워하잖아요!”요셉은 그 말에 다시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안 됩니다. 지금 깨웠다가는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리게 될 겁니다! 지금은 회장님께서 스스로 진정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대체 누가 회장님께 최면을 걸어 기억을 봉인하게 만든 겁니까? 최면이라는 건 원래...”“안 돼!”그때 가만히 누워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몸을 크게 뒤틀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몸에 부착되어 있던 기기 선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고 의자도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옆으로 넘어가고 말았다.임유진은 바닥에 쓰러진 강지혁을 일으키기 위해 다가갔다가 강지혁의 손에 의해 바로 뿌리침을 당했고 그대로 옆에 있는 협탁에 허리를 부딪쳐버렸다.“윽!”고
경비원은 잠시 망설였지만 여전히 출입을 거부했다.“죄송합니다. 이대로 사모님을 들여보내면 저희는 회장님께 죽을지도 모릅니다.”“나중에 질책당할 게 겁나서 그러는 거면 내가 대신 해결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약속하죠. 그러니 비키세요.”하지만 임유진의 설득에도 경비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경비원을 억지로 떼어내 안으로 가려고 해도 커다란 대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시간은 1분, 2분 흘러가고 있고 임유진은 마음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재가 되어가고 있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혁이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문 열어. 지금 당장 이 문 열라고! 만약 혁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그때는 내가 당신들 가만 안 둬!”설득이 안 돼 협박까지 해보았지만 경비원들은 아예 고개를 돌리며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임유진은 고집스러운 그들의 태도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아까 이곳으로 오는 길에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아예 전원이 꺼져있는 상태였다.‘안 돼.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어!’임유진은 그 생각에 다시 차로 돌아갔다.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으로 말이다.“고 비서님, 차 키 줘요.”“네? 네.”고이준은 그녀가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른 채 일단은 키를 건네주었다.임유진은 운전석에 앉고는 심호흡을 한번 했다.운전을 안 한지 너무 오래됐던 터라 심장이 쿵쿵 뛰고 손이 덜덜 떨렸다. 기억을 잃은 5년 동안에도 그녀는 운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조수석에 앉아 핸들을 잠깐 만진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르고 두려움부터 앞섰으니까.그때는 기억을 잃었을 때라 그 두려움이 왜 생겼는지 몰랐지만 기억을 완전히 되찾고 보니 왜 두려움부터 느꼈는지 알게 되었다.진애령의 교통사고와 절벽 사건, 그 두 사건 모두 그녀에게 뿌리 깊은 공포를 심어줬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두려워도 어떻게든 별장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강지혁이 전처럼 두통으로 입술까지 물어뜯으며 괴로워할지도 모르니까.이대로 계속 멍청하게 기다리면 평생을
임유진이 요셉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기억을 잃었을 당시 꽤 많은 상담도 받아보고 직접 해외의 유명한 논문도 찾아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다만 요셉은 해외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 예약을 잡는 게 하늘의 별 따기 급으로 어려웠다. 게다가 그때는 현이도 키워야 했기에 모든 걸 다 제쳐두고 해외로 날아가 온전히 치료만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래서 계속 속으로만 치료를 받아야겠다 하고 생각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기억을 되찾는 일에 대해 완전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요셉의 사진을 강지혁의 책상 위에서 보게 될 줄이야.“설마...”임유진은 미간을 한번 찌푸리더니 서류를 활짝 펼쳤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요셉의 과거 이력이 가득 적혀있는 자료가 있었고 일주일 일정표까지 적혀있었다.일정에 따르면 요셉은 엊그제 S 시에 도착했다고 한다.“요셉이 S 시로 왔다고?!”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다가 무슨 생각 하나가 떠오른 듯 서류를 쥐고 있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고이준이 복잡하고도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임유진이 먼저 물었다.“요셉이 왜 여기로 와요? 설마 혁이 기억을 찾아주려고 온 거예요?”고이준은 그 말에 흠칫하다가 임유진의 손에 들린 서류를 보고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것 같아 모든 걸 다 얘기해주었다.“네... 사모님 말씀대로 회장님은 지금 요셉 선생과 함께 있습니다. 오늘 기억을 되찾는 최면을 받을 거라고 하셨어요.”임유진은 그 말에 심각한 얼굴로 고이준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래서 지금 두 사람은 어디 있죠?”“회장님 명의로 된...”임유진은 고이준이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그의 팔을 끌고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지금 당장 그곳으로 데려다줘요!”“네, 알겠습니다.”차 안.임유진은 운전석에 앉은 고이준을 보며 물었다.“그런데 왜 나한테는 얘기 안 했어요?”“사모님께서 아시면 걱정하신다고 함구하라고 하셨습니다.”사실 고이준은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지만 임유진